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2장 지하계에서 벌받는 자들
1. 시큐온 시큐온(Sicyon)은 코린트 만에 면한 펠로폰네소스 시큐오니아 주의 수도로 현재는 바실리코라 한다.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 이름난 고장이며 첫 군주는 아이갈레오스로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시큐온을 중흥시킨 인물은 그 후손 시큐온으로, 아테네 왕 에렉테우스의 손자라 하며 따라서 다이달로스와는 형제간이 된다. 다른 설에는 마라톤의 아들이며 코린토스와 형제간이라고도 한다. 시큐온이 통치할 때 이곳은 크게 번영하여 전 펠로폰네소스를 시큐오니아라고도 하였다. 한참 후에는 아가멤논이 영주가 되고 그 후 헤라클리다이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251년에는 아라토스의 영도로 아카이아 동맹에 가담하여 강대국이 되었다. 밀, 포도주와 올리브의 집산지이며 철광으로도 유명하였고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는데 조각가 폴류클레이토스도 이 고장 출신이다. 후에 이 곳 주민들은 점차 방탕해지고 사치에 흘러 '시큐오니아의 신발'이라는 것이 매우 인기품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나약해진 시민의 일면을 엿보게 해준다.
2. 코린토스 코린토스(Corinthus:코린트)는 그리스의 북부지역 테살리아와 남부지역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좁은 지대(코린토스 협부)에 위치한 도시국가이다. 남북을 이은 육로와 동서의 해양(에게해와 이오니아해)에서 배를 육로로 연계하는 연수육로(Portage) 지점에 위치하여 교역의 중심지로서 한때 큰 번영을 누렸다. 원래 지명은 에퓨라, 그 후 비마리스(Bimaris : bi+mare 즉 둘+바다의 의미)라 불렸다. 시큐온의 통치 시대에 크게 번영하여 반도 전체를 시큐오니아라고도 하였다. 이 나라의 왕 에포페오스의 왕자 마라톤은 에포페오스의 학정이 심하므로 아티카로 가서 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마라톤이라 하였다. 후에 에포페오스가 사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왕권을 계승하고 두 아들 시큐온과 코린토스에게 나라를 나누어 주었다. 두 아들은 각각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 시큐온과 코린토스라 하였다. 일설에는 코린토스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그 나라 사람들은 메데이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설에 따르면, 코린토스는 메가레오스의 딸 코르게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지만 반란이 일어나 부자 모두 살해당하고 고르게는 절망에 빠져 호수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호수는 고르고피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반란은 시슈포스가 나서서 진압하여 원수를 갚고 코린토스를 지배하였다고 전한다. 코린토스 사람들은 코린토스를 제우스의 아들이라 하지만, 다른 그리스 사람들은 과장된 주장이라고 코웃음치며 '코린토스는 제우스의 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테세우스가 퇴치한 악당 시니스는 코린토스의 딸 슬레아가 낳은 아들이다.
역사시대에 와서도 강력한 부국으로 팽창을 계속한 코린토스는 기원전 733년 시칠리아의 슈라쿠세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티몰레오네 같은 폭군참주는 반강제로 신도시로 파천시켰다. 기원전 779년까지는 영주가 지배하였고 그 후 프류타네스라는 고위 행정관료가 통치를 맡았다. 기원전 394년, 코린토스 지역에서 아테네.테베.코린토스.아르기베스가 연합하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 대항하는 전투가 벌어졌다(코린토스 전쟁).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는 아테네와 보이오티아 연합군을 격파하여 큰 성과를 올렸으면서도 코린토스의 공략에 반대하고 "그리스인들은 서로 싸워 파멸할 것이 아니라 팽창하는 페르시아 세력에 대처해야 하는데 이에 대비하는 병력 투입은 하려 하지 않는다"며 개탄하였다. 그의 정적들은 '절름발이가 스파르타를 통치한다'는 옛 예언을 상기하고 절름발이 왕 아게실라오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아게실라오스는 대페르시아전에서 만 명 이상의 페르시아군을 섬멸시키는 성과를 올린 뛰어난 전략가였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 공략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 때의 화제로 녹아내린 모든 금속이 서로 섞이면서 값나가는 합금으로 변하였는데 이를 코린티움 아이스라 하였다. 장인들은 그 후 동에 소량의 금을 섞어 제품을 만드는 야금기술을 발전시켰는데 광택이 찬란한 코린토스 황동으로 소문이 나 매우 비싼 값에 팔렸다.
유명한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는 이 도시에는 음탕한 여인들이 돌아다니며 웃음을 팔았는데 대가가 어찌나 비쌌던지 애인 한량들이 대부분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 점에서는 레스보스 사람들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가 코린토스의 재건을 지원하여 도시는 종전의 영화를 되찾고 인구 60만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네로 황제는 코린토스 협부에 운하를 개착하고자 손수 금도끼로 기공식까지 하고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중단되었고, 2천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완공되었다. 건축학상 코린트식 신전 기둥장식은 매우 화려하여 도리스식이나 이오니아식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시슈포스 시슈포스(Sisyphus)는 극히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로서 아타마스 및 살모네우스와는 동기간이며, 아틀라스의 딸 메로페와 결혼하여 여러 아이들을 두었다. 에퓨라(코린트 시의 옛 이름)를 건설하였는데 이 때 멜리케르테스(이노의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자 영예로운 장례를 치르고 매장해 주었다. 이노는 멜리케르테스를 안고 이스트모스의 바다에 투신하였으며 아들은 바다의 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슈포스는 그 영혼을 기리는 행사로 이스트미아 경기를 시작하였다(기원전 1326). 시슈포스는 동기인 살모네우스를 증오하여 그를 처치하기로 마음먹고 아폴론의 신탁을 받아보니 조카딸과 동침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시슈포스는 살모네우스의 딸이자 그의 친조카딸인 튜로와 사랑을 하고 그로부터 쌍둥이 아들을 갖게 되었다.그러나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튜로는 두 아이를 어릴 때 살해하고 말았다. 시슈포스는 코린토스의 왕권을 쟁취하였는데 마술에 능한 메데이아가 갑자기 이 지역을 떠나면서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시슈포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하는데 하나같이 현명하고 온갖 계략으로 가득찬 이야기들이다. 예컨대 인근의 소를 도둑질하는 것쯤 식은 죽기 먹기로 알던 희대의 도둑 아아톨류코스가 시슈포스는 자신이 소유하는 소의 발굽에 '아우톨류코스가 훔쳤다'라고 적은 작은 서판을 달아 놓아, 잃은 소를 다시 되찾고 소도둑도 종식시켰다. 또한 아우톨류코스의 딸인 안티클레이아의 혼인날이 다가왔을 때는 이 처녀의 침실에 침입하여 겁탈하고 소도둑질에 대한 보복을 하였다. 안티클레이아는 이로 인해 라이르테스가 아닌 시슈포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오듀세우스였다. 다른 전설작가에 따르면 아우 톨류코스 자신이 스스로 딸을 시집보내기 전에 시슈포스와 자유롭게 연애하도록 하였는데, 자신보다 더 영악한 손자를 갖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한 번은 시슈포스가 코린토스 성채의 망루에서 제우스가 개울의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것을 보았다. 아이기나는 강신 아소포스와 요정 메토페의 달로 제우스가 그녀를 데리고 필리온토스에서 아이노이 섬으로 가던 길에 코린토스를 거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아소포스가 뒤쫓아와 시슈포스에게 딸을 납치한 자를 알려 달라고 하였다. 시슈포스가 코린토스 언덕에 있는 샘에서 물이 나오게 해주면 알려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이에 아소포스가 샘물을 솟아나게 하니 이 셈이 바로 피레네 샘이다. 시슈포스가 일러바친 것을 알게 된 제우스는 화가 나서 죽음의 정령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하데스의 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지극히 교활한 시슈포스는 타나토스를 교묘히 속여 꽁꽁 묶은 뒤 토굴 속에 가두어 버렸다. 이 때문에 인간이 죽지 않는 변고가 일어나게 됭고 이에 걱정이 된 신들은 아레스를 파견하여 타나토스를 찾아 풀어놓게 하였다. 풀려난 타나토스는 시슈포스를 다시 명계로 끌고 갔으나 시슈포스는 미리 처 메로페에게 자신의 장례를 지내지 말도록 지시해 두었다. 이에 따라 메로페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매장하지 않고 공양도 올리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하데스는 화를 냈지만 별 도리 없이 시슈포스가 다시 지상에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담히 지상으로 나와 코린토스로 돌아온 시슈포스는 하데스의 명령을 무시하며 예전과 마찬가지로 삶을 지속, 장수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오랫동안 이스트모스에서 패왕으로 군림한 후 그 고장에 매장되었고, 글라우코스(벨레로폰의 아비), 아르뉴티온(포코스의 아비), 테르산드로스 및 할모스라는 네 아들을 두었다.
신들조차 어찌할 수 없게 만들어 체면을 손상시킨 시슈포스는 사후 타르타로스에서 가혹한 벌을 받게 되는데 그 죄목은 여러 가지였다. 우선 지상에서 인근 나라를 악랄하게 파괴.약탈하고 주민을 돌로 눌러 잔인하게 죽이고 그 밖에도 혹독한 고문을 가한 죄, 제우스의 아이기나 납치를 딸의 아비에게 폭로한 죄, 하데스의 명령을 거역한 불경죄 등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옥 타르타로스에서 언덕 위로 큰 바윗돌을 영원히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바윗돌을 겨우 꼭대기까지 밀어올리면 번번히 다시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이 작업을 되풀이해야 했던 것이다.
익시온 익시온(Ixion)은 테살리아의 왕이며 라피테스족가지 지배하였다. 플레규아스와 페리멜레의 아들이라 하며 코로니스의 오라비가 된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서는 아레스, 아이틴, 안티온, 레온테오스, 혹은 파시온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데이오네오스의 딸 디아와 결혼하고 장인에게 값진 예물을 올리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약속을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알아차린 데이오네오스는 익시온의 말을 대신 끌고 가버렸다. 이에 익시온은 말을 빼앗긴 분을 감추고 우호를 가장하여 장인을 자신의 나라 수도 라리사의 축제에 초청하였다. 그리고는 데오오네오스가 도착하자 미리 땅을 파고 장작과 타오르는 목탄을 채워놓은 깊은 굴 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었다. 게다가 종교적 모임에 참석한 그 밖의 가족까지도 몽땅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살인 후에는 반드시 속죄가 행해져야 했으나 모두 극도의 공포와 경악에 휩싸여 익시온을 위한 속죄의 제의를 거부하고 그와의 접촉도 피하며 멸시하였다.
제우스 신은 난처한 처지에 빠진 익시온을 불쌍히 여겨 올림포스의 만찬에 초대하고 신들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제우스의 처사에 응당 보은의 마음을 갖고 근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익시온은 도리어 오만하고 욕정에 사로잡혀 헤라를 유혹, 겁탈하려 하였다. 일설에는 헤라가 익시온의 연정을 원했다고도 하나 대부분은 이를 부정한다. 익시온이 정조를 범하려 한 것을 헤라는 제우스에게 알렸고, 제우스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구름을 헤라와 닮게 만들어 익시온이 헤라와 만나자고 한 곳에 이끌어다 놓았다. 이 덫에 걸려든 익시온은 구름의 영상을 헤라로 알고 포옹 교합하였다. 이에 구름의 여신 네펠레(아타마스의 첫 왕비가 구름으로 변신하였다고 한다)가 수태하여 켄타우로스가 태어나고 이 켄타우로스가 펠리온 산의 암컷 야생마와 교합하여 켄타우로스족이 생겼다 하며, 혹 켄타우로스족은 네펠레의 아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신성 모독죄를 확인한 제우스는 익시온을 천공에서 내쫓고 헤라를 유혹한 죄로 벼락을 쳐서 타르타로스에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헤르메스를 시켜 익시온을 지옥에서 최고의 흉악범을 처벌하는 곳으로 끌고 가 화염에 싸인 수레바퀴에 묶여 영구히 돌게 하는 고통을 받게 하였다.
탄탈로스 탄탈로스(Tantalus)는 제우스와 플루토(크로노스 혹은 아틀라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시퓰로스 산에서 프리지아 혹은 리디아를 지배하였다. 탄탈로스는 엄청난 부자로 신들도 그를 좋아하여 신들의 잔치에 늘 초대되었다. 그는 아틀라스의 딸(7명의 딸을 플레이아데스라 함) 디오네와 결혼하였는데, 하신 파크롤로스의 딸인 에우류아나사도 아내라 한다. 다른 설에는 암피다마스와 스테로페의 딸 클류티아(다른 플레이아데스의 한 처녀)라고도 한다. 탄탈로스는 니오베와 펠롭스라는 두 아이를 두었는데, 브로테아스, 타슐로스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이 있다는 설도 있다. 후손으로 탄탈리데스, 튜에스테스, 아트레우스가 있고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 가게도 그 후손이라 한다. 시문에서는 탄탈로스가 지옥에 유폐되어 갈증과 배고픔을 면치 못하는 영겁의 벌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물이 턱에 차는 못에 갇혀 있으나 목이 말라 마시려 하면 물이 빠져 버리고, 머리 위에 잘 익은 과일이 잔뜩 달린 가지가 늘어져 있으나 손만 뻗치면 바람이 가지를 멀리 이동시켜 먹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또 다른 신화에서는 머리 위에 거대한 돌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달려 있어 시시각각으로 압사의 공포에 시달리며 한시도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슨 죄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크레타에 있는 제우스 신전에서 기르고 있는 제우스가 매우 아끼는 개를 훔쳤기 때문이라 한다. 또 한 설에서는 천상의 잔치에 참석할 때 식탁에서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지상의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더 끔찍스런 원인은 신들이 프리지아에 가는 길에 탄탈로스 집에 들렀는데 신의 신통력을 시험한다고 하여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죽여 신의 음식으로 제공하는 잔인성과 불경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 한다. 또 다른 설에서는 가뉴메데스를 납치하여 극히 비정상적인 음탕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탄탈로스에 대해서는 사후에 받은 벌로 유명하고 생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다나오스의 딸들 아르고스 왕 다나오스(Danaus)의 딸 50명을 다나이데스라 한다. 아라비아를 통치하던 숙부 아이귭토스(다나오스의 쌍둥이 형제)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다나오스가 통치하는 리비아에 아들 50명을 보낼 터이니 조카딸과 혼인을 시키자고 제의하였다. 다나오스는 이 제의를 자신의 왕국을 빼앗으려는 책략으로 보고 또한 신탁에서도 사위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였으므로 딸들을 데리고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건조한 큰 배로 아르고스로 향하였다. 아르고스는 선조 이오의 출신지였다. 도중에 로도스의 섬 린도스에 기항하여 아테나 여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신전을 봉헌하였다. 이어 아르고스에 도착한 그는 이오의 후손임을 내세워 왕권의 양위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수호신 자리를 놓고 헤라에게 패한 포세이돈이 화가 나서 아르고스 주민을 저주하고 모든 개울을 말려 버려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데 마침 아르골리드(수도는 아르고스)에 와서 머물던 다나오스의 딸 50명 중 아뮤모네가 포세이돈과 사랑을 하게 되었고, 포세이돈은 저주를 풀어 개울물을 다시 흐르게 하였다. 아르고스인은 집회를 열어 결국 다나오스에게 왕권을 넘겼다.
그런데 아이귭토스의 아들 50명이 신부를 찾아 다시 아르고스까지 와서 청혼을 하니 별 수 없이 각자 신부를 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낭자들은 미리 아비로부터 단검을 건네받고 신혼 첫날밤 동침하는 신랑을 찔러 죽이라는 엄한 밀지를 받았다. 명령은 어김없이 이행되어 딸들은 신랑을 살해하고 피묻은 머리를 내보였다. 그러나 장녀인 휴페름네스트라만은 자신의 처녀성을 존중하는 신랑 륜게오스를 사랑하여 아비의 비밀지령을 털어놓고 신랑을 도피시켰다. 명령을 거역한 장녀는 아비의 엄한 신문을 받았으나 시민들이 그녀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영예의 무죄판결을 받았다. 석방된 그녀는 신념의 여신에게 감사하여 사당을 봉납하였다. 다나오스는 륜케오스를 사위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49명의 자매는 제우스 명에 따라 헤르메스와 아테나에 의해 속죄하고 아르고스 젊은이들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비가 많은 지참금과 선물을 내걸었음에도 살인 경력을 가진 처녀들에게 선뜻 장가들겠다고 나서는 남자가 없었다. 궁리 끝에 도보 경기를 열어 우승한 젊은이에게 딸의 선택권을 주었고 마침내 모든 딸이 출가하여 그로부터 많은 후손이 생기니 다나오스족이라 일컫게 되었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다나오스의 딸들은 사후 하데스 나라 타르타로스에 가서 살인죄에 대한 벌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난 물독을 채우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한다. 다만 아뮤모네만은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가뭄에 허덕이는 아르고스 시로 물을 길어 나르고 이것을 본 포세이돈이 사랑을 느껴 데려갔기 때문이다. 또한 다나이데스가 신혼 초야에 신랑의 머리를 베어 레르나 늪에 던졌는데 그 곳에는 헤라클레스가 퇴치한 50두 괴물인 물뱀(헤라클레스의 두 번째 노역 참조)이 서식하였으며 히드라 독소는 그 후에도 계속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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