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자요록
제2장
3. 경솔한 천자
제족의 사죄
축담은 달아나는 어가를 더 이상 쫓지 못하고 영채로 돌아오자 불평부터 늘어놓았다."제가 활로 쏘아 어깨를 맞추고, 그리고 바로 추격하여 왕을 생포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때에 금(金)소리를 울려 낭패케 한단 말입니까."정장공이 빙그레 웃었다. "본디 천자가 밝지 못해서 덕(德)을 보이지 않고 군대를 모았기에 하는 수 없이 자위책으로 싸운 것이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마무리가 된 듯하오." 그러나 축담은 정장공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 화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천자를 잡아야 이번 싸움에서 일등 공로를 세우는 게 아닙니까?" 정장공이 웃는 낯으로 달랬다. "만일 그대가 천자를 생포하기라도 한다면 내 무슨 명목으로 세상 사람들과 제후의 얼굴을 보겠소? 만일에 그대가 쏜 화살에 천자가 급소를 맞아 죽기라도 한다면 천자를 살해했다는 그 오명을 어찌 할 뻔하였소? 자칫 정나라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을 것이오." 제족이 옆에서 거들었다. "주공의 말씀이 천만 번 옳습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는 천하만방에 그 위세를 단단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천자를 다치게 한 만큼 즉시 사자를 보내어 사죄하고 문후를 드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자의 어깨를 활로 쏘아 맞춘 것이 결코 주공의 뜻이 아니었음을 해명하시고 사과해야 합니다." 주위의 누구도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제족은 많은 선물을 가지고 주환왕에게 사죄 사절로 갔다. 정작 싸움에서 이긴 정나라였지만 머리를 숙일 수밖에는 없었다. 제족은 소 열두 마리, 염소 수놈 100마리, 암놈 100마리, 좋은 곡식 1백여 수레를 거느리고 그날 밤에 주환왕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그리고 정장공의 말을 전했다. "신(臣) 오생이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만 사직을 유지할 량으로 군사를 모아 방어하려던 것이 군중(軍中)에 무엄한 자가 있어 천자의 옥체를 범하게 될 줄이야 어찌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오생은 그저 황공하여 어찌 할 줄 모르겠습니다. 이제 삼가 사람을 보내어 죄를 아뢰고 별고나 없으신지 문안 드리옵니다. 그리고 약소하나마 왕군(王軍)을 위로하는데 쓰시옵고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신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번 일을 용서하옵소서." 주환왕은 제족의 말을 듣고 나서도 종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왕은 내심 부끄럽기만 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괵공 임부가 왕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오생이 제 죄를 알았다 하니 특별히 용서하노라. 심부름 온 사자는 사은하여라." 제족은 그제서야 일어나 연신 허리를 굽혀 절하고 정나라로 돌아갔다. 이로써 주환왕도 낙양으로 귀환했다. 무례한 정나라를 응징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켜 만천하에 낙양의 천자가 지닌 위엄만 손상당하게 하고 만 셈이 되었다.
축담의 죽음
한편 정나라에서는 논공 행상을 실시했다. "계책을 세워 싸움의 방향을 정한 자원(子元)의 공(功)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은 왕에게 사죄하고 명분을 되찾게 한 제족의 공이다. 그리고......" 정장공은 싸움에서 공을 세운 모든 대부와 병사들에게 각기 상(賞)을 내렸다. 그러나 오직 축담에 대해서만은 이렇다할 말조차 없었다. 축담은 정장공에게 직접 따져 물었다. "어찌 저에게는 이토록 서운하게 하시옵니까?" 정장공이 낯을 붉히며 말했다. "그대는 왕을 활로 쏘아 맞추었다. 그런데 자네에게 상(賞)을 주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과인을 뭐라고 하겠는가? 장차 불경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 과인을 핑계댈 것이로다." 축담은 궁에서 도망치듯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고 원통했다. 축담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지내다가 얼마 후 병이 나서 눕더니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축담이 안 됐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음직했다. "백번 양보해도 정장공이 지나쳤다. 축담의 화살에 혼쭐이 나지 않았다면 과연 화가 단단히 난 주환공께서 그 엉터리 항복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지." 한 청년이 말하자 다른 청년이 맞장구를 쳤다. "축담이 불쌍한 거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정장공이잖아. 그런데 당시 주환왕은 적의 대장이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마땅히 적의 대장을 혼낸 축담이 상(賞)을 받아야지 어찌 책임을 지느냔 말야." 주환왕이 정나라의 버릇을 고치려다가 오히려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는 이야기와 전쟁에서 이긴 정장공이 화살을 쏜 축담에게 상(賞)을 내리지 않자 축담이 원통해서 병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들의 화제였다. 임치성 남문가의 주점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한창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축담이 지나쳤다. 왕에게 직접 활을 쏜 것은......' 하고 생각하는 축도 있었다. 소홀(召忽)이 그랬다.
소홀은 원래 귀족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궁중에 드나들면서 공자들과 친분이 깊었다. "축담은 정백의 일개 수하(手下) 장수에 불과하다. 그런 자가 어찌 주천자(周天子)를 향해 활을 쏠 수 있단 말인가. 부득이 활을 쏘게 되었다 할지라도 왕이 타고 있는 수레 부근을 겨냥해서 무력 시위로 그쳤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축담은 천자에게 활을 쏘아 맞추고 또 생포하려고 대들었다. 고약한 자다." 소홀의 주장에 동조하는 청년들도 꽤 많았다. 이렇듯 두 패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한데 포숙아는 전혀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다. "포숙아는 어느 의견에 따르는 거야?" "글쎄......, 어떻게 보면 축담이 불쌍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축담이 지나친 것 같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물었지만 포숙아는 그때마다 결정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포숙아가 신중해졌기 때문이었다.
관중의 예언
'군위(君位)에 관해 민감한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다.' 이것이 관중과 포숙아의 은근한 약속이었다. 그 내면에는 공자 소백의 보좌역을 담당하는 포숙아가 자칫 군위에 관한 민감한 일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조심스런 계산이 있었다. '요즘 와서 포숙아가 변한 것 같다.' 주위 청년들은 그렇게 막연히 느낄 뿐이었다. 그날 밤, 점포 문을 닫고 나서 포숙아는 관중에게 갔다. 두 사람만 있을 때는 군위에 관한 일이거나 심지어는 소백에 관한 민감한 문제라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관중,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볼 땐 정백, 축담 모두가 잘못이 많아." "양쪽 모두에 잘못이 있다면, 양비론(兩非論)일세." "우선 정백으로 말하자면 일세의 간웅(奸雄)이지. 그는 야심이 많고 지략과 수완도 비상해. 예전의 태숙 사건만 해도 부모형제를 속였잖아. 그리고 덕(德)이 없어. 나중 왕에게 사죄하는 것을 보면 굉장한 사기꾼이나 다름이 없다고 보면 될 걸세." "사죄한 건 제족(祭足)이라 하던데......" "원래 신하들이란 자기 임금이 뭣을 바라는지, 또 어떻게 간해야 듣는지 알고 있는 법이야. 제족도 정장공의 음흉한 속을 들여다보고 있기에 그런 이야기를 진언(進言)한 것이겠지. 두고 봐. 그 제족이란 자가 정나라의 화근 덩어리가 될 테니. 옛부터 간사한 자는 간사함이 화근이라 하지 않던가." 포숙아는 깜짝 놀랐다. 관중이 이토록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거나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제족이 누구인가? 정나라의 대표적인 정치 외교가다. 그는 지략과 재주를 겸비하였고 정장공이 가장 총애하는 모사이기도 했다. 그런 제족을 평하여 화근 덩어리, 간사하고 음흉한 자라고 매도하다니! 포숙아는 관중을 안다. 왠만해서는 남의 욕을 하거나 뒤꽁무니에서 헐뜯는 그런 성품이 아니다. 포숙아가 또 물었다. "축담의 잘못은 무엇인가?" 관중이 대답했다. "그가 한 짓은 오랑캐 같은 행동이네. 제후의 휘하에 있는 무부(武夫) 따위가 주천자에게 흉기를 들이대다니....... 정백이 그에게 상을 내리지 않은 건 마땅한 처사야. 사실 축담은 불경죄로 엄벌을 받았어야 했어." "그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 죄값을 받은 게 아닐까?" "죽었으니까 죄갚음이 됐다는 건가? 장차 천자에게 활을 겨누는 후손을 경계해야지." 포숙아는 관중의 흥분한 말을 듣다가 홀연히 깨우쳐지는 바가 있었다. "이번에 천자가 성급하게 군사를 일으켰다는 의견도 있던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바로 그 점이야. 이번 일로 주왕실의 위엄은 땅바닥에 떨어진 바나 다름없게 되었어. 주천자의 조급한 출병(出兵)도 그렇지만 패전의 뒤처리에 있어서 여러 제후들이 위문조차 안한 것은 의외의 일이라고 봐야 해." "제후들이 왕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래. 명분상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실질적으로는 주천자를 경시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지." 포숙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우리 제나라의 입장과 소백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관중이 대답했다. "제후들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는다거나, 서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다투는 일이 늘어나겠지. 그리고 정(鄭)나라는 이번에 명분상 큰 손해를 본 셈이야. 어쨌든 그들은 크게 위축될 걸세. 소백 공자의 입장에서는 이럴 때일수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많은 대부(大夫)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노력해야 할 걸세.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때에는 의외로 작은 정성이 큰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당분간 외출도 삼가하고 공자로서의 체통을 지키면서 은인 자중하도록 충고해 두게나."
공지 | isGranted() && $use_category_update" class="cate"> | ∥…………………………………………………… 목록 | 바람의종 | 2007.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