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2부. 문학과 이념의 거리
향가에 실린 불심, 균여대사
1. 갈 수 없는 땅, 대사의 발자취
균여(923~973)는 고려 초기에 화엄종의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떨친 인물이자 뛰어난 학승이다. 그리고 한국문학사적으로 보아 그는 우리에게 소중한 향가 11수를 전해준 위대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보현십종원왕가」 11수는 10구체 향가의 전형으로서 우리 시가문학사의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균여의 이 작품들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학적 욕구에 의해서라기보다 종교적인 신앙심에서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종교와 문학과의 거리감을 단축시키고 나아가 고전문학이 갖고 있는 이념과 그것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과제를 일찍부터 부과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균여의 출생지와 활동 무대는 고려의 수도가 있는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였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균여는 고려 초기에 신라 중심의 불교를 다시 한반도 중앙의 무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에서 분열되었던 화엄종을 하나로 통합시켜 고려 중심의 불교로 승화시켰다. 또한 방언과 향찰로 표기된 국문학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이어지는 향가문학을 꽃피우게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처한 시간적, 공간적 환경이 갖는 의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균여의 생애에 관해서는 현재 해인사의 고려대장경 보판에 있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의 부록으로서 혁련정이 찬술한 『대화엄 수좌 원통 양중대사 균여전』(약칭 『균여전』)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균여전』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해인사에는 그의 전기 외에도 현재까지 거의 1백여권에 이르는 많은 저술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균여는 원래 포교를 위하여 방언, 즉 향찰로 불경을 주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방언본이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해인사 소재 그의 저술은 방언본이 씌어진 지 수백 년 뒤인 14세기에 와서 후세 사람들이 "방언을 삭제하고 한문으로만 새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균여의 생애를 보면 활동무대가 주로 고려의 수도인 개성 근처였다. 그런 이유로 균여의 발자취를 위해서는 남북이 통일될 때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그가 남긴 삶에 관한 언급은 순전히 해방 이전의 관계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균여와 성불사, 영통사 균여는 속성이 변씨로 이름이 균여인데, 그의 아버지는 환성이며 어머니는 점명이다. 그는 923년 황해도 황주 북쪽에 있는 형악의 남쪽 기슭 둔대엽촌에서 태어났다. 황주는 대동강고 재령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평야지대로 경의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경의선을 타고 개성을 지나 금천, 평산, 신막을 거치면 사리원 바로 다음 역이 황주이다. 황주에서 배를 타고 대동강을 내려가면 남포항에 도달할 수 있다. 황주는 예로부터 사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쪽의 황주와 남쪽의 대구는 사과의 대명사로 불렸다. 황주의 남쪽 끝 정방산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친숙한 노래의 고향인 성불사가 자리잡고 있다. 균여가 태어난 곳인 '형악'이 과연 오늘날의 어떤 산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유적도 자세히 알 수가 없다.『균여전』을 보면 황주판관인 이준이 균여의 옛 집터를 다시 수리하여 그곳을 경천사로 불렀다 한다.
균여의 탄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그의 어머니 점명은 917년 4월 7일 밤, 하늘에서 한 쌍의 누런 봉새가 내려와 품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 이런 꿈을 꾸고 난 뒤 923년, 어머니 나이 육십에 아이를 가져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 그런데 아기가 너무 못생겨 부모는 길거리에 내다버렸다. 그런데 까마귀 두 마리가 날아와 깃털로 아이를 감싸주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사실을 알리자, 부모는 그제서야 뉘우치며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한다. 이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비스런 태몽, 7개월 만에 태어나고 추한 외모, 기아, 짐승들의 아이 보호 등은 '신화적 인물'들의 출생담에 늘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 보아 균여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이야기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균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암기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아버지가 가르쳐준 『화엄경』의 계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기억력은 세 살 위인 그의 누이 수명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걸승이 읽어주는 화엄경 여덟 권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균여가 들려주는 경전을 그대로 기억하곤 하였다. 균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종형인 선균을 따라 부흥사에 갔다. 그곳에서 식현화상을 만나 출가하여 그 밑에서 배웠다. 그가 처음에 출가한 부흥사는 황해도 금천군 남쪽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금천군은 황해도에, 개풍군은 경기도에 속하게 된다. 두 도 경계에 있는 제석산 밑에는 '청석골'이 있는데, 그곳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일대에서 활약하던 임꺽정 무리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균여는 식현의 자질이 신통치 않음을 알고, 밤에 몰래 영통사의 의순공에게 가서 공부를 배우고 새벽에야 돌아왔다. 나중에야 식현이 이 사실을 알고 균여가 의순공에게 가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균여는 영통사의 의순공으로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배우게 된다. 균여가 그 절에서 어떻게 득도했는지에 대해서는 『균여전』에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고려의 임금 광종으로부터 아낌을 받아 재능과 신이한 행적을 보이는 대목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통사와 균여의 관계를 자세히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공부를 이곳에서 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에 영통사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영통사와 균여에 얽힌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한다. 균여는 낡은 영통사의 백운방을 고쳤는데, 이 때문에 지신이 노하여 그곳에 재변이 매일 일어났다. 그런데 균여가 노래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이자 그 괴변이 곧 없어졌다. 현재 그 노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매우 주술적인 효험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향가가 주술적인 힘을 지녔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사례가 이와 같은 균여의 이야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균여는 자신의 이적을 과시할 때는 대개 노래의 힘을 빌렸던 듯하다. 균여가 머물렀다는 영통사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추정된다. 영남면에는 개성시와 바로 이웃하여 있었기 때문에 고려 왕실의 능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 지역은 보부상으로 전국을 누비는 개성상인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영통사의 남쪽 가까운 곳에는 나중에 균여가 주지로 있었던 귀법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균여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영통사는 우선 대각국사 의천과 관련이 깊다. 의천은 이곳에서 출가하였는데, 입적 후에 그의 사적을 새긴 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 비는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36호로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김부식이 지었다. 영통사는 특히 고려 왕실에서 참배를 많이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종을 비롯하여 고려 후기의 많은 왕들이 이곳에 행차하여 분향하였으며, 왕실 주관의 각종 재가 열렸다. 그래서 이 절과 관련이 깊은 왕들의 진영을 모신 진영각을 두기도 하였다. 영통사에는 현재 북한이 문화재로 지정한 유물이 남아 있는데, 국보급 문화재 제37호인 5층탑, 제38호인 서3층탑, 그리고 보물급 문화재 제35호인 동3층탑, 제37호인 당간지주 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갈 수 없는 땅이라서 현재 남아 있는 옛 사진으로만 당대의 흔적과 숨결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불법을 펼치고 백성을 이롭게 균여는 화엄교리의 대가였다. 신라 말기에 가야산 해인사에는 나중에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 된 관혜와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된 희랑이라는 두 사람의 화엄종 사종이 있었다. 그런데 그 법문은 각각 남악과 북악으로 불리며 갈려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였다. 균여는 원래 북악의 법통을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단의 분열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전국의 절을 돌아다니며 한 길로 돌아오도록 교법을 널리 펴 후진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화엄경의 교리를 다시 주석하고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이에 따라 국가가 왕륜사에서 승시를 보일 때 균여의 설을 정통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에 분열된 화엄종의 두 갈래를 하나로 묶어 통합시킨 공으로 그는 화엄종을 처한 전한 신라의 의상에 이어 고려 때에 그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크게 떨친 중흥적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균여가 고려 초에 그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종의 '전제정치의 협조자'로서 왕권에 밀착된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이유야 어떻든 그가 자리한 화엄종에서의 위치는 왕권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상당히 음미할 만하다.
균여는 광종 14년(963)에 왕이 발원하여 세운 나라의 절 귀법사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 광종이 균여를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니, 그에 대한 애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절이 완성되자 균여는 왕명으로 향불을 받들고 절의 무리를 거느리며 불법을 널리 펼쳤다. 이 절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마전동 탄현문 밖에 있으며 송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균여가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던 영통사와 가까운 곳이다. 그러나 이 절은 조선 중엽에 와서는 이미 폐사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 전까지 당간지주와 함께 초석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는 석탑의 부분 석재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국찰로서 귀법사에는 광종 이후 목종, 선종 등의 여러 왕의 행사가 있었다. 선종은 1087년에 대장경을 봉안하는 법회에 참석하였고, 의종은 1161년 4월 초 한 달간 이 절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균여는 973년(광종 24) 6월 17일에 귀법사에서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귀법사의 동남쪽에 있는 팔덕산에 묻혔다. 그 산은 귀법사에서 1백 보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이다. 균여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광종 말기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지어 왕권과 밀착된 균여가 호족세력의 압력을 받아 오히려 왕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광종의 전제정치의 확립을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던 균여가 거꾸로 정치적 이유로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견해로 보인다. 균여는 제자는 3천 명 정도 되었으며, 그 가운데 담림과 조는 일대의 고승으로 수좌에 올랐다.
균여는 학덕이 높고 신이한 행적을 남긴 고승으로 광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비문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 탓에 그의 사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균여의 전기가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한다. 균여가 죽은 뒤 문하시랑평장사 김정준이 균여가 거처하던 곳을 수리하여 이를 감로원이라 하였고, 급사중 고정이 균여에 대한 가문을 썼다. 이것은 혁련정이 쓴『균여전』을 참조한 것이다. 일찍이 전중성의 내급사인 강유현이 쓴 균여의 전기가 있었지만 사실이 많이 누락되어 간략한 편이었다. 당시에 혁련정은 균여의 전기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창운 스님으로부터 『균여전』의 찬술을 의뢰받았다. 이때 창운은 그가 쓴 「실록구고」를 맡겼다. 혁련정은 이를 참고로 하여 1년 만에 『균여전』을 완성하였으니, 이때가 1075년(문종 29)으로 균여가 죽은 지 138년이 지난 뒤였다.
2. 불멸의 향가 11수
균여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는 『균여전』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도와 말미에 저자의 서두와 후서가 있고, 본문의 내용은 열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내용은 출생과 성장기에 관한 「강탄영험분」, 출가와 수도에 관한 「출가청익분」, 자매의 현명함에 관한 「자매제현분」, 화엄종의 분열을 통합시킨 균여의 노력에 관한 「입의정종분」, 균여의 불경해석 서적에 관한 「해석제장분」, 신이한 행적담에 관한 「감통신이분」, 향가 11수를 소개한 「가행화세분」, 그 향가에 대한 최행귀의 번역시를 소개한 「역가현덕분」, 귀법사의 승려 정수와의 대립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감응항마분」, 균여의 죽음에 관한 「번역생사분」 등으로 되어 있다. 균여의 향가문학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지적해둘 것이 바로 '자주적인 표기 방식'에 의한 저술활동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한자를 차용하여 국문으로 경전의 어려운 글을 풀이하였으며, 우리말 가요를 제작하여 향찰로 기술하였다. 이러한 표기 방식은 신라 이후 내려온 전통이지만, 당대의 화엄종 고승이 불경의 풀이본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기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가진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대각국사 의천은, "균여, 범운, 진파, 영윤 등의 스님은 불경을 그릇되게 하여 말이 글을 이루지 못하고 뜻이 통하지 않게 하였다"는 비난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저술이 후세 사람에 의하여 "방언이 삭제되고 한문만 남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임은 자명하다. 균여의 이러한 표기 의식은 불교의 포교를 위한 방편에서 비롯되었지만, 한자 표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인 국자의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국문학적, 문화적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균여가 우리 국문학에 남긴 업적은 향가의 창작이다. 향찰로 표기된 향가는 오늘날 모두 25수밖에 남아 있지 않는데, 그 가운데 11수는 균여의 「보현십종원앙가」(약칭 「원앙가」)이다. 그런데 균여는 이 「원앙가」 외에도 향찰식 표기의 시가를 많이 창작했던 것으로보인다. 그것들은 현재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십구장원통기』 하권의 다음과 같은 글귀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균여가 조사들의 글을 풀이한) 그 글이 다 방언고훈으로 되어 있고 노래의 초안을 베껴두었지만,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베낀 책[가초지서]마저 전하지 못했다.
균여의 향가는 『균여전』의 일곱번째 부문인 「가행화세분」에 수록되어 있으며, 여덟번째 부문인「역가현덕분」에는 균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최행귀가 967년(광종 18)에 이 「원앙가」를 한시로 번역한 11수가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균여의「원앙가」는 적어도 967년 이전, 즉 균여의 나이 45세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앙가」는 『대방광불화엄경』 40권, 「보현행원품」에 들어 있는 열 가지 종류의 '원앙'의 내용을 풀이한 가요이다. 「보현행원품」은 화엄사상의 중심에 해당한다. 문수보살의 설법을 듣고 보리심이 생긴 선재동자가 여러 성을 찾아다니면서 53명의 선지식에게 수도의 방법을 묻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로부터 구도의 과정에서 닦아야 할 열 가지 행원을 전해받는다. 이것이 보현의 십종광대행원이다. 즉 예경제불, 칭찬여래, 광수공양, 참회업장, 수희공덕, 청전법륜, 청불주세, 상수불학, 항순중생, 보개회향 등이 그것이다. 균여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 노래로 풀어서 짓되, 각 노래의 뜻을 종합한 「총결무진가」를 하나 더 지었다. 그리하여 노래는 모두 11수가 되었다. 균여는 이 「원앙가」의 서문에, "원앙의 내용을 세속의 도리에 따르기 위하여 우리말에 의탁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착한 근본을 이루기 바란다 "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균여의 이 노래는 기본적으로 포교를 목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방식의 노래 제작이 당대의 유식층으로부터 받을 비난을 우려하였다. 당시로서는 노래를 통해 백성들에게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방식이 파격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균여 이후 고려 말엽에는 가사를 통하여 불교의 교리를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나옹스님 같은 승려를 만날 수 있으니, 균여의 선각적인 업적은 크게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앙가」는 단순히 종교적인 포교의 노래에 그치지 않고, 높은 문학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균여는 종교적 내용을 향가라는 문학적 형식에 담아내면서, 우리 가요가 지니는 미적인 전승력을 강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향가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서 당대인의 인식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균여의 향가를 한시로 번역한 최행귀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균여의 향가에 대하여 최행귀는 "11수의 향가는 가사가 맑고 글귀가 아름다우며[가청구려], 중국의 사부에 비길 만하다"고 지적하였다. 앞부분은 균여의 향가가 지니는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고, 뒷부분은 우리말로 된 작품에 대한 평가로서 당당한 주체성의 선언이라 할 만하다. 최행귀는 향찰로 된 이 노래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알려지고 있는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이것을 중국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우리의 비단 같은 작품이 중국에 전해지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원앙가」를 몸소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 이 「원앙가」를 중국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베껴 가서 자기 나라에 전하게 되었다. 그 뒤 중국 사신이 균여를 만나보기 위해 귀법사를 찾아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디 가야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는가?"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한편 균여의 향가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으며, 주술적인 효험도 있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 널리 유포되어 가끔 담벽에도 씌어 있었다"고 『균여전』의 찬자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는 것은 균여의 향가가 매우 부르기 쉽고, 노래가 지니는 형식적, 내용적 아름다움이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그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부르게 되어 아마도 균여가 원했던 대로 백성들이 착한 마음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원앙가」가 보여준 신이한 영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사평군의 나필급간이 고질에 걸려 3년 동안이나 낫지 않았다. 균여가 이 일을 민망히 여겨 「원앙가」를 입으로 전해주고 늘 읽기를 권했다. 그랬더니 어느날 하늘에서 '그대는 대성의 노래의 힘으로 고통을 벗어나리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 나필의 병은 나았다." 그의 노래가 갖는 영이함은, "영통사 백운방을 짓는 것을 지신이 재변을 일으켜 방해하자 균여가 노래를 지어 벽에 붙여 물리쳤다"는 이야기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이는 아마도 노래(향가) 자체가 갖는 주술적인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승 균여가 가지는 놀라운 능력에 의해서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균여의「원앙가」 11수의 문학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우선 그는 이 향가를 통하여 문학과 종교의 거리를 좁혔으며, 이러한 문학과 이념의 조화문제를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겼다. 아울러 그는 향가를 통해 딱딱한 종교적 교리만을 강조하지 않고 거기에 문학적 형상력을 발휘함으로써 뛰어난 시가 작가로서 남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문학의 본래적 기능 가운데 하나인 효용적 기능을 잘 발휘하고 있다. 균여는 불법을 펼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향가를 지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교리를 쉽게 널리 알린다는 교훈적인 측면 외에도 그들의 고질병을 고쳤다든지 하는 주술적인 측면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균여는 이 노래를 염송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균여는 이처럼 문학이 담당해야 할 과제로서 '구제'의 문제를 일찍부터 부과시켰다. 그리고 그는 향가 11수를 제작함으로써 신라대에 이룩된 시가 양식이 고려 초기에도 지어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작품은 향가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알려진 10구체로 되어 있는데, 이 10구체 향가는 통일신라 이후에 유행되던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3단의 짜임을 가지면서 제9구의 첫머리에 감탄사, 곧 낙구가 한결같이 나옴으로써 장차 시조가 10구체 향가에서 형태적으로 기원했을 것이라는 논의의 소중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 밖에도 『균여전』에는 향가의 형식, 나아가 우리 시가의 형식에 관한 최행귀의 귀중한 발언이 실려 있어 주목된다. 이는 물론 균여의 향가 자체에 대한 평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는 당나라 말로 얽음으로써 5언 7자로 다듬고, 가는 우리말로 배열하여 3구 6명으로 가다듬는다.
5언 7자는 당시의 형식을, 3구 6명은 향가의 형식을 설명한 것이다. 당시에는 오언시와 칠언시가 있다. 이로 미루어 아마도 향가에는 그 형식이 3구와 6명이라는 두 가지로 존재했던 듯하다. 3구 6명에서 '구'와 '명'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에서는 중국 당시의 경우'언'과 '자'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혹시 구와 명도 같은 뜻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3. 작품 감상
향가 11수 가운데 첫번째 작품인 「예경제불가」를 수록한다. 균여의 작품은 『균여전』의 일곱번째 부문인 「가행화세분」에 원문이 실려 있으며, 그 맨 첫머리에 균여의 서문이 들어 있다. 균여가 향가를 지은 목적과 그의 생각을 살펴보기 위하여 서문을 해석하여 싣는다. 그다음으로 김완진 교수가 해독한 향가(『향가해독법연구』)로서 현대어로 풀어쓴 부분을 제시한다. 그리고 여덟번째 부분인 「역가현덕분」에 있는 최행귀의 한역시를 소개한다.
서문
대개 사뇌란 것은 세상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데 쓰는 도구요, 원앙이라 하는 것은 보살이 수행하는 요체가 된다. 그러므로 얇은 데를 지나야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가까운 데부터 시작해야 먼 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니, 세속의 이치에 기대지 않고는 천한 바탕을 인도할 길이 없으며, 비속한 말에 따르지 않고는 넓은 인연을 나타낼 길이 없다. 이제 알기 쉬운 가까운 일을 바탕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심원한 종지를 깨우치게 하고자 열 가지 큰 서원의 글에 의지하여 열한 장의 거친 노래를 지었다. 여러 사람의 눈에 극히 부끄러운 일이나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는 부합하기 바란다. 비록 뜻을 잃어버리고 말이 어긋나 성현의 오묘한 뜻에 알맞지 않더라도 서문을 쓰고 시구를 짓는 것은 범속한 사람들의 착한 본바탕을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 웃으며 외우려는 사람은 염송하는바 소원의 인연을 맺을 것이며, 훼방하면서 염송하는 사람도 염송하는바 소원의 이익을 얻을 것이니라. 엎드려 바라노니 훗날의 군자들이여, 비방도 찬양도 뜻대로 하소서! - 제7, 「가행화세분」
예경제불가
마음의 붓으로 그리온 부처 앞에 절하는 몸은 법계 없어지도록 이르거라. 티끌마다 부처 절이며 절마다 뫼셔놓은 법계 차신 부처 구세 내내 절하옵저. 아아, 신어의업무피염 이리 종지 지어 있노라.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
마음으로 붓을 삼아 부처님을 그리오며 우러러 절하오니 두루 시방세계 비취오시라! 한 티끌, 티끌마다 부처님의 나라 뵈이고, 곳곳의 절마다 온갖 부처님 뫼시옵니다. 보고 들을수록 부처로부터 멀어진 다생의 나를 만나오니 영겁의 긴 시간일망정 어찌 예경하지 않겠습니까? 몸과 말, 그리고 생각의 세 업을 싫은 생각 하나 없이 닦으오리다. - 제8, 「역가현덕분」
작품 해설 이 향가는 「보현행원품」의 앞의 대목을 형상화하여 노래로 지은 것이다. 우선 '마음'과 '붓'을 들어 고도의 은유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균여의 시적인 자질이 돋보인다. 마음으로 부처를 그리워하며, 붓으로 이를 그린다고 함으로써, "그린다"는 말 속에 담긴 중의성을 잘 활용한 셈이다. 또한 "티끌마다 많은 부처"라는 말 속에는 수많은 부처, 곧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들을 가리키면서도 '모든 중생은 곧 부처'라는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드러낸다. 균여는 부처를 그리워하며 우러러 절하니 티끌마다 부처나라가 보이고 온절마다 여러 부처를 모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처와 멀어진 다생의 나를 만날 수밖에 없으니, 영겁의 긴 시간 동안이라도 예경해야 되겠다고 토로한다. '다생'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몸, 말, 생각의 업을 정진하여 닦겠노라 다짐하고 있다. 균여는 화엄경의 중심사상을 가장 손쉽게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이 향가를 지었다. 결국 이 노래(향가)를 듣고 부름으로써 궁극적으로 마음속에 선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깨우쳐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간단한 시 속에 이처럼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함축시켰다는 점에서 균여의 시가 갖는 문학적 형상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말대로 부처를 진심으로 예경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중의적인 어휘와 은유적 표현 기법을 사용하고 어려운 불교 교리를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등 뛰어난 문학적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표현력은 비단 이 한 편의 향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딱딱한 종교적 교훈시 내지 포교시로만 보지 말고 역동적인 언어의 활용으로 인한 고도의 문학작품으로 보면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문학과 종교, 나아가 문학과 이념의 거리를 한층 좁힐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