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2장 동방신화
5.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Babylonia)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00년 전에 번영했던 도시 바빌론과 그 외 여러 도시의 문명을 총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좁혀 말할때는 바빌론 도시에서 흥망성쇠한 나라들을 지칭한다. 통일제국의 첫 시작은 수메르, 아카디아, 마리(현 탈알하리리) 등의 도시국가를 정복한 아모리인이 건국한 함무라비 왕조(기원전 1894~1595년경)로, 특히 왕 함무라비(재위 기원전 1792~1759)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그 하나가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96년경)으로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로 이성적이고 인도적인 관점에서 제정된 법전이다. 법전은 큰 섬록암 비석에 새겼는데, 비 상부에는 왕 함무라비가 오른손을 올리고 옥좌에 앉은 태양신 샤마시에게 법전의 편찬을 브리핑하는 장면을 부조하였다. 비문석 높이는 2.25m, 부조 부위의 높이는 0.71m로 파리의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
또한 그는 역사상 가장 찬란한 도시 중 하나인 바빌론과 거대한 '바벨탑'을 건립하였다. 신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바벨(Ba-Bel)은 하늘세계로 가는 산, 즉 계단식 피라미드 신전이 지구라트이다. 이는 하늘에 천신이 내려와 대지모신과 교합하는 성탑으로, 이 곳을 생식기가 놓인 중심점으로 가장 신성한 장소로 간주하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공중정원'은 이 지구라트 계단 7개에다 세계를 7개로 나눈 상징도시와 신전을 각 7개씩 낭떠러지에 건립한 것으로 마치 공중에 결려 있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대에 느부갓네살은 이 지구라트를 복원하였는데 세계를 7개로 구분, 7개의 동심원 모양으로 신전을 세웠다. 아름다운 수도 바빌론은 정치적.종교적.상업적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그 후 바빌로니아 제국은 카시트 왕조(1530~1150년경), 아람인 왕조(기원전 1100~1000년경)의 지배로 바뀌고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아시리아 제국이 들어섰다. 이후 기원전 625년 바빌론의 영주 나보폴라사르(재위 기원전 626~605)가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메데스에 가담하고, 기원전 612년아니라아의 수도 니네베는 함락당하였다. 영주의 아들 느부갓네살(재위 기원전 604~562)은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히타이트 도시) 전쟁에서 이집트 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바빌로니아 신제국(혹은 칼데아 제국)을 확립하였다. 신제국의 영역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실리시아(터키의 옛 지명)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이었다. 바빌로니아는 전설적 영광의 절정시대를 맞이하고 이 때 이름난 공중정원도 출현하였다. 이처럼 고대 오리엔트인은 호전적이고 전제군주의 지배하에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였으나 이어 잔인한 파괴로 멸망하고, 유달리 흥망성쇠가 자주 되풀이되었다.
6. 바빌로니아 창세시편
아시리아는 멸망과 함께 전화의 화염으로 전소되었다. 그리고 이 화염에 구워져 땅에 파묻힌 점토판 문서 하나가 2500년간의 긴 잠 끝에 발견되어 귀중한 역사사료가 되었다. 제국이 붕괴되기 직전 통치자 아슈르바니팔(재위 기원전 668~631)은 수도 니네베에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고 여기에 방대한 수의 설형문자 문서판을 보관하였다. 점토판은 바로 이 도서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소위 '에누마 엘리시'로 알려져 있는 기원전 7세기의 바빌로니아 창세시편의 서판이다. 이 창세시편에 대해서는, 언어와 스타일로 보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견된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서판 단편보다 훨씬 더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적어도 기원전 2000년 전의 원본 복사라 추측하기도 한다. 바빌론에서는 새해 축제기간인 11일 중 넷째 날에 신관이 반드시 이 '에누마 엘리시'를 암송하였다. 새해에는 매번 다시 창세되므로 자연과 사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따라서 왕도 재취임 의식을 밟았다. 일부 창세시의 내용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에는 하늘과 땅이라는 이름도 없고 신들조차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무에서 원생 남성 아프수(담수, 지하수, 샘과 개울물)와 여성 티아마트(해수, 대지 주위 혼돈의 정령)가 나타나 만물을 생성시켰다. 담수와 해수가 뒤섞여 한 몸이 되어 낳은 것이다. 질서나 한계, 법도도 없이 신과 괴물이 출현하였다. 신족의 아들 라마와 딸 라하마도 출생하고 이들은 크기 전에 안샤르와 키샤르를 낳았는데 남매는 다른 누구보다도 지혜가 뛰어나고 명석하였다. 안샤르와 키샤르의 첫 아들 에아(또는 누딤무드)는 대지와 물의 신이고, 다음 아들 아누(혹은 안)는 천공의 신이었다. 그런데 날이 가고 해를 거듭하면서 아누는 윗세대와 대립하였다. 수메르 신화에서는 천공의 신 안(비빌로니아의 아누)과 대지의 여신 키(바빌로니아의 에아)가 결합하여 엔릴(대기의 신)을 낳는다. 엔릴은 우주를 하늘과 땅으로 분리시키는 공기의 신으로 바람의 주신이자 비와 폭풍의 신이다. 비빌로니아 신화에는 이 신을 지혜와 마술의 원초신으로 보며, 수메르의 엔키 또는 에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신성은 변모해 갔다. 에아가 여신 니누르사그를 아내로 삼아 얻은 아들 마르두크는 자라면서 성격은 난폭하나 용맹하고 지혜가 출중하였다. 한편 신들의 수가 불어나게 되고 그들이 모여 춤추며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니 이에 화가 난 아프수가 이들을 파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명한 에아(수메르의 엔키)는 아프수(물)에 주문을 던져 조부신을 잠들게 한 후 아프수의 시종참모인 난쟁이 뭄무를 사로잡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조모신 티아마트는 정복자인 손자들에게 복수할 계책을 세워 큰 괴물 큉구와 혼인하고 그를 수장으로 삼아 군병을 지휘, 운명의 주사위를 맡겼다. 이에 겁을 먹은 에아는 자신의 왕권을 찬탈하여 눈밖에 난 아들 마르두크를 내세워 대항케 하였다. 처음에는 티아마트 군이 에아의 연합군을 이겼으나 두려움을 모르는 호담한 아들 마르두크가 티아마트 군의 계략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서서 티아마트에게 단둘이서 승리를 결판짓자고 싸움을 걸었다. 그리고는 분노에 차서 앞뒤 가리지 않고 성미 급하게 덤비는 티아마트를 죽여 그 몸을 조개처럼 두 쪽으로 갈라 한 쪽으로는 창공을 만들어 별들을 차렸고 나머지 반으로는 땅을 만들었다. 모든 신들이 마르두크의 승리에 경탄하고 환영하였다. 마르두크는 적군을 지휘한 큉구를 살해하고 그 피로 인간이라 부르는 꼭두각시를 만들어 신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하여 땅의 경작을 맡게 하였다. 이제 신들의 세계는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와 평화를 되찾고 인간은 그들의 종으로서 신들에게 복종할 운명이 씌워졌다. 신들이 협력하여 바빌론에 신전을 세우고 모든 신은 마르두크를 최고의 영웅신으로 삼아 바빌론의 주신으로서 엔릴과 에아와 함께 숭배하였다. 그리고 마르두크에게는 50개의 빛나는 별칭이 붙여졌는데 엔릴이 마지막으로 붙인 별칭은 '지상의 지배자'였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와 같은데 지금까지 발굴된 설형문자의 기록이 적은데다 파손 및 결손으로 해독이 난해하여 밝혀진 것은 아직 일부분에 불과하다.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서 크게 주목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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