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3부 자연과 인간, 우리의 노래
판소리의 수호자, 신재효
1. 한말 한 아전의 판소리 인생 19세기 후반에는 시대적인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봉건질서와 구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사회, 경제적 측면외에 의식면에서도 근대적 질서를 향한 노력들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또한 18세기 이래로 대두되기 시작한 민중의 자아 각성에 따른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인식이 싹트면서 다양한 분야의 서민 대중문학이 꽃피었다. 훗날 국민문학으로 자라난 판소리도 바로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과 민중의 저력 속에서 성장하였으니, 19세기에는 민중의식과 문학적인 역량이 결집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신재효(1812~1884)는 조선 후기 격동의 변화 속에서 무엇보다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판소리와 관련된 일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판소리 변화의 중간 지점에서 그 변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역사적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더욱이 그가 예견하고 실험했던 판소리 사설의 정리, 개작과 판의 분화, 그리고 단가와 가사의 창작 등은 현대 판소리와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재효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책 마지막에 놓여지게 된다.
신재효의 판소리 문학은 우선 지리적으로 고창이라는 배경 속에서 가능하였다. 고창은 오늘날에도 판소리와 인연이 깊어 지방의 군 단위로는 유일하게 국악당이 있는 곳이다. 또한 1996년에 타계한 판소리 명창 만정 김소희와 조선 말기 판소리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알려진 진채선의 고향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신재효의 판소리 문학을 일구게 한 환경으로서 신분적 배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중인 출신의 아전인 그는, 선친이 닦은 터전을 기반으로 고창에서 이방을 거쳐 호방을 하면서 자신이 일군 막대한 부를 통하여 판소리를 애호하고 광대의 후원자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적 조건은 그가 판소리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신재효가 살았던 시대도 그의 문학적 배경의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 격동의 한말에 태어난 그는 밖으로는 서양이나 일본의 외세침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으며, 안으로는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아전들의 폐해를 지켜보며 성장하였다. 신재효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갖게 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자신이 개작한 판소리 사설과 단가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 측면의 문학적 배경은 신재효의 경우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셋의 관계를 함께 고려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줌, 똥도 버리지 마라 신재효는 본관이 평산이요 자는 백원이며 호가 동리로, 고창에서 관약방을 하던 신광흡의 1남 3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서층 출신인 아버지 신광흡은 경기도 고양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직장을 지냈는데, 고창현의 경주인 노릇을 하였다. 경주인은 경저리라고 하는데, 서울에 머물면서 자신이 담당한 직역의 연락사무를 대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지방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상납물의 도착이 지연되었을 때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 드는 비용의 몇 배를 지방관아에 요구함으로써 부당한 이득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신광흡 역시 경주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재산을 모았는데, 이 재산은 그의 아들 신재효가 고창에서 향리로 활동하는 데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신광흡은 고창의 경주인을 한 인연으로 고창에 이주하여 관약방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신재효의 어머니는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여 근심하다가 부군과 함께 정읍에 있는 월조봉에 치성을 드렸다. 그 덕분에 산신의 영감을 얻어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재효의 나이 회갑이 되던 해(1872)에 내장산 영은사의 법당이 중수되었을 때, 그는 그 법당의 상량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아마도 이 절은 신재효의 부모가 그의 탄생을 빌었던 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영은사는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고 이 터에 새로이 내장사가 세워졌다. 부모는 나이 들어 얻은 자식이라 효도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재효라고 지었다. 신재효는 부모의 이러한 뜻에 어긋나지 않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으며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글은 아버지로부터 주로 배웠는데, 그의 아버지 신광흡이 종7품 벼슬인 직장을 했으며 관약방을 경영한 것으로 미루어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칠 만큼의 소양은 충분히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재효는 나이 40이 넘어 지방 향리인 호장을 그만둔 뒤로 수십 리 밖에 있는 대학자를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다 한다. 그 대학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신재효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학문적 소양은 훗날 그가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고 사설을 개작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신재효는 철종 3년(1852)에 고창현감으로 부임한 이익상 밑에서 이방을 지냈고, 이어서 호장까지 오른 뒤 은퇴하였다. 고양에서 살았던 아버지가 전혀 연고가 없는 고창에 내려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재효가 향리의 우두머리격인 호방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남다른 재능과 함께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그는 호장에서 퇴임한 뒤인 고종 13년(1876)에는 고창현감으로 부임한 유돈수로부터 그 동안의 업적에 대해 위로를 받았다고 하니, 그의 고창에서의 위치와 명성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고창현의 향리나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다. 그가 죽은 뒤에 여러 향반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유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고창현감의 관아가 있었던 모양성(고창 읍성) 안에는 향리 출신의 신재효와 그의 아버지 신광흡의 유애비가 세워져 있다. 신재효는 이미 40대 전후에 곡식 1천 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가 되어 있었다. 원래 향리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토호적인 성격이 강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담당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지방의 실무를 독점하고 각종 잇권에 개입함으로써 토착 비리를 저리르고, 사회적으로는 지배층의 가장자리에서 농민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적 성격을 주로 지녔다. 그러나 신재효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향리로서 부정한 방법에 의해서라기보다 남다른 노력의 결과에 의해서였다. 그것은 신재효 자신의 치산의 지혜와 근면성, 성실성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물론 그 밖에도 부친이 물려준 유산도 있었을 것이다. 창작 단가 「치산가」에 나오는 "의식지계 하노라고 불피풍우 40년에 검은 털이 희었으니"라는 구절로 보아, 그는 재산을 모으는데 상당히 열심이었던 듯하다.
이보 소년더라, 긔한 노인 웃지마소. 젊어서 방탕하면 이러하기 면할소냐. (...) 부리런코 검박하면 가장기물 절로 있네. 사치하고 무도하면 범법수죄 자로 하고, 패가망신 아조 쉽네. 치산가 한 곡조를 범연히 듣지 마소. 창업하기 어렵거니와 수성하기 더 어렵네. 어렵다고 말지 마소. 쉬운 것이 집에 있네. (...) 줄줄이 과목 심어 돈진 사람 오게 하소. 고물고물 채소 놓아 반찬값을 내지 말며, (...) 마무르고 높은 논도 거름하면 곡식되네. 오줌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도로 똥이 되니, 그리할 줄 모르고서 이내 몸에 있는 거름 오줌 똥을 한데 보면 옷과 밥이 어서 날꼬. (...) - 「치산가」
근검 절약을 생활화하고 과실과 채소를 심어 한치의 빈 땅이라도 놀리지 말며 하찮은 오줌과 똥이라도 버리지 말고 비료로 사용하면 증산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치산가」는 신재효의 생활 철학이 담긴 것으로 그가 어떻게 재산을 모으고 유지시킬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재효는 인색한 부자는 아니었다. 아끼고 모은 재산을 병자년(1876, 고종 13)의 대흉년에는 굶주린 재해민을 돕는 데 아낌없이 썼다. 이때 그는 사람들이 아무 대가 없이 물질적인 신세를 지면 의타심이 생긴다면서 비록 헌 옷가지나 걸레라도 가져와서 곡식과 바꾸어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물건들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후일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로 온 사람들에게는 원래의 곡식만을 받고 그 보관물을 다시 돌려주었다. 신재효가 아량이 넓고 매우 인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온다. 어느 날 밤 도둑이 신재효의 침방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투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타이른 뒤, 돈 1백 냥을 주면서 남을 해치지 말고 바른 사람으로 착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였다. 얼마 뒤 그 도둑은 1백 냥의 이자까지 내놓으며 과거의 잘못을 뉘추쳤다. 그러자 신재효는 그럴 수 없다며 도둑이 착한 사람이 된것을 칭찬하며 되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신재효는 자신이 근무하던 관아인 형방청의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돈을 시주하였고,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원납전으로 5백 냥을 헌납하였다. 특히 광대의 양성과 후원에는 전 재산을 기울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가선대부의 포상을 받았고,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 희사의 공으로 고종 15년(1878)네는 통정대부라는 품계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라는 명예직을 받아 명목상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신분사회의 모순을 깨닫다 신재효가 중인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털어서 판소리에 몰두하게 된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국문학계에서는 이러한 동기에 대하여 몇가지의 추정을 내리고 있다. 우선 서양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는 계층이 예술작품을 상품으로 사들이게 되는데, 신재효의 판소리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이래로 중산층이 증가하면서 극장의 관객 수효가 증가했으며, 이탈리아에서도 신흥상인들이 음악과 미술 등을 애호하면서 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당시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나 부를 축적한 부자들은 가객을 불러 소리를 사주는 현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향리를 포함한 중인층의 경우, 그들은 대개 비생산적인 유흥에 몰입하였으며, 현실인식이 뚜렷한 비판적인 안목도 없는데다가 새로운 역사를 위한 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전 출신의 중인 신분인 신재효가 판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작한 사설에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그가 대단히 특이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향리로서 각종 연회에 판소리를 창자를 포함한 가객과 기녀를 동원하는 일을 주선하였을 것이고, 또 고창현에 소속된 당시의 예능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그는 직업상 판소리의 창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점차 판소리에 심취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다 사람들은 신재효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를 덧붙여 고려하기도 한다. 사실 신재효는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열려졌다. 그는 양반 사대부적인 교양을 익히면서 고창의 향반들과 사귀었으며, 흉년의 기민구휼과 원납전 헌납이라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명목상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양반 사대부로 행세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고창 지방의 경우 향반의 위세가 대단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신재효 집안의 통혼권은 그의 명망과 명목적인 신분상승에도 불구하고 향리 집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재효의 의식에는 신분상승의 의지와 이를 제약하는 현실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결국 그의 판소리에 대한 애호와 관심은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대리 충족 욕구의 발현으로 이해된다. 「자서가」에서,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 장상댁에 못 생기고 / 활 잘 쏘아 평통할까 / 글 잘 한다고 과거할까"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신분차별에 대해 어느 정도 절망감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재효가 심리적인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보상행동을 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집 입구에서부터 덩굴진 측나무를 심어, 그 나무가 섬돌까지 연결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판소리의 풍류에 이끌려 자신을 찾아오는 향반들을 몸을 구부려 들어오게 하고, 자기는 그보다 높게 지은 집 마루 위에서 내려다보며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이 일은 후에 암행어사로 고창에 내려온 어윤중이 관아 쪽을 향한 신재효의 서재의 기둥 생김새가 신분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현감에게 지적함으로써 결국 시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재효의 판소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지역적, 시대적 측면 외에도 이러한 개인의 신분적인 측면을 고려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곧 그의 판소리 활동은 중인들의 예술 지원을 통하여 신분상승의 욕구를 대신 충족시키려는 보상행위로 이해되며, 아울러 그것은 고창이라는 지역적인 토양과 신재효 자신의 투철한 현실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당시의 중인층들과는 다른 '특별한 개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신재효는 판소리의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었다. 그는 판소리를 배우러 오는 수습생을 모아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집단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는 "여러 판소리 창자들을 모두 자기에게 오도록 했는데, 가깝고 먼 곳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이 날마다 문에 가득 찼으나 그들을 다 먹이고 거처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교방제보』의 저자인 양반 출신의 정현석이 신재효에게 부친 편지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수많은 판소리 수습생들을 먹이고 재우며 소리와 이론을 가르쳤던 집에는 원래 "뜰 앞의 벽오동은 임신생의 동갑이라"(방아타령) 하였듯이 벽오동이 심어져 있었고, 정자가 세워져 그 마루 아래로는 물이 흘러 꽤 운치가 있었다. 신재효는 방 안을 온통 검은 종이로 발라 놓고 홀로 명상에 잠겼다고 하는데, 그의 풍류는 "에헤에헤 나하에야 / 한량 중에 멋 알기는 / 고창 신호장이 날개라"(날개타령) 고 읊을 만큼 멋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벽오동은 베어져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연못도 메워졌다. 약 3백 평에 정원이 3천 평 정도였다던 그의 집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의 논밭들과 함께 모두 처분, 정리되었다. 일제는 그의 저택을 빼앗아 연못을 메우고 여러 채를 헐어 경찰서를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신재효의 고택은 원래 사랑채로서 경찰서의 사택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재효는 아전의 신분이면서도 판소리를 애호하고 후원하였기 때문에 신분상승이 가능했으며 또한 풍류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 그러나 그의 가정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하였다. 첫째 부인은 그가 26세 때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 부인도 2년 만에 외딸만 남기고 사별하였다. 다시 얻은 셋째 부인은 자기보다 20세나 아래였는데 슬하에 1남 2녀를 낳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 56세였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7년간을 결혼하지 않고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이러한 가정적인 슬픔이 그로 하여금 판소리 광대를 후원하고 사설을 개작하며 단가를 창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신재효는 73세(1884, 고종 21)를 일기로 고창의 집에서 자신이 태어난 날짜와 똑같은 11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이는 셰익스피어가 1564년 4월 23일에 태어나 1616년 4월 23일에 죽은 것과 일치한다. 셰익스피어의 활동과 신재효 활동이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영국은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인물로 기리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신재효를 기리는 일은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로 남아 있다. 신재효의 묘는 현재 고창읍 성두리에 있는데, 안타깝게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신재효 판소리 문학의 실상과 업적 신재효가 판소리 창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 집단적인 전문교육을 시켰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김세종이라는 당대의 명창을 초대하여 이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게 하였으며, 자신은 판소리 사설의 정확성, 소리의 적합성, 표현 문제 등을 지도했다고 전한다. 또한 수습생들의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녀 수습 창자 중심의 공동생활권을 형성하였다. 소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밑에서 도제적인 전수방식에 의존하던 당대의 풍습에 비하면 이러한 교육 방식은 상당히 근대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신재효는 판소리의 지도 활동으로 판소리 창자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판소리 창단에는 "남에는 고창 신재효요 북에는 정춘풍"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정춘풍은 당시에 유식한 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재효는 자신의 재력과 지적 능력을 밑바탕으로 판소리 창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를 거쳐 나간 판소리 명창으로 서편제의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과 동편제의 박만순, 김세종, 전해종, 김창록, 진채선, 허금파 등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판소리의 두 유파에 걸쳐 있다는 것은 신재효가 판소리 창단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의 판소리 창자들은 신재효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거나 높은 평가를 받아야만 명창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신재효의 판소리사적 업적 신재효가 판소리사에 남긴 업적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있다. 판소리 전문 교육 외에도 그는 판소리의 사설을 정리, 개작하고 판소리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판소리에 관한 이론적 관심은 그가 창작한 유명한 단가 「광대가」에 담겨 있다. 이 노래는 국문학사에서 판소리 이론에 관한 자료가 부족한 현 실정을 감안할 때, 학자들에 의해 귀중한 판소리의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대가」에서 신재효는 판소리는 여러 명창들을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에 비유하였다. 송흥록은 이태백, 모흥갑은 두자미, 권삼득은 한퇴지, 신만엽은 두목지, 황해청은 맹동야, 고수관은 백낙천, 김계철은 구양수, 송광록은 왕마힐, 주덕기는 소동파와 각각 비교하여 소리의 특징을 평가한 것이다. 판소리의 명창들이 이룩한 독자적인 소리의 세계를 양반 사대부들이 최고로 여기던 한문학 대가들의 문학세계와 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판소리의 예술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적으로 천민에 가까운 광대들의 소리를 양반 사대부의 이상적인 문학세계와 동등하게 평가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서민예술이 정점에 도달한 19세기 당대의 시대적인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곧 광대들의 판소리에 대한 자부심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광대가」에서 또한 판소리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였다. 판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는,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고 하였다. 그는 판소리의 창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요건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들었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판소리의 4대 법례'라고 부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3일치 법칙에 맞먹는 4일치설이라고 견주기도 한다. '인물'은 판소리 창자의 얼굴의 생김새를 말하며, '사설'은 사설의 내용과 그 표현을, '득음'은 소리의 분별력과 가창력을 얻는 것을, 마지막으로 '너름새'는 일명 '발림'이라고도 하는데 창자의 연기 능력을 말한다. 결국 판소리 창자에 관한 것이 세 가지나 포함된 셈이다. 이는 신재효가 판소리 공연의 주체를 창자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판소리의 공연예술적인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오늘날 판소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예견한 탁견이라 할 만하다.
신재효의 이러한 판소리관은 빠른 박자의 장단과 사설에 충실한 동편제 창자 중심에서 벗어나, 창자의 표현 동작을 강조하는 창법을 개발한 서편제 창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편제를 창시한 박유전은 박자를 느리게 하고 잔가락을 많이 꾸며서 노래하는 창법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들려주는 판소리'에서 '들려주고 보여주는 판소리'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신재효가 판소리사에 끼친 이론적인 업적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재효는 이전까지 여자가 부르기에는 힘들다고 여겨졌던 판소리를 진채선에게 부르게 함으로써 판소리사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판소리는 여자의 음량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복궁 낙성연에서 축하 공연으로 진채선에게 자신이 창작한 단가인 「명당축원」, 「방아타령」 등과 함께 판소리를 부르게 하여 당시의 명창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창자 중심으로 소리판을 분호하는 시도를 시키는 판의 분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가 어리거나 가창 능력이 미숙한 소리꾼에게「동창 춘향가」를, 여자 소리꾼에게는「여창 춘향가」를, 그리고 가창 능력을 완전히 갖춘 창자를 위해서는 「남창 춘향가」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판의 분화 작업은 훗날 판소리 창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그것은 서양 연극이 도입되면서 한 작품 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서로 다른 창자가 나누어 맡는 창극이 등장함으로써, 전통적인 판소리의 공연 방식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서양 연극의 영향으로 창극이 생겨나기 이전에 시도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판소리가 가질 수 있는 자생적인 응전력을 보여준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재효가 판소리사에 끼친 또다른 업적으로, 전승되는 판소리의 사설을 정리하고 개작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기존에 전승되는 판소리 가운데 6편의 사설을 정리하고 개작하였다. 그 6편(또는 여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흥부가」(박타령), 「수궁가」(토별가, 토끼타령),「적벽가」(화용도타령), 그리고「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를 말한다. 원래 판소리는 '열두 마당' 이라 하여 상당히 많은 작품이 전승되고 있었지만 신재효는 이들 여섯 작품만을 택하였다. 열두 마당에는 위의 여섯 마당 외에도 「배비장타령」,「장끼타령」, 「왈자타령」, 「매화타령」, 「신선타령」 등이 포함되며, 「숙영낭자전」도 판소리로 불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신재효의 개작에서 제외된 이들 작품들은 끝내 전승에서 탈락되었다. 그런 점에서 판소리에 대한 그의 깊은 안목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승에서 탈락한 작품들은 신재효의 개작 정리가 이루러지지 않아서 그런 현상이 초래된 것이 아니라, 판소리사의 흐름에 역동적으로 기능할 여건을 스스로 갖추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재효는 우선 '이미 있었던 판소리 작품'을 토대로 사설을 개작하였다. 이는 그가 「심청가」에서 "다른 가객 몽중가는 ..."이라는 표현을 구사한 데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만 판소리가 구비 문학이라는 점에서 그가 개작한 작품들도 결국에는 하나의 판소리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이러한 측면을 중시하게 된다면, "신재효 역시 하나의 판소리 창작자다"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직업적인 판소리 창자로서 연행 현장에 서지 않았던 탓에, 그가 정리한 사설들은 실제로 판소리로 불리기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뜻이 너무 세고 문장이 너무 긴 사설"이기 때문에 창자들이 그의 사설을 직접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판소리는 연행 현장의 발랄함을 상실한 채 경화되어 오히려 '독서물'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말았다. 다만 그가 애써 고친 사설들은 당대의 명창이나 후대의 판소리 창자들이 참고하거나 수용하기도 하였다. 전해종의「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졌다가 다시 환생하는 대목"이라든지, 유성준의 「토별가」 중에서 "토끼와 자라가 문답하는 대목" 등은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현전하는 여러 창본 「흥부가」 가운데서도 "놀부 심술" 사설의 경우 신재효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재효는 전승하던 판소리를 정리하면서 기존의 사설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과감히 개작하였다. 판소리의 사설은 한 개인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창자의 의식 또는 현장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바뀐다. 더구나 판소리 사설을 완창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고, 자신이 장기로 부르는 대목을 청중 앞에서 토막 소리로 실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대목에 대한 집중적인 수련으로 부분과 부분 사이에 상호 모순이 나타나는 것은 판소리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이것을 판소리 특성의 하나인 '부분의 독자성'이라고 하는데, 신재효는 그 '부분'으로 볼 때는 이의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사설을 '전체적인 면'에서 조감하고 그 합리성을 문제 삼았다. 이도령이 춘향의 집에 갑자기 찾아갔을 때, 풍성한 잔치에서나 볼 수 있는 음식상이 들어 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향단이 나가더니 다담(교잣상)같이 차렸단 말 이면에 당찮것다"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음식상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이면'이란 현실성, 곧 리얼리티를 말한다. 그는 어떤 한 부분의 불합리성 때문에 작품 전체가 허황한 이야기로 보이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신재효는 선악의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한 철저하게 전형적인 인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선행은 복으로 귀결되고, 악행은 화로 응징되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생각을 판소리 사설에 반영시킨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춘향은 이별하는 임 앞에서도 의젓함을 보여야 했고, 어린 나이의 심청은 죽음에 임하면서도 효녀의 모습을 견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재효는 이러한 윤리적인 점뿐만 아니라 이와 대립되는 비속한 면도 함께 드러냄으로써 삶의 실상을 온전히 보여주고자 하였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뒤 나타나는 심봉사의 익살스런 모습은 그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동중 사람들이 맡긴 전곡 식리하여 의식을 이어주니 심봉사 세간살이 요족히 되었구나. 자고로 색계상에 영웅 열사 없었거든 심봉사가 견디겄나. 동네 과부 있는 집을 공연히 찾아다녀 선웃음 풋장단을 무단히 하는구나.
이처럼 심봉사가 심청이의 사후에 뺑덕어미와 벌이는 행각은 이전의 군자로서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춘향이 자신의 인생을 의탁할 이도령을 만난 첫날밤에 행하는 다소 음탕한 모습도 열녀인 춘향이의 정숙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신재효는 윤리적인 합리성에 크게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을 정형화된 하나의 모습으로 획일화시키지는 않았다. 열녀의 모습일 때는 한없는 열녀의 모습으로, 사랑에 빠진 모습일 때는 또 한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다르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하겠다. 신재효는 또 판소리 연창에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냄으로써 '작중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개입을 통하여 그는 작품의 전개를 순간적으로 단절기키고, 청중으로 하여금 개입을 시도하는 작가(곧 신재효)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강요한다.
심청이 거동보소, 뱃머리에 나서보니 샛파란 물결이며 울울울 바람소리 풍랑이 대작하여 뱃전을 탕탕 치니, 심청이 깜짝 놀라 뒤로 퍽 주저앉으며 애고 아버지 다시는 못 오겠네. 이 물에 빠지면은 고기밥이 되겠구나. 무수히 통곡타가 다시금 일어나서, 바람맞은 병긴같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치마폭을 무릅쓰고 앞니를 아드득 물고, 애고 나 죽네 소리하고 물에 가 풍 빠졌다 하되, 그리하여서야 효녀 죽음 될 수 있나. 두 손을 합장하고 하느님 전 비는 말이, 도화동 심청이가 맹인 아비 해원키로 생목숨이 죽사오니 명천이 하감하사 캄캄한 아비 눈을 일일내에 밝게 떠서 세상 보게 하옵소서. 빌기를 다한 후에 선인들이 돌아보며 (...) 뱃머리에 썩 나서서 만경창파를 제 안방으로 알고 풍 빠지니...
이 글에서 "그리하여서야 효녀 죽음 될 수 있나"의 앞부분은 신재효의 이전까지 전승되던「심청가」의 모습이요, 그 뒷부분은 신재효가 불합리하다 하여 고친 부분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고치기 이전의 앞부분은 개작한 「심청가」에는 내용 전개상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신재효는 두 부분을 함께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개작본을 판소리 창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소리의 현장적인 측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사설에서는 판소리가 원래 갖고 있었던 육담이나 욕설 등이 사라지고 한문투의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남창 춘향가」나 「수궁가」에서 특히 그러한데, 이러한 현상은 결국 판소리의 발랄한 성격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판소리가 지향하는 바와는 다른 모습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신재효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양반문화를 지향하는, 즉 상층 지향적인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설 개작 작업이 반드시 발랄성을 제거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만은 않아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흥부가」에서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이 상당히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드난하라"는 사설에서 '드난'은 '행랑에 붙어 살며 주인을 돕는 고용살이'를 말하며, "범달 장달 허저 같은 설금찬 여러 놈이"에서 '설금찬'은 '힘세고 무섭게 생긴' 모양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이 밖에도 「흥부가」에서는 의태어나 의성어가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가얏고 둥덩둥덩, 퉁소소래 띠루띠루, 해적소리 고깨고깨, 북장단 검무추며 벼락소고 동골동골"은 악기의 구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신재효 사설의 모습은 보는 사람이 어떠한 작품을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서민적인 발랄성이 드러난다고 보는가 하면, 지나친 한문투로 오히려 보수적인 양반의식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은 궁극적으로 작품의 주제를 이원적으로 이해하게 하여, 양반 지향적인 교훈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거나 또는 조선 후기 민중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변강쇠가」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현재는 연행되지 않아 창을 상실한 것으로 신재효의 사설이 유일하다. 그런 점에서 신재효의 「변강쇠가」는 문학사적으로 소중할 수밖에 없다. 「변강쇠가」는 어느 판소리 작품보다도 창자(광대) 자신의 생활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나아가 하층 유랑민의 문학적 특질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대개의 판소리는 하층민의 창자에 의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그들 삶의 모습을 반영하면서도, 상층민인 양반이 애호하고 즐기면서 그 영향을 받아 사설 속에는 양반과 서민의 두 문화가 공존되는 현상을 낳았다. 그러나 「변강쇠가」는 이러한 문화적인 접변이나 혼재 양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작품이 특히 의미를 갖는 것은 판소리의 발생과 관련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소리는 호남지방에서, 그것도 호남의 무속에서 기원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음악적인 면에서 양자가 서로 유사하고, 판소리 발생의 초기 광대가 대개 호남 출신의 무속인이 많았으며, 그 연행의 방식이 무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변강쇠가」는 중부지방에서 불렸으며, 황해도 출신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이 한결같이 「변강쇠가」를 서도창이라고 말하는데다가 실제로 서도창에 「변강쇠타령」이 있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황해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유랑생활을 했던 광대가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변강쇠가」가 다른 지방에 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존재는 판소리의 발생이나 형성의 층이 어느 한 지방에 머무르지 않고 광범위하고 두텁게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변강쇠가」는 또한 우리의 문학 유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성애 묘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옹녀와 강쇠가 대낮에 청석관에서 만나 당일치기 혼례를 육체적인 교섭으로 시작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기물타령'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은 유랑민인 주인공 변강쇠의 죽음과 치상이 내용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에는 수많은 죽음이 나타난다. 이때의 죽음은 생활하려는 강한 의지, 그리고 여인과의 결합에 의해 정상적인 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로써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죽음이 여기서는 비장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대단히 희화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벼랑에 몰린 서민들이 죽음마저 놀이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열다섯에 얻은 서방 첫날밤 잠자리에 급상한에 죽고, 열여섯에 얻은 서방 당창병에 튀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 용천병에 펴고, 열여덟에 얻은 서방 벼락맞아 식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 천하에 대적으로 포청에 떨어지고, 스무 살에 얻은 서방 비상 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퇴가 나고 송장 치기 신물난다.
여기서 우리는 "죽고, 튀고, 펴고, 떨어지고, 돌아가니"에서처럼 '죽음'을 뜻하는 말의 다양한 변화를 찾을 수 있거니와, 마치 이 작품의 작자는 이러한 어휘를 더 동원할 수는 없을까 하는 은근한 즐거움마저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죽음까지도 웃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죽음이 일상적으로 접근되어 있는 서민의 삶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신재효는 이러한 서민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문학이 지니는 범위를 뛰어넘었다. 그는 그만큼 한국문학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신재효는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절감한 탓에 조선조 신분사회의 모순을 문제 삼을 줄 알았다. 나아가 향리로서 겪었던 부패된 현실을 날카롭게 폭로하였다.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까지 문제 삼을 수 있는 인식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히 '문제적 인물'이라 할 만하다.
관문 밖에 막 나서니 삼반 관속들이 와 하고 달려들어, 심봉사를 찾는데 그런 야단이 없지. 우리 청으로 가십시다.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색주가로 가십시다. 삼백 냥 드릴께 좌수시켜주오. 천 냥 낼께 이방시켜 주오. - 「심청가」
신재효는 심봉사가 관아에 가서 나라에서 장님 잔치를 베풀고 잇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을 이렇게 고쳤다. 그는 돈으로 좌수, 이방 등의 자리가 팔리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그는 「토별가」에서 곰의 목소리를 빌어 "시속에 비하면 산군은 수령 같고, 여우는 간물출패, 사냥개는 세도 아전, 너구리, 멧돼지며 쥐와 다람쥐는 굶지 않는 백성이라" 함으로써 당대 현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호랑이 같은 지방 수령이 사냥개 같은 아전을 부려 백성을 착취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신재효의 이러한 뛰어난 현실인식은 「적벽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원래 『삼국지연의』의 일부분인 '적벽대전'을 판소리화한 것으로, 판소리의 창자들에 의해 원본에는 없던 대목들이 가미되면서 새롭게 꾸며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판소리 「적벽가」에서는 최고 권력층을 상징하는 조조라는 인물과 일반 백성의 모습을 형상화한 군사들 사이의 대립이 심각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정욱'이라는 인물은 둘 사이의 대립을 더욱 극명하게 만들어주는 구실을 한다. 신재효는 자신이 정리, 개작한 「적벽가」에서 정욱을 통하여 조조를 풍자하고 공격하는 목소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가 중인 출신으로서 중간자적인 성격을 지니는 정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적벽대전에서 패하여 조조가 혼자만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정욱은, "비소하여 승상님 목 좀 내놓으시오. 근본 두풍이 괴하시더니 좋다는 편전으로 쌈박 퉁겨 피 빼시면 두풍이 나으리다"라고 풍자하며, 조조가 화용도의 장승을 만나 크게 놀라자 "적벽강 불에 간담 놀래 지랄병을 얻으셨소. 왜 공연히 앉았다가 솔방울 모양으로 뚝 떨어져 굴러가오" 라고 공격한다. 이들 내용은 다른 이본에는 없는 것으로 신재효가 고쳐 쓴 것이다. 그는 정욱을 통하여 백성을 동원해 전쟁터로 내모는 최고의 권력자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학, 창작 단가 신재효는 6편의 판소리를 택하여 사설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단가를 직접 창작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단가에는 「허두가」, 「성조가」, 「어부사」, 「호남가」, 「광대가」, 「명당축원가」, 「치산가」, 「십보가」, 「오섬가」, 「도리화가」, 「구구가」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단형 내지는 중형의 판소리로서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부르는 단가라 할 수 있다. 단가는 일명 '허두가'라 하여 목을 푸는 소리의 성격을 지닌다. 즉 창자가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목을 풀거나 청중의 반응을 살피고, 자신의 신체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하여 부르는 짧은 형태의 노래를 말한다. 따라서 판소리의 기본 장단인 '중머리' 장단의 평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 단가는 신재효의 판소리적인 지향과 의식 등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신재효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적 실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가운데 단가 몇 편을 통하여 그 모습을 살펴보자.
「도리화가」는 신재효가 자신의 제자인 진채선에 대해 간절한 그리움을 편지글 형식의 가사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진채선, 허금파와 같은 여자 소리꾼을 키워냈는데, 특히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진채선은 신재효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김세종에게 판소리를 사사하였다. 대원군이 경복궁 낙성연을 베풀어 전국의 이름난 광대를 부르자, 신재효는 채선을 남장시켜 김세종과 함께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그녀는 「명당축원가」와 「방아타령」 등을 불러 청중을 감동시켰고, 스승의 명성까지 드높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녀를 가까이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으니, 사랑하는 제자를 기다리던 신재효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이 「도리화가」로 표현하였다. 그는 여기서 "외로운 손의 회포 이전 병이 더하구나. 다른 이는 병이 낫고 나는 어찌 아니 낫뇨"라고 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노래하였다. 이 작품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뛰어넘어 하염없이 기다리는 남성과 오지않는 여성 사이에 오고 가는 감정의 미묘함이 전편에 넘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당대 지식인의 필수적 교양인 가사문학의 한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상사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창작은 일생을 중인 관료로 지낸 신재효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일이다.
「치산가」는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것인데, 빈부와 귀천은 개인적인 근검 절약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농사에 힘쓰고 돈이 될 작물을 심어 재산을 모으자고 함으로써, 인간생활의 물질적 토대를 중시한 현실지향적인 세계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오섬가」는 만남과 이별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슬픔을 곡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까마귀 남편과 두꺼비 아내의 대화를 통하여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춘향가」, 「배비장타령」, 그리고 「오유란전」에서 따왔을 듯한 내용을 곁들여 남녀 관계의 여러 양상을 다루면서도 노골적인 외설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흡사 '옴니버스' 형태를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몇 개의 짧은 이야기를 앞뒤 연결과는 관계없이 늘어놓아 한 편이 작품을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전통적인 판소리적 관습을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격식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실험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신재효의 단가를 보면, 판소리의 이론을 모색하거나 돈을 모으고 사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당대의 시대적 아픔을 의식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는 「십보가」에서 나라를 근심하느라고 잠을 이루지 못해, 한밤중에 뜰을 거닐면서 한 걸음에 노래 하나씩을 지어 열 걸음에 노래 열 곡을 지었다고 하였다.
두 걸음 걸어 서서 이삼 가지로 생각하니 이성지합 좋은 예법 이십팔수 종기하야 이천만 동포 생겨나서 이 세상에 다 죽을까 이군불사 이부불경 열녀행을 잃지 말고 지켜보세
이를 보면 외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2천만 동포가 다 죽어가고 가치관의 위기가 닥쳤으니, 모두 윤리를 버리지 말고 굳게 지키자고 하였다. 단순히 충효의 도리를 역설하는 것으로 비쳐지겠지만 '2천만 동포'라 하여 온 백성을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근대민족주의적 의식을 자각하는 뛰어난 인식을 찾을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무렵의 위기의식을 나타내면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한 작품으로 위의 「십보가」 외에도 「괘씸한 서양되놈」이라는 가사체 단가가 있다.
괘씸하다 서양되놈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 단군기자 동방국의 충효윤리 받았는데 어이 감히 열어보자 흥병가해 나왔다가 방수성 불에 타고 정족산성 총에 죽고 남은 목숨 도생하자 바삐바삐 도망한다.
이 작품의 전문으로서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공한 외적과 싸워 물리친 전공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는 나라를 열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외적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아울러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신재효가 창작한 이상의 작품들은 판소리의 허두가라는 부속물로서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문학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창작 단가나 판소리 사설의 개작을 두고 판소리사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판소리적인 관습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은 결국, "전통적, 그리고 당대적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신재효가 실험하였던 판소리의 모습은, 결국 오늘날 판소리가 지향하는 내용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통찰력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3. 창작 단가 감상 신재효가 판소리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은 여섯 마당의 사설과「광대가」라는 단가에서였다. 특히 창작 단가 「광대가」는 판소리의 미학적인 이론을 제시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따라서 원문을 살펴보고 현대어로 바꾼 글 가운데 의미를 분명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휘에는 한자를 병기하였다.
광대가 고금에 호걸문장 절창으로 지어 후세에 유전하나 다 모도 허사로다. 송옥의 고당부와 조자건의 낙신부는 그 말이 정녕한지 뉘 눈으로 보았으며, 와룡선생 양보음은 삼장사의 탄식이요, 정절선생 귀거래사 처사의 한정이라, 이청련의 원별이와 백낙천의 장한가며, 원진의 연창궁사, 이교의 분음행이 다 쓸어 처량 사설 차마 엇지 듣거듸야. 인간의 부귀영화 일장춘몽 가소롭고, 유유한 생이사별 뉘 아니 한탄하리. 거려천지 우리 행락 광대 행세 좋을씨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직차는 득음이요, 그 직차는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 끼고 맵씨 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류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씨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윽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야,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 디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밝은 달이 구름 밖에 나오는 듯, 새눈 뜨고 웃게 하니 대단히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 속판이 소리하는 법례로다.
영산 초장 다스름이 은은한 청계수가 어름 밑에 흐르는 듯, 끄을러내는 목이 순풍에 배 노는 듯, 차차로 올리는 목 봉회노전 기이하다. 도도와 울리는 목 만장봉이 솟구는 듯, 툭툭 굴러내리는 목 폭포수가 솟치는 듯, 장단고저 변화무궁 이리 농락 저리 농락, 아니리 짜는 말이 아리따운 제비 말과 공교로운 앵무 소리, 중머리 허리며 허성이며 진양조를 달아두고 놓아두고 거닐다가 들치다가, 청청하게 도는 목이 단산의 도는 봉의 울음, 청원하게 뜨는 목이 청천에 학의 울음, 애원성 흐르는 목 황영의 비파소리, 무수히 농락 변화 불시에 튀는 목이 벽력히 부듯는 듯, 음아질타 호령소리 태산이 흔드는 듯, 어느덧 변화하여 낙목한천 찬바람이 소슬케 부느 ㄴ소리, 왕소군의 출새곡과 척부인의 황곡가라. 좌상이 실색하고 구경꾼이 낙루하니, 이러한 광대 노릇 그 아니 어려우냐.
우리나라 명창 광대 자고로 많거니와, 기왕은 물론하고 근래 명창 누기누기. 명성이 자자하야 사람마다 칭찬하니, 이러한 명창들을 문장으로 비길진대, 송선달 흥록이는 타성주옥 방약무인 화란춘성 만화방창 시중천자 이태백. 모동지 흥갑이는 관산월색 초목춘성 청천만리 학의 울음 시중성인 두자미. 권생원 사인씨는 천청절벽 불끈 솟아 만장폭포 월렁꿀꿜 문기팔대 한퇴지. 신선달 만엽이는 구천은하 떨어진다 명월백로 맑은 기운 취과양주 두목지. 황동지 해청이는 적막공산 밝은 달에 다정하게 웅창자화 두우제월 맹동야. 고동지 수관이는 동아부자 엽피남묘 은근문답 하는 거동 권과농상 백낙천. 김선달 계철이는 담탐한 산천영기 명랑한 산하영자 천운영월 구양수. 송낭청 관록이는 망망한 장천벽해 걸릴 데가 없었으니 만리풍범 왕마힐. 주낭청 덕기는 둔갑장신 무수변화 농락하는 그 수단이 신출귀몰 소동파. 이러한 광대들이 다 각기 소장으로 천명을 하였으나 각색구비 명창 광대 어듸가 얻어보리. 이 속을 알 것마는 알고도 못 행하니 엇지 아니 답답하리.
작품 해설 총 70여 구의 단가로서 신재효가 만년에 지은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창작 연대는 알 수 없다. 작품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되다. 첫째 부분을 보면 중국 송옥의 「고당부」를 위시하여 유명한 문인들과 그 작품들을 열거하고, 인간의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이듯이 이들의 절창도 허사라고 하였다. 두번째는 유명한 광대의 4대법례로 알려진 부분이다. 광대의 4대요건으로서 그는 인물, 사설, 득음, 그리고 너름새 곧 발림을 들면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인물을 가장 먼저 들고 있는 것이 주목되거니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거꾸로 너름새부터 기술하고 있다. 너름새를 보면, 판소리의 내용을 말과 몸짓으로 잘 연기하여 청중을 울고 웃게 해야 하며, 득음에서는 오음을 분멸하고 육률을 변화시킬 줄 아는 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설은 판소리의 내용을 현장감 있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판소리를 극적으로 그릴 수 있는 광대의 사설 구사능력을 말한다. 끝으로 인물에서는 본래 타고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셋째 부분은 광대가 상황에 따라 소리를 적절히 구사하는 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아니리를 구사하고, 중머리, 진양조와 같은 여러 장단을 잘 알아서 소리해야 하며, 애원성의 슬픔과 벽력 같은 호령 소리 등의 창조를 구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넷째 부분은 당시의 명창 광대를 중국 당송대의 명문장가들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 광대의 소리의 장점을 문인들의 개성적인 문장과 비교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신재효는 이들 명창들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양반 사대부들의 문학세계와 대등하게 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광대가」에서 거론된 명창들은 모두 아홉이로서 '광대열전'이라 할 만한데, 여기서 8명창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서 판소리사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재미있는 것은 광대들의 호칭이다. 신분적으로 천민들인 광대를 동지, 선달, 낭청 등으로부르는 것은 광대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판소리는 신재효 당대에 와서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거니와, 이때에는 양반들까지 애호할 정도로 국민문학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따라 벼슬을 얻은 광대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대우와 보수도 좋아졌다. 「광대가」의 위의 부분은 바로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광대가」에 대해서는 판소리의 이론 정립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쪽도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 곧 소위 광대의 4대법례는 판소리의 실상과 달라서, '인물'의 경우 얼굴이 못생긴 광대도 많으며 '너름새'도 동편제에서는 별로 중시되지 않았으니, 이로 보아 신재효의 「광대가」는 판소리를 문학과 연극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광대가」 이전에 이미 정현석이 신재효에게 보낸 편지인「증동리신군서」에도 판소리의 이론이 제시되고 있어서, 신재효의 이론은 그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정현석은 진양 수령을 거쳐 황해도 감사를 지낸 양반으로, 진양 관아에서 교방을 설치하고 관기들에게 음악과 무용 등을 가르친 인물이다. 그는 『교방제보』라는 책을 통하여 양반의 입장에서 판소리의 권선징악적인 주제를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편지에서는 광대의 단정한 인물됨과 사설의 조리 정확성, 득음의 요령, 그리고 너름세의 실상을 강조함으로써 신재효의 이론과 유사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신재효를 제대로 평가하고 나아가 판소리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술하기 위하여 음미할 만하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아서도 안될 것이다. 앞으로 판소리의 이론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판소리에 관한 자료가 더 많이 수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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