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인은 멀리 있는가? 우리가 원하면,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을 좇을 것이다.
아무런 억지 없이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이니, 그가 무엇을 했겠는가! 자신을 받드는 마음으로 남면(즉 통치자의 적절한 예)을 했을 뿐이로다. '즉 그 나라의 모든 일이 탈없이 순조로왔음'
그 자체 만져 볼 수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분명히 드러나지도 않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모든 일을 항상 무리 없이 훌륭하게 이루어 내는 것이 신묘한 부분이다.
올바로 처신하면, 다른 명령을 안해도, 일은 잘 되어 나간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굽히게 된다.
덕으로 다스림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자기 자리에 있으나 뭇 별이 그를 둘러싸고 도는 것과 같다.
이 인용문들에 대한 주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듀벤다크의 언급처럼, <위정>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신비적 의미>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거나, <위령공>의 순임금의 예식을 드리는 모습은 <신묘한 힘이 최고에 달한 상태>라고 간단히 지적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런 부분들이란 <논어>에 남아 있는 순수한 <미신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논어> 주석가들은 공자를 보다더 <좋게 이해하려는 쪽으로>, 말하자면 우리들 (현대인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개념을 통하여 공자의 철학적 주장의 타당성을 최대로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들 주석가들의 이런 노력의 결과 <논어>에 있는 신비주의적 언급들은 축소될대로 축소되어 더 이상 원상을 읽어 내기 어렵게 되었다. 주문을 외우거나 예식을 올리는 몸짓을 통하여 정말 올바른 행동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진지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우리 시대의 당연한 공리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공리의 일반적 수용에 중요한 예외가 현대의 <언어 분석> 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의 중요한 의미는 아직 전문적 철학의 세계 밖으로까지는 별로 진척되지 못하였다'
현대인의 기호에 전혀 맞지 않는 신묘함이나 경이의 뜻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희석될 수 있다. <논어>의 3-8장만이 가장 <논어다운> 부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내가 인용한 공자의 말씀은, 때때로 공자 정신에 어긋나는, 전술된 텍스트에 삽입된 구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묘한 요소는 아주 완벽한 군주에게만 적용되는 극히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신묘함>에 대한 언급을 <불식하려는 해석>의 또 다른 가능성이란, 공자는 (시의 적절하게) 좋은 예를 제시하는 (주술식이 아닌) 다른 식의 친화력을 강조하고 극대화했다고 가정해 보는 일일 것이다. 요컨대, 이런 관점에 따른다면, <신묘한 힘>과 관련된 (<논어>의) 언급들을 우리는, (공자가 지리한) 산문적 진리를 운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끝으로, 공자는 이런 문제에 수미 일관된 논리를 갖지 못하였거나, 아마도 그의 주장의 핵심은 주로 신비 적대적(antimagic)이었지만, 그는 뿌리깊게 박힌 전통적인 (즉 주술적, 미신적) 믿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주석들은 인간의 덕에 대한 주술적 차원의 가르침을 20세기 문명인이 수용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보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신묘함(magic)을 아예 해석해서 지워 버리거나, 또는 (공자를 2,500여 년 전의 인물로 생각한다면 그가 말하는) 신묘함이라는 것도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양해될 수 있는 실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말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분명한 의미 (즉 신묘함이 갖는 의미)를 우리들이 수용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 문제에 관하여는 우리 (현대인)들이 오히려 공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여지가 아직도 있다고생각하고 싶다.
나와 입장을 달리하는 여러 주석들과의 논쟁에 말려들기 보다는, 차라리 나는 지금부터 내가 보기에 순수하고 건전한 공자의 신묘한 인간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해 보고자 한다. 나의 해석이 모든 다른 해석을 배제할 만큼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와 같은 창조적 철학자가 자기가 말한 것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정확하게 밝혔다거나 그의 여러 가능한 의미들 가운데 다른 의미들은 모두 사상하고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의식적으로 강조했으리라고 생각해야 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신묘한 가르침이 갖는 많은 의미 중에서, 아래의 우리의 논의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질 하나의 의미가 신뢰할 만한 핵심적인 공자 사상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이 제대로 평가되고 이해되지 못해 왔다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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