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3 - 엄광용 엮음
허술해 보이는 적 뒤에는 복병이 숨어 있다 <유경>
-사자들이 본 것은 흉노군의 허술한 모습이었다. 흉노들은 그들의 용병과 살찐 우마들을 숨긴 채 병들고 파리한 노약자와 마른 가축들만 길거리에 어슬렁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한나라 7년에 한왕 신이 반역을 하여 한고조가 대군을 이끌고 진양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때 한왕 신이 흉노군과 합세하여 한나라 군대를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고조는 사자를 보내 한왕과 흉노군의 움직임을 파악해 오라고 하였다. 무려 10명의 사자를 보냈는데, 대답은 같았다.
"이 기회에 흉노를 치십시오. 한왕 신과 흉노군이 결탁하여 우리 한나라 군대를 친다는 것은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사자들이 본 것은 흉노군의 허술한 모습이었다. 흉노들은 용병과 살찐 우마들을 숨긴 채 병들고 파리한 노약자와 마른 가축들만 길거리에 어슬렁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고조는 사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경을 사자로 보냈다. 흉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돌아온 유경은 먼저 갔다 온 사자들과 전혀 다른 말을 하였다.
"제가 보기에 지금 흉노군은 강합니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우려고 하면 반드시 전쟁 준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흉노들은 병약자와 비쩍 마른 가축들을 길거리에 어슬렁거리게 하여 매우 허술한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흉노들이 완벽하게 무장을 한 용병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 흉노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경의 말에 고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역시 한명의 말보다 열 명의 말이 옳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한나라는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힘들게 구주산을 넘어왔다. 여기서 다시 군사를 되돌린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조는 유경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원래 제나라의 포로놈인데 입과 혀로 벼슬을 얻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기고만장하여 망언으로 우리 한나라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한다. 저자를 당장 감옥에 처넣어라."
유경은 어이없게 감옥에 갇혔다. 마침내 한고조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군을 치기 위해 평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평성에 매복중이던 흉노의 기습병들은 한나라 군대가 진을 친 백등산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한고조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한나라 군대는 보급로가 막혀 곧 굶어죽게 될 판이었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7일만에 포위망을 빠져나온 한고조는 감옥에 갇혀 있는 유경을 풀어주고 용서를 빌었다.
"짐이 그대의 진언을 듣지 않아 큰 곤욕을 치렀소. 용서하시오. 그대에 앞서 열 번이나 다녀온 사자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버렸소."
그런 후 고조는 유경에게 봉읍 2천 호를 주고, 건신후에 봉하였다. 천하를 평정한 고조였지만 끊임없는 흉노의 침입은 큰 근심거리였다. 당시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가 된 묵특이 흉노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호시탐탐 30만의 강력한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 변방을 공격하여 온갖 약탈을 일삼았다. 어느 날 고조는 유경에게 물었다.
"저 오랑캐들을 무찌를 방법이 없겠소?"
"한나라는 천하를 평정하는 데 많은 힘을 소모하였습니다. 이제 저 강력한 흉노군을 상대로 다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국력을 낭비하는 결과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아비를 죽이고 흉노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제 아비가 데리고 있던 첩들을 제 첩으로 삼은 자를 인의로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자를 한나라의 신하가 되도록 만드는 계략이 딱 한 가지 있기는 하지만, 아마 폐하께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니 어떤 계략이길래 그러시오?"
"폐하의 적장공주를 묵특선우의 아내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하게 예물을 보내어 다독거려준다면 오랑캐라 하더라도 한나라를 받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라구? 짐의 장공주를 그 무식한 흉노놈에게 주라구?"
고조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것 보십시오. 그래서 폐하께서는 실행에 옮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말씀드린 것입니다."
"으으음, 좋은 계략이긴 하오. 그러나 장공주 말고 다른 여인을 보내면 안 되겠소?"
"종실이나 후궁의 여식 중에서 미인을 뽑아 공주라 속이고 보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만약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지면 오히려 화를 모면하려다 더욱 큰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좋소."
마침내 고조는 유경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공주를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이 되자, 여황후가 밤낮으로 울었다. 고조는 결국 그 계획을 바꾸어 다른 여인을 데려다 장공주라고 속여 묵특선우에게 보냈다. 이때 유경이 사신으로 뽑혀 흉노에 가게 되었다. 무사히 흉노와의 화친조약을 맺고 돌아온 그는, 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흉노 하남의 백양과 누번 두 왕이 살고 있는 땅은 장안에서 겨우 7백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루낮 하루밤이면 이곳 관중에 도달할 거리입니다. 관중은 전쟁에서 파괴된 지 얼마 안 되어 백성의 수효가 적은데 비해 땅은 비옥하여 버려두기 아깝습니다. 대체로 제후가 처음 진나라에 반기를 들 때 제나라의 전씨, 초나라의 소, 굴, 경씨 같은 호족들이 없었다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는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나, 이곳에 사는 호구 수가 극히 적어 북방 흉노들이 침략할 경우 큰 위험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쪽의 옛 6국은 아직도 강한 호족들을 거느리고 있어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이 기회에 방금 전에 말씀드린 호족들과 연, 조, 한, 위의 왕족들과 그 후손, 각지의 호걸, 명문가의 사람들을 모조리 한중으로 옮겨와 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훌륭한 생각이다."
고조는 유경의 말대로 각지에 흩어져 있는 호족들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이주한 인구가 무려 10만 명에 이르렀다.
실속: 빈수레는 항상 요란한 법이다. 내실없는 사람, 내실없는 기업일수록 그 겉치장이 화려하다. 겉모습에 감추어진 속내용을 꿰뚫어 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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