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41. 원앙.조착열전
감히 주군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직간(直諫)하여 군주가 걸어야 할 정도(正道)를 달성케 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한 장구한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에 제41에 <원앙.조착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원앙은 초나라 사람이다. 자를 사(絲)라 했다. 부친은 원래 떼도둑 패에 투신해 있었는데 안릉(安陵: 陝西省 咸陽縣 동쪽)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안릉은 혜제(惠帝)의 어릉(御陵)이다. 장안 주변에 역대 황제의 어릉을 조영하고 거기에 도성을 쌓고 국내의 부호나 군도(群盜) 등을 강제로 이주시킨 곳이다. 여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을 때 원앙은 여록(呂祿)의 가신이 된 적이 있었다. 효문제가 즉위하자 원앙은 형 원쾌가 보증을 서 주어 낭중(郎中)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주발(周勃)이 승상으로 있었다. 조회가 끝나고 퇴출하는데 그는 규칙대로 빠른 걸음이었으나 몹시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황제는 그를 언제나 정중히 예우하여 목송(目送: 原文에는 自送이라 했으나 황제 스스로 신하를 전송하는 법은 없으므로 <漢書>에 따라 目送이라 함)했으므로 그 때문인 듯 보였다. 원앙이 어전으로 나아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승상을 어떤 인물로 보십니까?" "사직지신(社稷之臣)이오." "강후(絳侯: 주발)께선 공신이긴 하나 사직지신은 아닙니다. 원래 사직지신이란 군주가 건재하면 함께 살 수 있으나 군주가 망하면 함께 망해야 하는 몸입니다." "그런 해석이 있소?" "여태후가 실권을 잡았을 때를 기억하십시오. 여씨 일족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승상과 왕의 지위를 독점해 유씨(劉氏)의 명맥은 실날같이 끊어질 듯했습니다. 그 때 강후는 태위(太尉: 오늘날의 國防長官)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불안을 시정치 못했습니다. 여태후가 붕어하자 여러 대신들이 협력하여 여씨 일족에게 항거했으며, 태위는 오로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유 하나만으로 우연히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공신이긴 하나 사직지신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겠구려." "그런데 그런 승상께서 폐하에 대하여 교만한 태도를 취하는 기색이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폐하께서는 지나치게 겸양하십니다. 이것은 군주와 신하간의 예의를 잃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폐하를 위하여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효문제는 그 후 원앙의 충고를 의식해서인지 주발에 대하여 강경하게 나갔고 승상 주발은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주발은 원앙을 원망했다. "내가 너의 형과 막역한 사이인데 어찌 네가 조정에서 나를 헐뜯을 수가 있느냐!" "헐뜯은 게 아닙니다. 원칙론을 주장했을 뿐입니다." 원앙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주발이 승상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봉국의 어떤 사람이 상서하기를 주발이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주발은 붙잡혀 와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황족이나 대신들 누구도 그를 위해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오직 원앙만이 주발의 무죄를 증명했다. 주발이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원앙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고맙네......" "천만에요. 강후께서는 모반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석방된 것입니다."
회남국(淮南國)의 여왕(劉長, 孝文帝의 아우)이 입조해서는 벽양후(審食其)를 멋대로 죽이는 등 그 태도가 자못 오만 방자했다. 원앙이 또 황제에게 간언했다. "제후가 지나치게 교만해지면 반드시 근심할 만한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를 견책하시어 봉령을 삭감하십시오." 효문제는 그 충고를 듣지 않았다. 회남왕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중 극포후(棘蒲侯) 시무(柴武)의 태자가 모반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취조해 본즉 회남왕과 연계되어 있었다. 회남왕을 소환해 효문제는 이 기회에 그를 촉(蜀)으로 귀양 보내기로 했다. 그나마도 함거(罪人 호송차)에 실어 역마를 갈아가며 급송키로 했다. 원앙은 이 때 중랑장(中郞長)으로 있었는데 황제의 처사에 반대하고 나섰다. "폐하께서는 평소 회남왕의 교만을 허용하시어 조금도 제지치 않으시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그를 꺾으려 하시니 그의 강의한 성격으로 보아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가는 도중 안개나 이슬을 맞아 열병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폐하께서는 광대한 천하를 소유 하시고도 아우 하나를 포용 못 해 죽게 했다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애초의 결정대로 하라." 황제는 듣지 않고 회남왕을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과연 회남왕이 옹(雍) 땅에 이르러 병사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듣고 황제는 식사를 폐하고 슬피 통곡했다. 원앙이 다시 입조해 강력하게 간하지 못한 죄를 사과했다. 황제가 말했다. "아,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 꼴이 되었소!" "그토록 자책하지 마십시오. 지난 일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폐하한테도 뛰어난 세상의 덕행 세 가지가 있거늘 이번의 그만한 일로 명예가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짐의 세 가지 덕행이란 무어요?" "폐하께서 아직 대왕(代王)으로 계실 때 황태후께서 3년 간이나 병환으로 고생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폐하께서는 밤새 눈도 붙이지 않으시고 의복도 벗지 않으셨으며 탕약도 폐하의 입으로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진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저 효도로 유명한 증삼(曾參: 孔子의 제자)도 하기 힘든 일이었거늘 폐하께서는 왕자(王者)의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것을 실행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덕행은 여씨 일족이 정권을 전단할 때 폐하께서는 대국(代國)으로부터 겨우 여섯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수도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태연히 달려오셨습니다. 이것은 저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같은 용자의 용기도 폐하한테는 미치지 못하는 행위였습니다." "세 번째의 덕행이란 무어요?" "그 날 폐하께서는 수도의 대국저(代國邸)에 도착하시어 서향(西向)하여 천자의 지위를 사양한 것이 세 차례나 됩니다. 또 남향(南向)하여서도 두 번이나 사양하셨습니다. 저 덕행으로 유명한 허유(許由)도 단 한차례만 사양했습니다. 허유보다 네 차례나 더 많은 사양을 폐하께서도 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회남왕을 귀양 보낸 것은 그의 심기를 괴롭혀 잘못을 고쳐 주려는 호의에서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병사한 것은 관계관의 보살핌이 불충분해서 돌아가신 것뿐입니다." 그제서야 황제의 심사는 풀어졌다. "그건 그렇고 지금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오직 폐하가 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회남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아, 그렇구려!" 효문제는 세 아들을 세워 모두 왕으로 삼았다. 원앙은 그런 일들로 인해 조정에서 명성이 높아졌다. 원앙은 언제나 대도(大道)를 근거로 이론을 전개하였고 세태에 대한 강개(慷慨)한 정신으로 살았다. 환관 조동(趙同)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언제나 원앙을 중상했다. 그것이 항상 근심스러웠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원앙의 조카 원종(袁種)이 상시기(常侍騎: 侍從武官騎兵)가 되어 천자의 권한을 표시하는 절(節)을 가지고 승여 옆에서 황제를 모셨다. 그런 원종이 원앙에게 귀띔했다. "그놈의 중상이 통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삼촌께서는 어전에서 공공연히 조동과 다투십시오. 그에게 모욕을 주면 됩니다." "그럴 듯하다!" 효문제가 외출할 때 조동이 배승하고 있었다. 옳지 됐다 하고 원앙은 수레 앞에 엎드려 아룄다. "천자의 사방 여섯 자 승여에 배승이 허용된 인물은 모두가 천하의 호걸.영웅들이어야 한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漢)에서는 아무리 인재가 없다고 하지만 어찌 폐하께선 하필 거세당한 환관을 동승시키십니까." 그러자 멋쩍어진 황제는 웃으면서 조동을 하거(下車)시켰다. 그렇지만 조동은 울면서 승여에서 내렸다. 효문제가 패릉(覇陵: 長安 동쪽의 丘陵) 위에서 서쪽 험준한 언덕길을 말을 달려 내려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원앙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승여 옆으로 말을 바짝 갖다 대면서 승여의 말고삐를 잡았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짐은 괜찮은데 장군은 겁이 나는 모양이구려." "천만장자의 아들은 당(堂)의 가장자리에 앉지 않으며, 백만장자의 아들은 난간에 기대지 않으며, 성천자(聖天子)는 위험을 무릅써 가며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선 6두 마차를 달려 준험한 산길을 내려가려 하십니다. 가령 폐하께서는 자신을 가벼이 여기시더라도 만에 하나 말이 놀라 수레가 파손되기라도 한다면 고조 황제의 묘(廟)와 황태후(皇太后: 孝文帝의 生母 薄太后)는 무슨 면목으로 대하실 것입니까?" 그래서 황제는 그만두었다. 어느 날 황제가 상림원(上林苑: 長安에 있다)으로 행행(行幸)하는데 황후와 또 애첩 신부인(愼夫人)이 따라갔다. 궁중에서 그녀들은 언제나 동석했다. 그런데 원중(苑中)으로 들어가 좌석을 정할 때 원의 위서장(衛署長)이 동열(同列)에 두 여인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원앙이 신부인의 자리를 한 칸 뒤로 물려 버렸다. 신부인은 성이 나서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황제 또한 노하여 놀이도 포기하고 궁중으로 돌아와 버렸다. 원앙은 즉시 어전으로 달려들어갔다. "신은 높고 낮은 지위에 질서가 잡혀 있으면 상하가 모두 평화롭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선 오래 전에 황후를 세우시고 신부인은 첩실(妾室)에 지나지 않습니다. 첩실과 황후가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정작 폐하께서 신부인을 사랑하신다면 차라리 후한 금품을 내리십시오. 그것은 높낮은 지위의 분별과 관계 없는 일입니다. 금일 상림원에서 하신 폐하의 행위는 신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부인에게 화를 만들어 주시는 일입니다. 설마 인체(사람돼지)가 된 척부인(戚夫人: 高祖의 妾. 呂太后가 그녀를 투기해 사지를 잘라 돼지우리에 넣고 사람돼지라 불렀음)의 경우를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러자 황제는 기뻐하며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말을 들려 주었다. 신부인도 기뻐하며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내렸다.
원앙은 실상 너무 자주 직간했다. 그로 인해 경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은 궁중에 오래 있지 못하고 농서군(農書郡: 甘肅省 東部)의 도위(都尉)로 전임되었다. 그는 거기서도 사졸들을 인애롭게 대했으므로 그를 위해 생명을 던지겠다는 자들이 많았다. 곧 제(齊)의 재상으로 전임되었다. 다시 오(吳)의 재상이 되었는데, 오로 가려고 작별인사를 할 때 조카 원종이 다시 충고했다. "오왕(吳王: 劉비)은 몹시 교만하며 그의 수하에는 간사한 무리들이 많습니다. 삼촌의 성격을 두고 말씀드리는데 오나라에 가시거든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일을 각박하게는 처리하지 마십시오. 오왕은 필시 삼촌을 폐하께 중상하든가 심하게는 자객을 시켜 삼촌을 척살(刺殺)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는 무얼 하고 지내는 게 좋지?" "남방은 저지대인데다 습한 지방입니다. 날마다 술이나 드시고 결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고 업무에 진력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오왕께 '모반은 하지 마십시오' 정도만 일러 주십시오. 그러면 다행히도 위난(危難)은 벗어날 길이 있을 것입니다." 원앙은 원종의 계책대로 했다. 그랬더니 오왕은 원앙을 몹시 후대해 주었다. 원앙이 휴가를 얻어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승상 신도가(申屠嘉)를 만났다. 원앙은 수레에서 내려 배례했으나 승상은 수레 위에서 가볍게 답례했을 뿐 배알은 거절했다. 원앙이 되돌아와 생각하니 자기 부하들에게 부끄러웠다. 이에 그는 즉시 승상부를 찾아뵙기를 청했다. 그랬더니 그나마도 한참 후에야 싫은 듯이 면회를 허락했다. 원앙은 무릎을 꿇고 승상에게 말했다. "제게 주위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는 한가한 틈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그럴 틈은 없소. 귀관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공무라면 관계 관청으로 가서 장사(長史)나 연(둘 다 丞相의 屬官)에게 상의하시오. 그러면 내가 황제께 상주하겠소. 만일 사적인 일이라면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소." 원앙은 다시 무릎 꿇으며 말했다. "나리께서는 승상으로서 진평이나 주발에 비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그분들보다 못하오." "다행입니다. 스스로 못하다고 해 주시니. 진평과 주발은 고조 황제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장군 혹은 재상이 되었으며 여씨 일족을 주멸해 황족 유씨를 존속시켰습니다. 그러나 나리로 말씀 드리자면 강노(强弩)나 쏘는 무졸 출신으로 약간의 공을 쌓아 대장(隊長)으로 승진해 운이 좋아 회양군(淮陽郡: 江蘇省 淮陽縣의 남서)의 태수로 승진했던 것입니다. 그랬을 뿐 기발한 계략에 의한 공성(攻城)이나 야전에서의 군공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대국에서 상경하신 이래 조정에 나오실 적마다 낭관이 상주문서를 올리면 수레를 멈춘 뒤 그것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내용이 쓸 만하지 못하면 버리시되 쓸 만하면 반드시 채용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하의 현명한 사대부(士大夫)를 불러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로 폐하께선 날마다 들어 보지 못한 바를 듣고 알지 못한 바를 밝혀 성지(聖智)는 날로 더해가시는데, 나리께서는 자진하여 천하 사람의 입을 봉해 우매의 정도를 날로 더해가고 있으니, 무릇 총명한 군주가 우매한 재상을 견책할 날도 머지않은 듯싶습니다." 승상은 곧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사죄했다. "나는 미천한 시골 출신이라 사리를 잘 알지 못하니 부디 장군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면 다행이겠소." 신도가는 원앙을 인도해 대좌하면서 상객으로 우대했다.
원앙은 원래 조착(조조로도 발음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착이 있는 곳에서는 원앙이 나가고, 원앙이 있는 좌석에서는 조착이 역시 자리를 떴다. 그러니 두 사람은 한번도 같은 방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이 된다. 효문제가 붕어하고 효경제가 즉위하자 조착이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을 겸한 大法官)가 되었다. 그는 관계관에게 명해 원앙이 오왕한테서 재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조사 심리케 해 유죄로 판결해 버렸다. 그러나 황제는 조칙으로 원앙의 죄를 용서하고 서인으로 하는데 그쳤다. 그래도 조착의 원앙에 대한 미움은 집요했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반란소식이 들려오자 조착은 승(丞).사(史: 모두 어사대부의 속관)에게 말했다. "저 원앙은 오왕한테서 많은 금전을 받고 오로지 오왕의 죄상을 감추어 주면서 항상 '모반할 리가 없다'고 해 왔는데 지금 정작 오왕이 모반했지 않았는가. 폐하께 청하여 원앙을 취조하려 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계략이 드러날 듯하다." 승과 사가 난색을 표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원앙을 취조했다면 그들의 모반을 막을 수는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지금 반군(反軍)이 이미 서진하고 있습니다. 원앙을 취조한들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게다가 원앙 같은 인물이 모반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대들은 원앙을 비호하는가." "천만에요. 이미 그를 서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나리십니다." 조착이 어떻게 하든 원앙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부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원앙에게로 달려가서 조착이 모반 문제로 다시 취조하려 한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음! 그자가 한사코 나를 죽이려는구나. 그렇다면......!" 원앙은 급했다. 밤을 도와 두영을 만나 오(吳)가 모반한 원인을 설파했다. "무엇보다도 저를 폐하 앞에서 구두로 사정을 진술케 하도록 해 주십시오." "힘써 보겠소." 이튿날 두영은 서둘러 입조하여 황제에게 원앙의 청원을 아룄다. 이에 황제는 즉시 원앙을 입조케 했다. 원앙이 입조케 될 것이라고는 조착도 모르고 있었다. 원앙이 입조하자 무언가를 아뢰기 위하여 어전에 조착이 와 있었다. "폐하, 유씨 문중의 일과 관계가 있기로 사안이 미묘합니다. 원컨대 주위 사람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그러자 효경제는 조착까지 물러가게 했다. 원앙은 황제와 단 둘이 되자 오나라가 모반한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조착이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한 데 있었다는 사실을 소상히 설명했다. "지금으로서는 오나라의 반란을 중지시킬 방법은 하루빨리 조착의 목을 베어 사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오(吳)에 관한 기사(記事: <사기>의 <吳王妃 列傳>)중에 실려 있다]. 황제는 원앙을 태상(太常)으로 삼고 두영을 장군으로 삼는 전격적인 인사조치를 취했다. 두 사람은 본시 사이가 좋았다. 오가 모반하자 장안 주변의 제후 유지들, 일테면 여러 황제 능 주변으로 강제 이주된 호족 혹은 명문자제들이나 장안의 현명한 관리들도 다투어 두 사람을 따랐다. 그들 문전으로 모여드는 수레는 하루에도 수백 대나 될 지경이었다. 조착은 이미 주살되었다.
원앙이 태상의 자격으로 오나라에 사자로 갔다. 오왕이 그를 오군의 장군으로 삼겠다는 회유를 했으나 원앙은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를 죽이는 길밖에 없겠다." 도위(都尉) 한 사람에게 명해 5백 명의 군사로 그를 둘러싸고 감시케 했다. 속절없었다. 죽는 시간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전날 원앙이 오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였다. 종사(從史: 宰相의 屬官)이던 자가 원앙의 시비(侍婢)와 밀통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귀띔해 주어 원앙은 잘 알고 있었으나 입 밖에 내지 않고 종사를 종전대로 잘 대우해 주었다. 어떤 자가 종사에게 일러 주었다. "재상께선 자네가 그분의 시비와 밀통한 사실을 알고 계시네." 그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행위였다. 종사는 더럭 겁이 났다. 슬그머니 빠져 나가 고향으로 도망해 갔다. 원앙은 종사가 도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곧 직접 말을 타고 달려 종사를 붙잡아 다시 데려왔다. 그런 후 시비까지 그에게 주어 여전히 종사로 썼다.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전날의 바로 그 종사가 우연히도 원앙을 감시하는 교위사마(校尉司馬: 都尉의 副官)로 있었던 것이다. 전날의 종사 즉 사마(司馬)는 자신의 옷가지와 소지품까지 남김없이 처분해 2석(石)의 진한 탁주를 마련했다. 그런 후 자신의 담당구역인 남서쪽 모퉁이의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때마침 차가운 겨울날씨인데다 주리고 목말라 있을 때 마신 술이라 금세 깊이 취해 버렸다. 깨어 있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깊은 밤이 되어 사마는 원앙을 잡아 일으키면서 속삭였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오왕은 내일 아침에 당신을 벱니다." 원앙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의심스런 눈으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모르시겠습니까? 전날의 종사...... 나리의 시비와 밀통한 놈 말입니다." "오, 그대가!" "지금은 교위사마로 운좋게 당신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난 사양하겠네." "아니, 왜 그러십니까?" "내가 죽지 않으면 자네가 죽네. 자네에겐 다행히도 양친이 계시지 않은가. 난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걱정 말게." "그 일 때문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벌써 양친은 멀찍이 숨겼습니다.어서 도망이나 하십시오." 그래서 칼로 군막을 자르고 나온 사마는 원앙을 인도해 술취해 잠든 사졸 사이로 빠져 나왔다. "자, 여기서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원앙은 칙사의 증거로 받은 기(旗)와 절모(節毛)를 풀어 품 속에 감춘 뒤 깃대를 지팡이삼아 7, 8리쯤 걸었더니 날이 샜다. 곧 양나라 기병을 만나 그의 말을 빌려 타고 귀경했다. 오.초칠국 반란군이 격파되자 효경제는 다시 초(楚)의 원왕(元王) 유교(劉交: 高祖의 아우)의 아들 유예(劉禮: 平陸侯)를 초왕으로 삼고 원앙을 초의 재상으로 삼았다. 그 후 원앙은 자신의 의견을 황제께 상서했으나 간택되지는 않았다.
오랜 후 원앙은 신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 촌리의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함께 몰려다녔다. 닭싸움과 개달리기 등으로 한가롭게 세월을 보냈다. 낙양의 극맹(劇孟)이라는 사람이 원앙이 살고 있는 시골집으로 방문하고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원앙은 그를 극진히 대해 주었다. 그 일을 두고 안릉의 어떤 부호 한 사람이 원앙에게 이렇게 물었다. "들은 바로는 극맹은 사기도박꾼으로 소문이 나 있는 자인데 어찌 장군 같으신 분이 그런 자와 그토록 가깝게 사귀고 있으신지요?" "극맹이 비록 도박꾼이긴 하나 그의 모친이 별세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수레가 1천 대가 넘었소. 그의 삶이 어떻든 그것은 그에게 어떤 비범한 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니겠소. 인간이란 누구에게나 위급한 일이 있게 마련이오. 어떤 사람이 그의 집 대문을 화급하게 두드려 구원을 호소했을 때 그는 모친을 구실삼아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소. 그래서 사람들은 천하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사람은 계심(季心: 李布의 동생으로 협객임. <계포열전>에 그의 행적이 실려 있음)과 극맹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오. 지금 당신은 몇 명의 기병을 신변호위용으로 달고 다니지만 정작 당신한테 화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까짓 것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꾸짖듯이 대꾸한 원앙은 결국 그 부호와는 절교하고 말았다. 그 소문을 들은 뜻있는 인사들은 모두들 원앙을 칭송했다. 원앙이 비록 은퇴해 초야에 있었으나 효경제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자를 급파해 원앙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효경제의 아우 양왕(梁王) 유무(劉武)가 자진해서 황태제(皇太弟)가 되고 싶다는 의견을 효경제에게 올린 일이 있었다. 그 문제 역시 중요 사안이라 효경제는 원앙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원앙은 어느 날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저는 양왕한테서 돈을 받고 당신을 척살(刺殺)하러 왔습니다만 그냥 돌아가려 합니다. 관중으로 들어와 원앙의 사람됨을 물은즉 뜻있는 인사들마다 당신을 입으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칭찬합디다. 제가 비록 돈에 팔린 자객이지만 당신처럼 인덕있는 분을 어찌 척살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조심하십시오. 저 말고도 당신을 살해하려는 자객이 열 명은 더 들이닥칠 것입니다." 원앙이 그 말을 듣자 불안하고 심란해졌다. 더구나 집안에 기괴한 일들까지 속출했다. 우울하여, 유명한 점복가(占卜家) 배생한테로 가서 점을 쳤다. "정작 위험합니다!" 어떻게 위난을 피할까 궁리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릉의 성문 외곽에서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원앙은 그 날 거기서 죽었다.
조착은 영천(潁川) 출신이다. 그는 지현(河南省 濟源縣 남쪽)의 장회(張恢) 선생에게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앙)의 형명학(刑名學: 韓非子 등이 제창한 法治主義 學說)을 배웠다. 낙양의 송맹(宋孟)과 유예(劉禮)도 그의 동문이다. 조착은 학문이 능통하다 하여 태상(太常)의 장고(掌故: 太常의 屬官으로 故事를 담당)가 되었다. 사람됨은 준엄.정직.심각.비정.각박하였다. 효문제 시절에는 천하에서 <상서(尙書: 書經)>를 전공하는 자가 없었다. 진(秦)의 박사였던 제남(濟南: 山東省)의 복 선생(卜先生)만이 <상서>에 정통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나이가 90여 세여서 조정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상에게 조칙이 내려졌다. 누군가를 복 선생에게 파견해 배워 오라는 것이었다. 그 때 뽑힌 유학생이 조착이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조착은 유익한 정책을 상주할 때 <상서>를 인용하는 설득조의 논술을 사용했다. 조착은 조칙으로 황태자의 사인(舍人: 2百石)이 되었다가 문대부(門大夫: 봉록 6百石)로 올라 다시 가령(家令: 봉록 8百石)으로 승진했다. 그는 능변이었기 때문에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태자궁에서는 그를 지혜주머니로 칭송했다. 효문제 때 그는 가끔 글을 올려 제후의 영지를 삭감하는 법령 개정을 주장했지만 효문제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재능만은 기특하다 하여 중대부(中大夫: 궁중 고문관)로 승진시켰다. 즈음에 조착이 입안해 올리는 계책을 황태자는 무조건 찬성하였으나 원앙을 비롯한 공신.대신들은 거의 반대였다. 드디어 효경제가 즉위했다. 조착을 내사(內史: 首都圈 長官)로 삼았다. 주위를 물리치고 상주할 때마다 항상 채택되었다. 그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9경(九卿)들보다 더 했다. 법령은 거의 그에 의해서 개정되었다. 승상 신도가는 마음이 편치 못했으나 그를 능가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내사의 관부(官府)는 태상황(太上皇: 高祖의 父) 묘의 안쪽 담과 바깥담 사이에 있는데다 문이 동쪽으로 나 있어 출입이 불편했다. 이에 조착은 남쪽으로 또 하나의 문을 냈는데 이 때 태상묘의 담을 뚫은 것이다. 승상 신도가는 옳지 됐다 싶었다. 조착을 벌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회 때 입조해서 조착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청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을 조착이 먼저 알고 말았다.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그 날 밤 궁중으로 달려들어갔다. 조회 때 승상은 정사를 모두 상주하고 나서 드디어 묘원 문제를 꺼냈다. "폐하, 조착이 제멋대로 묘원(廟垣)을 뚫고 문을 냈습니다. 청컨대 정위(廷尉)에게 넘겨 주살하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대답했다. "그것은 묘의 담이 아니고 묘의 안쪽 담과 바깥담 사이에 있는 연중(묘의 內牆과 外垣 사이의 空地)이니 법에 저촉되지는 않는 것이오." "그렇다면 신이 사과드립니다." 조회를 마치고 승상부로 돌아온 승상은 장사(長史: 승상의 속관)에게 탄식했다. "아, 나의 잘못이다. 조착을 벤 후에 상주했어야 하는 것을! 그 놈에게 당했다!" 승상은 그 일로 인해 발병하여 죽었고, 조착은 이로써 더욱 존귀하게 되어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드디어 조착의 법령 개정작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제후가 죄를 범하면 그 영지를 삭감하고 봉토 주변의 군(郡)을 몰수할 것을 주청했다. 이 상주문이 올라오자 황제는 공경(公卿).열후(列侯).황족들을 소집해 심의케 했다. 감히 아무도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두영만이 이것을 문제삼고 나섰는데 그로 인해 조착과 두영 사이에는 큰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착이 개정한 법령은 30조(條)나 되었다. 천하의 제후들이 조착을 미워하면서 술렁거렸다. 조착의 부친이 이 소식을 듣고 영천에서 상경했다. "금상(今上) 폐하께서 즉위한 당초부터 네가 요로(要路)에서 실권을 잡고 제후의 영지를 삭감해 황족의 골육 사이를 네가 이간질한다고 들었다. 사람들의 말이 너를 원망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느냐."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의 존엄은 실추되고 종묘의 안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법령을 포기할 수는 없는가." "안 됩니다." "좋다. 네가 황실인 유씨는 안태롭게 만들지 모르나 우리 조씨(조氏)는 위태롭게 만드는구나. 나는 너를 버리고 돌아간다." 조착의 부친은 귀향하자마자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 이렇게 소리질렀다. "그놈으로 인하여 내 몸에 화가 미치는 것을 차마 볼 수는 없다!" 조착의 부친이 죽고 나서 10여 일이 지나서였다. 과연 오.초칠국이 반란을 일으켜 조착을 주살해 줄 것을 그들은 요구했다. 그것이 명목이기도 했다. 두영과 원앙이 자진해서 입조해 황제를 설득했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보아 조착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조회시에 조착에게 정장차림을 시켜 수도 동쪽의 저자에서 참형에 처했다. 조착이 죽고 알자복야(謁者僕야: 빈객 접대관) 등공(鄧公)이 교위(校尉)가 되어 오.초의 반란군을 쳤다. 등공은 장군으로 승진하여 돌아와 황제에게 군사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 때 황제가 물었다. "그대가 전선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이니 묻는다만, 그들에게 조착이 죽었다고 말했더니 과연 그들은 전투를 중지했소?" "오왕이 반역할 생각을 했던 것은 벌써 수십 년 전부터입니다. 영지를 삭감당한 데서 그 분노가 터지고 조착을 주살하는 것을 반란의 명목으로 삼았을 뿐이지 그들의 참뜻은 조착을 주살하는 데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걱정하는 바는 천하의 인사들이 조착이 처형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무는 일입니다. 다시는 감히 국사(國事)에 진언을 하지 않겠지요." "무슨 말이오?" "조착은 제후들이 강대하게 되어 제어할 수 없게 될 것을 근심한 나머지 제후 영지를 삭감해 국도(國都)의 권위를 높일 것을 꽤했던 것입니다. 만세의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지요. 그런데 이 계획이 실시되자 난데없이 오히려 조착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번 일은 안으로는 충신들의 입을 봉해 버리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수를 갚아 준 결과가 됩니다. 충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폐하를 위해서는 양책(良策)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효경제는 아무 말이 없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 옳소. 나도 후회가 되오." 등공을 성양의 중위(中尉)로 삼았다. 등공은 원래 성고(成固) 출신이었다. 기발한 계략이 많았다. 효무제(孝武帝)의 건원(建元) 연간에 효무제가 현량(賢良)의 사(士)를 초치하자 대신들이 등공을 추천했다. 그 무렵 등공은 관직에서 떠나 있었으나 무위무관에서 일어나 구경(九卿)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 년이 지나 다시 신병으로 사임하고 귀향했다. 그의 아들 등장(鄧章)은 황제(皇帝).노자(老子)의 학문을 공부하여 인사들 사이에서 이름이 드러났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원앙은 비록 학문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시의적절하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데에는 능하였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본질로 간직하면서 인도(人道)를 고수하는 기개가 넘쳐 흘렀다. 효문제가 즉위하면서 그 때를 맞추어 그의 자질이 시세에 맞아들어갔다. 그러나 시세는 변하고 바뀌어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하자 한차례 효경제를 설득해 조착을 처형시키는 자기 주장은 관찰되었다 치더라도 그의 반란 수습책이 성공적이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는 명예를 좋아하고 자신의 현명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그는 그 명예로 인해 죽었다. 조착은 가령(家令)이었을 적에는 자주 진언했어도 채택되지 못했다. 후일에 권력을 마음대로 하면서는 법을 변경하는 일이 많았다.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둘러 국난을 바로잡을 생각은 아니하고 원앙에게 사사로운 원한이나 갚으려다가 도리어 자신을 멸망시켰다. 옛말에 '고법(古法)을 변경해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자는 망하지 않으면 피살된다'고 했으니 바로 조착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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