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3장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일흔세번째 이야기 - 교행 육 년의 인연
불심이 깊어 계율을 잘 지키며 선정을 베푼 한 국왕이 있었다. 백성들은 인자한 국왕 덕에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때 한 수행자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속에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걸식을 하러 나왔다가 몹시 목이 말라 연못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연못 속에 연꽃이 여러 송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행자는 이내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차, 내가 잘못을 저질렀구나. 연못 주인이 연꽃을 심어 기른 후 부처님에게 공양하려고 했을 터인데, 내가 주인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연꽃이 취할 물을 마시고 말았구나. 도둑질한 죄를 지으면 내생에 축생으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할 것이고,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노비가 되어 등이 휘어지게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당장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 내생에 그와 같은 과보를 받지 않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수행자는 서둘러 국왕을 만나러 갔다.
"대왕이시여, 저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으니 법대로 처벌해주십시오. 저는 이 세상에서 그 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내세에는 또다시 죄과를 받지 않으려 합니다."
국왕은 자리에 앉아 수행자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듣고 나서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수행자여, 당신은 왜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이오? 당신이 마신 물은 하늘이 준 자연의 물이오. 그리고 그것은 보물도 아니니 죄를 범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오."
"대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집 안에 있는 우물이나 밭에 있는 채소를 그 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마시거나 먹는 것이 바로 도둑질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부디 저를 처벌해주십시오."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쁘니, 정녕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후원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가 사람을 보내 다시 부르리다."
그러자 옆에 있던 태자가 왕의 말에 따라 그 수행자를 데리고 후원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국왕은 국사가 너무 바쁜 바람에 수행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칠일째 되는 날 아침 국왕은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나서 곁에 있던 신하에게 급히 물었다.
"그 수행자가 아직도 후원에 있는가? 있다면 어서 데리고 오도록 하라."
수행자는 후원에서 육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왕이 다시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을 다시 만나게 된 수행자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국왕은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모든 게 나의 잘못이다."
국왕은 곧 신하들에게 명하여 그 수행자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그러고는 수행자에게 고개를 숙여 참회했다.
"나는 일국의 왕이오. 백성이 굶주리면 나도 밥이 넘어가지 않고, 또 백성이 헐벗고 있으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못한 법이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악행을 저질러 수행자를 괴롭게 만들었소. 내가 이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고 해도 이 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오. 국가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왕의 덕행에 기인하는 것이오. 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신 것이 죄가 된다면, 내가 수행자를 기다리게 한 것은 더욱 중한 죄임에 틀림없소. 수행자여, 당신의 죄는 내가 용서할 테니 앞으로 그 일은 잊어버리도록 하시오."
"대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수행해서 대왕의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수행자는 말을 끝내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에 더욱 힘썼다. 그 이후 국왕은 생사의 바다를 윤회하면서 끊임없이 계속 불도를 닦은 덕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 옛날 수행자를 육일 동안 고생시킨 죄과로 육 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수행의 과정을 치르고 나서야 성불할 수 있었다.
<육도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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