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9. 신화와 역사 사이 - 미노타우로스와 에게문명
신화를 발굴한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또는 학문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우리는 뜻밖의 진실과 만나게 된다. 비전문가, 다시 말해 아마추어들이 빼놓을 수 없는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기를 발견한 갈바니와 에너지 보전의 법칙을 발견한 메이어는 의사였고 무선 부호를 창안한 모르스는 화가였다. 직업적인 전문가들은 잘 다니려 들지 않는 잡초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 신천지를 발견하는 이런 열정적인 아마추어들을 마르틴루터는 일찍이 "이 세상의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다. 그들로 하여금 전인미답의 오솔길을 헤매게 만드는 것은 돈도 밥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알고 싶어하고 밝혀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러한 위대한 아마추어 가운데서도 마땅히 첫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북부 독일 메클렌부르크 주위 자그마한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슐리만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신화와 전설, 동화같은 것들을 곧잘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가운데서 특히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트로이전쟁과 그것을 승리로 이끈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같은 뭇 영웅들의 모험담이었다. 일곱 살 나던 해인 1829년 크리스마스 때 그는 아버지한테서 <그림으로 본 세계사>라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책에는 아이네이아스가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등에 업는 채, 불타고 있는 트로이 성을 빠져나오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어린 슐리만은 책속에 그려진 트로이의 거대한 성벽과 성문에 눈길을 빼앗긴 채 물었다.
이게 바로 트로이의 모습이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 있어요? 글쎄, 아무도 모른단다. 내가 어른이 되면 트로이와 왕의 보물들을 꼭 찾아내고 말거예요.
일곱 살 난 아들의 맹세에 가난한 아버지는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슐리만은 호머의 서사시들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 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 위대한 아마추어답게 그는 오로지 순수한 열정에 의지해 자신의 믿음을 향해 돌진했다. 슐리만은 열네 살 때 식품점 점원으로 취직해 5년 반 동안이나 청어와 우유, 소금 같은 것을 팔았다. 그런데 미국을 여행하게 된 서른 살 때는 미국 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대상인이 되어 있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 30대 초반에 백만장자가 되기까지의 고난과 시련이 어떠했는지, 또한 그것들을 이긴 그의 신념과 투지와 재능이 얼마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과 찬사를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그가 모국어인 독일어를 합해 12개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쓰고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슐리만은 1863년 드디어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매혹시켜 왔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에서 은퇴 하였고 몇 년간의 답사를 거친 뒤 1871년 마침내 트로이의 폐허 위에 첫 삽을 꽂았다. 그 곳은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는 뉴일리엄이라는 마을이었다. 백 명의 인부를 동원해 3년여를 파들어간 끝에 슐리만은 원시 시대의 두 도시를 포함해 모두 9개의 도시를 발굴해 냈다. 폐허 밑에서 한 도시가 묻혀 있었다. 슐리만은 그중 밑에서부터 세 번째 층에서 불탄 흔적이 있는 견고한 성벽과 거대한 성문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는 그곳이 트로이의 유적이라고 확신했으며 실제로 거기서 왕관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금붙이들을 발견했다. 바로 그 유명한 프리아모스의 보물 이었다. (슐리만이 죽기 얼마전에 이 보물은 트로이 시대보다 천 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임이 밝혀졌으며 트로이 유적은 제 7층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고학사의 맨 첫장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에게 문명의 실마리, 황소 그림
신화를 역사로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 밖에 미케네 왕국의 왕묘를 발굴한 것도 슐리만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슐리만의 진짜 위대한 업적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슐리만은 트로이, 미케네에 이어 1884년 티린스를 발굴했는데 이 발굴에서 그는 미케네와 티린스 나아가서는 크레타와 그리스 동부 해안지역, 키클라데스 제도를 하나로 잇는 어떤 공통된 문명의 그림자를 감지했던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 다스리던 황금의 도시이고 티린스는 헤라클레스가 탄생한 곳이다. 슐리만은 티린스에서 그때까지 발견한 것들 가운데 가장 웅대한 궁전의 기초벽을 발굴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궁전의 유적에서 발견된 도기와 벽화들이었다. 티린스의 도기들은 미케네에서 발견한 것들과 비슷한 특징들은 에게해의 다른 섬들, 특히 크레타에서 다른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도기들과도 비슷했다. 오리엔트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리고 티린스 궁전의 벽들에는 파란색과 노란색 띠로 둘러쳐진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푸른색 바탕에, 사나워 보이는 둥근 눈을 부릅뜨고 등에는 붉은 점이 있는 황소가 꼬리를 치켜들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황소 위에서는 한 남자가 뿔을 붙잡고 무용수가 도약할 때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티린스 발굴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 황소 벽화에 대해 슐리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일리아드 속에 나오는 유명한 마술사처럼 묘기를 보여주는 벽화를 보고 저는 그 황소의 등에 탄 남자가 안장 없이 타는 사람이거나 황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슐리만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이 황소 그림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유럽 최초의 문명-에게 문명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제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화를 발굴함으로써 스스로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 하인리히 슐리만은 1890년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아서 에번스의 크노소스 발굴
슐리만이 그 흔적만을 얼핏 보았을 뿐인 에게 문명을 완전히 알리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인인 아서 에번스였다.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슐리만과 대조되는 사람이었다. 슐리만이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아마추어였다면 에번스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전문자였다. 그는 옥스퍼드와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고대의 상형문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상형문자 해석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크레타를 방문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자갈더미와 폐허를 돌아다니다가 그는 상형문자 해석에 대한 이론은 전으로 미루어 두고 삽을 잡았다. 크레타 총독의 표현을 빌리면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닌 슐리만과는 달리, 에번스는 그후 25년 동안을 한 장소만을 팠다. 끈질긴 삽질 끝에 그는 마침내 버킹검 궁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크노소스 궁정의 유적을 발굴했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궁저의 1층 평면도가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그것은 미케네와 티린스에 있는 궁전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미케네나 티린스에 있는 궁전들에 비해 훨씬 크고 당당해서 크레타가 본거지이고 다른 두 지역의 성들은 그에 종속된 식민 도시의 수도였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궁전은 각 층마다 방과 복도, 홀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어 있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 왕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미로 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전문가인 에번스도 제우스의 아들인 미노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둔 미로의 궁전을 발견했다는 다소 슐리만적 인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유물과 벽화가 계속 발굴되었다. 그런데 벽화 가운데 슐리만이 티린스에서 발굴한 그림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바로 두 처녀와 한 청년이 황소와 놀고 있는 듯한 <황소와 춤추는 사람>이었다. 미궁과 황소, 이 두 가지야말로 신화와 역사 사이에 놓인 가파른 사다리였다.
미노스와 미노타우로스
티로스의 왕 포에닉스에게 에우로페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어느날 에우로페가 바닷가에서 시녀들과 놀고 있는데 잘생긴 황소 한 마리가 다가와서 에우로페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 황소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 에우로페가 등에 올라타자 마자 황소는 그녀를 크레타 섬으로 납치해 버렸다. 황소는 다름아닌 제우스였다. 이 둘 사이에 생긴 아들이 바로 미노스였다. 미노스는 장성한 뒤 의붓형제들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 제가 제우스의 아들로서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니 부디 황소를 한 마디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반드시 신께 제물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청을 받아들여 흰 파도를 가르고 황소를 한 마리 보내주었다. 든든한 뒷배경을 과시한 덕에 미노스는 무사히 왕위에 올랐고 나라는 융성했다. 그러나 미노스는 그만 과욕을 부리고 말았다. 포세이돈이 보낸 신성한 황소를 다시 제물로 갖다 바치는 게 못내 아까와서 다른 소를 그 황소인 것처럼 속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 포세이돈이 미노스의 잔꾀에 속을 리 없었다. 진노한 포세이돈은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문제의 황소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둘 사이에 괴물이 태어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괴물이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미노타우로스였다. 미노스로서는 차마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포세이돈이 또 무슨 형벌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노스는 할 수 없이 지상의 헤파이스토스 라고 불리는 장인 다이달로스를 불러 한 번 들어가면 신들도 나오기 어려운 미궁, 만든 사람도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그 미궁에 같혀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미노스왕의 애물단지인 이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사람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였다. 어느날 미노스의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에서 열린 운동 경기에 참가했다가 황소의 뿔에 받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노스는 이를 빌미로 아테네를 공격했다. 그리고 평화를 맺는 조건으로 매년 7명의 처녀와 7명의 총각을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주기 위해서였다. 아들 딸을 둔 아테네의 부모들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때가 오면 자기 자식이 뽑혀갈까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때 왕자인 테세우스가 공물로 바쳐지는 다른 처녀 총각 사이에 섞여 크레타로 가서 그 괴물을 처치하고 오겠다고 나섰다.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반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실 한 꾸러미를 주면서 자신이 실의 한 쪽끝을 잡고 미궁 앞에 서 있을테니 실을 풀어 가며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일러 주었던 것이다.
신화와 역사
슐리만과 에번스가 발견한 <황소와 춤추는 사람>은 사실은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진 제물이었을지 모른다.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미궁의 유적은 미노스 왕의 신화에 일말의 역사적 진실이 묻어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B.C 5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테스는 미노스가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오늘날 그리스에 속한 해역의 대부분을 제압했으며 키클라테스 제도 전역에 신민지를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실제로 에번스는 크레타에서 함대의 흔적을 찾아냈다. 슐리만과 에번스의 발굴은 B.C 3000년부터 그리스가 성립한 B.C 1000년까지의 2천여 년간 지속된 에게 문명의 전모를 상당 부분 밝혀주었다. 에게 문명은 지리적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해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 세계로 전승해 주었으며 그 중심은 크레타와 미케네였다. 크레타는 특히 B.C 16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에게해를 주름잡았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해 놓은 함대의 지휘자이며 바다의 통치자 였던 미노스라는 왕이 살았던 시기는 바로 이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크노소스 궁전 역시 이 시기의 것인데 크레타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50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궁전은 하수고와 환기 장치, 난방 장치, 호사스런 목욕탕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크레타는 B.C 1500년경 미케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미케네는 B.C 1900년경 북방에서 내려온 인도 유럽어족인 아카이아인들이 세운 공동체였다. 미케네는 크레타와 교역하면서 그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나중엔 크레타를 제치고 에게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B.C 1200년경 철기 문화를 가지고 남하한 도리아인들(이들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다)에게 크레타와 더불어 멸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수수께끼
에게 문명의 주역이였던 미노아 문명(크레타 문명을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 흔히 이렇게 부른다)를 둘러싸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몇 가지 고고학적 숙제가 남아 있다. 그 첫 번째는 그토록 한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크레타 섬의 원주민들은 대체 어떤 종족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미노스가 그리스인이었다고 적어 놓았고 헤로도토스는 그렇지 않다고 적어 놓았다. 소아시아에서 온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지중해인으로 불리는 종족과 소아시아인의 혼혈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첫 번째의 의문을 풀어 줄 단서가 있긴 있으나 그 자체가 또다른 수수께끼이다. 에번스는 크노소스에서 독특한 선상문자가 가득 쓰여진 조그만 점토판을 2천 개가 넘게 발굴했다. 1953년 영국의 건축가 마이클 벤트리스가 선상문자 중 일부가 그리스어의 초지 형태임을 밝히고 상당 부분 해독을 해냈다. 하지만 그 역시 당시 크레타인에 비해 훨씬 미개했던 그리스인의 언어가 어떻게 크레타에서 사용되었을까 하는 또다른 의문을 던져 주었다. 그 의문을 파헤쳐들어가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벤트리스는 불행히고 4년 뒤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미노아 문명의 최후를 둘러싸고도 아직 견해가 분분하다. 오랫동안 평화롭게 번영를 누렸던 미노아 문명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또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새로운 정복자가 침탈하더라도 대개는 기존의 문명 위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때문에 앞선 문명이 하루 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크노소스의 유적은 난폭한 가장이 내던진 밥상처럼, 짧은 순간에 박살이 난 형국을 하고 있었다.이를 두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무기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크레타인들보다 미개했던 도리아인들이 그 야만성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지진에 의한 몰락설인데 발굴자인 에번스는 후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크노소스의 유적지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과 비슷한 갑작스런 죽음 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미처 끝내지 못한 예술작품과 작업 중에 갑자기 중단된 듯한 현장, 그리고 밥을 짓다 파괴당한 부엌들이 그런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크레타 섬은 지진대 위에 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원인이 무엇이었거나 간에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이후 4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 고대 문명이 탄생했다. 4세기 동안의 이 암흑기는 왜 생긴 것일까? 미궁과 같은 이 의문점들을 속시원하게 풀어 줄 아리아드네의실은 어디에 있을까. 열정과 투지의 실타래를 들고 아무도 가지 않은 역사의 미궁으로 접어들 위대한 아마추어를 고대하며 그 첫걸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경구를 한 구절 읽어 본다.
인간으로서의 겸양을 배우고자 할진대 굳이 하늘의 별을 쳐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수천 년 앞서 존재했던 위대한,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수많은 문화 세계로 눈을 돌리면 족하다 - C.W. 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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