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공자는 (한편) 예를 실행하는 군주와 (다른 한편 오직) 명령, 협박, 규율, 처벌과 폭력으로 자기 목적만을 추구하려는 군주를 특정적이고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외부적, 타율적) 강제력은 명명백백하지만, 예 안에 생동하는 막연하고 '신묘한' 힘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분명하지도 않다. 경건하고 근엄한 마음가짐을 하고 서로 자유스럽게 협동하는 가운데 예는 살아 움직인다. 신성한 의식의 완성은 예술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것이다. 거룩한 예식 지체를 검토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좀더 일상 생활 측면에 눈을 돌려야 하겠다. 이것이 사실 바로 공자가 우리에게 실천하기를 바라는 측면이며, 이것이 그의 인간관의 바탕인 것이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아는 상대반을 만나면, 미소지으며, 그에게로 걸어가서, 그와 악수를 한다. 보라! 어떤 명령, 책략, 폭력, 특수한 꾀나 도구를 쓰지 않았고, 내 쪽에서 상대방을 그렇게 하게끔 아무언 힘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내 쪽으로 그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우리가 악수하는 것은 단순히 결코 내가 상대방의 손을 또는 상대방이 내 손을 위, 아래로 끌어 잡아 당기는 것(즉 강제적 폭력)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완전히 서로 한마음으로 협조하여야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서로서로 한마음으로) 협조하는 <예식> 행위의 미묘함과 놀라운 복잡성에 주목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가 교본을 통해서 이런 예식을 배워야만 할 경우라든가, 아니면 악수하는 풍속을 모르는 이방인의 경우라면, 이런 미묘함과 복잡성이 아주 분명하게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예식>이 자체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도라 할지라도, 각각 서로 (예의 진행 과정에 실제) <몸소 참여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보통 주목하고 있지 못하다. 공자의 말씀대로, (예식을 행할 때는) 상호간의 깊은 신뢰와 존중이 항상 일반적,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간의 존중은 존경의 마음을 서로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마음속으로만) 인지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훨씬 더 멍청하게 정신을 빼앗기거나, 또는 그런 자신을 의식하면서 아마도 상당히 어색하게 보이게 될 수 밖에 없다. 분명히 (상대방과 악수하는) 이런 우리의 작은<예식>이라도 그 모습이 상당히 어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한 사람이 자신의 손을 너무나 선급하게 빨리 빼어 들고는 허공에 빈손을 어색하게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예가 아니다. 진정한 상호 존중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존경이 마음을 의식적으로 감지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 대한 존경에 초점을 (의도적으로) 맞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는 그저 올바른 <생활>, 말하자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위를 하는 중에 충분히 표현되는 것이다. 마치 공중 곡예사가, 적어도 목전의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속임수가 있다 해도,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신뢰를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몸소 가져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수를 하는 우리도 (공중 곡예만큼 위험 부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되지 않는, 생동감 없는 형식으로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손을 더듬고 흔들 뿐인 것이다.
악수나 인사를 잘하기 위해서 상호간의 인격 존중과 신뢰가 꼭 필요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만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때로는 악수를 통해 상대방 태도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예식을 드리는> 몸짓은 그 예식의 의미를 각별하게 드러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식의 몸짓에는 인간 관계의 깊이가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의 옛 은사라고 한다면, 길에서 만난 그 상대망(옛날 학생)에게 걸어가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그 학생이 먼저 확실하게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악수를 하면서, 그것이 분명 따뜻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학생은 어떤 묘한 여운을 남길 수도 있다. (말하자면) 내 쪽에서는 아마도 그 학생의 어깨를 얼싸 안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학생은 내 등을 살짝 두드리는 일 (반갑다는 표식) 따위는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몸짓을 가지고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든지, 뉘앙스를 준다든지, 자상하면서도 의미 있는 여러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묘한 감정을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음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다. 이런 미묘한 변화들과 그 규칙을 묘사하자면, 우리는 곧 <논어> 10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0장에서 말하는 예식을 올리는 요령은 현대의 미국인 독자들의 눈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주 고풍스러운 전통주의의 정수로 비쳐질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간 개개인의) 사회 활동은 문명 사회 안에서도-힘을 들이거나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적절한 구도속에서 적합한 예식의 몸짓을 자연스럽게 해 나감으로써-서로 협조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예식의 힘은 첫째로 배워 익힘에 달려 있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통한 무리 없는 자연스런 힘은, 우리들이 보통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또한 물리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연구실에서 강의실로 책을 한 권 가지고 와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신묘한 방법이 없는 한, 나는 글자 그대로 다음 과정을 밟아야 한다. 몸소 연구실까지 걸어가서, 문을 열고, 내 근육을 움직여 책을 집어 들고 물리적으로 그것을 다시 강의실로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묘법이 있을 수 있다. 즉 자신의 소망을 예식에 적합하게 나타냄으로써, 자신이 몸소 (물리적인)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강의실에 있는 한 학생에게 정중하게, 즉 에식에 적절하게, 눈길을 주고 단지 책을 나에게 가져 오라는 내 소망을 절도 있고 품위에 맞는 '예식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내 소망을 이렇게 예식에 적절하게 나타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학생에게 폭력을 쓰거나, 위협을 주거나, 술책을 써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몸소 실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 내가 소망했던 대로, 거의 아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도 그 책은 내 손에 있게 된다. 이런 점이 바로 인간 고유의 일처리 방식인 것이다.
남과 악수하는 것이나 남에게 일을 대신시키는 일 같은 것은 매우 비근한 예라고 한다면, 도의 정신은 아주 심원한 예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예식을 올리는) 복잡하지만 또한 친근한 몸짓들이 바로 인간 관계를 유지시키는 가장 인간적인 특징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관계가 -말하자면 이리저리 쫓기거나, 위협을 당하거나, 힘의 압제를 받거나, 조종을 받는 동물 또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과 같은-물리적인 (대상적) 사물들간의 관계가 아닐 때,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어느 것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예의 이미지에 의해 이런 <예식>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개명한 인간들 상호간의 일상적인 접촉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고 매우 세련되게 다듬어 놓은 것들이 바로 의심없이 신성한 예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오직 행위에 대하여 말할 때나 또는 행위를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데 쓰여질 뿐이라는 관념이 서구 현대인의 생각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당대의 <언어> 분석 철학은 예식을 올리는 도중에 하는 말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보고이거나 또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보다는 얼마만큼 그 자체가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실제 행위인가를 밝혀 왔다. 작고한 오스틴 교수는 이런 현상의 보편적 실재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 사람중의 하나이며, 그는 자신의 분석에서 이런 언어적 실재성을 <수행적 언사>라고 명명하였다. 우리들이 하는 말 중에는 사실 법적 증서에서 <효력을 갖는> 조항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무수한 수행적 언사들이 있다. 이런 언사들은 말이기는 하지만, 어떤 행위에 대하여 보고하거나 어떤 행위를 (우회적으로) 유도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들은 행위 그 자체를 바로 수행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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