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42. 장석지.풍당열전
법을 지켜 대의(大義)를 잃지 않고 옛 현인(賢人)에 관해 말하여 군주의 총명을 더하게 했다. 그래서 제42에 <장석지.풍당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정위(廷尉: 刑獄을 주관하는 官) 장석지는 도양(堵陽: 河南省) 사람으로 자는 계(季)이다. 그는 형인 장중(張仲)과 함께 살고 있었다. 부자였으므로 재물을 바치고 기랑(騎郞: 騎馬를 주관하는 郞中) 벼슬을 얻어 효문제를 섬겼으나 10년이 넘도록 승진도 안 되고 이름도 나지 않았다. 장석지는 투덜거렸다. "오래 벼슬자리에 있었지만 형의 재산만 축냈을 뿐 이룬 게 아무것도 없네!"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원앙이 중랑장(中郞將: 궁중 경호장관)으로 있었다. 원앙이 장석지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관직을 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황제에게 주청했다. 그래서 장석지는 알자(謁者: 궁중 접대관)가 되었다. 그는 알자가 되자마자 효문제에게 나라에 유익한 일을 상주했다. 장황스럽다고 생각했는지 효문제는 이렇게 말했다. "좀더 비근(卑近)하게 말하라. 너무 고상하고 요원한 것 말고, 지금 당장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말일세." 그래서 장석지는 진(秦)에서 한(漢) 사이에 일어난, 즉 진나라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과 한나라가 흥하게 된 이유를 장시간 설명했다. 그제서야 효문제는 그를 칭찬하면서 알자복야(謁者僕射: 알자의 長官)로승진시켰다. 장석지가 황제를 수행해 동물원으로 갔다. 황제는 상림원의 위(尉)에게 동물기록부에 적혀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런데 위는 구원을 요청하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하나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는 색부(嗇夫: 즉 일꾼) 하나를 지적하여 물었다. 그랬더니 색부는 너무도 명확하게 막힘없이 대답을 잘했다. 메아리가 그대로 울려오듯 거침없이 유창하게 말했다. 그러자 효문제는 화난 음성으로 위(尉)를 꾸짖었다. "책임 있는 관리가 이래서 되겠는가. 능력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겠군!" 상림원을 벗어나자마자 황제는 장석지에게 위(尉)를 파면시키고 색부를 상림원의 영(令: 장관)으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장석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황제에게 질문했다. "폐하께서는 강후 주발(周勃)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십니까?" "덕이 높은 사람이지." "동양후 장상여(張相如)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시 고덕한 인물이지." "폐하께서는 이상 두 사람을 유덕자(有德者)라 칭찬하셨지만 구변이 없어 생각을 표현 못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청산유수로 입을 놀려 대던 아까 그 색부의 발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진(秦)에서는 법조문을 잘 외우는 자에게만 정치를 맡겨 사소한 결정도 가혹하게 밝혀 내는 것을 자랑삼게 했습니다. 이는 곧 형식만 구비되고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실속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는 간언은 들어 보지도 못하고 점차로 쇠퇴하다가 2세황제에 이르러서는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저 색부의 구변이 달변이라 하여 그를 특진시키면 천하사람들이 출세하기 위하여 유행병처럼 변설에만 매달려 실속이란 것은 흔적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천민들이 폐하의 감화를 받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소리에 메아리가 응답하는 것보다 빠른 것입니다. 인사문제는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좋은 얘기다." 효문제는 색부를 상림원에 임명할 것을 포기했다.
황제는 장석지를 수레에 배승시킨 뒤 수레를 천천히 몰게 하면서 진나라의 실정(失政)에 대하여 물었다. 장석지는 이에 성의를 다하여 소상히 진언했다. 황제는 수레가 궁에 이르렀을 때 장석지를 공거령(公車令: 궁궐 司馬門의 수비 大臣)에 임명했다. 얼마 후 황태자와 양왕(梁王: 황태자의 아우)이 같은 수레로 입조하면서 사마문에서 내리지 않고 들어갔다. 장석지가 그들을 뒤쫓아가 그들을 제지했다. "공문(公門)에서 하거(下車)하지 않으면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장석지는 즉시 탄핵했다. 효문제는 박태후(薄太后)에게 관을 벗고서 사과했다. "아들들을 교육시키는데 소홀하였습니다." 이에 박태후는 사자를 보내 조칙을 받아 태자와 양왕을 사면하도록 부탁했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궁으로 들어갈 수갈 있었다. 까다로운 절차였지만 그것이 규칙이었다. 효문제는 그 일로 장석지를 기특한 인물이라 하여 중대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중랑장으로 승진시켰다.
한때 장석지는 황제를 따라 패릉(覇陵: 長安 동쪽의 丘陵)으로 간 적이 있었다. 황제는 패릉 북쪽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다. 그 때 신부인(愼夫人)이 따르고 있었다. 황제는 신부인에게 신풍(新豊:섬서성) 쪽 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길이 한단(신부인의 고향, 河北省)으로 가는 길이오." 그런 후 신부인에게 대금(大琴)을 뜯게 하고 황제 자신은 노래를 불렀다. 마음이 처량해진 황제는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아, 북산의 정밀하고 굳은 돌로 곽(槨: 棺의 外箱)을 만들고 마(麻)와 면(綿)을 썰어 틈새를 메꾸고 옻(漆)으로 칠해 고정시키면 아무도 그것을 열지 못하겠지." 좌우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자 장석지가 나서서 말했다. "그 가운데에 사람들이 탐낼 것이 있다면 남산(南山: 終南山, 섬西省) 전체를 외곽(外槨)으로 삼고 쇳물을 부어 고정시킨다 해도 반드시 노릴 만한 틈새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 사람들이 탐낼 만한 것이 없다면 석곽(石槨)이 아니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겠지요." "......그렇군." 효문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장석지를 정위(廷尉)로 삼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궁을 나와 중위교(中渭橋: 渭水에 놓은 三橋 중의 하나. 섬서성)를 지날 때였다. 그런데 다리 밑으로부터 갑자기 사람 하나가 뛰쳐나와 승여(乘輿)를 끌던 말을 놀라게 했다. 그자는 기병에 의해 곧 체포되었다. 황제는 그자를 정위에게 내려 취조케 했다. 장석지가 취조해 보니 그자의 말은 이러했다. "저는 이 곳 장안 사람입니다. 이쪽으로 오는데 통행이 금지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다리 밑으로 숨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쯤 행행(行幸)이 충분히 지났으리라 생각되어 무심코 밖으로 나와 보니 때마침 용연과 수레와 기병들이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놀라 달아나던 중이었습니다." 정위 장석지는 그에 상당하는 형량을 상주했다. "한 사람이 단독으로 통행금지를 위반했으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효문제가 노했다. "이 자는 바로 황제의 말을 놀라게 한 자요. 다행히도 내 말이 온순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말이었다면 짐이 크게 다쳤을 게 아니오. 그런데도 정위는 기껏 벌금형으로 처벌할 참이오!" 장석지가 대답했다. "법이란 것은 천자도 천자의 백성도 공동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법으로써는 이것밖에 벌 줄 수가 없는데 더욱 중벌로써 이 자를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은 법을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당시에 폐하께서 이 자를 주살해 버렸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폐하께선 이미 이 자를 정위인 저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정위란 무엇입니까. 천하의 법을 공평하게 관리해야 되는 직책입니다. 이 공평히 한번 기울어지면 천하의 법이 가볍게도 되고 무겁게도 운용되어 만백성들은 안심하고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 폐하께서 양찰하여 주십시오." 한참 후에 황제는 말했다. "정위의 판결이 옳소."
그 후 고조의 묘 좌대(坐대) 앞에 놓인 옥가락지를 훔친 자가 체포되었다. 효문제가 노해 역시 그자를 정위에게 넘겨 취조하게 하였다. 장석지는 종묘의 어용품(御用品)을 훔친 자에 관한 법률조문을 들어 상주했다. "기시(棄市: 죄인의 목을 베어 죽인 시체를 저자에 버림)에 해당합니다." 그러자 효문제는 더욱 노했다. "저자는 무도하게도 종묘의 기물을 훔쳤소. 내가 정위에게 저자를 넘긴 것은 일족을 멸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런데도 법에 의해 판결했다고 하니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내가 종묘를 공경해 받든다고 말할 수가 있겠소!" 장석지는 관을 벗고 사죄하며 말했다. "법대로 하자면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죄상이 같다 하더라도 그 불경의 정도에 따라 차등은 반드시 두어야 합니다. 만일 종묘의 기물을 훔쳤다 하여 일족을 멸하는 형벌을 내리시면 만일 장릉(長陵: 高祖의 陵)을 도굴한 자가 생겼을 때 폐하께서는 무슨 벌로 다스리겠습니까?" 한참 후 효문제는 황태후와 그 문제를 상의한 끝에 정위의 판결이 옳았다고 동의했다. 즈음에 중위(中尉)였던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와 양(梁)의 재상 산도후(山都侯) 왕염개(王염開)는 장석지의 논리 전개가 공평한 것을 보고 그와 친교를 맺었다. 장정위는 이러한 일들로 하여 천하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 뒤 효문제가 붕어하고 효경제가 즉위했다. 장석지는 효경제가 황태자 시절 그를 탄핵한 적이 있는 고로 그로 인해 죄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병이라 칭하고 근신하고 있었다. 어쨌든 사직하려 해도 주살될까 두렵고 사죄하려 해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때 왕생(王生)이란 노인이 있었다. 황제(皇帝).노자(老子)의 학문에 통달한 처사(處士: 在野人士)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황.노의 학문이 몹시 존중되었으므로 삼공(三公).구경(九卿)이 모두 기립해 있는 데서 그만이 착석이 허락될 만큼 그는 존중을 받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왕생이 장석지에게 하나의 계략을 일러 주었다. 드디어 어전에서 회합이 진행되었다. 왕생이 소리쳤다. "내 신발끈이 풀어졌네." 모두가 왕생에게로 주의가 쏠리자 왕생은 굳이 장석지를 지적하며 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신발 끈을 좀 매어 주게." 장석지는 무릎을 꿇고서 그의 신발끈을 매어 주었다. 효경제는 그런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효경제는 장석지에게 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어떤 대신이 그 일을 두고 왕생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궁정에서 장정위에게 무릎 꿇여 신발끈을 매게 하는 창피를 주셨소?" "나는 늙고 천한 몸이오. 그러니 아무리 두루 생각해 보아도 장정위에게 도움 줄 만한 일이 없었소. 장정위는 지금 천하의 명신(名臣)이 아니오? 그렇지만 폐하한테서 미움을 받고 있단 말씀이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그를 욕보임으로써 천하사람한테서 존중을 받도록 한 것이오. 그쯤 되면 폐하께서도 그를 벌 줄 수가 없소이다." 공경들은 그런 말을 듣고 왕생은 현명한 사람이라 말했고, 장정위를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 장정위는 그로부터 1년 남짓 효경제를 섬겼다. 그런 후 회남왕의 재상으로 전출되었다. 역시 지난날의 탄핵건 때문이었다. 장석지는 회남왕의 재상으로서 죽었다. 장석지의 아들은 장지(張摯)였다. 자는 장공(長公)이었고, 벼슬은 대부(大夫)에까지 올랐다. 개성을 죽이고 당세에 영합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로 면직된 이후로는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풍당은 그의 조부가 조(趙)나라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대에 대(代)나라로 이주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다시 안릉(安陵: 陝西省)으로 이주했다. 풍당은 효도로 이름이 났다. 중랑서장(中郞署長)이 되어 효문제를 섬겼다. 효문제가 연(輦: 사람이 끄는 수레)을 타고 중랑서를 지나다가 풍당을 만났다. "노인은 어찌하여 낭관(郎官)이 되었소? 고향은 어디요?" 풍당은 자신의 과거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효문제는 다시 물었다. "내가 대국(代國)에 있을 때 나의 상식감(尙食監: 食事를 調理하는 官)인 고겁(高겁)이 조나라 장수 이제(李齊)의 현명함과 거록(鉅鹿:河北省)에서의 전투 얘기를 자주 들려 주었소. 지금도 나는 식사 때마다 마음이 거록으로 달려감을 누를 길이 없소. 노인도 이제를 아오?" "그렇지만 역시 염파 장군이나 이목 장군보다는 못하지요." "어째서?" "저의 조부가 조나라에 있을 때는 장수였기로 이목과 친분이 있어 그를 잘 알고, 저의 부친은 대(代)나라의 재상이었는데 조나라 장수 이제와 친근했기로 그를 잘 압니다. 그런 관계로 두 분의 사람됨을 잘 짐작하고 있지요." 황제는 염파와 이목의 사람됨이 훌륭했다는 얘기를 모두 들은 후 기뻐서 무릎을 탁 쳤다. "아깝다! 내게는 왜 염파나 이목 같은 장군이 없지? 그런 인물들이 나의 장군으로 있다면 나는 흉노 따위는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일인데!" "황공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염파나 이목을 얻더라도 그들을 쓰지는 못하십니다." 황제는 그 말에 성이 나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후 풍당을 불러서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많은 사람 앞에서 나를 욕보이는 거요? 뭇 사람들이 없는 데서도 충분히 말할 수 있을 텐데." "시골놈이 돼서 예절을 몰라 그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 무렵 흉노가 다시 조나(朝那: 甘肅省)로 대거 침입해서 북지군(北地郡)의 도위(都尉) 손앙을 죽였다. 황제는 흉노족들의 침략에 몹시 신경이 쓰였으므로 다시 풍당을 불러 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묻겠소. 그대는 내가 어째서 염파나 이목을 부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소?" "신이 듣기로는 옛적에 왕자(王者)가 전쟁터로 장군을 파견할 경우에는 무릎을 꿇고 수레바퀴를 밀어 주며, '국내의 일은 과인이 다스릴 테니 나라 바깥일은 장군이 모든 걸 알아서 결재하시오. 일체의 군공(軍功)이나 작위수여나 논공행상도 장군의 결정에 따를 뿐이오. 다만 장군은 개선하여 나에게 보고만 해 주면 되오'하고 했습니다. 이것은 빈 말이 아닙니다. 저의 조부 말씀입니다만, 이목이 조나라 장수로 변방에 주둔하자 주둔지의 조세(租稅)는 모두 임의대로 사용하여 전사들을 먹였으며 상을 내리는 바도 그 자리에서 결정해 버려 조정의 간섭은 일체 받지 않았다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군주는 장수에게 일체를 맡겨 그저 성공만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목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다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선된 전차 1천3백 대와 기병궁수 1만 3천명과 백금(百金)의 상금을 받을 만한 용사 십만을 거느린 이목은 이로써 북으로는 선우를 내쫓고 동호(東胡:흉노의 동방別族)를 격파하고 담림(澹林: 東胡의 國名)을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강대한 진(秦)을 누르고 남으로는 한(韓).위(魏)를 묶어 버렸습니다. 그 무렵의 조나라는 거의 천하를 재패하는 형세였습니다." "그러한 배경이 있었구려!" "그런데 그 후 조나라에는 천(遷)이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모친은 창녀(倡女) 출신이었지요. 어쨌든 조왕은 곽개(郭開)의 중상으로 드디어 이목을 주살하고 대신 안취(顔聚)를 장군으로 내보냈지요. 그러자 조나라 군대는 격파되고 병사들은 패주해 조왕은 사로잡혀서 나라는 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운중(雲中) 태수 위상(魏尙)에게 최근에 폐하께서 벌을 내리신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소." "신이 가만히 알아본 바로는 위상이 운중군(雲中郡: 山西省에서 綬遠.오르도스에 걸친 지역)에 태수가 되면서 주둔지의 조세를 모조리 털어 사졸들을 먹이고 자신에게 지급되는 사양전(私養錢)으로 닷새마다 한 번씩 소를 잡아 빈객과 군리(軍吏)와 사인(舍人)들을 먹인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흉노들은 운중 요새로부터 멀리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딱 한 번 쳐들어온 적은 있습니다만 위상은 병사를 이끌고 나가 부지기수의 적을 목베었습니다. 대체로 위상의 병사들은 모두가 민간의 자제로 시골에서 뽑혀왔습니다. 그토록 무식한 그들이 척적(尺籍: 참수한 공을 기록한 一尺의 板)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며 오부(伍符: 兵士가 五人一組가 되어 서로 감시하겠다는 서약서)가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루 종일 분전하여 적의 목을 베거나 포로를 잡으면 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적을 기록해 군감부(軍監府)로 보내는데 문리(文吏)들은 보고해 온 숫자가 맞지 않는다 하여 트집을 잡아 법적으로 제재하고 있다 합니다. 그 공로에 대한 은상(恩賞)이 삽시에 취소되는 것이지요." "그런 일들이 있었소?" "법이라 하여 관리들이 그렇게 하면 그것이 바로 법이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폐하의 법은 지나치게 밝으며 폐하의 상은 지나치게 가볍고 폐하의 벌은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운중 태수 위상의 경우도 바로 그렇습니다. 군공(軍功)을 보고자 올렸으나 그 공로는 묵살되고 적의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적의 숫자가 단 여섯 명이 틀린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문관이 올린 보고서만 보시고 위상을 형리(刑吏)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위상은 목숨을 걸고 싸운 보람도 없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그를 징역수로 만들어 사역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신이 폐하께서는 염파나 이목을 얻는다 해도 그들을 제대로 쓸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어 때를 가려 말씀드리지 못한 죄 죽어도 마땅합니다." 효문제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풍당의 충언을 몹시 기뻐했다. 황제는 그 날로 즉시 풍당을 사자로 황제의 부절을 가져가게 해서 위상을 사면함과 동시에 다시 운중의 태수로 복귀시켰다. 풍당도 거기도위(車騎都尉)로 임명해 중위(中尉)를 관장케 하고 군.국(郡.國)의 차전대(車戰隊)를 지휘.주관케 했다. 7년이 지난 뒤 효경제가 즉위[<史記>에는 7년이나 계산상으로는 11년이다. 또 <漢書>에는 10년으로 돼 있다. <史記會注考證>에도 11년이다]하여 풍당을 초나라의 재상으로 삼았으나 연로하여 곧 은퇴했다.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해 현량(賢良)한 인사를 구할 때 다시 풍당이 천거되었으나 벌써 나이가 90여 세라 출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풍당의 아들 풍수(馮遂)를 낭(郎)으로 삼았다. 풍수의 자는 왕손(王孫)인데 그 역시 기사(奇士)이다. 나[사마천]와 친분이 있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장석지의 유덕자(有德者)에 대한 진언은 황제에게 아부한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고, 풍당의 장수론(將帥論)에 대한 견해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옛말에 '그 사람을 모르면 그 친구를 보라'고 돼 있는데, 장계(張季)와 풍공(馮公)을 칭찬한 두 임금을 보면 그분들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서경(書經)>의 <모범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치우치지 않고 한쪽을 편들지 않으니 왕도(王道)는 넓고 크며, 한쪽을 편들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니 왕도는 공평한 것이다'. 장석지와 풍당이 바로 이 말에 가깝게 살다 간 사람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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