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1장 테베 전쟁
1. 테베
테베(Thebae, Thebes)는 보이오티아 지역 이스메노스 강 근처에 있는 도시이다. 카드모스가 최초로 건설하였고 이어서 암피온과 제토스가 완성시킨 성채라 하여 카드메아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로마의 저술가 바로에 의하면, 이 도시를 처음 건설한 것은 오규게스였으며 그는 제우스의 딸 테베와 결혼하여 이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규게스는 보이오티아, 아티카를 지배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랜 통치자로 나라 전체를 오규기아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그 후 많은 군주들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으나 액운이 계속되어 불운의 도시로 이름이 났다. 이 도시와는 별도로 트로아스 남쪽에 헤라클레스가 건설한 도시 테베도 있다.
2. 테베를 공격한 7용장과 에피고노이의 보복
비운의 왕 오이디푸스는 스스로를 자학하며 테베의 왕위에서 물러나고 아들들이 그 뒤를 계승하였다. 아들 형제는 서로 교대로 통치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때가 되었는데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소외된 동생은 아르고스 왕실로 가서 왕 아드라스토스가 규합한 7명의 용장과 함께 기병하여 테베 성을 포위하였다. 이들을 소위 테베를 공격한 7용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실패하고 아드라스토스만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성인이 된 7용장의 아들들인 에피고노이(2세들)는 다시 테베를 침공하여 마침내 보복에 성공하였다. 이는 트로이 원정 이전의 테베 성에 얽힌 서사시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좀더 자세한 사정은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뒤 아들 에테오클레스는 형제인 폴류니케스와 왕국을 교대로 다스리기로 약속하였으나 막상 양위할 시기가 닥치자 약속을 깨고 거부하였다. 이후 폴류니케스는 테베에서 쫓겨나 아르고스 왕실로 떠났다. 그런데 왕궁 입구에서 공교롭게도 평상 때문에 튜데오스와 시비가 붙게 되었다. 튜데오스는 사람을 죽여 칼류돈에서 추방된 도피자였다. 싸움이 붙은 두 사람을 떼어 놓은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는 폴류니케스와 튜데오스가 각각 사자 가죽과 멧돼지 가죽을 몸에 두르고 있으며 방패에도 각각 사자와 멧돼지 상이 장식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전에 딸들을 사자, 멧돼지와 결혼시키라는 신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에 아드라스토스는 두 사람에게 딸을 주고 또한 추방된 나라의 왕으로 복귀시켜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먼저 폴류니케스의 복귀를 돕기로 결정하고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모집된 주력의 7인 용사는 아드라스토스와 폴류니케스를 위시로 튜데오스, 파르테노파이오스(아르카디아 영주), 카파네오스(아르고스의 영주로 왕의 조카), 히포메논(아르고스인으로 왕의 사촌), 암피아라오스(아르고스인 예언자로 왕의 처남)이었다. 암피아라오스는 이번 출진이 실패할 것임을 예측하였으나, 부부간에 어떠한 불화가 생기면 부인 에리퓰레쪽의 결정에 따른다는 서약을 한 바 있어 부인 때문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래서 출발 직전에 암피아라오스는 두 아들 알크마이온과 암필로코스를 불러 아비가 죽어 돌아오면 우선 어미를 죽이고 후에 아비의 원한을 복수하는 테베 침공에 나서라고 엄명하였다. 일설에는 아드라스토스 대신 이피스의 아들 에테오클로스(카파네오스의 처남), 폴류니케스 대신 아드라스토스의 형제 메키스테오스가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정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진군하였다. 튜데오스는 화해할 특사로 먼저 출발하였는데 도중에 테베의 복병 50명을 만나 싸움이 벌어진 끝에 마이온(크레온의 손자)을 제외한 49명을 모조리 죽었다. 그러나 테베인들은, 이미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테베 귀족의 직계 자손으로 동정인 남자가 희생공양으로 자해하면 테베가 승리한다는 점괘를 낸 적이 있었고, 마침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오스가 자진하여 희생하였으므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출진 도중 불상사가 일어나니, 어린 왕자 아르케모로스 혹은 오펠테스의 유모 흅시퓰레(렘노스에서 해적에게 납치된 후 류쿠르고스 왕실로 팔려와 유모로 있을 때다)가 7용사를 샘으로 안내하는 동안 큰 뱀이 아기를 휘감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르케모로스를 위한 네메아 경기를 창설시킨 다음 이 곳을 떠났다. 테베에 도달한 7용장은 각기 테베의 성의 7개 성문을 맡아 공격에 들어갔다. 튜데오스는 멜라니포스가 방비하는 크레니다이 성문을, 카파네오스는 폴류폰테스가 방어하는 오규기아이 성문을, 아드라스토스(혹은 에테오클로스)는 크로온의 아들 메가레우스가 지키는 호말로이데 성문을, 히포메돈은 휴페르비오스가 지키는 온카이다이 성문을, 암피아라오스는 라스테네스가 방어하는 프로이티다이 성문을 공격하였다. 폴류니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지키는 흅시스타이 성문을 공격하였다. 카파네오스는 성벽을 타고 올라가 큰 소리로 "테베 시 입성은 설사 제우스라 할지라도 방해할 수 없다"고 외쳤는데, 이 지나친 기승에 분노한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다. 파르테노파이오스는 엘렉트라이 성문을 공격하다가 페리클류메노스가 성벽 위에서 떨어뜨린 큰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메키스테오스는 에테오클레스와 단기 격돌하다 패해 죽었다. 튜데오스의 수호신 아테나는 이 장수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우스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암피아라오스가 우군 모두에 반감을 샀던 멜라니포스의 목을 잘라 튜데오스에게 던져 주었더니 튜데오스가 그 골수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바람에 아테나의 동정심이 가져버려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암피아라오스는 페리클류메노스에 쫓겨 전차로 도망을 쳤으나 제우스가 던진 벼락 때문에 열린 대지에 빠졌다. 한편 오이디푸스가 지지하는 쪽이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임을 알고 있던 차라 폴류니케스는 그 지지을 얻으려 하였고 크레온도 에테오클레스를 위해 오이디푸스가 테베로 돌아오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어느 쪽도 돕지 않은 채 계속 저주심을 품어 결국 두 아들은 서로 단기 대적하여 양쪽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아비의 저주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7용장 중에서 아드라스토만이,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소산인 준마 아레이온의 질풍같은 준족 덕으로 살육을 면하고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 크레온은 공석이 된 테베의 왕위에 올라 폴류니케스를 위시한 침입자들의 매장을 엄금하였다. 일설에는 폴류니케스의 처 아르기아(아드라스토스의 딸)와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한밤중에 폴류니케스의 시신을 거두어 에테오클레스를 화장할 장작더미에 갖다 놓았다 한다. 다른 설에는 안티고네가 부패하는 시신에 흙을 손으로 모아 뿌렸다고도 한다. 아테네 왕 테세우스는 아드라스토스의 딸들과 아르고스의 여인들이 엘레우스시스의 데메테르 신전에 와서 전사한 남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탄원하자 이에 응하여 테베를 치고 크레온에게 전사한 시신을 매장하게 하였다.
10년이 지난 후 이 7용장의 아들들인 에피고노이는 성인이 되어 복수전에 나섰다. 에피고노이의 복수전은 고대사에서 유명한 전쟁이다. 총지휘자는 폴류니케스의 아들 테르산드로스라 하는데, 다른 설에서는 암피아라우스의 아들 알크마이온이라고도 한다. 코린트 사람, 메시나 사람, 아르카디아 사람 및 메가라 사람들이 아르고스군을 도우니, 결국 테베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대적해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적개심에 불탄 양쪽 무사들은 글리사스 마을 개울 둑에서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다. 격렬한 혈전 끝에 에피고노이 군이 승리를 거두고 일부 테베 병사는 왕자 라오다마스와 함께 예언자 티레시아스의 충고에 따라 테베를 포기하고 서부 해안 일류리쿰의 마을 엔켈레아이아(그 전에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가 이주한 곳)로 피난하였으며, 일부는 테베로 퇴각하였으나 곧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는 에피고노이 중 아드라스토스의 아들 아이기알레오스만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아비가 10년 전의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폴류니케스와 아르기아의 소산 테르산드로스는 테베의 왕위에 올라 도망간 주민들의 귀환을 권고하고 대파된 성채를 재건하였으나 매우 빈약한 왕국이 되었다. 테베에서 포로가 된 예언자 티레시아스와 딸 만토는 델포이로 보내져 아폴론 신전에서 봉사하였다. 아드라스토스는 에피고노이와 함께 아르고스로 귀환하던 중 내내 아들의 전사를 비통해하다가 사망하고 손자 큐아니포스를 후계자로 남겼고, 디오메데스가 섭정 혹은 왕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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