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스물여섯번째 이야기-왕후가 된 계집종
옛날 사위성에 야야달이라는 바라문이 살고있었다. 이 바라문은 수많은 금은보화와 여러 전원을 가진 부자였다. 그의 여러 전원중에는 미라원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야야달의 계집종 '황두'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별로 할 일이 없어 심심할 때면 언제나 멍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천한 계집종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내 신세, 언제나 이 처지를 면할 날이 올까?' 그러나 매일 그런 생각을 해봐도 막상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황두는 항상 이마를 찡그리고 한숨만 푹푹 쉬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야달은 사람을 시켜 그녀에게 아침밥을 보냈다. 그때 부처님은 일반 비구승으로 변신하여 사위성에 탁발하러 왔는데, 그 모습이 멀리있는 황두의 두 눈에 들어왔다. 평소 마음속에 생각했던 바가 있던 황두는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 '차라리 이 아침밥을 저 비구승에게 보시한다면 혹시 계집종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서 그녀는 조금도 아까워하는 마음없이 자신의 아침밥을 그 비구승에게 보시해버렸다. 이에 비구승은 그녀에게 인자한 미소를 짓고 합장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비구승은 떠났다. 황두는 그후 미라원으로 돌아와 일을 했다. 이때 국왕인 파사닉왕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다. 국왕의 시종들은 사슴떼를 앞서 나갔고, 파사닉왕은 홀로 마차를 몰고서 미라원으로 왔다. 그날은 몹시 더웠는데, 파사닉왕은 미라원 안에 있는 커다란 종려나무가 잎이 무성한 것을 보자 곧 마차를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황두는 미라원의 과일나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느긋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그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고 용모도 비범했으므로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해서 곧 다가가 친절하게 말했다.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아서 쉬도록 하십시오."
황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파사닉왕이 깔고 앉도록 만들어주었다. 파사닉왕이 자리에 앉자 황두가 다시 말했다.
"혹시 발을 씻어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하라."
황두는 곧 시원한 물과 수건을 준비해 와선 파사닉왕의 발을 씻고 닦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물었다.
"세수도 하시겠습니까?"
파사닉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물을 길어왔다. 그리고 세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말했다.
"혹시 목이 마르실지 모르니 마실 물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황두는 고운 목소리로 말하며 연못으로 가서 물을 떠다가 파사닉왕에게 바쳤다. 파사닉왕은 사냥하러 나온 지가 오래되어 몹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얼른 그 물을 받아마셨는데, 물맛이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황두는 물었다.
"피곤하실지도 모르니 잠시 누워서 쉬도록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또 옷을 하나 벗어 왕이 누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파사닉왕이 자리에 눕자 황두는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안마를 해주었다. 그녀는 다리 안마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를 주물러서 왕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이때 파사닉왕의 눈에 황두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영리하고 착한 여자는 생전 처음 본다.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척척 알아서 하는 여자는 정말 얻기 어려우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왕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집안의 아가씨요?"
"저는 야야달 바라문 집안의 계집종으로 이 미라원을 지키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가 대답을 막 마치자 왕의 시종들이 미라원 밖에 마차를 멈추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선 왕의 주위에 늘어섰다. 그러자 왕은 한 시종을 보내 야야달 바라문을 불러오게 했다. 바라문은 국왕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뛰어왔다. 국왕은 그에게 물었다.
"이 황두라는 아가씨가 당신의 계집종 맞소?"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무슨 분부를 내리시려 합니까?"
"난 이 아가씨를 처로 삼을 생각인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아니! 대왕이시여, 황두는 계집종에 불과한데 어찌 왕후로 삼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상관없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니 값을 불러보도록 하시오."
야야달은 국왕의 마음이 확고부동함을 알자 한 밑천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값을 말하자면 천 냥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 감히 국왕과 흥정을 하겠습니까? 저는 조금도 아까워하는 마음 없이 그녀를 국왕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파사닉왕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안 되오, 안 돼! 내가 이미 당신의 종을 왕후로 삼겠다고 했는데, 왜 돈을 내지 않는단 말이오?"
파사닉왕은 천 냥을 내어 야야달에게 주었다. 셈을 치른 후 파사닉왕은 기쁜 듯이 황두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 궁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미라원을 지키던 계집종 황두는 하루 아침에 출세하여 미라부인이 되었다. 국왕은 그녀를 무척 사랑해서 후에 정궁왕후로 삼았다. 황두는 화려한 궁전에서 기쁜 나날을 보내며 종종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마침내 종의 신분을 벗어나 왕족이 되었구나. 그때 비구승에게 아침밥을 보시했던 것이 오늘날 나의 인생을 이렇게 변화시켰구나.'
<사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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