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스물네번째 이야기 - 왕의 환생
아주 오랜 옛날 설두라건녕이라는 왕이 대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팔만사천의 소국과 팔십억 개에 이르는 마을을 통치하였으며, 이만 명의 부인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자비심으로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는 어진 왕이었다. 백성들 역시 그러한 왕을 마치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혜성이 출현하자 천문관이 국왕을 찾아와 말했다.
"옛부터 혜성이 출현하면 십이년 간 큰 가뭄이 든다고 하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천문관의 보고를 받은 국왕은 수심에 잠겼다. '정말 그렇게 큰 가뭄이 들면 어쩌나? 그렇게 되면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려 죽을 텐데...' 곧이어 국왕은 여러 대신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세웠다. 그때 회의에 참석한 한 대신이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우선 시급히 전국의 인구와 비축되어 있는 양식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국왕은 그 대신의 말에 따라 조사를 진행시켰다. 그 결과 아무리 최소 수준으로 배급량을 줄인다 할지라도 몇 년 버티지 못한다는 참담한 계산이 나왔다. 얼마 지나지않아 천문관의 예측대로 전국은 큰 가뭄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어 몇 년이 흐르자 마을마다 굶어죽은 백성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다. 평소에 백성들을 끔찍히 아끼던 국왕은 이 일로 잠을 편히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은 수심에 잠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고 부인과 몇몇 시녀들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강을 찾았다. 국왕은 그녀들과 함께 강변을 거닐다가 홀로 조용한 곳을 찾아 생각에 잠겼다. '백성들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이다지도 참담한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이상 가뭄에 희생되는 백성이 없도록 해야 한다.' 생각을 마친 국왕은 강변의 한 언덕 위로 올라가 천지신명에게 기원했다.
"만 백성이 굶주려 죽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 몸을 버리나니 원컨대 커다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그 살로 굶주리는 백성들의 배를 채워주게 하소서."
국왕은 기원을 끝내자 시퍼런 강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국왕은 커다란 물고기로 환생하게 되었는데, 그 길이는 무려 오백 유순(유순은 인도의 거리 개념으로 멍에를 황소 수레에 걸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이나 되었다. 그때 나무껍질을 벗겨 주린 배를 채우고 있던 다섯 사람이 물을 마시기 위해 강변으로 왔다가 큰 물고기를 보게 되었다. 큰 물고기는 그들에게 말했다.
"배가 고프면 어서 내 살을 먹도록 하시오. 그리고 살을 베어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 다른이들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하시오. 또 이이야기를 뭇 사람들에게 알려 배고픈 자는 모두 내게 오도록 하시오."
다섯 사람은 큰 물고기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선 각기 물고기의 살을 한 덩이씩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이윽고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 그 나라 모든 백성들이 큰 물고기의 살을 먹고 부지하게 되었다. 이 물고기의 살은 신기하게도 한 덩이를 베어내면 금방 다시 새 살이 돋아났다. 큰 물고기는 살점이 뜯겨나가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굶주린 백성들의 유일한 먹거리가 돼주었다.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차마 그냥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 까지 커다란 서원을 세웠던 설두라건녕왕, 그의 환생인 그 신비롭고 커다란 물고기를 먹은 백성들은 마침내 천수를 다한 뒤에도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얻었다. <현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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