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2. 평진후, 주보열전(平津侯, 主父列傳)
대신과 황족들이 앞다투어 사치스런 생활을 할 때 오직 평진후 공손홍(公孫弘)만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절약해 모든 벼슬아치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제52에 <평진후, 주보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승상 공손홍은 제(齊)나라 치천국의 설현(薛縣:山東省 勝縣 부근)사람이다. 자(字)를 계(季)라 했다. 젊은 시절에 설현의 옥리(獄吏)를 했는데 죄를 지었다고 해서 파면되었다. 가세가 빈한해 해변에서 돼지를 길러가며 또 계모에게도 효성을 극진히 다했다. 그는 나이 40 이 넘어 <춘추> 잡가의 학설들을 공부했다. 건원(建元) 원년에 효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어진 선비와 문학하는 사람들을 초빙했다. 이때 공손홍은 60세로 초청되어 박사관(博士官)으로 들어갔다. 그는 흉노로 사신을 갔다와서 보고를 했지만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능력자로 단정되었다. 그는 병이라 핑계대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렸다. 원광(元光) 5년이었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천하의 학자들을 초청했다. 치천국에서는 공손홍을 추천하자 그는 담당관에게 사양해서 말했다. "무슨 소리요. 나는 일찍이 칙명에 의해서 상경했다가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힌 채 돌아온 사람이오. 필요하다면 다른 분을 추천하시오." 그렇지만 담당관은 굳이 그를 추천했다. 할 수 없어 태상(太常:官名)에게 출두해 초청된 백여 명의 학자들 틈에 섞여 황제가 출제한 문제에 대하여 답안지를 내었다. 그의 석차는 꼴찌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든 답안지를 섭렵해 본 황제는 공손홍의 답안지를 장원으로 뽑았다. 그를 불러 만나보니 인품이 고귀해 보여 즉석에서 박사관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한나라에서는 서남방의 오랑캐들과 친하기 위해 도로를 개설하고 있었는데 파, 촉(巴, 蜀)의 백성들은 그로 인해 몹시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탄원서가 올라오자 황제는 공손홍을 시켜 상황을 직접 시찰해 보도록 했다. 그는 돌아보고 와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서남쪽 오랑캐들과 통해 봐야 하등 이익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황제는 공손홍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국량도 크고 보통사람들보다 견문도 넓은 공손홍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임금으로서의 최대 결점은 광대(廣大)하지 않는 것이고, 신하로서의 최대 결점은 검소, 절약하지 않는 것이야." 그는 스르로 포의(布衣)를 입었고 밥상에는 한 가지 이상의 고기를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모가 죽자 꼬박 3년상을 치렀다. 그는 조정에서 어전회의가 열릴 때면 자기 의견을 말하는 대신 판단의 단서가 될 만한 자료만 내놓았다. 그리하여 황제 스스로가 선택케 했으며 굳이 남의 의견을 면전에서 논박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황제는 공손홍의 행실은 매우 돈후하며 변론이 너그럽고 법조문에 정통하고 관리능력도 뛰어나다고 보았다. 모든 것에 유학(儒學)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고 생각되어 황제는 그를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2년이 채 못돼 그는 좌내사(左內史:수도권 東部大臣)에 임명되었다. 그는 정사(政事)를 상주할 때 재가를 얻지 못할지라도 변론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주작도위(主爵都尉:賞賜를 주관하는 官)인 급암과 함께 한가한 틈을 가려 황제에게 나아가 그 또한 급암에게 먼저 말을 꺼내게 하고 자신은 그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렇게 되니 황제는 항상 기뻐하면서 상주하는 바를 모조리 들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공손홍을 나날이 친애했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어전회의 때 대신들과 어떤 안건에 대하여 미리 짜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손홍은 짜고 들어간 대신들의 의견을 버리고 황제의 의견을 따르고 말았다. 화가 난 급암이 어전에서 소리질렀다. "제나라 촌놈은 할 수 없군! 이게 뭐요! 당신은 성실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거짓말쟁이가 아니겠소. 우리들과 짜놓고 들어와서 그 약속을 여기서 송두리째 저버리다니!" 놀란 황제가 그 사유를 공손홍에게 물었다. "별일 아닙니다. 대체로 저를 아는 사람은 저를 충실하다고 말하고 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충실치 못하다고 말합디다." 그 이후로 대신들이 공손홍을 헐뜯을 때마다 오히려 황제는 공손홍 편을 들었다.
원삭(元朔) 3년이었다.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을 겸한 大法官) 장구(張歐)가 면직되었으므로 그 자리에 공손홍이 임명되었다. 이 무렵 한에서는 서남방으로 오랑캐들과 개통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으며 북방으로는 삭방군에 성새를 축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손홍이 간했다. "중국을 피폐케 할 뿐입니다. 아무 소용도 없는 땅에다 노력과 재산을 투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업은 중지되어야 합니다." 그러자 대신 주매신(朱買臣)이 삭방군을 설치했을 때의 열 가지 유익한 점을 설파했다. 당연히 1개조라도 논박할 줄 알았는데 공손홍의 대꾸는 그게 아니었다. "산동의 촌놈이라서 그게 그토록 유익한 줄 정말 몰랐습니다. 다만 서남쪽 오랑캐와 창해군 일은 중지하고 오로지 삭방군의 일만 힘들여 경영했으면 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니 황제는 공손홍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암은 다시 화가 났다. "폐하, 공손홍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며 막대한 봉록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포의를 걸치고 다닙니다. 검소한 척...... 이게 바로 위선자들이나 할 짓이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정작 그렇소?" "바로 그렇습니다. 대신들 사이에서 신이 급암보다 더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조정에서 저를 힐책했으니 그렇다면 그는 저의 결점을 정곡으로 찌른 것입니다. 사실 베옷을 입은 것은 명성을 낚으려는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옛날 관중(管仲)은 제나라 재상이 되어 삼귀(三歸:異姓女 3人을 側室로 두는 저택 혹은 누대)까지 두는 사치스런 생활을 했습니다. 비록 환공(桓公)을 패자(覇者)로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그 사치함이 제후에 비길 만했으므로 위에 있는 인군에 대하여 참월(僭越)한 행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반면 안영은 제나라 경공(景公)의 재상이었습니다만 식사 때 고기는 한 가지로 만족했고 그의 처첩에게는 명주옷을 못 입게 했으면서도 역시 제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이것은 아래의 일반 백성들에 비길 만한 생활인 것입니다. 지금 소신은 어사대부라는 고위에 있으면서도 베옷을 걸치고 있으니 결국 대신에서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급암의 말과 같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급암의 충성이 아니었더라면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로 인해 황제는 공손홍이 매우 겸손한 인물이라 생각되어 더욱 그를 후대했다. 결국 그를 승상으로 삼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했다. 그러면서도 공손홍은 겉으로는 관대해 보이나 곧잘 남을 의심하고 질투심이 강한 냉혹한 인간으로 평가받았다. 그와 틈이 생긴 사람들에 대해 밖으로는 사이가 좋은 척하면서도 그들에게서 받은 비방에 대해서는 반드시 복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주보언(主父偃)을 죽이고 동중서(董仲舒)를 교서(膠西:山東省 膠州)로 이주시킨 것도 공손홍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 가지의 고기반찬과 현미밥만 먹었으며, 친구나 빈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봉록을 털어 그들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집안에 남는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다. 선비들은 이러한 그를 보고 현명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의 모반이 발각되어 그들 일당에 대한 문초가 바야흐로 급격하게 진행될 때 마침 공손홍은 중병으로 누워 있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공로도 없으면서 봉을 받아 관위가 승상에까지 이르렀으면 마땅히 현명한 군주를 보좌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위로해 만민들로 하여금 천자의 신하이며 자식이라는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제후들이 반역을 기도했으니 이는 모두 재상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탓이니, 아마도 이대로 앓다 죽으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방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공손홍은 병중에서도 다음과 같이 상서했다.
-신이 듣기로는 '천하에는 지켜야 할 길이 다섯 가지가 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즉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지켜져야 할 질서를 말하며, 또 지(智), 인(仁), 용(勇)이야말로 그 질서를 실천하기 위한 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행하기에 힘쓰면 인에 가까워지고 학문을 좋아하게 되면 지에 가까워지고 부끄러움을 알면 용에 가까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자신이 자신을 다스릴 줄 알게 되며, 자신을 자신이 다스리는 연후에라야 남을 다스릴 줄 알게 됩니다. 아직도 자신을 다스릴 수 없으면서 남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변치 않는 원리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효도를 크게 실천하시어 하(夏), 은(殷), 주(周) 3대의 성천자(聖天子)의 행적을 거울삼아 주(周)의 정치원리를 본받고 국시(國是)를 세워 문무를 겸전하시어 어진 자를 격려하고 봉록을 지급하시며 재능을 헤아려 관직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신 홍은 지치고 노둔한 몸으로 싸움터에서 말을 달린 공로조차 없는데도 폐하께서는 과분한 후의로 소신 홍을 보잘것없는 무리 중에서 발탁하시어 열후에 봉하고 삼공의 지위를 주셨습니다. 소신은 행위나 능력에 있어 중임을 맡기에는 도무지 부족합니다. 게다가 평소부터 신병이 있어 폐하를 위해 힘을 다하기 전에 먼저 구렁텅이에 묻혀 끝내 홍은(鴻恩)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후작의 인수를 돌려 드리고 직책을 물러나 어진이에게 길을 비켜주고자 합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황제는 이렇게 회답했다.
-옛날부터 통치자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고 덕이 있는 자에게는 이를 표창하였다. 성취된 것을 지키는 데는 문(文)을 숭상하고 변란에 부딪치면 무(武)를 존중했다. 아직까지 원칙을 변경한 치자는 없다. 짐도 밤낮으로 이 원칙대로 하려고 간절히 애쓰고 있다. 짐이 지존의 위(位)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천하를 안녕하게 통치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리고 짐이 과연 누구와 함께 천하를 통치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으니 그대도 마땅히 이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생각해 보면 군자란 마땅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 그대 또한 이 점도 알아야 한다. 그대의 근실한 행실을 짐이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 그대가 한랭한 기후로 인해 불행히도 병에 걸렸으나 어찌 회복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가. 그래서 상서하여 후작을 반납하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니 이는 짐의 부덕함을 폭로하는 것이다. 지금 국사는 다소한 한가하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고 오로지 정신을 하나로 하여 의약의 도움을 빌어 요양에 힘쓰기 바란다.
그런 후 황제는 그에게 휴가를 주고 쇠고기, 주류(酒類), 비단 등을 보내어 그를 위로했다. 수개월이 지나자 그의 병은 완쾌되어 정사를 다시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원수(元狩) 2년이었다. 공손홍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해 승상의 자리에 앉은 그대로 생을 마쳤다. 아들 공손도(公孫度)가 작위를 계승해 평진후(平津侯)가 되었다. 공손도는 산양군(山陽郡:山東省 金鄕縣 북서쪽)의 태수로 10여 년을 있다가 법에 걸려 후작을 잃었다.
주보언(主父偃)은 제(齊)의 임치 출신이다. 처음에는 전국책사(戰國策士)의 장단설(長短設:길게도 짧게도 말할 수 있는 說得法)인 합종과 연횡의 술법을 배웠으나 만년에는 <역(易)> <춘추>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을 배워 제나라 여러 학자들과 교류했는데 그를 후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나라 학자들이 서로 짜고 그를 배척하는 바람에 제나라에서 용납될 턱이 없었던 것이다. 집이 가난해 돈을 빌리려 해도 빌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북쪽으로 연(燕), 조(趙), 중산(中山) 등으로 떠돌아다녔는데 그 어디에서도 그는 대접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객지생활 역시 몹시 곤궁했다. 효무제의 원광 원년에 이르러 주보언은 제후국에서는 벼슬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쪽 관중으로 들어가 위청 장군을 만났다. 위청은 황제에게 그를 여러 번 추천했으나 웬일인지 황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노자도 없는 몸이어서 오래도록 거기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그가 상종하는 제공(諸公)이나 빈객들 중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궁지에 몰린 주보언은 마침내 황제에게 직접 상서했다. 상서한 내용은 9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의 8개조는 율령(律令)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1개조는 흉노 정벌의 불리함을 충고한 것이다. 그의 1개조 내용은 이러하다.
-소신이 들은 바로는 현명한 군주는 간절한 충고를 미워하지 않고 넓게 들으며, 충성된 신하는 구태여 중벌을 피하지 않고 솔직히 충고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나라일에 소홀함이 없고 그 공업은 만세에 미친다고 합니다. 이제 소신은 충성심을 숨겨두지 않고 죽음도 피하지 않고서 저의 어리석은 계략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저의 당돌한 말씀을 용서하시고 조금이라도 명찰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사마법(司馬法:周代의 兵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강대하더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천하가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고 있으면 반드시 위태롭다'고. 천하가 이미 태평하다 하더라도 천자가 전승(戰勝)의 개가를 연주하고 봄철에 사냥을 하고 가을철에도 사냥하며, 제후들이 봄에 군사를 정비하고 가을에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은 모두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대체로 격노한다는 것은 덕(德)을 거역하는 것이며 무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최종의 행위입니다. 옛날의 군주는 한 번 격노하면 반드시 시체가 뒹굴고 유혈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천자는 전쟁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대체로 전쟁에 이기기를 힘쓰고 무력을 한껏 사용한 자 치고 후회를 남기지 않은 이는 아직 없었습니다. 옛날 진의 시황제는 전승의 위세를 믿고 천하를 잠식한 나머지 6국을 병탄해 국내를 통일한 위업은 하, 은, 주 3대의 그것과 맞먹습니다. 그러나 그가 승리만을 추구해 지칠 줄 모르고 흉노를 공격하려 하자 이사(李斯)가 이렇게 간했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대체로 흉노족은 성곽이 있어 거기에 정주하지도 않는 족속이며 식량을 쌓아놓고 수비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새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이동하고 있으니 간단히 제압하기도 어렵습니다. 가벼운 무장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는 식량은 반드시 떨어질 것이며 치중거를 동반하자니 행군이 둔화되어 제때에 현장으로 도착할 수도 없습니다. 흉노 땅을 얻었다 해도 이익될 것이 없으며 흉노백성을 포로로 잡아와 후대한다 해도 사역(使役)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 이겨 적을 몰살시키다가는 만민의 부모인 천자로서 그 역시 할 일이 못 됩니다. 중국을 피폐시키면서까지 흉노와 마음껏 싸운다는 것은 결코 상책이 아닙니다.' 진의 시황제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 몽염을 시켜 흉노를 치게 해 1천 리의 땅을 병합하여 황하를 경계로 삼았으나 이 땅은 염분이 많은 소택지(沼澤地)로서 오곡을 생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후 진에서는 천하 장정을 징발해 북하(北河:九原 印의 黃河) 일대를 수비케 했으나 병사들이 위험한 지경에 놓이기를 10여 년, 그동안 사망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또한 끝내 황하를 넘어 북으로 진격하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병력이 부족하고 군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탓이었겠습니까. 사정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천하에 명령하여 말먹이나 군량을 급히 수송했습니다만 황현(黃縣:山東省 蓬萊縣 남서쪽), 수현(山東省 文登縣 서쪽), 낭야 등의 연해(沿海) 지방에서 북하의 전선까지 수송하게 되면 길은 멀고 비용은 많이 들어 대개 30종(鍾:1종은 6石 4斗이니 192石이다)을 수송하면 발송량의 2백분의 1인 1석(石)이 간신히 도달할 뿐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경작에 힘써도 군량미 대기에 힘이 부치고 여자들은 아무리 길쌈을 해도 군용 장막 만들기가 모자랐습니다. 백성들은 피폐하고 고아, 과부, 노인, 아이들은 식량을 얻을 수가 없어 길바닥에서 사망하는 자가 속출했습니다. 대개 천하가 진을 배반하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주보언의 상서문을 읽던 황제는 크게 놀랐다. "어서 주보언을 불러들여라!" 주보언으로서는 아침에 상서하여 저녁에 입궁하는 꼴이었다. 주보언의 상서문은 계속된다.
-......고조황제께서도 천하를 평정하자 변경지대를 공략해 흉노가 대(代:山西省 北部)의 골짜기에 모여든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치려 하자 이때 어사 성진(成進)이 간했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대체로 흉노족의 성격은 짐승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흩어집니다. 이런 것들을 추격한다는 건 그림자를 치는 것처럼 무익한 일입니다. 지금 폐하의 왕성한 위덕으로 흉노를 친다 해도 저는 속으로 위험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고조황제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북진해 대의 골짜기에 이르렀습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평성(平城)에서 포위되었으며 고조황제는 몹시 후회했던 것입니다. 이에 유경(劉敬)을 보내 화친조약을 맺게 했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은 뒤에야 천하는 전쟁을 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법에는 '10만의 군사를 동원하면 하루에 1천 금의 군비가 소모된다[<孫子> '用間篇'>]'고 했습니다. 대체로 진에서는 언제나 수십만 군사를 싸움터로 몰아넣어 병사들을 시달리게 했습니다. 설사 흉노군을 뒤엎고 적장을 베고 선우를 포로로 잡는 전공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적의 원한을 사서 복수심만 깊게 했을 뿐이며 천하에서 소모된 모든 것을 보상하기에는 부족할 뿐이었습니다. 대개 위로는 국고(國庫)를 비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피폐케 하면서 외국 정벌에 몰두한다는 것은 건전한 정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릇 흉노족을 간단히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자행하는 게 그들의 본업이며 그들의 본성입니다. 옛날 순임금이나 하, 은, 주에서도 그들에게 과업을 준 뒤 감독한 적은 없으며 새나 짐승처럼 길렀을 뿐이지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순임금이나 하, 은, 주 때의 통치방법은 살펴보지 않고 근세의 진이나 고조황제의 실책만 따르려 하시니 실로 근심되는 바이며 백성들은 괴로워할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을 오래 끌면 반란이 일어나고 사태가 나빠지면 정상적인 사려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변경 백성들이 피폐해지고 괴롭고 근심한 끝에 모반할 마음을 품게 되며 장군과 관리들이 서로 의심하게 되어 외적과 사사로운 거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타는 진을 배반한 뒤 남월에서 독립했고 장한(章邯)은 적측으로 넘어가 사리(私利)를 도모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진의 통치가 불가능하게 된 것은 진의 권위가 이 두 사람의 이반으로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결과는 흉노정벌이 어떤 이해를 낳았는지를 보여준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주서(周書)>에도 '국가의 안위는 어떤 정령(政令)을 내느냐에 달려 있으며, 국가의 존망은 어떤 인물을 등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돼 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런 점들을 자세히 살펴보시어 좀 더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조나라 사람 서악(徐樂)과 제나라 사람 엄안(嚴安) 역시 시국의 위급함을 지적하는 상서문을 올리고 있었다. 서악의 상서는 이러했다.
-제가 듣기로는 '천하의 우환이란 것은 밑에서 서서히 무너지는 토붕(土崩)에 있지 겉으로 갑자기 무너지는 와해(瓦解)에는 있지 않다'고 합니다. 토붕이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진(秦)의 말세가 이것입니다. 진섭(陳涉)에게는 제후의 존위도 없었고 한 자의 땅도 없었으며 그 몸 역시 왕공(王公), 대인(大人), 명족의 후손이 아니고 향리에서 알려진 명예도 없었으며 공자, 묵자, 증자의 현명도 없었고 도주(陶朱)나 의돈(모두 춘추시대 魯 출신의 부호) 같은 재력도 없었으며, 빈궁한 골목에서 일어나 갈래창을 휘두르며 한쪽 어깨를 벗어 제치고 큰소리를 지르자 천하 사람들은 바람에 쏠리듯 모두 그를 따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백성들이 괴로워해도 군주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며 밑에서 원망을 해도 위에서는 알지를 못했고 세속이 이미 어지러워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에 말한 세 가지가 진섭의 밑천이 되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우환은 토붕에 있다고 합니다. 와해(瓦解)란 또 무엇인가 하면 오, 초, 제, 조의 병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 초 등의 7국이 서로 모의해 저마다 만승(萬乘:전차 1만 대를 소유)의 천자라 칭할 때 무장병이 수십만, 위엄은 그들의 영내를 압도할 만했으며 재력은 사민(士民)들을 반란으로 끌어들이고도 남을 만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쪽으로 한 자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중원(中原)에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것은 또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의 권위가 필부보다도 가볍다거나 병력이 진섭보다도 약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선제(先帝)의 덕택이 아직도 쇠하지 않았으며 그대로 땅에 안주해 세속의 풍속을 즐기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반란을 일으킨 제후들에게는 자기들 말고는 도와주는 사람들이 도무지 없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와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우환은 와해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실례에서 관찰해 보면, 천하 대세가 진실로 토붕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비록 벼슬도 없고 곤궁한 처지의 사람일지라도 일단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 천하는 위태롭게 마련입니다. 진섭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물며 삼진(三晋:韓, 魏, 趙)의 왕이라도 있었더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그러나 천하가 아직도 잘 다스려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토붕할 대세로 기울어지지 못했다면 아무리 강국과 강병을 소유하고 반란을 일으켜도 미처 그들은 발뒤꿈치를 돌릴 사이도 없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 초, 제, 조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물며 뭇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어떻게 난을 일으키겠습니까. 토붕과 와해의 두 가지 뜻은 국가 안위에 관계되는 아주 명백하고도 긴요한 점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서악의 상서문 역시 읽다 말고 크게 놀랐다. "서악을 불러들여라!" 서악의 상서문은 계속된다.
-......현명한 군주시라면 깊이 고찰하십시오. 요사이 관동지방에는 오곡이 흉작이어서 평년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곤궁한 처지에 빠졌으며 변경에는 뜻밖의 사태들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백성들은 안주할 수가 없게 되며 안주할 수 없으면 동요하게 되고 토붕의 정세가 조성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군주는 무엇보다 만물 변화의 근본을 살펴 국가 안위의 기미를 밝혀내 이것을 조정에서 해결하여 우환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하에 토붕의 징후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제아무리 강국과 강병이 위협한다 해도 폐하께서는 달리는 짐승을 쫓고 나는 새를 쏘며 동물들이 즐겨 노는 원유[動植物園]를 확장하고 마음껏 관광을 즐기시며 말달리며 사냥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더라도 태연자약하실 수 있습니다. 종소리와 북소리, 거문고와 피리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을 울릴 것이며 휘장과 장막 안에서 환락(歡樂:妾)과 배우와 주유(侏儒:난장이)의 재롱이 어전에서 계속 벌어져도 우환은 장기간 없을 것입니다. 은의 탕왕, 주의 무왕의 명성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으며 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의 태평성대를 그리워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가만히 생각할 때 폐하께서는 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을 갖추시고 또한 관대하고 인자한 자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심껏 천하 다스리기에 노력하신다면 저 탕왕, 무왕과 같은 명성을 얻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성왕, 강왕의 태평성대를 재현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성취시킨 뒤에라야 비로소 존중과 안태의 실효를 거두게 되는 것이며 명성을 당대에 휘날리고 명예는 널리 퍼져 천하 만백성과 친근해지고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감복시켜 그 은혜와 끼친 덕이 여러 대에 걸쳐서 융성할 것입니다. 그때라야 도끼[斧] 무늬를 수놓은 병풍을 등지고 남면(南面)하여 의관을 갖추어 왕공들을 인견하시는 일만 남게 됩니다. 신이 들으니, '왕자(王者)가 되려고 도모하다가 설령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자신을 안정시키기에 족하면 그것으로 성공이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자질로 보아 구해서 얻지 못할 것이 무엇이며 일을 꾸며 못할 것이 무엇이며 어디를 치든 복종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황제는 이번에는 엄안(嚴安)의 상서문까지 읽게 되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주(周)가 천하를 보유해 잘 다스린 기간이 3백여 년이며 그 중에서도 성왕, 강왕의 치세가 최성기에 해당합니다. 형법(刑法)이 있어도 40여 년 동안이나 적용하지 않고 버려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가 쇠약해지고 나서도 역시 3백여 년이나 명맥을 보존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오패(五覇)가 번갈아 일어나면서도 하나같이 언제나 천자를 도와 이익을 일으키고 해악을 제거하며 난폭한 자를 주살하고 사악한 일을 금하며 천하를 바로잡아 천자를 높였습니다. 오패가 사몰한 뒤로는 그들을 이을 만한 성현(聖賢)들이 없어 천자는 고립, 약화되어 그의 호령이 이행되지 못하니 제후들은 제멋대로 행동해 강자는 약자를 능욕하고 큰 떼거리들은 작은 무리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전상(田常)은 제(齊)나라를 찬탈하고 6경(六卿)은 진(晋)을 분할하여 드디어 전국시대로 돌입했습니다. 이로부터 백성들의 괴로움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강국은 침공을 일삼고 약국은 수비에 골몰하여 혹은 합종하고 혹은 연횡하여 많은 전차들이 달리다가 바퀴통을 맞부딪치며 전투가 오래 끌리다 보니 갑옷에는 이(蝨)가 끌었습니다만 백성들은 괴로움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진왕(秦王)은 천하를 잠식해 전국을 병탄하고 황제라 칭하여 강권을 휘둘러 제후들의 성읍을 파괴하고 그들의 무기를 녹여 종(鍾)과 종받침대의 다리를 주조해 다시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이제는 전쟁의 불안에서 벗어나 총명한 천자를 만난 덕분으로 마침내 소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진이 그 형벌을 완화하고 부세를 가볍게 해서 부역을 덜어주었더라면, 그리고 인의(仁義)를 존중하고 권세와 이욕(利欲)을 천시하고 독실, 온후한 인사를 존중하며 교활한 지혜를 가진 자를 멸시해 악풍, 악습을 고치고 국내를 교화했더라면 진의 치세는 대대로 안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에서는 그렇게 하는 대신 구습을 따라 교활한 지혜나 권세나 이욕에 몰두하는 자는 출세하고 독후(篤厚)하고 충신(忠信)한 선비는 배척되었으며 법은 엄혹하고 정치는 준열한 데다 아첨하는 자는 많아 황제는 날마다 그들의 감언(甘言)만 듣고 뜻은 과장되고 마음은 질탕해졌습니다. 그래서 위세를 마음껏 떨쳐보려 몽염을 시켜 북방 흉노를 치게 해 영토를 확장하고 국경을 넓혀보려 북하(北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말먹이와 양곡을 수송했습니다. 또 위타와 도수를 시켜 수전(水戰)하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 백월(百越)을 공격했고 감(監:御史)인 녹(祿:이름)을 시켜 운하를 파서 양곡을 운반케 해서는 월 땅 깊숙히 침입케 했습니다. 월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망했습니다만 진군이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양곡이 떨어지자 이를 안 월군이 공격으로 나와 진군을 크게 패배시켰습니다. 진은 하는 수 없이 위타를 시켜 월군을 방어케 했습니다. 이때 진나라는 불행히도 북방으로는 흉노에 얽히고 남방으로는 월에 걸려서 군사를 쓸모 없는 땅에 주둔시킨 꼴이 되어 전진도 후퇴도 못하기를 10여 년이나 넘겼습니다. 장정들은 갑옷 입고 싸움터에 있었고 여자들은 물자 수송하기에 괴로움을 당해 도무지 편안 생활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스스로 길가 나무에다 목을 메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습니다."
황제는 엄안의 상서문을 읽다 말고 역시 크게 놀랐다. "엄안 역시 불러라!" 엄안의 상서문은 계속된다.
-진의 시황제가 붕어하자 천하에서는 크게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진(陳)에서 거병하고 무신과 장이는 조(趙)에서 일어났으며 항량은 오(吳)에서, 전담은 제(齊)에서, 경구는 영에서, 주불은 위(魏)에서, 한광은 연(燕)에서 거병했습니다. 심산유곡에서 아울러 일어난 호걸들로 그 숫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공작이나 후작의 후손도 아니며 일개 관(官)의 장(長)도 아니며 적으나마 세력도 없으면서 항간에서 갈래창을 잡고 지팡이 삼아 일어나 시세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 모의하지도 않았고 함께 일어날 것을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모였으며 그런 기세로 점차 진격하여 패왕(覇王)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당시 진의 냉혹한 법령과 준열한 정령(政令)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이 존귀한 천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고 부력(富力)은 천하를 소유할 만했으면서도 나중에는 자손이 절멸되어 조상의 제사조차 끊어지게 할 만큼 된 것은 오로지 무력(武力)만을 너무나도 숭상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주(周)나라는 문약해서 천하를 잃었고 진(秦)은 무력이 강해서 천하를 잃었습니다. 모두 시류에 따른 정책변경을 할 줄 모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제 한에서는 서남 오랑캐를 불러 들이고 야랑(夜郞:貴州省, 國名)을 조공케 하며 강북(靑海省, 國名)을 항복시키고 예주(濊州:吉林省 南東郡에서 北韓에 이르는 일대, 즉 옛 예맥국)를 공략하고 성읍을 건설하며, 깊숙히 흉노땅에 침입해 용성을 불사르려 하고 있습니다. 논의하는 자들은 이것을 찬미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신하로서 제 이익을 얻기 위해 발언하는 것이지 천하를 간직하려는 제왕(帝王)에게는 상책이 아닙니다. 지금 중국 안에서는 개짖는 소리에도 놀랄 일이 없을 정도로 태평합니다만 밖에서는 먼 변방 수비로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변방 수비로 국가를 피폐케 하는 것은 만민을 자식처럼 거느려야 하는 천자로서는 취할 길이 못됩니다. 무궁한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 마음껏 행동하여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안정시키는 길이 아닙니다. 화를 맺어 풀지는 못하고 전쟁이 멎었는가 하면 다시 일어나 가깝게 있는 자를 슬프고 괴롭게 하며 멀리 있는 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천하를 장구히 유지하기 위한 길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천하에서는 갑옷을 단련하고 칼을 갈면서 구부러진 화살을 바로잡고 활줄을 다시 매며 군량을 보내고 하여 조금도 쉴 새가 없으니 이것은 온 천하가 함께 우려하는 바입니다. 무릇 전쟁이 장기화되면 변고가 일어나고 사단(事端)이 번잡하게 빚어지면 우환이 생깁니다. 지금 군현(郡縣) 중에는 그 땅의 크기가 천 리에 가까운 것이 수십 개가 있어 그 형세가 이웃 제후를 위협하고 있어 이것이야말로 황실의 이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제, 진(晋)이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공실(公室)의 지위는 저하되고 위세가 깎인 반면 6경(六卿)들의 위세가 성대했기 때문입니다. 또 최근 진(秦)이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그 법령이 엄혹 심각하고 황제의 욕망이 막대하여 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군(郡)의 태수 권한은 지극히 무거워 6경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 관할 구역 또한 사방 1천 리에 가깝다는 것은 진승 등이 항간에서 궐기할 당시의 사정에는 비교도 안 됩니다. 또 갑옷과 무기의 정교함에도 갈래창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만일의 변고가 일어난다면 국가의 멸망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주보언과 서악과 엄안이 함께 궁으로 들어왔다. 황제가 말했다. "대체 그대들은 모두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소. 어째서 서로 만나는 것이 이토록 늦었소!" 그러면서 그들 세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 낭중(郎中)으로 삼았다. 주보언은 특히 황제를 자주 뵙고 상서하면서 정사를 논했으므로 황제는 조칙을 내려 주보언을 알자(謁者)로 삼더니 또한 중대부(中大夫)로 옮겼다. 그 후 주보언은 1년 동안에 네 차례나 승진했다. 주보언은 황제를 구슬렀다. "옛날에는 제후들의 영지란 것이 사방 1백 리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강약의 정도가 알맞아 제어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후들은 수십 개의 성읍을 보유한 사방 1천 리 이상입니다. 잘못 관대히 취급하면 교만해지고 사치해지며 음란해지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엄중히 규제하면 자기의 강력한 국력을 믿고 합종을 해서 조정에 반역할지도 모릅니다. 법으로 제후의 영지를 삭감하려면 위태롭습니다. 전날 조착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제재방법이 있겠소?" "지금 제후들의 자제들이 수십 명이 되더라도 적자(嫡子) 하나에게만 봉령이 세습됩니다. 나머지 아들들은 골육임에도 한 치의 봉령도 없으니 이래서는 인자(仁慈), 효행(孝行)의 도(道)가 선양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제후들을 시켜 다른 자제들에게도 봉령을 갈라주고 후가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불평을 없이하고 또 제후들의 땅을 갈라줌으로써 그 제후령을 삭감하지 않더라도 그들 스스로 약화되게 하는 효과도 노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럴 듯한 계략이오." 얼마 후 주보언은 황제에게 또 다른 계책을 올렸다. "무릉(茂陵:효무제 생존시에 건설된 능묘)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천하의 호걸들과 부호들 그리고 민중을 선동해 혼란시키는 자들을 모두 무릉으로 이주시키십시오. 이렇게 하면 안으로는 경사(京師:서울)를 채우고 밖으로는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은 이른바 벌주지 않고도 해로운 자를 없애는 방법이 됩니다." 황제는 역시 그 계략도 따르기로 했다. 또 주보언은 위황후(衛皇后)를 세우는 일과 연왕(燕王) 정국(定國)의 음모를 적발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대신들은 모두가 그의 발언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보낸 뇌물만도 1천 금이 넘었다. 어떤 사람이 충고했다. "해도 너무하오! 이건 너무 심한 횡포가 아니겠소!" 그러자 주보언이 대답했다. "내가 성장해서 각지로 배우러 떠돌아 다니기를 40여 년이나 허비했지만 영달할 수가 없었소. 양친은 자식이라 여기지 않았고 형제들도 도와주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나를 버렸소. 나는 곤궁한 나날을 보내온 지가 너무 오래요.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살아서 오정(五鼎:다섯 개의 솥에 담은 소, 양, 돼지, 물고기 요리. 제후 혹은 大夫의 식사. 즉 진수성찬)의 미식(美食)을 즐길 수 있는 신분이 못 된다면 차라리 죄를 짓고 죽어서 오정에 팽살(烹殺)되는 게 낫소. 나는 해가 저물어가는 데도 갈 길이 먼 나그네처럼 나이는 많고 할 일은 많소.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오." 주보언은 황제에게 또다른 계책을 올렸다. "삭방(朔方) 일대는 땅이 비옥합니다. 더구나 타국과는 황하가 막고 있습니다. 몽염장군이 여기에다 성새를 쌓고 흉노를 내몰았던 곳입니다. 이곳을 경영하면 안으로는 양곡수송이나 군사수비의 괴로움을 덜게 되고 중국 영토를 넓힘과 동시에 흉노를 멸망시키는 근본이 됩니다." 황제가 이 주장을 듣고 공경(公卿)들에게 내려 심의케 했다. 그랬더니 공경들 대부분이 불가함을 주장했다. 더구나 공손홍은 이렇게 반박했다. "진나라 때에도 일찍이 30만 대군을 파견해 북하에다 성을 쌓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결국은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얼마 안 가서 포기해 버렸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보언은 다시 그 편리한 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황제는 결국 주보언의 계략을 채용해 삭방군을 설치했다.
원삭(元朔) 2년이었다. 주보언이 황제에게 이런 귀띔을 했다. "제왕(齊王)은 안으로 음란 방탕한데다 그 행위 역시 간사한 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를 제나라 재상으로 임명할 테니 곁에서 잘 살펴 보오." 주보언이 재상으로서 제나라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일은 형제들과 빈객들을 모조리 불러모은 일이었다. 그는 5백 금을 그들에게 뿌려 주며 이렇게 꾸짖었다. "전날 내가 빈곤했을 때 형제들은 나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주지 않았고 빈객들은 나를 문 안으로 들여 놓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제 제나라 재상이 되어 오자 그대들 중에서 천 리 바깥까지 나와 나를 영접해 준 자도 있다. 정말 치사하다. 나는 그대들과 절교한다. 다시는 나의 문 안으로 들어서지 말라." 주보언은 그 후 슬그머니 사람을 시켜서는 제왕이 자기 누님과 간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비쳐 주며 충격을 주었다. 그러자 제왕은 결국 죄를 모면할 길이 없어 연왕(燕王)처럼 사형 논고를 받을 것이 두려워 자살하고 말았다. 전날 주보언이 평민 신분이었을 적에 일찍이 연과 조(趙)나라에서 노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주보언이 높은 자리에 올라 연나라의 비밀을 들추어 내어 연왕을 죽게 만들자 조왕 또한 주보언에 의해 추문이 들추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를 쳐서 주보언의 비밀을 황제에게 고발하려 했지만 그가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보언이 제나라 재상이 되어 관문 밖으로 나가자 조왕은 잽싸게 주보언을 고발했다.
-주보언은 제후들에게서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후의 자제들이 그로 인해 봉토를 받은 자가 많습니다. 살펴 보십시오. 제나라의 관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둘러 재상 주보언을 고발했다. -제나라 왕이 자살한 것은 재상 주보언이 공연한 일을 트집잡아 왕을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문초해 보십시오. 황제는 특히 주보언이 위협해 제왕을 자살케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노했다. 그래서 그를 불러들여 형리에게 넘겼다. 주보언은 제후에게서 금품을 받은 죄에는 복종했으나 제왕을 위협해 자살케 했다는 죄에는 반발했다.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주보언을 사형까지는 처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어사대부로 있던 공손홍이 황제에게 간했다. "제나라 왕은 자살했고 후사가 없어서 봉국(封國)은 폐지되었으며 군(郡)으로서 한실(漢室)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어찌되었건 주보언이 그 원흉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주보언을 사형에 처하지 않으시면 천하에 사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가." 황제는 드디어 주보언의 일족을 몰살했다. 주보언이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을 때는 그 문하를 드나들던 빈객이 수천이었으나 일족이 몰살되자 한 사람도 그의 시체를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 효현(安徽省 靈壁縣) 공거(孔車)라는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매장해 주었다. 후일 황제는 그 소문을 듣고 공거는 덕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공손홍은 수양을 쌓아 행동에 의리를 갖추었지만 무엇보다 시운(時運)을 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실이 흥기한 지 80여 년이 되니 천자의 마음은 학문쪽으로 향하여 훌륭한 인재들을 불러모아 유가(儒家), 묵가(墨家)의 학문을 퍼뜨리려 했던 것이다. 그때 제일 먼저 뽑힌 사람이 공손홍이었던 것이다. 주보언은 그가 요직에 있을 때는 여러 공경들이 모두 그를 칭송했으나 일단 그가 명성을 잃고 주살되자 선비들이 앞다투어 그의 나쁜 점만 떠들었다. 슬픈 일이다.
[이하는 후세 사람이 보충 기록한 것이다.]
태황태후(太皇太后) 왕씨(王氏:孝平帝의 할머니)가 대사도(大司徒:丞相)와 대사공(大司空:御史大夫)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절약과 검소함에 있다고 들었다. <효경(孝經)>에는, '위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는 예(禮)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했으며, 또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도리어 검소하게[<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 하라고 했다. 옛날 관중(管仲)은 제나라 환공의 재상이 되어 환공을 제후들의 패자로 만들고 제후를 아홉 번 규합해 단번에 난세를 바로잡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공자는 관중을 평해 예를 모른다고 했다. 그것은 관중이 사치스러워 군주에 비길 만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하왕조(夏王朝)의 우왕(禹王)은 궁실을 낮게 하고 의복을 검소하게 입었으나 후손들이 이를 따르지 않아 망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성대한 치세에는 군주의 덕행이 높고 우월했다. 검소함보다 높은 덕행은 없다. 검소한 미덕이 민속을 교화하면 존비의 질서가 확립되고 골육간의 정이 두터워지며 상쟁의 근원이 없어진다. 이것은 즉 집이 부유해져 사람들이 풍족하게 생활하여 형법(刑法)을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게 되는 기초가 되니 어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삼공(三公)은 백관의 우두머리이며 만민의 사표(師表)이다. 아직은 곧은 기둥을 세워 구부러진 그림자를 비친 적은 없다. 공자도 '그대가 앞장서서 바른 길을 걷는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되지 않겠는가[<논어> '안연(顔淵)편']'고 했다. '선인(善人)을 등용해 능치 못한 자를 가르치면 백성들은 선해지려고 노력한다[<논어>'위정(爲政)편']'고도 하지 않던가.
생각해 보면 한실이 흥기한 이래 팔다리 노릇을 한 재상들 중에서 몸소 검약에 힘쓰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며 의(義)를 중히 여겨, 두드러지게 세상에 나타난 사람으로 아직까지는 지난날의 승상 평진후 공손홍만한 이가 없다.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베이불을 덮었고 현미밥과 한 가지 고기반찬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친구나 빈객들에게는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 주어 집에는 여재(餘財)가 없었다. 진실로 안으로는 자진하여 극기 검약에 힘쓰고 밖으로는 규제하는 바에 따랐다. 급암이 이 일을 힐란했으나 공손홍은 조정에서 숨김없이 상주했다. 하기는 이것이 상식 이하의 절약이었으나 실행한다 해서 남에게 지장을 주는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공손홍은 덕이 훌륭했기에 실행할 수 있었으며 그렇지 못했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으로 사치하고 밖으로 기이한 복장으로 허명을 얻으려는 자와는 종류가 다르다. 공손홍이 신병으로 인해 사직을 청원하자 효무황제는 '유공자를 상주고 유덕자를 포상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짐의 마음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근심을 버리고 정신을 쉬게 하고 의약의 도움을 받아 치료에 전념하라'고 조칙을 내리고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케 했으며 쇠고기, 술, 비단 등을 내리어 그를 위로했다. 수개월이 지나 병이 낫자 그는 정무를 보았다. 원수 2년이 되어 마침내 공손홍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승상에 재직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무릇 신하를 아는 데는 군주만한 사람이 없다 하니 이것이 그 증거다. 공손홍의 아들 공손도는 작위를 받아 후일 신양군의 태수가 되었으나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잃었다. 대체로 덕 있는 사람과 의로운 인사를 표창하는 것은 민속을 이끌고 교화에 힘쓰기 위함이니 이것은 성왕(聖王)의 제도로서 천고에 바뀌지 않는 길이다. 여기에 공손홍의 자손으로 후계자에 해당하는 자에게 관내후의 작위와 식읍 3백 호를 내린다. 그를 불러서 공거(公車:官名)에 출두케 하여 그의 이름을 상서(尙書:官名)에 상고케 하면 내가 스스로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줄 것이다.
[이하는 후한(後漢)의 역사가이며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가 공손홍(公孫弘), 복식(卜式), 예관(兒寬)전을 짓고 논찬한 부분인데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덧붙였다.]
반고(班固)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손홍, 복식, 예관 같은 인물은 모두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날개 같은 대재(大才)를 가지고서도 제비와 참새 같은 소인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중앙에서 몸을 멀리하여 양이나 돼지를 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시운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능히 이런 고위(高位)에 나갈 수 있었겠는가. 이 무렵은 한이 흥기한 지 60여 년으로 국내는 안녕하고 국고는 충실하여도 사방 오랑캐는 아직도 복종치 않고 제도에도 결함이 많던 때였다. 효무제는 바야흐로 문무의 인재를 등용하려고 마음을 기울였으나 잘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처음에 포륜(蒲輪:부들풀로 수레바퀴를 감아 흔들림을 조절하는 安樂車)으로 매선생(枚先生:枚乘)을 정중히 맞이했고, 또 주보언을 인견하여 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 이리하여 뭇신하들이 황제를 흠모해 따르게 되어 특이한 재능의 인사들이 세상에 배출되었다. 복식은 목자(牧者)로 있다가 기용되었고 상홍양(桑弘羊)은 장사꾼 중에서 발탁되었고 위청은 종의 몸에서 일어났고 김일제는 항복한 흉노의 처지에서 기용되었다. 이들은 옛날 토공(土工) 출신의 부열(溥說:殷高宗의 賢相)과 소먹이 출신의 영척(寧戚:齊 桓公의 名臣)과 다름없다. 한실에서 인재를 얻기로는 효무제 때가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 유학자로서는 공손홍, 동중서, 예관이 있고, 독실한 선비로는 석건, 석경이 있으며, 질박 솔직한 인사로는 급암, 복식이 있으며, 현자를 잘 추천하는 신하로는 한안국, 정당시(鄭當時)가 있으며, 법령을 제정하기로는 조우(趙禹), 장탕(張湯)이 있으며, 문장에는 사마천, 사마상여가 있으며, 해학가에는 동방삭, 매고(枚皐)가 있으며, 손님 접대를 잘한 신하에는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이 있으며, 천문역수(天文曆數)에는 당도(唐都), 낙하굉이 있으며, 음률을 조화하는 데는 이연년(李延年)이 있으며, 산수회계(算數會計)에는 상홍양이 있으며, 외국에 사신가는 데는 장건, 소무가 있으며, 장군으로는 위청, 곽거병이 있으며,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임금을 보좌하는 데는 곽광, 김일제가 있으며 기타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인재들이 많았다. 그래서 공업을 일으키고 제도와 문물을 남기기로도 후세에서 능히 이 시대에 미치지 못한다.
효선제(孝宣帝)가 황통을 물려받자 효무제의 큰 업적을 계승 정리하는 데 다시 육예(六藝:六經. 易, 書, 詩, 春秋, 禮, 樂)를 강론하고 뛰어난 특이한 인재들을 선발 초치했다. 그래서 소망지(蕭望之), 양구하(梁丘賀), 하후승(夏侯勝), 위현성(韋玄成), 엄팽조(嚴彭祖), 윤경시(尹更始)는 유학에 뛰어나 등용되었고, 유향(劉向), 왕포(王褒)는 문장으로 세상에 나타나고, 장상(將相)으로는 장안세(張安世),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 우정국(于定國), 두연년(杜延年)이 있으며,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는 황패(黃覇), 왕성(王成), 공수, 정홍(鄭弘), 소신신(邵信臣), 한연수(韓延壽), 윤옹귀(尹翁歸), 조광한(趙廣漢)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공적이 있었기에 후세에 기술되어 전해졌다.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했다는 점에서 효선제 시대는 효무제 때의 다음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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