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 정병헌, 이지영
1부 한문학의 대가들과 그 유산
구속을 싫어한 진보적 지식인, 허균
1. 구속과 자유의 공간에서 빚어낸 문학
허균(1569~1618)은 일반적으로 국문소설의 효시작으로 알려진「홍길동전」을 지었으며 김시습, 박지원과 함께 우리 소설문학사의 뚜렷한 획을 긋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와 예학에 사로잡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수용했다. 아울러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했으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이처럼 기존의 가치와 사고방식에 구속 받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후세의 문인들과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더욱이 자신의 문집 어디에도「홍길동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고전소설 작자로서의 영예를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파란만장한 벼슬살이
허균의 자는 단보요 호는 교산·학산·성소·성수·성옹·백월거사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그는 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 초당 허엽의 막내아들이다. 부친 허엽은 청주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허성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한씨 부인이 일찍 죽자 다시 예조참판 김광철의 여식을 후취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강릉 김씨 부인 사이에서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낳았다. 허균은 서울의 마른내(지금의 오장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강릉을 그의 출생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허균의 부친이 그가 태어나기 이태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온 뒤 서울에서 내직으로 벼슬살이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생지가 '서울'일 것으로 짐작된다. 허균은 자신의 출생지가 유명한 인물이 태어난 곳임을 자랑하며 상당히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의 「성옹식소록」을 보면, 자신의 집이 있던 마른내에는 청녕공주 저택에서부터 본방교까지 서른네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국초 이래로 김종서, 정인지, 양성지, 김수온, 유성롱, 이순신, 원균 등의 명인이 태어났다고 쓰고 있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아 장차 훌륭한 대문장가로서의 소질을 일찍부터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의 두 형, 곧 허성, 허봉뿐만 아니라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던 점을 감안한다면, 어린 시절 허균의 뛰어난 글재주는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허균의 학문은 친형 허봉과 누이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배움에 힘써 15세 때에는 둘째 형 허봉으로부터 글 솜씨를 칭찬 받을 정도에 이르렀다. 허균은 의금부도사 김대섭의 딸과 혼인한 17세 무렵에, 귀양에서 풀려난 둘째 형에게 고문과 한유·소동파의 시를 배웠으며, 서애 유성룡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허균은 문학수업을 하던 이 시기에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삼당파 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이었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신분이 천한 탓에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글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허균은 누이와 함께 그에게서 시 짓는 법을 익혔다. 더욱이 손곡은 허균의 인생관과 문학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허균이 서류천인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도 모두 이 스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점에서 문학수업을 하였던 원주 땅은 허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 되던 해 허균은 그를 아껴주던 둘째 형 허봉을 잃었다. 이는 허균이 12세 때 부친을 잃은 후 겪은 두번째 가정적인 불행이었다. 더욱이 생원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22세에는 그를 가장 아껴주던 누이 난설헌마저 죽었다. 막내로서 친형과 친누이를 잃은 허균의 충격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정적인 불행은 계속 이어져 24세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함경도 단천 땅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인 김씨와 첫아들을 잃고 만다. 이때 허균은 가지고 갔던 소를 팔아 부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전한다. 허균은 29세 되던 해 김효원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그는 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외가가 있는 강릉의 애일당을 찾아 여기서 2년간 머물렀다. 이때 허균은 퇴락한 애일당을 다시 짓고 애일당의 뒷산 '교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곳은 그가 마음의 평안을 얻고, 문학적 영감을 교감한 삶의 중요한 공간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애일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교산 언덕 위에 허균을 기념한 시비만 세워져 있다. 허균은 26세(1594, 선조27) 되던 해 2월,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29세 때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병조좌랑으로 있던 이듬해, 황해도 도서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기생들을 그곳 임지까지 데려와 즐기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직무를 등한히 한 죄로 부임한 지 여섯 달 만에 파직당하였다. 파직과 복직의 파란만장한 벼슬살이가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벼슬살이는 그의 적성과 성미에 맞지 않았던 듯, 대개의 뛰어난 문학작품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시련과 고난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정치나 벼슬의 공간은 그를 오히려 구속하는 족쇄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다시 맏형 허성의 도움으로 2년 뒤 관직에 복귀하였으며, 33세 때 형조정랑을 거쳐 이듬해에는 사예, 사복시정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36세 되던 해에는 수안군수 재직 시절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두번째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이 무렵 불교에 빠져들어 한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을 정도였다 한다. 허균은 37세에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었는데 그에게 학문과 문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그리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누이의 시집을 중국에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에 삼척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석 달 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 40세에 다시 공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서류들과 어울렸다. 그는 처삼촌인 심우영, 이경준 등과 사귀었으며, 또한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광해군이 보낸 충청 지방 암행어사의 감사에 걸려 또다시 파직되었다. 그 후 허균은 전라도 부안의 봉산에 내려가 그곳의 산천을 유람하였다. 이때 명기 매창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원래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 허균의『성소부부고』를 보면, 그가 매창과 시를 읊으며 즐기다가 밤이 되자 매창이 그녀의 조카딸을 자신의 침소로 들여보낸 일을 기록하고 있다. 허균은 매창이 죽자 그녀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매창의 무덤은 현재 부안에서 가까운 '매창뜸'이라는 공동묘지에 있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구나.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중국의 명기)의 무덤을 찾아오려나.
- 「애계랑」
허균은 41세(1609) 되던 해 명나라의 책봉사신이 오자 원접사 이상의의 부름을 받아 서장관의 일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어서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1610)에는 명나라 성절사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가 면직되었다. 그러다가 이 해에 궁중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의 시관이 되었는데, 이때 '자서제질사돈방'이라는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승종, 이이첨 등이 친인척을 과거에 부정으로 합격시킨 사건인데, 허균도 이때 큰형의 둘째 아들과 여서 박홍도를 부정으로 뽑았다. 이 일로 인하여 42일 동안 옥고를 겪은 뒤 전라도 함산으로 유배당했다. 그는 함산 유배지에서 자신의 문집『성소부부고』를 직접 정리하여 완성하였다. 이 사건은 그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처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균이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휩쓸리던 허균에게 그나마 믿음을 주고 의지가 되었던 큰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말로 혼자 남게 되었다.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는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고(46세),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의 부사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태평광기』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얻어 국내에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사신 일로 인해 그는 48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윤선도가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광해군은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때 49세로 좌참찬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기준격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은 허균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허균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허균이 50세가 되던 해 8월, 남대문에 괴서가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심문시킨 끝에 역적 모의의 죄목을 뒤집어씌워, 허균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서쪽 저자거리(서시)에서 책형(능지처참형)으로 죽이고 말았다. 그는 당쟁의 와중에 휩쓸려 권력투쟁의 전면에 나섰다가 50세의 나이로 불운하게 죽고 만 것이다. 허균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영민하며 시를 짓고 감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내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목대비의 폐모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기생이나 무뢰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등의 반인륜적이고 경박한 행위를 일삼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허균의 전 생애를 돌이켜볼 때 그는 가정적으로 매우 불행하였으며,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갈등을 심하게 겪었다. 그가 44세 되던 해 마지막 남은 혈육 큰형 허성마저 죽자, 그 이후로는 더이상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당쟁의 격랑 속에 자신을 내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허균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잦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서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파직 이유는 그의 돌출적이고 경박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외직에 나가서는 거의 1년을 지탱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귀양살이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유배는 그에게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 시기에 그는 문학활동을 집중적으로 하거나 자신의 글을 정리하였다. 그는 『성수시화』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 해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렵고 험난한 체험을 하게되면 비로소 삶의 진실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기묘한 문학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난의 체험을 통한 문학, 그것이 곧 허균 문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종사관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그의 시적 감식안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막내로서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면서 자라 자유롭고 무절제한 생활에서 비롯된 탓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 외에도 새롭고 다양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그의 진보적인 개방성과 천재적인 능력 등에서 이룩되었다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개혁성과 진보성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그에게 내려진 '경박자'니 '표리부동자'니, 혹은 '천지간의 한 괴물' 등의 부정적인 평가는 45세 이후 중앙의 정치판에 뛰어들어 당쟁의 급류에 편승했던 그의 마지막 생애에 국한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허균은 재주는 있으나 덕이 부족했던 문제적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허균은 역모의 죄로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과연 남아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하지만 그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있는데, 현재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건지산 아래쪽에 자리잡은 양천 허씨의 묘역이 그곳이다. 원래 이들 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곳에 한데 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균의 무덤은 그가 반역죄로 처형된 후 어떤 방법으로든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묘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2. 허균의 사상과 문학
허균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불여세합', 즉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사우제기」)고 하였다. 이때의 '세상'은 기존의 완고한 중세적 질서를 말한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를 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그는 서얼들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할 만큼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었다. 광해군이 통치하던 당시는 당쟁이 격화되고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드러났으며,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가 동요되던 시기였다. 그는 중세적인 체제 속에서 살면서도 체제비판적인 사고방식의 소요자였다. 그런데「홍길동전」을 허균이 지었다는 사실은 택당 이식의『택당집별집』의 기록에 근거할 뿐, 그 밖의 어느 문헌에도 더이상 자세한 사실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과연 이 소설 작품을 허균이 지었느냐 하는 문제는 학계의 큰 쟁점이 되어왔다. 이러한 저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의 방법이 '허균의 사상'을 살피는 일이었다. 곧 허균의 사상이「홍길동전」의 작품적 의미와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흩어져 있는 여러 글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밝히고, 이것이 소설 작품 속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 동안 허균의 사상적 특징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이 거론되었다. 그의 뚜렷한 사상적 흔적으로는 정치사상을 들 수 있다. 이것은『성소부부고』에 '논'의 개혁, 국방정책의 강화, 신분계급의 타파 등으로 정리된다.「정론」에서 그는 나라를 다스릴 때는 유능한 신하가 있어야 하며 권신이나 소인배가 있으면 임금은 이상정치를 펼 수 없다고 하였다.「관론」에서는 관원이 너무 많아 기구와 관료를 줄여 국고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며,「후록론」에서는 관리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의 넉넉한 봉록을 주어야 부패와 착취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병론」에서는 군정의 난맥상을 예로 들면서 모든 계층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설은「호민론」과「유재론」이다.「호민론」에서는 위정자가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백성을 객관적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정도에 따라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면서 이들의 저항적 잠재력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 부류의 백성 가운데 호민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호민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국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호민이 나머지 두 부류의 백성을 모아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들면 농민저항이 된다. 허균은 한나라 때의 황건적, 당나라 때의 황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견훤과 궁예가 호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홍길동전」의 주인공 길동은 호민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재론」에서 그는 불평등한 인재등용을 비판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모순된 제도 아래서 인간의 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는 인재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데, 나라에서 가문과 과거만으로 등용을 제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인재로서 서자와 개가한 집 자손을 들고 있다. 적서차별을 부르짖는「홍길동전」이야말로 그의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부당한 차별로 불행하게 살다간 인물등의 전기를 쓰기도 하고, 시선집인『국조시산』에서는 서얼들의 시를 수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에 이단시되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한때 출가를 생각했을 만큼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여 자주 파직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삼척부사에서 파직당하고 난 뒤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예교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오 부침을 오로지 정에 맡겨두리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나의 생을 살아가련다. 친우들 서로 와서 위로를 하고 처자는 맘 속으로 불평하지만, 즐거운 소득 하나 있는 것 같아 이백과 두보 이름 나란히 했네.
- 「문파관작」
이 한시에서는 기존 예교의 구속에서 자유롭고 자신만의 법대로 살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그만큼 성리학의 역사적인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균은 불교적 지식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글에서 "불서를 읽는 까닭은 그 글이 좋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파적거리를 삼는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불교서적의 구득은 자신의 문장 묘미를 계발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심리적인 갈등과 관련이 깊다. 그는「문파관작」의 첫번째 시에서 "불교를 대하는 것은 마음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벼슬살이에 대한 좌절과 가정적 불행에 따른 마음의 불안정을 위안받기 위하여 불교에 심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갈등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에도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단시되던 양명학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지녔다. 도교에 대해서는 주로 양생굴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허균은 노자를 비롯하여 31열선에 대한 찬도 지었으며, 단학 수련에도 상당한 지식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은둔사상을 동경하여 4천 권이 넘는 중국 선가의 서적을 발췌하여 『한정록』으로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서학(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져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이에 관한 기도문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이처럼 허균은 기존의 성리학적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에 이단시되던 여러 방면의 사상과 지식에 폭넓게 관심을 갖고 수용하는 열린 시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억압받는 백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마디로 당대의 문제적 인물이면서 시대적 선각자였던 것이다.
주체성과 독창성의 문학
허균은 문학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그는 우선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감히 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백성의 진솔한 감정이 토로된 국풍, 곧 민요를 시도의 정도로 삼았다. 또한 자연스런 감정을 발현하기 위하여 '현실의 체험'을 중시하거나 '인간의 꾸밈없는 마음의 경지를 포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문장이 부귀공명의 편안함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더욱더 묘경에 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유배생활을 통해 터득한 바이다. 그는 시란 천기, 즉 진솔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포착할 때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늘이 부여한 진솔한 감정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는 '개성을 중시하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역대 한시의 대가들의 글을 인용하는 '의고주의'를 비판하고 자기만의 글과 개성을 강조했다. 자신의 시가 당시와 같다거나 송시와 같다는 말을 듣기보다 오직 '허균의 시다'라고 평가받기를 좋아했다.
지금 시를 짓는 사람들은 한·위·육조·당을 말하고 그 아래로 소동파·진사도를 말한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말은 망녕된 소리다. 이는 기껏 말뜻을 주워 모아서 그대로 답습하거나 글귀를 적절히 표절해서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시변」
허균은 이 글에서처럼 선진시대의 글을 모범으로 삼고 또한 이러한 방향에서 고문운동을 일으킨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동파 등의 전례를 따르는 일을 거부하였다. 문장은 무조건 고문을 본받아야 한다는 당시의 풍조를 거부한 것이다. 여기서 고문이란 '한문학에서 모범이 되는 성현의 글(문장)'을 의미한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유종원 이전의 글이 모범이 되는 이유가 오직 상하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통하게 했다는 데 있다"면서, "한유, 유종원도 자기 시대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평가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고문이 아닌 '상어'의 사용을 주장했으며,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내가 보건대(유종원, 구양수, 소동파 등의 글은) 비록 간략하고 웅혼하며 길고 분방하여 굳세고 기이한 듯하니, 이는 당시의 상어를 변화시켜 진실함을 만든 것이며 쇠를 녹여 금을 만든 것이다. (...) 그대는 이들의 글을 자세히 보았는가? (...) 유종원, 구양수는 스스로 유종원,구양수가 되었다. 서로 답습하지 아니하고 각각 일가를 이룬 것이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이런 경지를 배우는 데 있어야 하며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짓고 답습하고 훔치고 닦아내다가 비난을 받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 「문설」
허균은 개성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상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어란 '당대의 일상어'로서 한자를 완전히 버린 것이라기보다는 '비어나 속어를 섞어 쓴 우리말식 한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한문을 우리말식으로 바꿔 쓰는 일은 다시 조선 후기의 문인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었으니, 연암 박지원은 고문을 버리고 시속문으로 바꿔 쓰려고 하였다. 허균은 송강 정철의 글을 평하기를, "정송강은 속구를 잘 지었다. 그의「사미인곡」과 권주사는 들을 만하다"고 하였다. 속구란 '우리말로 된 글'을 말한다. 그가 속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그의 국문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서포 김만중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허균은 또한 '남의 글을 답습해서는 안되고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글을 모범으로 삼아 모방하기를 일삼던 당대 풍습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허균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 것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독창적인 문학에 대한 자각은 고루한 인식에 젖어 있던 당대 사대부의 문학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런 점에서 허균의 근대적 문학관은 주목할 만하다.
시를 알았던 사람
허균 문학의 참 모습을 살필 때는 한시 창작과 「홍길동전」외에, 시화집의 편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25세에 이미 시화서 내지는 시 비평서라고 할 수 있는『학산초담』을 찬하였다. 이 책은 삼당파 시인을 비롯하여 그의 형인 허봉, 누이인 난설헌 등의 시에 대한 시 비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직 그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1년 전에 엮어진 것이니, 시를 이해하는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중국을 왕래할 때, 또는 각 지방을 다스리러 내려가거나 여행할 때, 혹은 수시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전해듣거나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거나 시로 제작하는 열의를 보였다. 29세에는 연행에서 지은 시 37편을 묶은 「정서조천록」, 이듬해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서행한 뒤 지은 시 19편을 모은 「무술서행록」, 31세에는 황해도 도사로 있을 때 지은 시를 묶은「좌막록」,33세에는 해운판관을 지낼 때 지은 일기「조관기행」, 34세에는 원접사 이정구를 모실 때 지은 시를 엮은「임인서행록」, 또 같은 해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지은「풍악기행」, 38세에는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을 대접하며 서행하면서 쓴 일기인 「병오기행」 등을 남겼다. 또한 허균은 39세에는 삼척부사에서 파직된 뒤 명시들을 모아『동국시산』을 엮었고, 41세에는 원접사 이상의의 종사관으로 서행하면서 시와 「을유서행록」을 지었다. 이듬해에 병이 들어 요양하면서 궁인을 만나 궁 안의 일을 자세히 들은 뒤 「궁사」100수와 『한정록』을 지었다. 이 『한정록』은 중국 사신 주지번이 준 책을 읽고 은일·한적·퇴휴·청사의 사문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연행에서 구입한 책 4천여 권을 읽고 16권으로 증보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 43세에는 함산으로 귀양 가서「식소록」을 엮었다. 이곳에서 또한 이미 39세 때 엮었던『동국시산』을 다시 손질하여 석 달만에『성수시화』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최치원부터 허균 당대에까지 800여 년 동안의 시들을 96조목으로 나누어 일일이 품평하고 있는바, 위로는 사대부에서부터 아래로는 여류, 우사, 승려, 창기에 이르기까지의 시를 망라하고 있다. 그는 이 귀양지 바닷가에서 쌀겨마저 먹지 못하는 어려운 나날을 보내면서, 그 옛날 산해진미조차 먹기 싫어했던 일을 생각하며 「도문대작」을 지었다. 이 제목은 '푸줏간을 지나면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옛날의 영화를 생각하며 생계의 고통을 잊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43년 동안 문필생활의 총결산인 문집 『성소부부고』를 정리하여 엮었다. 이 책은 그가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해졌다고 하며 부록으로 『한정록』이 있다. 그 밖에도 44세 이후 2년간 부안에 살면서 호남지방을 여행할 때 지었다는 「계축남유초」, 46세 이후 2년간 중국을 두 번 왕래하면서 견문한 바를 기록한 「을병조천록」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임진왜란 사실을 적은「동정록」은 『선조실록』의 편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허균에 대해서는 후세의 문인들이 "시를 안 사람"이라고 했고, "감별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도 했다.『국조시산』은 그의 시적 감식력을 잘 보여준 시선집으로 후세의 문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성정의 자연스런 발로"를 가장 중시하였으며, 송시보다는 당시를 좋아하였다. 이는 그의 스승인 손곡 이달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격률은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당시를 시의 전범으로 삼으면서도 시법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의 유명한 시 「궁사」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건춘문 밖 의장대 소리 우레 같고 사헌부 정재로 조그만 잔치 열었네. 한 줄로 꽃 속에서 궁녀가 나오더니 양궁께서 비로소 서총대로 거둥하시네.
건춘문은 세자궁이 있는 곳이고 서총대는 임금이 거둥하여 무관들의 무예를 점검하던 곳이다. 봄날에 임금이 그곳으로 행차하는 거둥과 그때의 의례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전원이 거칠건만 어느 때나 돌아갈까. 머리가 흰 이 사람은 벼슬살이에 뜻이 적네. 적막한 산림에 봄일(춘사) 다 지나가고 성긴 비에 장미 젖는 것을 다시금 보게 되네.
고요한 낮졸음은 비 내릴 때부터요, 베갯머리 더운 바람 관청에 넉넉하네. 소리야, 점심 먹으라 재촉하지 말아라. 꿈 속에서 바야흐로 무창의 고기를 먹나니.
- 「초하성중」, 2
성기게 내리는 비에 핀 장미를 보고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단잠에 취해 있을 때 깨우지 말라는 것은 그러한 생각을 꿈속에서나마 실현하고픈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아마도 자신의 잦은 파직과 그로 인한 벼슬살이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의 시 가운데는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묘사하는 것들도 있다.
해 저문 날 황촌에서 눈물 짓는 아낙 귀밑머리 서리 같고 두 눈마저 침침하네. 남편은 빚 못 갚아 북녘 집에 갇혀 있고 아들은 도위 따라 서원으로 떠나갔네. 난리통에 집안에 쓸 만한 것 불타 없고 이 산 저 산 피난길에 옷가지도 다 잃었네. 먹고 살 일 아득해서 살 맛마저 안 나는데 관가 차인 무슨 일로 또 문을 두드리나.
-「기견」
난리통에 괴로움을 겪는 것은 아낙네들이다. 남편은 빚으로 감옥에 갇혔고 아들은 전쟁터로 끌려갔다. 그런데도 관청에서는 또 수탈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 원망으로 가득 찬 백성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는 듯하다. 또한 허균은 여성들의 입장을 따뜻한 시선으로 노래한 시들을 짓기도 하였다. 그 유명한 시가「노객부원」이라는 서사시이다. 원래 「풍악기행」이라는 시편 속에 있는데, 허균은 금강산을 찾아가는 도중에 철원의 한 객점에서 늙은 여자를 만나 그때 들은 이야기를 이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동주성 서편으로 가을해가 뉘엿뉘엿 보개산 마루턱엔 저녁노을 끼었구나. 객점을 찾아드니 머리 센 할머니 남루한 차림으로 사립문 열고 나와서 길손을 맞이하네. 이 할머니 하는 이야기 "나는 본디 서울 사람으로 유리파산하고 외톨이 타관살이하는 신세라오. 지난번 난리에 왜놈들이 서울을 함락할 제 자식 하나 데리고 어머님과 낭군을 따라 (...)
이 작품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늙은 여인을 객점에서 만나 그녀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시는, 그녀가 임진왜란으로 남편과 자식, 그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유리걸식하다가 어머니와 낭군을 왜군에게 잃고 또한 아들마저 빼앗긴 채 자기만 혼자 남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러던 중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건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난리통에 겪는 아낙네의 고통을 솔직하게 그려가는 시인의 관찰력이 예리하다. 허균은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채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떠도는 노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요에서 인용한 것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황주염곡」이 있다. 모두 아홉 수로 된 이 작품을 보면, 일관된 서사적 줄거리는 없지만 대개는 남녀 사이의 여러 애정담이 나열되어 있다.
윗녘에 정방산(황주에 있음) 높고 높고 아래로 족금계 흘러흘러. 차라리 창기가 될지언정 상인의 아내는 되지 마소. 상인 낭군 강물 따라 떠나갈 제 팔월에는 돌아온다 기약하고 구월이라 중양날이 지났건만 담근 술 익었는데 임 소식은 없네. (...)
이 시에서는 한 여인이 기약하고 떠난 뒤 소식이 없는 장사꾼 남편에 대해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젊은 남녀의 밀회와 사랑을 묘사하거나 중국 비단을 무역하는 상인이 기생을 만나 재산을 탕진한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모순된 사회현실을 타파하다
다음은 허균의 산문을 살펴보자. 먼저, 소설「홍길동전」에 대해서는 작품의 저자, 작품의 주제, 그리고 형성의 근원이 소재나 내용 등의 여러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작품의 저작자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택당 이식의 기록(『택당집 별집』)이 있는데다 이를 부정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홍길동전」작자의 영광은 여전히 허균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홍길동전」은 허균의 친필본이나 그가 생존하던 당시와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진 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판본만 있는데, 허균 시대와는 거의 3백 년 가량의 시간적인 격차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과연 한글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한문으로 지어진 것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한문본은 유일하게 서강대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30장본)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홍길동전」은 한글로 먼저 지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판본 가운데 1905년에 한남서림에서 출간된 목판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그렇다면 약 3백 년 정도의 시간적인 거리가 있는데, 그 판본이 과연 원전의 모습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큰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홍길동전」의 주제에 대해서는 계급타파, 특히 적서차별의 폐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여기에 지배층의 불의한 재물을 빼앗아 빈민을 구제하려 했다는 주장, 모순된 사회현실을 타파하고 더 나아가 율도국의 왕이 됨으로써 사회혁명을 고양하려 했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그 동안 국문학계의 업적들을 정리해보면 대강 이러한 견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사회소설이자 의적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형식과 소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이 작품의 형성 배경으로 중국의「수호전」이 주목되면서 이 둘을 비교하는 논의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결과「홍길동전」에 나타난 사회적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 등에서「수호전」과 비슷한 부분이 발견되어 이 작품이 중국소설을 기초하여 씌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밖에「삼국지」,「서유기」등과 비교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비교문학적인 관점은 더 나아가 서양의 악한소설과 비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는 세계문학 속에서 한국문학 작품의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소재를 국내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먼저 국내의 역사적 사실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는 노력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광해군 당대의 '칠서지옥 사건', 연산군대의 '홍길동', 명종대의 '임꺽정', 선조대의 '이몽학의 난' 등이 거론된다. 여기에 이 작품이 갖는 구조적인 특징을 고려하여, 이것이 우리 문학의 오랜 서사적인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주장하는 견해가 대두되면서 보다 근본적인 배경 논의를 이끌어냈다. 즉 「홍길동전」에서 추출되는 전기적 유형은 우리 신화나 민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조동일 교수는 영웅의 일생을 근간 구조로 하는 한국 서사문학을 신화에서부터 소설에 이르기까지 두루 검토하면서,「홍길동전」이 신화에서 비롯된 '영웅의 일대기' 구조를 수용하여 소설화한 첫 작품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이 작품이 우리 서사문학의 전통 속에서 발생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밖에도 소위 「지하국대적퇴치담」이라는 민담에서 그 형식적 연원을 따지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궁극적으로「홍길동전」이 단지 중국소설의 영향으로 생겨났다는 견해를 불식하고, 우리의 서사적 전통과 연관되어 형성되었음을 밝히는 소중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집안에서 적서차별을 겪게 되는데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알아채고는 자객을 죽인 뒤 집을 나선다. 그 뒤 활빈당의 두목이 되어 의적행세를 하다가 부친으로부터 호부호형하는 것을 허락받고 나아가 병조판서의 벼슬에 제수되면서 나라를 떠나 해외로 나아가 율도국의 왕 노릇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적서차별과 봉건지배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또 이를 극복하고 있다. 즉 작가는 홍길동 개인의 문제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나아가게 하여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모순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시키고 있다. 홍길동은 활빈당이라는 도둑집단을 만들어 통치체제에 저항하고 백성을 구제한다. 이것은 자신의 문제를 백성, 즉 사회 전체의 불만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홍길동이 건설했던 율도국은 고전소설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상국가로서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남방의 섬과 유사하다. 율도국의 위치에 대하여 설성경 교수는 그곳이 일본의 '오키나와'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홍길동의 고향에 대해서 장덕순 교수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곧 '아치실'이라는 견해를 내세운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홍판서가 외직에 있을 때 이 마을에 들러 이곳의 여자와 사귀었는데, 여기서 난 아들이 홍길동이며 태어난 곳도 납터골이라고 부른다"고 이야기한다. 더욱이 이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는 홍길동의 태 무덤이 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허균의 산문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홍길동전」외에 다섯 편의 전이 있다. 이것들은 전통적인 전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독창적인 허구성을 가미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도 전통적인 전과는 달리 재능은 있지만 불우한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거나 도가 계통의 인물이라는 특이성을 갖는다. 「남궁선생전」에서 주인공 남궁두는 서울에서 벼슬할 때 시골에 있는 그의 첩이 간통을 하자 활로 쏘아 죽인 뒤 붙잡혀 고생을 한다. 남궁두는 승려가 되어 무극의 치상산의 노인에게 선술의 비결을 익혀 신선의 도를 터득하였지만, 노인은 그가 수련을 제대로 못한다며 속세로 내려보냈다. 허균이 부안에 있을 때 남궁두가 와서 비결을 주고 갔는데 종적을 모른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남궁두는 실제 인물인 듯한데『어우야담』, 『동야휘집』등의 야담집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전한다.
「장산인전」을 보면 의인 장산인은 부친이 전해준 책으로 귀신을 부릴 줄 알았고, 지리산에서 기인으로부터 신선의 술법을 익혔다. 18년 만에 하산하여 서울에서 흉가의 뱀을 죽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칼을 맞았지만 피가 흰 구름처럼 뿜어져 왜적이 도망갔다고 한다. 그는 죽은 뒤 산 사람처럼 친구의 집에 묵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도가적 인물이 자신의 기이한 능력을 겨우 뱀이나 죽이는 데 활용하여 능력이 제대로 쓰이지 못함을 고발하고 있다.
「장생전」에서 밀양 좌수의 아들로 거지노릇을 하는 장생은 재주를 부려 자신의 집 종이 잃어버린 머리꽂이를 찾아오고, 동냥해온 것을 모두 다른 거지에게 나누어준다. 수표교에서 죽었는데 송장은 벌레가 되었다. 그의 친구가 새재를 넘다가 그를 만났을 때는 자기는 죽지 않고 동해의 한 섬으로 날아간다고 했다. 재능을 감추며 살아가는 장생은 불우한 인물로서, 작자는 그가 죽어서 동해의 섬을 찾아갔다고 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는 의식을 보여준다.
「손곡산인전」은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을 입전한 것이다. 그는 서자로서 문장은 뛰어났지만 쓰이지 못했다. 이를 탓하며 불평도 일삼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다고 한다. 능력은 있으나 쓰이지 못하는 인물의 전형을 그리고 있으니, 여기서는 당대의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난다.
「엄처사전」에서 가난한 엄처사는 효도와 청렴한 행위로 고을에 이름이 자자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나라에서 그를 불렀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고 78세에 죽었다. 그는 선비였지만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지만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한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 다섯 편 전의 주인공들은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불우하게 인생을 보낸 인물들이다. 이러한 주인공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허균의 「유재론」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이들 주인공은 당대 현실에 모순을 느끼고 그 현실을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 세계는 도가적 세계이다. 게다가 현실을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고있으니, 이는 「홍길동전」에서 주인공이 율도국을 건설하는 점과 같다. 그런 점에서「홍길동전」의 율도국, 「남궁선생전」의 치상산, 「장산인전」의 지리산, 「장생전」의 해동일국토는 동일한 성격의 세계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들 작품에서는 모두가 인간에 대한 가치관념을 천민의 세계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허균은 당대에는 금기시되었던 천민이나 소외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입전하였다. 이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인간적 가치를 옹호했음을 의미한다. 허균문학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인간적 가치의 인식은 조선 후기 박지원의 여러 전 작품에서 발견된다.
3. 「장생전」감상 허균의 한문소설 다섯 편 가운데 하나인「장생전」은「홍길동전」과 관련성이 깊다. 그런데다가 조선 후기 전 작품들과 유사성이 많은 탓에 일찍이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권8 문부 5, 전)에 실려 있다.
장생전 장생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기축년(선조 22, 1589) 사이에 서울에 드나들며, 비렁뱅이 노릇을 하였다. 누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도 모릅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와 할어버지가 살고 있는 곳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밀양 좌수로 계실 때에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겨우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비첩의 고자질에 혹하여 나를 전장을 맡긴 종의 집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뒤 나이 열다섯에 평민의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몇 해 만에 아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호서와 호남의 수십 고을을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막 서울로 온 것이지요." 장생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눈매는 그림 같고 이야기와 웃기를 잘 했으며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를 애처롭게 하여 남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늘 빨간 비단으로 지은 겹옷을 입되 아무리 춥고 더워도 바꿔 입지 않았고, 어떤 술집이나 기생방 치고 그가 드나들며 익숙하게 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또 술을 보면 곧장 가득히 부어 들고 노래를 불러 기쁨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자리를 일어섰다. 그는 술이 반쯤 취하면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인, 밥 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의 시늉을 하되 거의 실물에 가까웠다. 또 한 가면으로 십팔 나한을 본받되 거의 흡사하였고, 또 입을 움직이며 호각, 퉁소, 피리, 비파, 기러기, 고니, 두루미, 따오기, 까치, 학 따위의 소리를 짓되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밤중에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를 흉내내면 이웃집 개와 닭이 모두 따라서 우짖었다. 아침 나절이면 나가서 들이나 저자거리에서 동냥을 구하여 하루에 얻은 것이 거의 서너 말이 되면, 두어 되만 밥을 지어먹고 나머지는 다른 비렁뱅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므로 많은 비렁뱅이들이 그의 뒤를 따르곤 하였다. 그 이튿날도 역시 그렇게 하는데, 남들은 그가 하는 일을 측량하지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악공 이한의 집에 몸을 의지하였다. 계집종 하나가 그에게 호금을 배우느라고 아침 저녁으로 만나게 되어서 친숙해졌다. 하루는 그 계집종이 자주빛 봉미(머리꽂이)를 잃어버렸지만 그 잃은 장소를 몰랐다. 그녀는 "아침에 네거리로 오다가 길에서 준수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가 웃으며 농을 건 뒤 몸을 스치더니 이내 봉미가 사라졌다"고 되뇌이며 울기만 하였다. 장생은 "에이, 어린 녀석이 감히 이런 짓을 해. 얘야, 울지 마라. 저녁 나절이면 내 소매 속에 넣고 오마" 하고는 나는 듯이 어디론지 가버렸다. 저녁이 되자 그는 그 계집종을 불러냈다. 서편 네거리 곁 경복궁 담을 돌아서서 신호문 모퉁이에 이르자, 큰 띠로써 계집종의 허리를 맨 뒤 왼팔에다 걸고는 몸을 한번 솟구쳐 나는 듯이 몇 겹이나 되는 문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해는 저물어서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별안간 경회루 위에 닿았다. 청년 둘이 촛불을 잡고 나와 맞이하였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크게 한바탕 웃고, 이내 들보 위 컴컴한 구멍 속에서 금, 구슬, 비단, 견직 따위를 수없이 많이 끄집어냈다. 계집종이 잃어버렸던 봉미도 그 속에 있었다. 그 청년은 이를 돌려주었다. 장생이 말하였다. "두 아우님은 행동을 삼가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자취를 알게 하지 마시오." 돌아올 때는 날아왔는데, 북편의 성에 이르러 계집종을 그의 집으로 보냈다. 그 이튿날이었다. 날이 채 밝기 전에 계집종은 이한의 집을 찾아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하였다. 장생은 오히려 취하여 자는데, 코 고는 소리가 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생이 밤에 문을 나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임진년(선조 25, 1592) 사월 초하룻날이었다. 그는 술 몇 말을 마신 뒤에 크게 취하여서 네거리를 가로막은 채 춤을 추며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다. 밤이 되자 수표다리위에 거꾸러졌다. 다음날 사람들이 보니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그의 시신은 썩어서 벌레가 되어 낱낱이 날개가 돋혀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 없어져버렸고, 다만 옷과 버선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인 홍세희는 연화방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장생과 가장 친밀한 사이였다. 그 해 사월에 장수 이일을 따라 왜적을 막으러 갔었는데, 조령에 이르러 장생을 만났다. 장생은 짚신에다 막대를 끌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몹시 기뻐하자, 장생이 말하였다. "나는 실은 죽은 게 아닐세. 저 동해 속에 한 섬나라를 발견하러 가는 길이라네." 그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자네 올해에는 죽지 않을 텐데, 전쟁이 일어나면 높은 숲으로 들어가지, 물가로는 가지 말게나. 그리고 정유년(1597)에는 결코 남쪽으로 오지 말 것이며, 혹 공무가 생겨서 남으로 오더라도 산성엔 오르지 말게." 말을 끝내자 곧 나는 듯이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는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 후 홍세희는 탄금대 싸움에 장생의 말을 기억하고는 산 위로 내달려 올라가 죽기를 면하였다. 정유년 7월에 그는 마침 금군으로 입직하였다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이원익 상국에게 교지를 전달하러 영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는 장생이 일찍이 경계해주었던 말을 모두 잊어버렸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성주에 이르러서 왜놈들이 쳐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황식성의 경비가 튼튼하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그 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었고, 홍세희는 결국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곧 허균) 일찍이 젊었을 때 협사들과 친하게 사귄 적이 있었다. 장생과 더불어 농담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탓에, 그의 방술을 빠짐없이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아아!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옛사람이 말하는 '검선'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작품 해설 밀양좌수의 아들로 비렁뱅이 행세를 하는 장생은 잘생긴 외모에다 노래까지 잘 하는데 기생집 오입쟁이 노릇을 하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인, 밥 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의 흉내를 내기도 하고, 입을 움직여 모든 악기와 조수의 소리를 흉내냈다. 그는 악공 이한의 집에 하숙을 하였는데, 하루는 그 집 여종이 머리꽂이를 잃고 울기에 저녁에 여종을 데리고 경복궁 담을 넘어 경회루 위에 올라가 머리꽂이를 찾아주었다. 그는 술에 취하여 수표교 위에서 죽었는데, 시신이 썩어서 벌레가 되어 날아갔다. 그의 친구 홍세희가 조령을 넘다가 그를 만났는데, 그는 홍세희에게 자기는 죽은 것이 아니라 동해 속의 이상적인 섬 나라를 찾으러 간다고 말하면서, 홍세희에게 몇 가지 예언을 남겼다. 훗날 그것들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다시 홍만종의『해동이적』속의 '장생'이나 김려의『담정총서』속의「장생전」등에서도 보인다.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길이가 약간 다를 뿐이다. 이로 미루어 조선 중엽에는 위의「장생전」과 유사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은 우선 기인의 전기적 성격을 띠고 있으니, 장생은 미남자요 노래도 잘 부른데다가 성대 묘사와 여러 부류의 사람들 모습을 흉내낼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비록 비렁뱅이 노릇을 하면서도 예사로운 인간이 아니어서 선도의 술법을 익힌 이인이었다. 그의 시신이 썩어서 벌레가 되어 날아갔다는 대목에서 도교의 시해사상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장생이 해동의 섬나라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일찍이 허균이「홍길동전」에서 보여준 율도국 건설과 같은 '이상향 건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섬나라 이상향의 건설 대목 외에도 장생이 걸인을 돕고 있다는 점, 잃어버린 머리꽂이를 왕궁 속의 경회루에서 찾아냄으로써 그곳을 도적의 소굴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홍길동전」의 내용과 상통된 부분이 많다. 홍길동이 도적의 괴수가 되어 훔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궁극적으로 왕권에 대항하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회루는 왕권의 상징인 궁중에서도 연회와 주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장생이 그곳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온다는 것은 작가에게 그곳이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장생의 행동은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광문자전」의 주인공 광문과도 상통되고 있어서, 허균문학이 연암문학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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