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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3장
흔들리는 세상
6. 권좌는 호색으로 물들고
규와 관중의 만남
규(糾)는 선강 누님이 시집간 후 아름답지 못한 행실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양공이 간곡히 부탁하니 도리가 없었다. "형후(兄侯)의 말씀대로 추진해 보겠나이다." 궁에서 나온 규는 동생 소백(小白)에게로 갔다. "동생은 내게 좋은 방도를 좀 알려다오." 소백은 같은 형제지만 물정에 밝고 사려가 깊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우리 형제들만의 사사로운 일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자칫 세상에 알려지면 양쪽 나라 군위의 체통에 큰 흠이 됩니다. 또 선강 누님의 부끄러운 일로 세상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미리 철저한 계책을 세워 신중히 행동하셔야 합니다." "어떤 계책이 있겠느냐?" 소백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선 한 분을 제가 소개하지요." 소백은 곧 심복 하인을 시켜 포숙아를 부르게 했다. 곧 포숙아가 왔다. 소백은 두 사람을 인사시키고 규가 방금 전에 한 이야기를 포숙아에게 들려 줬다. 이야기를 다 들은 포숙아는 신중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나라 사이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나보다 백 배는 더 뛰어난 분이 계십니다." 규가 반색을 했다. "그분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포숙아는 공자 규를 안내하여 관중에게 갔다. 규는 예로서 절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관중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가서 위혜공 삭의 모친인 선강 누님을 구하려 합니다. 관공께서 나를 좀 도와 주시오." 관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규는 성의가 부족했나 싶어 더욱 간절히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관중이 입을 여는데 의외에도 노래 구절이었다.
신대는 매우 아름답고 강물은 그냥 흘러가는데
님을 따르고자 왔으나 음탕한 자가 가로챘도다
고기를 얻고자 한 그물에 도리어 기러기가 걸렸도다
님을 따르고자 왔으나 음탕한 자를 만났도다.
노래를 마친 관중이 공자 규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이런 노래를 예전에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공자 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듣기는 오늘 처음이지만 그 내용이 뜻하는 바는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관중이 다시 물었다.
"옛일을 들추어 누구를 탓하고 부끄럽게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노래는 오래된 것입니다. 이후의 일에 대해서 들은 바 있습니까?"
공자 규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대강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관중이 또 다시 물었다.
"지금 우리 제나라에 와 있는 공자 석의 생모(生母)인 이강(夷姜)이 어찌하여 죽은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공자 석의 형님인 급자(急子)와 공자 삭의 형님인 공자 수(壽)가 어찌하여 죽은지는 아십니까?"
공자 규는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관중은 잠시 동안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절절한 사연들
이야기는 오래 전으로 돌아가 급자와 공자 수가 살아 있을 때였다. 그날은 급자의 생일날이었다. 이날, 공자 수는 이복 형제이지만 집안의 맏형이자 세자나 마찬가지인 급자의 생일 잔칫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그 자리에는 형제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즐거운 날이니 마음껏 드시며 노십시오."
공자 수가 급자에게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올렸다. 다른 공자들도 모두 생일을 축하했다. 그런데 공자 삭은 달랐다.
"나는 몸이 불편해서 그만 일어나겠소."
공자 삭은 뜬금 없는 말 한마디를 불쑥 던지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슬며시 일어서더니 휑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얼떨떨해서 그의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공자 삭은 교활한 표정을 짓더니 그 즉시 모친 선강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의 두눈에서는 벌써부터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있었다. 선강이 당황해서 물었다.
"어찌하여 이렇듯 슬피 우느냐?"
공자 삭은 눈 한번 꿈쩍 않고 근거 없는 말을 마치 몸소 겪은 듯이 풀어 놓았다.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급자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급자는 술이 얼큰히 취하자 장난하는 척하면서 '너희들은 모두 내 아들이다'라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대들었습니다. 아무리 장난이 심하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급자가 '너희들의 모친은 원래 내 아내로 시집왔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 보면 될 게 아니냐' 합디다. 저는 화가 나서 더 이상 앉아 있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바라건대 모친은 이 일을 아버지께 여쭈어 따끔한 훈계가 있도록 해주시오소서."
선강은 이 그럴 듯한 거짓말을 곧이듣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위선공이 내궁으로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 위선공은 내궁으로 들어오기 바쁘게 선강으로부터 졸리기 시작했다. 선강은 우선 눈물부터 흘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한참 흐느껴 울더니 신세 한탄을 섞어 가며 삭으로부터 들은 말을 전부 고했다. 뿐만 아니라 홧김에 한술 더 부쳤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급자는 '우리 모친 이강은 원래 우리 부친의 서모였다. 부친께서 선군(先君)이 떠나신 후 서모를 아내로 삼았다. 너희들 모친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내 품안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떠들어 말하더랍니다."
위선공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생일 잔치에 모였던 공자 중에서 한 명을 불러 물어 보았다.
"그저 즐겁게 놀았습니다. 별일도 없었구요."
위선공은 반신반의했다. 그 다음 내시를 불렀다.
"지금 곧 이강에게 가서 자식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형제들 사이에 화목을 도모하지 못하고 분란만 일으키느냐고 따끔하게 꾸짖고 오너라."
이리하여 불길은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그날 밤 이강은 꾸중을 듣고 서러웠다. 벌써 십여 년 동안 위선공의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쳐 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내시를 시켜 다 큰 자식들 교육 문제로 호되게 나무라고 꾸짖으니 더욱 슬펐다. 이강은 어디 억울하다고 호소할 데조차 없었다. 벌써 얼굴에는 주름살이 겹치고 뚱뚱해진 몸은 일 년에도 서너 번씩 병치레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린다고 해서 위후의 사랑이 돌아올 까닭도 없고...... 자식 잘못 가르쳤다고 성화니 이를 어쩔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고민하던 이강은 그날 밤 허리띠를 풀어 대들보에 걸고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그런 뒤로도 공자 삭과 선강은 서로 짜고 갖가지 말로 위선공을 충동질했다.
"급자를 죽여야 후환이 없어집니다. 그 일이 절대로 안 될 일이라면 우리 모자(母子)를 제나라 친정으로 돌려보내 목숨이나 건사하도록 해주시어요. 당신이 살아계실 때 그렇게 해주시어요."
위선공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제 어미가 비명에 죽었다면서 이를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장차 급자가 군위에 오르면 우리 모자는 죽은 목숨 아닙니까?"
질투 많은 애첩과 아첨하는 자식이 매일 조르는 데야 늙은 위선공도 어찌할 수 없었다.
"방법을 한번 찾아봅시다."
그때 제나라에서 사신이 장차 기(杞)나라를 치려 하는데 응원군을 보내 주실 수 있겠느냐 하는 전갈을 가져 왔다. 위선공은 제희공에 대해서는 지은 죄가 있었기에 항상 저자세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강마저 죽고 선강이 본부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받아들였다.
"곧 사신을 보낸다고 말씀드려라."
위선공은 구원병을 약속하고 제나라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그리고 나서 급자를 불러 제나라 사신으로 갔다오라고 분부했다. 위선공은 제나라 사신으로 가는 급자를 적당한 지점에서 살해할 생각이었다. 위선공은 삭에게 은밀히 분부했다.
"급자를 보낼 때 백모를 주어서 보낼 생각이다. 제나라로 가려면 배를 타고 신야에 내려서 임치성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니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죽이면 사람의 관심도 끌지 않고 좋다. 공연히 소문 사납게 준비할 것 없다."
공자 삭은 궁에서 나와 자객들에게 갔다.
"이제 그대들이 할일이 생겼다. 우선 도둑으로 가장하고 신야의 뱃터 부근에 가서 숨어 있거라. 그러고 있으면 위나라 배가 닿고 백모를 가진 자가 내릴 것이다. 그곳에서 불문곡직 해치워라. 그리고 그 자의 목을 나무 궤짝에 넣어 백모와 함께 바쳐라. 그리하면 후하게 상을 줄 것이로다."
공자 삭은 자객들을 떠나 보낸 후 내궁으로 가서 그의 모친 선강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고했다. 이 말을 듣고 선강은 성공이라도 한 듯이 기뻐했다. 그날 공자 수는 공자 삭의 태도가 어쩐지 수상했다. 그래서 내궁으로 들어가 모친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기셨습니까? 어머님 혈색이 매우 좋으십니다. 어머님의 큰아들인 저도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알아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강은 웃으며 조그만 소리로 급자를 죽일 계책이 결정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이는 우리 모자의 장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계책을 세워 하시는 일이다. 절대로 발설하지 말고 모른 체하고만 있거라. 너는 장차 군후에 오를 생각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고......."
공자 수의 살신성인
흉칙한 계책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공자 수는 내궁에서 나오는 길로 즉시 이복형 급자에게로 달려갔다.
"이번에 제나라로 가실 때 신야 땅을 지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아무래도 변고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형님께서는 이번 일만은 칭병하고 사양하세요."
자살한 어머니의 숙명과 얄궂어진 자신의 운명을 고민하며 수척해진 급자는 오히려 공자 수를 위로했다.
"사람의 자식으로 어찌 부친의 명을 따르지 않겠느냐. 어진 동생은 우형(愚兄)에게 마음 쓰지 말고 장차를 위해 더욱 몸을 바르게 하여라."
이튿날 급자는 궁에 가서 부군(父君)으로부터 백모를 하사받고 물러나와 배를 타려고 강으로 갔다. 공자 수가 뒤를 따라가며 울면서 권했다.
"형님은 백모를 내게 주고 도망치소서."
급자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남이 보면 부군(父君)이나 우리 두 형제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공자 수는 아무리 해도 급자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서 속으로 결심했다. '형님은 진실로 어진 분이시다. 이번에 가시다가 도적의 손에 세상을 떠나시면 다음 군위는 내가 잇게 된다. 그때 내 무슨 얼굴로 세상을 향해 임금이라 할 것인가. 형님은 말씀 하시기를 아버지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으나, 또한 형님 없는 동생인들이 세상에 있으리. 내 마땅히 형님보다 앞서 가서 그 도적들의 손에 죽는다면 형님은 해(害)를 입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친과 모친은 내가 죽었음을 알고 그제서야 이번 계책이 잘못된 일임을 깨닫게 되실 것이니 이 또한 효도일 것이다.' 결심을 굳힌 공자 수는 재빨리 지름길로 가서 강변에 먼저 도착했다. 그는 술과 배 한 척을 준비해 두고는 급자가 타고 갈 배로 갔다. 급자는 막 떠나려 하고 있었다. 공자 수가 청했다.
"제가 형님 떠나시는 마당에 술 한잔을 바치겠습니다. 한잔 드시고 천천히 떠나도록 하세요."
급자가 미소하며 사양했다.
"부군(父君)의 명령을 받고 가는 몸이 어찌 술타령으로 지체할 수 있겠는가."
"그러시면 여기에 배 한 척을 더 준비해 두었으니 제가 도중까지만 전송하며 한잔 술로 작별할까 합니다."
급자는 동생의 이런 성의마저 물리칠 수는 없었다. 이제 세상을 먼저 떠나려는 형제를 실은 두 척의 배는 푸른 강물 위로 떠내려갔다. 이윽고 공자 수는 종복을 시켜 술을 형님이 탄 배로 옮겨 싣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형님이 탄 배로 옮겨 탔다. 공자 수는 손수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형님에게 바쳤다. 말보다 앞서 흐르는 눈물이 구슬처럼 술잔에 떨어졌다. 급자는 황망히 술잔을 받아 마시려는데 공자 수가 말했다.
"술잔에 눈물이 들어갔습니다. 새로 받으십시오."
"나는 동생의 그 정(情)을 마시겠네."
급자가 웃으면서 그대로 마셨다. 공자 수가 눈물을 닦고 형님에게 말했다.
"이 술잔이 이별주입니다. 형님은 이 동생의 정을 싫다 마시고 많이 드십시오."
급자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어찌 그마저 싫다 하리오. 동생도 사양치 마시게."
두 형제는 눈물을 삼키며 서로 술을 권했다. 그러나 공자 수는 마시는 체하면서 술잔을 놓았다가 슬며시 버리기도 했다. 급자는 지금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 세상과 영영 하직하는 길을 위해 한잔 술로 마음을 달랜다 생각하니 주는 대로 사양않고 받아 마셨다. 이윽고 급자는 술에 취하여 쓰러졌다. 하늘과 물은 푸르고 배는 무심하게도 미끄러지듯 살같이 신야 땅을 향해 달리는데,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는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자 수는 이런 비감(悲感)에 젖어 있다가 짐짓 놀란 체하더니 수행인을 보고 포고했다.
"군명(君命)은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법. 내 마땅히 형님을 대신하리라."
공자 수는 백모를 자기 뱃머리에 옮겨 꽂게 하고 급자가 탄 배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 나를 따라서 제나라까지 갈 것이 뭐 있겠느냐. 나는 내 배로 가서 사신 일을 수행할 테니 형님을 모시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형님께서 깨시거든 이 서찰을 바치거라."
공자 수는 이렇게 말한 후 몇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자기 배로 옮겨 타더니 뱃길을 재촉했다.
"늦으면 안 된다. 어서 노를 저어라."
배가 어느덧 신야에 당도하자 공자 수와 수행원들은 수레를 정돈하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매복하고 있던 자객들은 수레를 포위했다. 공자 수가 수레에서 벌떡 일어나 호령했다.
"나는 위나라의 공자다. 군명을 받들어 제나라로 사신차 가는데 감히 어떤 놈들이 내 앞길을 막느냐?"
자객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잔말 말고 목을 내놓아라. 우리는 너의 목과 백모를 기다린 지 오래다."
수행원과 종복들은 혼비백산하여 제각기 도망쳤다. 마침내 한 명의 자객이 마차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에서 칼이 번쩍 빛났다. 동시에 공자 수의 머리가 수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자객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공자 수의 머리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준비해 온 목갑(木匣)에다 넣고, 시체 옆에 나부끼는 백모를 뽑아들더니 일제히 나루터로 달려갔다.
급자의 죽음
한편 급자가 술에 취해 쓰러져 한잠 푹 자고 눈을 떴을 때는 벌써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저녁 무렵이었다. 이때 수행원 하나가 공자 수의 편지를 그에게 바쳤다.
弟己代行 兄宣速避
동생이 대신 갑니다. 형님은 속히 피하십시오.
급자는 편지를 읽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어진 동생이 나 때문에 안 될 곳으로 가고 말았구나. 속히 가야겠다. 내 어찌 그를 죽일 수 있으리오."
급자는 몇몇 수행원과 거느리고 온 종복들이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았다. 그는 재촉하여 배를 나아가게 했다. 어느덧 강물 위에는 처연한 달이 떴다. 급자의 마음은 일각이 여삼추. 초조한 심사를 어찌 필설로 다하랴. 뱃전에 걸터앉아 어서 동생의 배가 보이기를 기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달빛 속으로 저편에서 점점 크게 나타나는 배가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공자 수의 배였다. 급자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하늘이 돕는구나! 천행이로다."
그런데 곁에 있던 수행원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외쳤다.
"저, 저것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배입니다. 앞으로 가고 있는 배가 아닙니다."
급자는 유심히 가까워지는 배를 살폈다. 배는 아무리 보아도 공자 수의 배인데 거기엔 낯모를 사람들만 있고 공자 수는 보이지 않았다. 급자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났다. 그는 거짓으로 다가오는 배를 향해 소리쳤다.
"주공께서 명령하신 일을 모두 마쳤는가!"
자객들은 비밀을 아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공자 삭이 보낸 사람으로 믿었다.
"틀림없이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한 자객이 외쳤다. 급자는 즉시 배를 멈추게 하고 그 배로 옮겨 탔다. 자객들은 백모와 목갑 하나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급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목갑을 열게 했다. 공자 수의 목이 자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급자는 그만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이를 어쩐단 말이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진정 원망스럽구나."
자객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칼을 뽑아들고 급자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그리고 위협조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의 명으로 왔소?"
급자가 공자 수의 목을 꺼내 들고 그들에게 대답했다.
"이놈들, 나를 자세히 보아라. 내가 급자니라. 너희들이 죽이려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목갑에 있는 사람은 내 동생 공자 수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였느냐. 네놈들이 엉뚱한 사람을 죽였도다!"
급자는 그대로 흐느껴 울었다. 자객들 가운데 마침 두 공자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자가 앞으로 나와 달빛 아래 급자를 자세히 보더니 동료들에게 눈짓을 했다. 칼날이 번쩍 빛났고 급자의 목이 떨어졌다. 자객들은 급자의 머리를 공자 수의 머리와 함께 목갑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급히 배를 저어 날이 새기 전에 위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바로 공자 삭에게로 가서 백모와 목갑을 바쳤다. 그리고 급자와 공자 수 두 사람을 죽이게 된 전후 사정을 자세히 고했다. 그들은 공자 수까지 죽였으므로 혹 벌이라도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런데 공자 삭은 너무나 태연했다. 아니 속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기뻤다. '화살 한 대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는 보았지만 이토록 절묘한 경우가 있을 줄이야.' 공자 삭은 황금과 비단을 듬뿍 내어 그들 자객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한편 공자 예와 공자 직은 전날 급자가 찾아와서, '모든 것을 부탁했다'고 처량해 하던 일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하들을 시켜 비밀리에 알아보도록 했다. 며칠 후 이들은 공자 수와 급자가 번갈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곧 궁으로 가서 위선공에게 절하고 방성 통곡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공자 수와 급자 형님의 시신이라도 내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장례라도 치르겠습니다."
원래 위선공은 급자 하나를 죽이게 했다. 공자 수는 사실상 다음 군위를 물려 줄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후계자였다. 위선공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윽고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선강이 나를 그르쳤도다. 선강이 나를 망쳤도다."
위선공은 탄식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영영 회복하지 못하고 쓰러진 지 꼭 보름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공자 삭이 군위에 오르니 위혜공, 당시 그의 나이 15세였다고 한다.
공지 | isGranted() && $use_category_update" class="cate"> | ∥…………………………………………………… 목록 | 바람의종 | 2007.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