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11. 황금을 사랑하면 별을 잊어 버린다. - 미다스 왕의 황금손
그리스 신화에 소아시아 프리기아 왕국의 왕으로 등장하는 미다스는 크레타의 미노스 왕과 비슷하게 반은 역사적인 인물로 추정된다. 프리기아 왕국이 있었던 상가리우스 지역의 바위로 된 기념비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 고대 앗시리아에서는 미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기록해 놓은 바에 따르면, 상당히 명민한 통치자였던 미다스는 외적의 침입을 받고 B.C 700년경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미노스와 마찬가지로 미다스도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조의 이름이었으리라 추측한다. 미다스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전해 오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저 유명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다.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임을 알게 된 이발사가 임금의 언론 탄압(?) 때문에 여위어 가다가 결국 빈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국가 기밀을 털어놓고 말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알다시피 그 뒤로 구덩이에서 갈대가 자라나 바람만 불면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속삭여대는 바람에 그 국가기밀이 그만 국민적 상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미다스가 당나귀 귀를 가지게 된 억울한 연유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연인즉슨 이러하다. 프리기아 땅에 사는 하신 마르시아스는 사슴뿔로 만든 피리를 기가 막히게 잘 불었다. 그래서 마르시아스의 피리 솜씨 앞에서는 아폴론의 수금 솜씨가 무색하겠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 기어이 아폴론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명색이 음악의 신으로서 듣기에 그다지 기분 좋은 소문은 아니었다. 해서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찾아가 솜씨를 겨뤄 보자도 했다(아폴론과 솜씨를 겨룬 상대는 전하는 이에 따라 다르다. 목신 판이라고도 하고 사티로스라고도 한다. 또 마르시아스이기는 하나 그는 하신이 아나리 보통 인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의 껍질을 산 채로 벗기자는 끔찍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르시아스가 겁없이 내기를 받아들인 것은 상대가 아폴론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폴론은 그때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서 잠시 양치기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양치기 차림으로 와서는 자신이 누구라는 내색도 않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니 이를테면 비겁한 함정 수사 였다. 그런데 이 두 신의 솜씨가 겨루기에 심판으로 초대된 이가 바로 산신 토몰로스와 미다스였다. 경연이 끝난 뒤 토몰로스는 아폴론의 승리를 판정했으나 미다스는 눈치 없이 마르시아스의 손을 들고 말았다. 노한 아폴론은 하신 나부랭이의 피리 가락과 음악의 신이 타는 수금 가락도 제대로 가려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다스의 귀 같잖은 귀 를 그만 볼썽 사나운 당나귀 귀로 만들어 버렸다. 미다스로선 고래 싸움에 애꿎게 등이 터진 셈이었다. 신의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자신이 좋다고 느낀 쪽의 손을 들어준 대목을 놓고 볼 때 미다스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 왕이었던 모양이다. 비록 이발사 때문에 망신을 좀 당하긴 했지만 소신껏 살자면 늘 그만한 수난쯤은 따르기 마련이다.
저주받은 황금의 손
그런데 미다스는 소신만 있었던 게 아니라 풍류도 제법 아는 멋쟁이었다. 어느날 프리기아의 농부들이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노인을 데려왔다. 다름 아닌 주신 디오니소스의 양아버지이자 스승인 실레노스였다. 실레노스는 반인 반수의 사티로스 종족이었으나 지혜롭기로 유명했다. 후세의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실레노스에 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미다스는 인사 불성의 노인이 실레노스임을 알아보고 자그만치 열흘 동안이나 주연을 베풀며 잘 대접했다. 이 사실을 안 디오니소스는 너무나 고마운 나머지 미다스에게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 테니 무엇이든 말해 보라고 하였다. 고기 수천마리를 얻는 것보다 고기 잡는 법을 배우는 게 낫다는 이치를 꿰고 있던 터라 미다스는 자신의 손이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대답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청이 마땅찮긴 했지만 약속한 대로 소원을 들어 주었다. '원하는 대로 되리라'는 디오니소스의 말을 듣고 미다스는 처음엔 반신반의하였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참나무 가지를 한번 꺾어 보았다. 가지는 곧 황금 가지로 변했다.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미다스는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손을 대보았다. 조약돌도, 잔디도, 사과도, 무엇이든 손이 닿기만 하면 모조리 금으로 변했다. 그러나 미다스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미다스는 큰 잔치를 열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포도주를 한 잔 들이키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잔도, 잔 속에 든 술도 금으로 변해 버렸다. 빵ㅇ르 한 조각 먹으려 해도, 고기를 한 점 집으려 해도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모두 금으로 변해 버렸다. 사방엔 금이 흘러넘치는데 미다스는 굵어 죽을 판이었다. 미다스의 황금손은 이제 횡재가 아니라 횡액이요 저주였다. 미다스가 자신의 탐욕을 뉘우치며 탄식하고 있을 때 하나뿐인 딸이 아버지를 위로하러 내전으로 들어왔다. 슬픔에 겨운 나머지 미다스는 위로하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아뿔싸, 애지중지 길러온 귀여운 딸마저 황금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엄청난 재앙 앞에서 넋을 잃은 미다스는 염치불구하고 디오니소스를 찾아가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가 스스로 어리석음을 깊이 깨달았음을 알고 자비로이 일러 주었다. "팍톨로스 강으로 가되, 강의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그대의 머리와 몸을 담그고 탐욕과 어리석음을 씻어라." 미다스는 디오니소스가 시키는 대로 팍톨로스 강물에 몸을 씻고 황금의 저주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황금을 만드는 미다스의 능력이 강물로 옮아가 강바닥의 모래가 모두 금모래로 변했다고 한다.
황금의 강, 그리고 골드 러쉬
북미 대륙은 어느 모로 보나 미다스가 몸을 씻었다는 팍톨로스 강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러나 1848년 1월 24일 아침, 신화속의 팍톨로스 강이 북미 대륙의 남서부에 현현하였다. 그날 아침, 스코들랜드 출신의 목수 제임스 윌슨 마샬은 세라네바다 산맥 기슭 아메리카 강변에 자리잡은 제재소의 방수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기 때문에 혹시 방수로에 이상이라도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방수로엔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고 물 밑바닥의 진흙 위엔 자갈과 암석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 보던 어느 순간, 마샬은 자갈과 암석 조각 사이에 희미한 광택을 내는 콩알만한 물체가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그는 둑에 쭈그리고 앉아 그 물체를 들여다 보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것을 몇 알 주워 들고 자신의 상관인 요한 요거스트 사타에게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방문을 꼭 잠근 채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아메리카 백과사전>에 씌어진 대로 약제용 저울을 이용해 몇 번이고 테스트를 반복했다. 그 결과 마샬이 들고 온 물체가 뛰어나게 순도 높은 금이라는 사실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해졌다.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이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비밀은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캘리포니아(이 때의 캘리포니아는 지금의 네바다·아리조나·유타주까지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의 카우보이들을 거쳐 바다 저쪽의 하와이, 남쪽으로는 멀리 페루와 칠레까지 퍼져 나갔다. 6개월 뒤에는 미 동부 지역의 주요 도시에까지 소문이 닿았다. 처음엔 연안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선원들과 멕시코와의 전쟁 때문에 인근 몬테레이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 금을 찾아 몰려왔다. 주둔군 사령관은 워싱턴의 중앙 정부에 '소문은 과장이 아니다.'는 보고를 했고, 이어 조폐국 국장이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금광석 중에는 순도가 98.7%나 되는 것도 있다 고 공식 확인했다.
12월 들어서는 급기야 포크 당시 미 대통령이 수많은 소문 중에서 '터무늬없이 공상적인 것을 빼면 사실이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발언함으로써 골드 러쉬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져갔다. 1849년에 접어들면서 유럽·중남미·중국 등지에서까지 금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몰려왔다. 49년 한 해 동안만 해도 금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의 수는 무려 8만에 육박했다. 이들을 일러 '포티아 나이너즈'라고 한다. 포티 나이너즈의 쇄도로 말미암아 미국 서해안 지역의 몇몇 소도시들은 동부의 대도시 못지 않은 대도시로 발돋움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이다. 오늘날 샌프란시스코에 포티 나이너즈 라는 미식 축구 팀이 있는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이다. 캘리포니아는 1850년에 미국의 정식 주로 편입되었는데 이 또한 삽시간에 몰려든 포티 나이너즈 덕택이었다.
포티 나이너즈는 과연 금을 찾았나
포티 나이너즈가 캘리포니아로 들어온 경로는 대개 세 가지였다. 북동부의 항구 도시에서 출발하여 배로 남미의 남쪽 끝 호온 갑을 돌아 샌프란시스코까지 올라오는 방법, 역시 동부에서 배로 중미의 파나마까지 가서 육로로 지협을 건넌 다음 다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방법, 그리고 육로로 대륙을 횡당하는 방법이 있었다. 제일 널리 이용된 세 번째 루트는 북미 대륙 중앙부를 걸어서 횡단하는 것으로서 출발지는 미주리 주의 세인트 조세프였다. 세인트 조세프는 오하이오 강, 미시시피 강, 미주리 강 들을 오가는 기선들이 죄다 모여드는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미주리 주까진 철도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단 기차로 미주리 주까지 와서, 다시 기선을 타고 세인트 조세프에 당도했다. 골드러쉬가 시작되고 1년이 되었을 즈음, 이 마을을 거쳐 서부로 간 사람들은 무려 5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인트 조세프는 문명이 끝나는 장소 였다. 그들 앞에는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 3,200km의 황야가 가로놓여 있었다. 포티 나이너즈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장비는 대강 이런 것들이었다. 먼저 노새와 소, 소는 초원지애를 건널 때, 노새는 험한 산길을 지날 대 필요했다. 그리고 마차, 마차의 뒷 트렁크에는 반드시 엽총, 편자, 도끼, 그리고 마차가 고장났을 때 쓰는 수리 용구를 갖추어 실어야 했다. 그 외에도 휴대용 취사 도구, 칸델라, 장화, 방수모 등등 자질구레한 준비물이 수없이 많았다. 포티 나이너즈는 세인트 조세프에 닿기 전에 너나할것 없이 <캘리포니아 이주 입문서>라는 가이드 북을 사서 읽었다. 위에 열거한 준비물 목록까지 포험한 이러한 가이드 북은 십수개 국어로 간행되어 있었는데, 웃지 못할 일은 그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이 사실은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세인트루이스의 신문기자가 엉터리로 꾸며 쓴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곡괭이와 선광 냄비였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들은 노다지를 캐냈을까? 생각해 보라. 3,200km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8배에 이르는 거리이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서부는 완전히 미개척지였다. 대초원과 험한 산길, 수많은 강과 골짜기가 곳곳에서 이들을 가로막았다. 인디안들과의 충돌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처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병을 얻기도 했고, 계곡에서 추락하기도 했으며, 강을 건너다 물길에 쓸리기도 했다. 지금도 세라네바다 산맥의 기슭에 가면 수없이 널려 있는 포티 나이너즈의 무덤들을 볼수 있다. 그리고 무사히 도착한 포티 나이너즈 가운데서도 노다지의 꿈을 이룬 사람들, 즉 운도 따르고, 체력도 좋고, 선견지명도 있는 사람 은 별로 많지 않았다. 금이 나올 만한 주요한 광맥은 이미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이 잽싸게 차지해 버린 뒤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을 구경도 못했거나, 운좋게 금광을 발견했다손치더라도 농장주와 결탁한 브로커들에게 사기당하기 일쑤였다. 얼마간의 사금을 손에 넣어 집으로 돌아가는 배삯이나마 마련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없어 낯선 땅에 눌러 앉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술집을 차리기도 하고 뜨내기 장사치도 되었다. 요컨대 샌프란시스코의 하층민이 된 것이다.
포티 나이너즈의 불행한 결말을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서 최초로 금을 발견한 마샬과 사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결말부터 밝히자면 두 사람 모두 빈곤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원래 사타는 캘리포니아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스위스 출신의 대지주였다. 자신도 자신 소유의 토지를 다 둘러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 위에 위스키 증류 공장, 모피 공장, 제재소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니 서부의 스위스 황제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 토지는 캘리포니아가 아직 멕시코 영토였을 때 확보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타는 금을 발견하자마자 몬테레이 주둔 미군 사령관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멕시코 전쟁이 미군의 승리로 끝날 게 확실했으므로, 캘리포니아가 미국 영토로 넘어올 경우 혹시 기존의 소유권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사령관은 캘리포니아는 아직은 미군 점령 아래 있는 멕시코 영토일 뿐 이라며 그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사타의 요청이 있은지 열하루 뒤에 그 땅은 일정 부분 나누어 받은 마샹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토지를 강탈해 간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상류 계급 , 즉 골드 러쉬를 타고 도시의 지배 계급으로 위치를 굳힌 과거의 농장주들이었다. 마샬은 소송도 제기해 보았으나, 재판관과 배심원석은 모두 그들 상류 계급 이 차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발견자들이 이러 했을진대 머나먼 곳에서 흘러 들어온 포티 나이너즈야 오죽했으랴.
우리의 탐욕을 씻을 강물은 어디에
미다스왕이나 포티 나이너즈를 탐욕스럽다거나 허황되다고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 황금, 곧 재물·부 물질에 대한 욕심은 어쩌면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비바람을 가릴 집도 있어야 하며 추위를 막아낼 옷도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목적 의식적으로 개조하는 지혜로운 머리를 가진 까닭에 더 좋은 옷, 더 편리한 집, 더기름진 음식을 찾게 된다. 물질적인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류의 문명을 여기까지 밀고 온 토대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쌓으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발전적인 동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지나쳐 물질을 숭배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황금을 사랑하면 별이 있는 곳도 모르게 된다 는 격언이 있다. 물질에 대한 숭배는 곧 영혼을 가두는 감옥을 짓는 행위임을 알리는 경구는 그 밖에도 동서양의 고금을 통틀어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다. 인간이 물질을 다스리는 주인으로 똑바로 서 있을 때라야만 물질의 발전이 인류의 발전에 보탬이 된다. 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숭고한 가치들을 잊어 버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저 안락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간다면 황금은 곧 파멸의 길이다. 물질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적인 존재 조건이라면 물질의 노예가 되는 건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존재 조건이다. 돈 때문에 온갖 끔찍한 일이 다 벌어지는 오늘날의 배금주의·물질주의를 보면 일찍이 그 과오를 깨친 미다스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우리의 이 탐욕과 어리석음을 씻어낼 강물은 어디에 있을까
<고요한 돈강>의 작가 숄로호프의 작품 가운데 <한 인간의 생애>라는 중편이 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한 러시아 병사가 어느 날 독일군 장교들의 질탕한 파티장에 불려 나간다. 무언가 맡은 일에 트집을 잡혀 총살을 당할 판이었다. 그런데 마침 총을 겨누었던 장교의 권총 안에 총알이 들어 있지 않은 바람에 죽음을 모면했다. 장교는 운 좋은 놈 이라며 술을 한잔 준다. 물론 주인공을 장난감쯤으로 여겨 희롱하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술을 거부하자 장교가 어쭈, 이것 봐라 하는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물론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엉겁결에 나온 대답이 저는 안주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였다. 취기가 오른 장교는 이 엉뚱한 대답을 귀엽게 여겨 주인공에게 식탁 위에 있던 소시지와 빵을 가득 안겨 주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그는 이번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독일군 장교들이 배가 터져라 웃어대는 가운데 파티장을 나왔다. 그날 밤 수용소의 러시아 포로들은 모두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빵과 소시지를 한 조각씩 먹었다. 주인공은 포로의 수대로 빵과 소세지를 나누었던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인가. 배고픈 사람을 옆에 두고 혼자 먹지 않는 것, 이 소박한 예의야 말로 우리 모두가 그 속에 이 몸을 담구어야할 강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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