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1 - 김병총
26. 자객열전 刺客列傳
조말(曹沫)의 비수(匕首)로 노나라는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고 제나라는 맹약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예양(豫讓)의 의로움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제26에 <자객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조말(曹沫)은 노나라 사람이다. 용기와 담력으로 노의 장공(莊公: B.C.693-662 在位)을 섬겼다. 장공은 용사를 좋아했다. 조말은 노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 싸웠으나 워낙 작은 나라인데다 중과 부적으로 세 번 사력을 다했지만 모두 패했다. 노나라 장공이 두려워하여 이에 수읍(遂邑: 山東省 寧陽縣 북서)의 땅을 바치고 제나라와 화친했다. 제나라 환공(桓公)은 노나라 장공과 가(柯:山東省 東阿縣 서쪽)에서 회맹할 것을 요구했다. [누가 과인과 동행하겠소?] 장공이 둘러보자 조말이 앞으로 썩 나섰다.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환공과 장공이 단상(壇上)에서 화친의 맹세를 하고 있었다. 환공은 강대국의 군주라 글 거만함이란 말할 수가 없었다. 말이 화친의 맹세이지 실상은 군주와 신하 사이의 모양세였다. 장공에 대한 환공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순간 조말이 단상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앗!]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이미 조말의 품 속으로부터 빠져 나온 단검이 환공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라도 가까이 오기만 하면 조말의 비수가 날카롭게 움직일 것 같은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피차간에 아무도 조말을 말릴 수가 없었다. 역시 환공은 대국의 군주였다. [그래서 그대는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제 말씀만 들어 주시면 됩니다.] [어떤 요구인가?] [제나라는 강대하고 노나라는 약소국입니다. 대국인 제나라가 노나라에 대하여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얼?] [노나라의 성벽이 무너지기만 하면 제나라 땅으로 떨어질 만큼 제나라 군사가 국경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우선 비수를 치우게.] [싫습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말씀드린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숙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왕에 빼앗은 노나라 땅을 돌려 주면 되겠는가?] [다시 한 번 크게 말씀해 주십시오.] [기왕에 빼앗은 노나라 땅을 돌려 주면 되겠는가!] [그렇게만 하신다면 화친의 맹세는 유효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단하로 내려가겠습니다.] 환공이 선언이 끝나자 조말은 비수를 던져 버리고 단에서 내려와 뭇신하들의 위치로 돌아가 조용히 북면(北面)하여 앉았다. 낯빛은 변함이 없었다. 조금 전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가만히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환공의 생각은 달랐다. 비수가 목을 바짝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빼앗은 땅을 돌려 준다는 식으로 말해 버린 상태였다. [저자를 죽이게!] 환공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몇 명의 칼잡이들이 칼을 뽑았으나 관중(管仲)이 한 발 먼저 나서서 손을 내저었다. [자네들은 가만히 제자리로 가서 지키고 있게.] 제나라의 칼잡이들이 물러가자 환공이 관중에게 말했다. [무슨 얘기요!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내뱉은 거짓 약속이 아니었겠소?] [안 됩니다. 그렇더라도 천하에 외친 약속이니 지키십시오.] [무어라고?] [소리(小利)를 탐내어 스스로 만족하신다면 천하 제후들에게 신의를 잃습니다. 분노에 얽매이지 마시고 크게 생각하십시오. 차라리 약속대로 땅을 주어 버리는 게 훨씬 유익합니다.] 환공은 관중의 말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빼앗은 노나라 땅을 흔쾌히 모두 돌려 주었다. 조말은 세 번 싸워 잃었던 노나라 땅을 한 순간에 되찾았다. 그로부터 167년이 지났을 때 오나라에서 전저(專저)의 사건이 일어났다.
전저는 오나라 당읍(堂邑: 江蘇省 六合縣 북쪽) 사람이다.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도망해 오나라로 갔을 때 만난 사람인데 그는 첫 눈에 전저가 유능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전저는 크게 등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오자서는 오왕 요(僚: B.C. 526-515 在位)를 만나 초나라를 쳤을 때의 유리한 점을 역설했다. 요는 오자서의 말을 듣고 초나라를 치려고 했으나 공자 광(光)이 반대하고 나섰다. [오원(伍員: 子胥)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어째서 그런가?] [오자서의 부친과 형이 모두 초나라에서 피살되었습니다. 그의 설득이 모두 그럴 듯하다 치더라도 실상은 자신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이지 오나라를 위해서 올리는 계책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가?] 그래서 요는 초나라를 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자서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나라의 국내 형편을 살펴보니 정세가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아직은 대외 문제를 설득할 때가 아니지. 참고 기다리며 두고 볼 일이다.] 그런 다음 오자서는 우선 공자 광에게 전저를 추천했다. 한편 광의 부친은 오왕 제번(諸樊: B.C. 560-548 在位)인데 제번에게는 세 아우가 있었다. 첫 아우가 여채(餘채: B.C. 547-544 在位)라 했고, 다음 아우가 이말(夷말: B.C. 543-527 在位)이었으며, 막내 아우가 계자찰(季子札:季子는 末子를 말함)이었다. 제번은 아우들 중에서 특히 계자찰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태자를 세우지 않고 순서대로 아우들에게 왕위를 전한 뒤 마지막으로 계자찰에게 왕위가 계승되도록 조처했다. 그렇게 되어 제번이 죽은 뒤 왕위는 여채에게 돌아갔으며 여채가 죽자 이말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계자찰이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려고 멀리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오나라에서는 별수 없었다. 고르고 골라 왕위는 이말의 아들 요에게 돌아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제번의 아들 공자 광은 은근히 불평을 품게 되었다. [형제의 순서대로라면 왕위는 당연히 계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순서가 이미 깨어져 버린 이상 왕위는 선대 왕의 아들인 나에게 돌아와야 할 게 아닌가. 진짜 적사(嫡嗣)는 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광은 오래 전부터 큰 일을 차곡차곡 준비했다. 우선 지모 있는 신하들을 양성해 수하에 두었다. 바로 전저가 수하들 중의 하나였다. 광은 전저를 빈객으로 잘 대우해 주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였다. 초나라에서는 평왕(平王)이 죽었다. [좋은 기회다. 초의 국상(國喪)을 틈타 쓸어 엎는다.] 오왕 요는 두 아우인 공자 개여(蓋餘)와 촉용(촉庸)을 시켜 병사를 이끌고 가 초의 첨(安徽省 곽山縣 북동)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연릉(延陵: 江蘇省 武進縣)의 성주(城主)로 만족하고 있던 계자찰을 사자로 진(晋)에 파견해 제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도록 했다. 초나라에서도 물론 군사를 출동시켰다. 그래서 오의 장군 개여와 촉용의 퇴로를 막아 버렸다. 일이 그렇게 되자 오군은 귀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절호의 기회인 것 같소. 왕위도 얻고자 해야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겠소? 왕의 진짜 후사로서의 명분이 내게는 있소. 설사 계자가 돌아온다 해도 이제 와서 기득권을 행사할 순 없을 게요.] 공자 광이 전저에게 의향을 타진하자 전저 역시 광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요를 죽이는 일이 그토록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친은 노쇠하고 그 아들은 유약하며 듬직하다는 두 아우는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나가 버린 데다 그 퇴로까지 차단했으니까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오나라는 바깥으로 초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안으로는 병력조차 텅 비어 있는 데다 왕의 수하에는 강직한 신하 역시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왕에게 어떻게 접근하지요?] [술자리를 마련해서 그를 초청하십시오. 거사의 세밀한 계책은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고맙소. 내 몸이 곧 그대의 몸이오.] 4월 병자일(丙子日)이었다. [심상치가 않습니다. 주연에 초청돼 가시는 일을 다시 한 번 고려하십시오.] 신하 하나가 요에게 간청했다. [걱정할 거 없소이다. 과인도 벌써부터 공자 광의 의도를 읽었소. 그래서 짐짓 나를 해치는 기회를 주는 척해서 오히려 이쪽에서 그를 처치하는 기회를 삼고자 하오.] [그렇지만 불안합니다.] [군대를 왕궁에서부터 시작해 광의 집까지 두 줄로 진치게 하면 설사 그 자가 어떤 생각을 품었더라도 질린 나머지 거사는 못 할 게 뻔하오. 더구나 광의 집 문과 계단 좌우에까지 내 친척들로 꽉 채울 작정이오. 그런 후 적당한 트집을 잡아 삽시에 광을 처치할 작정이오.] 초청연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험상궂은 칼잡이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듯 눈알을 부라리며 오왕 요를 술상 주위에서까지 경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를 해칠 수 있는 틈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다. 그렇지만 공자 광도 계획을 변경시킬 수가 없었다. 어차피 위험을 감지한 이상 애초의 계획대로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주연이 무르익어 갔다. 광은 손님 사이를 요란하게 움직이며 다니다가 일부러 실수한 척 넘어졌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발이 삔 것 같으니 금세 치료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런 후 광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날렵한 무장병들과 전저가 숨어 있었다. 광이 전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전저도 광에게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무장병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내가 연회장에 도착했을 것 같다고 짐작되는 순간부터 속으로 열을 센 뒤 달려나오게. 그리고 닥치는 대로 베어 버리게!] 전저는 주방에서 일하는 광의 집 사인 차림으로 쟁반에 큰 생선 요리를 든 채 요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왕 앞으로 접근한 전저는 물고기 뱃속에 숨겨 둔 비수를 전광 석화처럼 뺏어 들었다. [앗!] 왕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전저는 비수를 왕의 심장에다 꽂았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오왕 요는 즉사했다. 왕의 칼잡이들도 만만찮았다. 왕이 살해되는 간발의 차로 장검을 휘둘러 전저의 목을 쳤다. 연회장은 금세 혼란에 빠졌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지하실에 숨어 있던 무장병들이 달려나와 왕의 군사들과 신하들과 친척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요왕 일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몰살되었다. 그런 후 공자 광은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합려(闔閭)이다. 합려는 진저의 아들을 봉하여 상경(上卿)으로 삼았다. 그 후 70여 년이 지나고 진(晋)나라에서 예양(豫讓)의 사건이 일어났다.
예양은 진(晋)나라 사람이다. 본래는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 : 모두 晋의 卿)를 섬겼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거기서 떠나 지백(智伯: 晋의 卿)을 섬겼다. 그런데 지백은 예양을 유달리 존중하고 총우(寵遇)했다. 그런데 진나라 경(卿)들끼리 분쟁이 일어났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자 조양자는 한씨(韓氏: 康子)와 위씨(魏氏: 桓子, 모두 晋의 卿) 등과 힘을 합해 지백을 멸망시켰다. 그들은 지백의 자손까지 절멸시킨 뒤 지백의 영토를 삼분(三分: 나중에 각 姓氏로 독립하여 趙.韓.魏 즉 三晋이 되었다)했다. 조양자는 그래 놓고도 지백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지백의 가신인 예양도 온전할 수가 없었으므로 산중으로 도망했다. 그러면서 혼자말로 탄식했다. [아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한다. 지백은 나를 알아 주었으니 반드시 나는 지백의 원수를 갚고 죽겠다. 그렇게 지백에게 보답한다면 나의 혼백은 부끄럽지 않겠지.] 그 때부터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죄수처럼 가장해 다녔다. 그러다가 조양자의 궁중으로 들어가 뒷간의 벽을 바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언제나 품 속에 비수를 품고 다녔다. 기회가 오면 조양자를 찔러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루는 조양자가 뒷간으로 가는데 웬일인지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수상하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 조양자는 뒷간에서 벽을 바르고 있는 자를 붙잡아 심문했다. 과연 그는 예양이었고 가슴 속에는 단도가 숨겨져 있었다. [내 그대에게 무슨 원수진 일이 있기에 이러는가?] [지백을 위해 원수 갚으려 했을 뿐이다.] [무어?] 좌우의 부하들이 예양을 베어 죽이려고 했다. [가만! 그냥 두어라.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지백은 죽고 그의 후손조차 없는데도 그의 신하가 원수를 갚아 주려 하니 그야말로 천하의 의인 아닌가. 그대로 살려 보내라. 내가 그를 조심하여 피하면 된다.] 그래서 예양을 석방했다. 예양은 이번에는 온 몸에다 옻칠을 해서는 문둥이처럼 하고 다녔다.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며 거지 노릇을 했다. 그의 아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벗이 우연히 그를 알아보았다. [예양이 틀림없지?] [용케 알아보는군.] 벗은 눈물을 흘리면서 예양에게 충고했다. [그대만한 재능을 가진 자가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고 조양자를 섬긴다면 그는 반드시 그대를 가까이 두며 총우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원 성취할 기회가 훨씬 쉽게 올 텐데. 하필 상처 입어 변한 모습으로 어렵게 양자에게 보복하려드니 이건 어리석은 방법일세.] [그렇지가 않네. 물론 내가 선택한 방법이 어렵다는 건 아네. 그렇지만 이미 신하의 예를 갖추고 사람을 섬기면서 한편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일은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일과 같네. 그래서 굳이 복수를 어렵게 하려는 이유는 후세에 사람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고 그 주군을 섬기는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일세.] 그러면서 예양은 친구 곁을 떠나갔다. 얼마 후 조양자가 다시 외출을 했는데 다리에 다다르자 수레를 끌던 말이 몹시 놀라며 지나가지 않으려 했다. [다리 밑을 뒤져 보아라. 누군가가 있다!] 과연 거지 하나가 잡혀 나오고 그의 몸에서 비수까지 나왔다. [그대는 예양이 틀림없겠다!] [운이 없어 오늘도 그대를 죽이지 못하는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그대는 전날 분명히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었지?] [그랬었다.] [지백이 그들을 모조리 멸망시켰는데도 그대는 그들 둘을 위해 원수를 갚기는커녕 오히려 지백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어 그를 섬기지 않았는가.] [그대로이다.] [그대의 짓거리가 모순되지 않는가. 지백 또한 이미 죽었는데 굳이 그대가 지백을 위해서만 원수 갚으려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분명 나는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대접했다. 그래서 나도 그들에게 보통 인간으로 보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 한 나라에서 특별히 높이는 우수한 선비)로 대우했다. 그래서 나는 국사로서 그를 보답하고자 하는 바이다.] [아아, 예자(豫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절을 다했다는 명예는 이미 얻었다. 그리고 과인이 그대를 용서하는 일도 한계에 이르렀다. 어쩌겠나. 과인은 이번에야말로 그대를 놓아 보낼 수가 없는 걸.] 그러면서 병사들을 시켜 예양을 포박하게 했다. 그러자 예양은 공손하게 꿇어앉으며 부탁했다. [제가 듣기로는 '명군은 남의 아름다움을 덮지 않으며, 충신은 명절(名節)에 죽는 의리를 잊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전날 주군께서 저를 너그러이 용서하여 천하의 현군임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이다. 물론 오늘 저는 죽음을 혼쾌히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제발 주군의 의복 한 벌만 제게 내려 주십시오.] [그건 가져서 무얼 하게?] [옷이라도 베어 원수를 갚는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감히 바랄 바가 못 되는 줄 알면서도 제 심중의 말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대의 생각이 옳다.] 그래서 조양자는 사자를 시켜 자신의 옷 한 벌을 가져다 예양에게 주게 했다. 예양은 양자의 옷을 향해 칼을 들고 세 차례씩이나 뛰어오르며 내질렀다. [이제는 속이 시원한가?] [이로써 지하에 잠든 지백께 아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예양은 자신의 비수에 엎드려 자살했다. 예양이 죽던 날 조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이 그 일을 전해 듣고 모두 그를 위해서 울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 지(河南省 齊源縣 남쪽) 땅에서 섭정(섭政)의 사건이 일어났다.
섭정은 지 땅 심정리(深井里) 출신이다. 사람을 죽이고 그 원수를 피해 모친과 누님과 함께 제나라로 가서 백정 노릇을 하며 살았다. 복양(山東省 복陽 동쪽)의 엄중자(嚴仲子)가 한(韓)나라 애후(哀侯: B.C. 376-371 在位)를 섬기다가 한의 재상 겹루(겹累)와 사이가 나빠졌다. 엄중자는 주살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그리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며 대신 원수 갚아 줄 인물을 물색했다. 제나라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엄중자에게 섭정을 귀띔했다. [섭정이라는 용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한번 부탁해 보시지요. 그는 지금 원수를 피해 백정들 사이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중자는 섭정의 집으로 찾아가 교제를 청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엄중자는 주연을 베풀어 황금 백일(百鎰: 약 38킬로그램)을 받들고 술잔을 섭정의 모친에게 올려 축수했다.섭정은 깜짝 놀랐다. 너무도 예물이 후했다. 이상한 생각도 든 것이다. [사양하겠습니다. 비록 가난해 객지로 떠돌면서 개백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만 조석으로 어머니께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봉양할 정도는 됩니다. 구태여 당신의 선물은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제서야 엄중자는 사람을 물리친 뒤 정색을 하고 말했다. [실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한테는 원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 원수를 갚아 줄 인물을 찾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다가 제나라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 와서 당신의 의기가 매우 높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금을 바쳐 어머님의 음식 비용에나 쓰시게 해서 당신과 사귀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감지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뜻을 낮추고 몸을 숙여 시장 바닥에서 백정 노릇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노모가 계시는 한 제 몸을 남에게 바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효성이 저를 감동시킨 것입니다. 부담 느끼지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아닙니다. 성의는 고맙지만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섭정은 한사코 예물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엄중자와의 예를 다한 교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섭정의 모친이 죽었다. 이미 장례도 치렀고 상복도 벗었다. 그제서야 섭정은 전날 엄중자와의 일을 생각했다. [나는 일개 시정 잡배처럼 칼을 휘둘러 개.돼지 도살이나 하고 살아가는 보잘것 없는 몸이다. 그런데 엄중자는 제후의 경상(卿相) 신분으로 천릿길도 멀다 않고 수레 몰아 찾아와 나 같은 사람과 사귀었다. 비록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백금을 들어 어머니의 장수까지 축복해 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위해 해 준 일이 아무것도 없다. 엄중자 같은 현인이 격분하여 원수를 쏘아보면서 궁벽한 촌놈인 나를 친밀하게 신뢰해 주었는데도 말이다. 전날 엄중자가 내 몸을 요구했을 때는 노모가 살아 계셔서 그것을 사양했으나 이제는 나를 알아 준 그 분을 위해 무언가를 나서 볼 일이다.] 섭정은 단신 서쪽 복양으로 가서 엄중자를 만나 말했다. [이제는 홀가분한 몸입니다. 당신의 원수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내 원수는 한나라 재상 겹루입니다. 그는 왕의 숙부이기도 하며 일족의 세력들이 강대하고 숫자도 많아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거처 역시 엄중 호위되고 있지요. 내가 사람을 시켜 겹루를 척살(刺殺)하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다행히 나를 버리지 않고 찾아와 주었으니 거사가 성공될 수 있도록 가급적 많은 거기(車騎)와 장사(壯士)들을 동원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한나라 국도 양책(河南省)은 이 곳 위(衛)나라 수도 복양에서는 별로 멀지 않습니다. 더구나 왕의 숙부인 재상을 죽이려는데 그런 요란스런 행차는 오히려 일을 어렵게만 만들 뿐입니다. 많은 인원을 사용하다 보면 생포되는 자가 생길 것이고 생포되면 그 입에서 배후자가 누설되게 마련입니다. 그럴 경우 한나라 전체가 당신을 원수로 볼 테니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와 장사들을 모두 사양한 섭정은 지팡이 속에다 칼을 숨긴 채 단신 한나라로 떠났다. 한나라 재상 겹루는 마침 관부(官府)의 당상에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수많은 호위병이 눈을 빛내며 늘어서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무심한 척 접근해야 한다.] 섭정은 겹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무어냐!] [감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주위에 사람을 물리쳐 주십시오.] [내가 네 놈을 어떻게 믿고 사람을 물리쳐.] [그렇다면 믿도록 해 드리지요. 이렇게!] [악!] 섭정은 지팡이 속에서 칼을 빼면서 그대로 겹루를 베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래서 수많은 호위병들도 손쓸 새가 없었다. 겹루는 쓰러지고, 칼을 빼든 호위병들이 왁작 달려왔다. 섭정은 소리치며 다가오는 수십 인의 호위병들을 쳐 죽였다. 중과 부적이었다. 도망칠 틈 역시 보이지가 않았다. 섭정은 그 혼란의 틈새에게 칼로 이마를 그어 자신의 낯가죽을 벗겨 버렸다. 두 눈까지 도려낸 뒤 삽시에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고는 죽어 버렸다. 그러니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한나라에서는 살인자의 정체를 알려고 혈안이 되었다.
- 재상 겹루를 살해한 자의 정체를 알려 주는 자에게는 천 금을 내리리라.
시체를 시장 바닥에 드러내 놓고 상금을 걸어 포고문을 띄워도 누구 하나 신원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섭정의 누나가 섭영(섭榮)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의 시체가 한나라 시장 바닥에 방치 되어 있다는 소문을 섭영은 들었다. [틀림없이 그는 내 동생일 것이다. 엄중자가 과연 내 동생을 알아 주었구나!] 섭영은 곧바로 한의 시장 바닥으로 갔다. 죽은 자를 보니 과연 동생 섭정이었다. 섭영은 죽은 동생의 시체 위에 엎드려 슬피 울며 말했다. [이 사람은 지 땅 심정리의 섭정이라는 사람입니다.] 시장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당신 지금 정신 있소? 이 자의 정체를 알려고 천 금을 걸어 찾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겁도 없이 이 자를 잘 안다고 하고 있으니!] [물론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내 동생 섭정이 시장 바닥에다 오욕을 무릅쓰고 몸을 굴린 것은 늙으신 어머니와 시집 가지 않은 누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가 천수를 다 누리고 돌아가신 데다 저도 시집을 갔습니다. 엄중자는 동생의 인물됨을 통찰하여 곤궁하고 오욕스런 환경에 살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교제해 주셨으니 그 은택이 도타웠다고 하겠습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 동생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스스로 만든 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누나를 생각해서이지요. 연좌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찌 제가 사형이 두려워 아름다운 동생의 이름을 숨기는 일을 하겠습니까.] 시장 사람들은 섭영의 말에 더욱 놀랐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가슴이 터지도록 세 차례 슬피 소리 지르더니 섭정의 옆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진(晋)나라, 초나라, 제나라, 위(衛)나라에도 이 소문이 퍼져 나갔다. [섭정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누님 또한 열녀로구나! 만약에 섭정이 참으로 자기 누나가 참고 견디는 성격이 아니고 시체가 아우임을 폭로하는 두려움도 생기지 않고 천릿길을 달려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함께 시장 바닥에서 죽게 될 것을 알았다면 아무리 섭정이라도 엄중자에게 몸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엄중자는 사람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그런 용사의 마음을 잘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220여 년이 지나 진(秦)에서는 형가(荊軻)의 사건이 일어났다. 형가라는 인물은 위(衛)나라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제(齊)나라 사람이었으나 형가 때 위나라로 이주해 왔다. 위나라 사람들은 형가를 경경(慶卿)이라 불렀다. 그 후 또 연(燕)나라로 갔더니 사람들이 그를 형경(荊卿)이라 불렀던 것이다. 형가는 학문이 길고 격검도 좋아한 문무 겸전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가지고 위나라 원군(元君: B.C. 251-230 在位)에게 유세했으나 등용되지 못했다. 그 뒤에 진나라가 위(魏)를 쳐서 동군(東郡)을 두고 원군 일족을 야왕(野王: 河南省 派陽縣) 땅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있었다. 형가가 일찍이 떠돌아다니다가 유차(楡次)를 지날 때 갑섭(蓋섭)이라는 검객과 검술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이놈아, 그걸 검술이라고 떠들어? 네가 그토록 칼 쓰는 재주가 있다면 어디 나한테 한 번 대들어 보시지!] 갑섭이 화를 펄펄 내자 형가는 맞상대하기는커녕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갑섭의 친구가 달랬다. [형가의 검술 이론도 일리는 있다네. 공연히 화를 내서 그를 쫓아 보낼 게 뭐람.] [그놈은 겁쟁이일세.] [어째서?] [엉터리 이론에 떠벌리기만 하고 실상은 실력도 없다네.]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대목도 있던데.] [그렇게 생각되더라도 때는 이미 늦었어. 그 자는 영영 가 버렸다니까.] [어디루?] [좌우지간 멀리.] [설마.] [전에도 그 자와 검술을 논하다가 얼토당토 않은 이론을 전개하길래 노려보며 화를 냈더니 슬그머니 도망쳐 버리더군.] [이상한 사람일세.]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람을 시켜 다시 불러 오게 했더니 역시 그는 수레를 몰아 떠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정작 이상한 인물이네!] 형가가 한단에서도 검객 노구천(魯句踐)과 장기를 두며 놀다가 한 수 물러 달라 안 된다 하며 다투게 되었다. 역시 노구천이 화를 내며 장기판을 뒤집어 엎자 형가는 내색도 없이 조용히 일어나 도망쳐 버렸다. [참으로 속셈을 알 수 없는 인물일세.] 그 뒤 형가는 연나라로 가서 축(筑: 비파 비슷한 竹製樂器)을 기막히게 잘 타는 개백정 고점리(高漸離)와 어울렸다. 어쩐지 죽이 맞았던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형가는 날마다 시장 바닥에서 술을 마시며 고점리와 겔겔거렸다. 술이 얼큰해지면 고점리가 타는 축의 장단에 맞추어 시장 복판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서로 즐기며 떠들며 엉엉 울기도 하면서 옆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굴었다. 그렇지만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듯이 많은 현인과 호걸 장자(長者)들이 그를 잘 대우했다. 비록 떠돌이지만 형가의 침착한 성품과 학문의 깊이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연나라의 처사(處士: 在野人士) 전광(田光)이 형가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유달리 우대하였다. 때마침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와 있었다. 일찍이 태자 단이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진왕 정(政)도 조나라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소꿉친구로 단과는 아주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정이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자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자청한 것이었다. 강국 진나라의 왕으로 등극한 친구에게 과거의 정분을 내세워 연나라를 보호하려는 계략이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단의 계산은 전연 잘못이었다. 진왕은 단에 대하여 안면을 완전히 바꾸고 있었다. [과거에 친구라고 해서 국익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왕의 선언이었다. [의리를 배신하는 자는 금수와 같다. 난 그대를 전에 홀대한 일이 없거늘 연나라가 작고 힘이 없다 하여 이토록 구박하고 위협까지 하는가. 어디 두고 보자. 이 원수는 반드시 갚으리라!] 생명의 위험까지 느낀 단은 즉시에 진나라로부터 도망쳐 나왔던 바였다. [저토록 탐욕스러운 자는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나를 적으로 본다면 나 역시 네 놈을 친구로 생각지 않으리!] 단은 원수 갚을 길을 곰곰 모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그러나 생각뿐이었지 실행할 방법은 없었다. 진나라는 야금야금 천하를 먹어 들어오고 있었다. 산동(山動)에 출병하여 제나라 초나라 삼진(三晋)을 잠식했다. 기어코 연나라에 접하게 되었다. 연나라 왕과 신하들은 곧 미칠 화(禍)를 두려워하여 전전 긍긍했다. 태자 단도 걱정이 되어 태부(太傅)인 국무(鞠武)에게 물었다. [진나라를 먼저 뒤집어 엎을 방도는 없겠소?] [어림없습니다. 진나라는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으로는 감천산(甘泉山: 陜西省 渟化縣 북서)과 곡구(谷口: 陜西消 涇陽縣 북서)의 험한 요새를 끼고 있습니다. 남으로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육역의 비옥한 땅을 안고 있는 데다가 파(巴)와 한중(漢中)의 풍요로움까지 독차지했습니다. 우측에는 농(농: 甘肅省의 남동).촉(蜀)의 산악 지대와 왼쪽의 험준한 함곡관과 효산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백성은 많고 용사는 사나우며 무기와 장비 역시 넉넉합니다. 진나라가 쳐들어올 생각만 있다면 우리 장성(長城)의 남쪽, 역수(易水)의 북쪽 땅 연나라쯤은 삽시에 무너집니다. 어찌 태자께서 한때 능멸을 당했다 하여 진왕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려 하십니까. 불안한 대로 태자께서는 진왕과 정의(情誼)를 유지하고 있으니 한때의 원한은 푸십시오.] [정작 원수 갚을 방법이 없겠단 말이오?] 공교롭게도 얼마 뒤 진나라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해 왔다. 태자는 그를 반겨 정중히 대접하였다. 국무가 다시 간했다. [아니 되십니다, 태자. 저 포악한 진왕이 연나라에 대해 쌓을 분노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지명 수배된 번 장군이 연나라에 숨어 잘 대접받고 있다는 소문이 진왕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굶주린 호랑이가 나다니는 길목에다 고기를 던져둔 것과 같은 격이 아니겠습니까? 화를 자초하는 조처입니다. 비록 관중(管仲)과 안영(晏영)이 살아 있더라도 이것만은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겠소?] [태자께서는 한시바삐 번 장군을 흉노 땅으로 보내십시오.] [흉노 땅으로?] [진나라에게 트집잡힐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청컨대 서쪽으로 삼진(三晋)과 맹약을 맺고 남쪽으로는 제나라.초나라와 연합하여 북쪽으로는 흉노의 추장 선우(單于: 흉노의 王)와 강화하십시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진나라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가 있게 됩니다.] [나라의 존립이 풍전 등화 같고 내 심정 역시 울울 분기하여 잠시도 머뭇거릴 수가 없소. 태부의 계책은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릴 뿐 아니라 그런 책략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소. 더구나 번 장군은 천하에 한 몸 둘 곳이 없어 나한테 몸을 맡겨 온 사람이오. 내가 강한 진나라한테 협박을 받는다고 해서 애련한 교정(交情)을 저 버려 그를 흉노 땅에다 내몰 수야 있겠소. 그것은 인간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처사요. 내 운명이 다하는 날에나 그렇게 될 것이니 태부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마오.]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편안함을 찾고 화를 만들면서 복을 구한다면 결국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은 깊어 갈 뿐입니다. 뒷전으로 미뤄야 할 사람과 교제에 얽매어 국가의 커다란 피해를 돌보지 않는다면 상대의 원한을 돋우고 자기의 재앙을 조장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뒤엎는 일은 기러기의 가벼운 털 하나를 화로의 숯불 위로 태우는 것처럼 아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독수리나 매 떼같이 탐욕스럽고 사나운 진나라가 원망에 찬 노여움을 터뜨린다면 그 결과는 두말 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렇게 몰인정하고 잔인한 처사에 동의할 수가 없소.] 한동안 입맛을 쩍쩍 다시고 있던 국무가 눈을 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궁한즉 통한다더니......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묘책이 있겠소?] [가까운 곳에 영명하신 처사(處士: 在野人士) 전광(田光) 선생이 계십니다.] [그 분이 그토록 현명하오?] [만나 보시고 의논을 청해 보십시오.] [다급한데 여부가 있겠소. 데려오시오.] [아니 됩니다. 심원하고 용기 있고 침착한 분의 지혜를 빌리려는 마당에 그런 식으로는 불가합니다. 그래 가지고는 오지도 않습니다.] [알겠소. 내가 직접 찾아가 뵙겠소.] 결국 태부 국무의 주선으로 태자 단은 전광을 만나게 되었다. 태자는 전광을 나아가 맞고 뒷걸음으로 인도하여 무릎을 꿇고는 전광이 앉을 자리를 깨끗이 털었다. 단 둘이 마주 앉았을 때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태부의 주선이 있었습니다. 태자 단은 전광 선생과 사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실 건지요?] [삼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과 나라일을 의논하고 싶습니다.]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미력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우리 연나라는 진나라와 함께 설 수가 없습니다.] [그 문제라면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준마도 혈기 왕성할 때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쇠하면 하등마(下等馬)가 앞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태자께서는 저의 젊었을 적의 행적만 듣고 정력이 다한 지금 국사를 의논하려 하십니다.] [너무 겸양치 마시고 훌륭한 계책을 들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계책은 제가 마련할 게 아니라 그에 적합한 사람이 마련할 것입니다.] [선생이 아니라면 누구십니까?] [형경(荊卿)을 추천합니다.] [형경이라면 어떤 분이십니까?] [지혜는 심오하며 칼놀림 또한 전광 석화 같습니다.] [그러시다면 한시바삐 그 분을 소개시켜 주십시오.] [삼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태자는 대문께까지 나가다가 문득 되돌아와서는 전광에게 굳이 귓속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선생과 오늘 나눈 대화는 국가의 중차대한 기밀입니다. 굳이 누설치 말아 주십시오.] 전광은 잔잔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형가가 내일 일찍 태자를 찾아가 뵙도록 조처를 취해 놓겠습니다.] 구부정한 등의 전광은 노구를 질질 끌며 곧장 형가한테로 찾아갔다. [형가.] [예에.] 평소에 전광을 존경하는 형가는 조신한 태도로 마주 앉았다. [내가 그대와 친하다는 사실은 연나라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렇습니다. 하온대, 새삼스럽게.......] [태자께옵서 이 노구를 찾아오셨소.] [태자께옵서?] [나라 걱정으로 심신이 말씀이 아니었소.] [좋은 계략이라도 가르쳐 드렸습니까?] [태자가 나의 혈기 왕성할 적의 행적만 듣고 황망히 찾아오셨더이다. 한데, 계교는 있으나 실행이 어렵겠소이다.] [무어라 말씀하십디까?] [연나라와 진나라는 함께 설 수 없다고 했소.] [원한이 사무쳤던가 봅니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추천했소.] [예에?] [그대가 직접 궁으로 태자를 찾아가 보오.] [삼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한데, 내가 듣기로는 덕 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남에게 의심을 품게 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소.] [그런 줄 압니다.] [그런데 태자는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나눈 대화는 나라의 막중한 기밀에 속하니 부디 누설치 말아 주시오 하고 부탁했소.] [선생께서는 기밀을 흘린 분이 아니시라는 걸 저는 압니다.] [어찌 되었건 태자의 말씀은 어차피 나를 의심한다는 뜻이었소. 모종의 일을 수행할 때 남에게 의심을 산다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인간의 행동은 아닐 것이라 믿소.]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내 평소의 행동이 남에게 신의를 주지 못했는가 보오. 그대는 내일 아침 태자를 찾아가 전광은 이미 죽었다고 전해 주시오.] [그건......!] [이미 내가 비밀을 누설치 않았다는 뜻이오.] [하지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전광은 품 속에 지니고 있던 단검을 꺼내어 말릴 틈도 없이 제 목을 찔러 버렸다. 이튿날 형가의 말을 전해 들은 태자는 대경 실색했다. [아,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전 선생께 부질없는 주의를 드린 것은 나라의 중대사를 성공시키기 위한 충정 때문이었을 뿐이오. 전 선생이 죽음으로써 비밀을 누설치 않았다는 결의를 보일 줄은 어디 꿈엔들 알았겠소이까! 전연 나의 본심이 아니었거늘......!] 담담한 표정으로 형가가 가만히 앉아 기다리자 태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형가에게 절한 뒤 입을 열었다. [전광 선생께선 그토록 어리석은 나한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소이다. 이는 하늘이 연나라를 불쌍히 여긴 증거로 아오. 지금 진나라의 탐욕은 끝이 안 보이오. 천하의 제왕들을 제 신하로 삼으려 하오. 이미 한왕(韓王)을 사로잡아 그 영토를 모두 거두어들였으며 남쪽으로 초나라를 치고 북쪽으로는 조나라에 들이닥쳤소이다. 왕전(王전)이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장수(長水)에서 업(업)까지 조나라 군대와 싸우며 이신(李信)도 태원(太原)과 운중(雲中)으로 출병했소이다. 조나라는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해 진나라의 신하가 되고 말 것이오. 조나라가 진의 신하가 되면 그 재앙은 곧 연나라에 미칠 것이오. 약소한 연나라는 이제까지 여러 차례의 전쟁에 시달려 왔소이다. 이제는 모든 국력을 다 모아도 진나라를 당해 낼 방법이 없소이다. 제후들이 이미 진나라에 복종하였기로 우리와 합종하려는 나라도 없소이다.] [그리하였기로 전광 선생께선 어떤 계략을 주셨습니까?] [명민하고 날렵한 천하의 용사를 얻어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라 했소.] [커다란 이익을 미끼로 내걸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진왕이 탐을 낸다면 우리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소.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진왕을 위협해 옛적 조말(曹沫)이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했던 것처럼 빼앗은 땅을 제후들에게 진이 다시 돌려 주도록 만들게 한다면 금상 첨화라 했소이다.] [참으로 좋은 계략인 듯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나라는 크나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진의 장군들이 바깥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으므로 욕심이 생길 것이니 전 선생께선 그 점을 노린 말씀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소이다. 그 틈에 제후들이 합종하여 진을 깨뜨릴 수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 선생께선 목숨을 내던질 용사가 누구라는 건 가르쳐 주시지 않았소이다. 오로지 형경하고만 의논하라는 말씀이 있었소.] 태자를 통해 전광의 부탁을 감지한 형가는 상체를 곧추세운 뒤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토록 막중한 사명을 미력하오나 신이 감당하겠습니다.] 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형가한테 절했다. 태자는 형가의 직위를 높여 상경(上卿)으로 삼고 상등 관사에 머물게 하여 태뢰(太牢: 본래는 나라의 제사에 쓰는 음식으로 소.양.돼지 등으로 된 고급 요리)를 대접하고 비싼 물건들을 구비해 주고 이따금 수레와 말과 아름다운 여인들을 제공해 형가의 장거를 격려했다.
그럴 동안 진의 장군 왕전이 조나라를 깨뜨리고 조왕을 사로잡았다. 영토까지 접수한 진군은 북으로 치달려 드디어 연나라 남쪽 변방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태자는 두렵고 초조했다. 형가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 군대가 역수(易水)를 건너서는 순간 나로서는 형경의 쾌거를 부탁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되겠소이다.] [하오나 신이 떠나려 해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 준비물이란 게 무엇이겠소.] [번오기 장군의 목과 연나라 옥토 독항(督亢: 河北省 탁縣 남동)의 지도입니다.] [독항의 지도는 모르겠으되 번 장군의 목은 아니 되겠소이다.] [그래요? 그렇다면 조금 더 시일을 두고 차선책(次善策)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차마 번오기의 목을 베 수 없다는 태자는 속마음을 알아차린 형가는 몰래 번오기를 찾아갔다. [번 장군, 진나라가 장군과 가족에게 가한 참혹한 처우는 가히 몸서리가 쳐집니다. 과거의 공적은 눈꼽만큼도 참작하지 않고 죄없는 부모 처자 일가족까지 몰살시키다니요!] [어떻게 하여야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인지를 몰라 매일 매시가 앙앙 불락(怏怏不樂)입니다.] [듣건대 번 장군의 목에다 황금 천 근과 식읍 만 호를 내걸었다지요?] [저는 어떻게 하여야 좋을까요?] [원수를 갚아야 하지요. 저한테는 연나라의 걱정거리를 없애고 동시에 번장군의 원수도 갚을 수 있는 계책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복수의 방법만 있다면 무슨 계책인들 경청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장군의 목을 제게 주십시오.] [예에?] [진왕에게 바치려고 합니다. 그는 몹시 반가워하며 필시 저를 만나려고 할 것입니다. 그 때 기회를 잡아 왼손으로는 그의 옷소매를 붙들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찌르겠습니다.] 번오기는 잠깐 생각한 뒤에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한 뒤에 말했다. [아, 이제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가슴 태우던 숙제가 풀렸습니다. 귀중한 가르침을 주셔서 그 고마움 이루 형용할 길이 없습니다.] 번오기는 형가한테 절한 뒤 스스로 자신의 목을 칼로 찔러 죽었다. 태자는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 번오기의 시체에 엎드려 통곡했다. 형가가 말렸다. [태자께서는 큰 일을 위하여 작은 일에 고정하십시오.] 마음을 다져 먹은 태자는 서둘렀다. 번오기의 목을 썩지 않도록 상자에 넣어 봉했다.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다는 서부인(徐夫人: 趙나라 男子 刀匠의 이름)의 비수를 백금(百金)을 주고 사들였다. 칼날에 독약을 묻혀 죄수를 찔러 보게 했더니 한 오라기를 적실 정도의 상처에도 사람이 죽었다. 연나라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죄수가 있었다. 나이 열셋에 벌써 사람을 여럿 죽인 표독한 인물이었다. 그의 악독함을 겁내어 사람들은 그를 얼핏 쳐다보는 일조차 두려워했다. [살아 돌아오면 네 죄를 탕감해 주겠다. 못 돌아오더라도 네 가족에게 식읍을 제공해 주겠다.] 그렇게 되어 진무양은 형가의 부사(副使)가 되었다. 드디어 형가 일행은 장도에 올랐다. 그들의 장렬한 의거(義擧)를 짐작하고 있는 빈객들은 흰 옷을 입고 흰 관을 쓴 상복차림으로 그들을 전송했다. 역수 가에 이른 형가들은 도조신(道祖神: 行人을 보호하는 神)에 제사 지냈다. 고점리가 거기까지 따라와 축을 탔고 형가가 화답하여 노래를 불렀다.
바람소리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워라 장사(壯士)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변치(變徵: 音에는 宮.商.角.徵.羽의 五音이 있고 치와 우에는 변음이있다. 변치음은 슬픈 소리)의 소리를 내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다시 우성(羽聲: 격앙 용장한 羽調의 소리)으로 노래 부르자 비분강개를 느낀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으며 그 통에 치솟은 머리카락이 관을 찔렀다. 형가들은 수레를 타고 떠났고, 그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천금이나 되는 뇌물을 진왕의 총신(寵臣) 중서자(中庶子: 宮內府大臣) 몽가(蒙嘉)에게 바치며 진왕의 알현을 부탁했다. 계획은 잘도 맞아 들어갔다. 우선 몽가가 진왕한테 말했다. [연왕은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우리 군대에 맞서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대왕의 신하되기를 원했습니다. 제후의 열에 참여하여 공물 바치기를 우리 나라의 한 고을처럼 하면서 연나라 선왕(先王)의 종묘나 지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삼가 번오기의 목을 베어 독항의 지도와 함께 바치려고 함에 넣어 봉해 왔습니다. 마침 사자(使者)가 와서 대왕께 저간의 사정을 아뢰고자 하고 있으니 대왕께서 한 번 인견하시겠습니까?] 진왕은 몽가의 설명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를 위하여 짐이 조복을 갖추어 입고 구빈(九賓)의 예(禮: 周禮의 九儀, 아홉 가지 賓客을 迎接하는 최고의 儀禮)를 베풀겠다.] 형가는 함양궁(咸陽宮)에서 진왕을 인견하게 되었다. 형가가 번오기의 목이 든 함을 받들었고 진무양이 지도가 든 갑(匣)을 받들어 진왕이 버티고 있는 궁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 진왕의 옥좌가 보였다. 그런데 형가는 내심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 죽이기를 파리목숨 다루듯 하던 진무양이 경비의 삼엄함에 사뭇 놀랐는지 얼굴빛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 역시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일을 그르칠라. 침착하게나!] 그렇게 귀띔을 했는데도 진무양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옥좌가 있는 전(殿)의 계단 아래에 이르렀을 때였다. 진무양이 사정없이 떨고 섰으니 진왕이나 중신들이나 경비병들도 괴이쩍게 여기며 더욱 경계의 눈초리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형가가 얼른 나섰다. 진무양을 일별한 뒤에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자는 북방 오랑캐 땅에서 살던 비천한 인간이라 천자(天子)의 용안(龍顔)을 뵌 적이 없습니다. 다만 대왕의 위엄에 떨고 있을 뿐이니 무례를 용서하시고 어전 사명을 무사히 다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진왕이 별 의심없이 말했다. [거기 떨고 섰는 자가 가지고 있는 지도부터 가지고 오라.] 그래서 형가가 얼른 진무양의 갑을 받아들고 진왕 앞으로 나아갔다. 근처에는 진왕과 형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진왕은 천천히 지도를 펼쳐 들었다. [이 옥토를 바친다는 말이지.......] 진왕의 심술궂은 입술에 기분 좋은 웃음이 함지박만큼씩 퍼져 나갔다. [이 순간을 노려야 한다!] 형가는 긴장했다. 진왕은 지도를 천천히 펼쳐 나갔다. 기어코 두루마리 지도는 모두 펼쳐지고 마지막으로 숨겨졌던 비수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전광 석화처럼 비수를 집어 든 형가는 동시에 진왕의 옷소매를 왼손으로 잡아 쥐며 칼 든 오른손으로 힘차게 진왕을 찔렀다. 그런데 진왕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제낀 것이다. 따라서 간발의 차로 비수 끝에 몸에 닿지 못했다. 놀란 진왕이 몸을 휙 비틀며 옥좌에서 도망치자 형가가 잡고 있던 옷소매가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옥좌 뒤에는 장검(長劍) 하나가 숨겨져 꽂혀 있었다. 진왕이 다가가 그것을 빼내려 했으나 너무 칼이 길었으므로 미처 그것을 빼기도 전에 형가가 달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라 대경 실색할 뿐 손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진나라 법에는 전상(殿上)에서 왕을 모시는 그 어떤 신하들도 한 치의 쇠붙이도 몸에 지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많은 낭중(郎中)들이 전하 멀찍이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긴 했지만 왕이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전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으므로 망연자실한 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진왕도 그들을 부를 겨를이 없었다. 형가는 자유롭게 진왕을 쫓아다녔다. 진왕은 다급해져서 전당안의 기둥을 돌아 요리조리 빠져 나가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제 한 발자국만 따라 잡으면 형가는 진왕을 찌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형가가 진왕의 등을 마악 내려치려는 순간 시의(侍醫) 하무저(夏無저)가 엉겹결에 들고 있던 약주머니를 형가의 얼굴에다 던져 버린 것이다. 불의의 공격을 당해 형가가 어찔하는 순간이었다. 장검을 뽑아 든 진왕은 그제서야 형가의 왼쪽 다리를 끊어쳤다. 형가는 푹 고꾸라졌다. 쓰러지면서도 형가는 비수를 진왕을 겨냥해 집어 던졌다. 창졸간에 던진 칼이라 진왕을 맞히지 못했다. 비수는 구리 기둥을 맞고 맥없이 떨어졌다. 진왕의 칼날이 사정없이 형가를 난도질했다. 여덟 군데에나 큰 상처를 입은 다음 형가는 일이 글러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기둥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나의 운명이며 연나라의 운명이다!] 그제서야 궁실을 지키던 권술(拳術) 병들과 칼잡이들이 형가 쪽으로 몰려들었다. 형가는 즉석에서 맞아 죽었다. 나중에 진왕은 하무저에게 상으로 황금 이백 일(二百鎰)을 내렸다. 진왕은 노했다. 연나라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왕전 장군에게 명하여 연나라를 가차없이 치게 했다. 연나라의 수도인 계성(계成)은 그로부터 10개월 후에 함락되었다. 연나라 왕 희(喜)와 태자 단은 동쪽으로 달아나 요동에서 농성했는데 진나라 이신(李信) 장군이 뒤따라 연왕을 추격해 왔다. 전전 긍긍하고 있을 때 조나라 마지막 왕인 가(嘉)가 연왕 희한테 엉뚱한 편지를 보내 왔다.
- 진나라의 분노를 그대로 삭이시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방법은 한 가지일 것입니다.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의 진노를 가라앉혀 다행히 연나라의 사직은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은 연수(衍水) 가운데에 있는 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급했다. 그러나 연왕은 태자의 목을 칠 수가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진의 대군은 물밀듯이 연나라로 밀려 들어왔다. 연왕 희를 사로잡은 진군은 태자 단과 형가가 거느리던 빈객들을 수색했다.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고 고점리 역시 변성명하여 송자(宋子)라는 곳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주인집 마루 위에서는 때때로 손님이 놀러 와 축을 켰다. 그럴 때마다 고점리는 그 주위에서 떠나지 못했다. 손가락이 근질거렸기 때문이다. [저것 좀 보게나. 저걸 축이라고 치나. 음악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때마침 주인집 종자가 고점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인님,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손님들이 축을 켤 때마다 저 머슴 놈이 잘합네 못합네 하고 중얼거립니다. 불러서 단단히 혼을 내십시오.] 주인은 잠깐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야단칠 것 없네. 불러서 축을 켜도록 해 만인들 앞에서 망신을 시키면 다시는 그 따위 평을 하지 못할 게 아닌가.] 그렇게 되어서 고점리는 주인 앞으로 불려 갔다. 고통스럽지만 숨어 살아야 했으므로 고점리는 처음에는 대충대충 축을 켰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에 끌려들어 갔다. 축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서러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가슴 아파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손님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음악에 끌려들어 함께 눈물을 흘렸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흘러 나갔다. 드디어 진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즉시 궁으로 불러들여라.] 불행히도 그가 고점리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신하가 있었다. [대왕, 저 자가 바로 형가의 친구 고점리올시다. 비록 축이라면 천하에서 제일 가긴 하나 심지가 불순합니다. 가까이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축을 너무 좋아하는 진왕은 차마 고점리의 솜씨를 버릴 수는 없었다. [죽을 죄에 해당하나 그 재주는 너무나 아깝다. 말똥을 태워 그 연기로 눈을 멀게 하면 과인이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 그렇게 되어 고점리는 맹인이 되었고 그의 축을 켜는 솜씨는 더욱 예민해져서 그가 연주할 때마다 진왕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왕의 고점리에 대한 경계심은 날이 갈수록 해이해져서 점점 그를 가까이 두게 되었다. 그 동안 고점리는 은밀히 한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거운 납덩이를 조금씩 조금씩 축 속으로 감추는 일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벗 형가가 이루지 못한 거사를 자신이 대신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날 고점리는 묵직한 축을 진왕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고점리가 불운했던지 진왕의 운세가 왕운이었던지 진왕은 축한테 간발의 차로 맞지 않았다. 그 대신 고점리가 즉석에서 맞아 죽었다. 그 사건으로 해서 진왕은 죽을 때까지 제후국의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노구천은 형가가 진왕을 척살하려 했다는 소문을 듣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아, 아깝다! 내가 진왕을 찌르는 검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게 안타깝구나! 게다가 나는 어찌 사람을 그토록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토록 훌륭한 인사를 밤낮으로 꾸짖기만 했었다니! 그가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테지!]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퍼진 형가에 관한 전설 중에서 태자 단에게 내린 하늘의 기적이라 하여, '하늘에서 곡식이 내리고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머리에서 뿔이 돋아났다' 〔인질인 丹을 진왕이 보내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했을 때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蘇丹子>〕고 말하고 있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또 '형가가 진왕을 찔러 상처를 주었다'고 하나 이것 역시 틀린 말이다. 본래 공손계공(公孫季功)과 동생(董生: 董仲舒)은 하무저와 교류해 그 사건을 자세히 알아가지고 나에게 알려주었는데, 사실무근이었다는 것이다. 조말에서 형가에 이르기까지 5인의 자객은 각각 의협심이 성취되기도 하고 혹은 실패하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의도는 너무도 명백했으며 또한 그 의지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명성이 후세에 널리 전해지는 것은 실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