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역사(Historia) -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5?~425?)
동서양의 최초의 대립인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을 그린 이 책은 서유럽 최초의 역사서. 시의 단계를 극복하고 역사서술의 장을 연 이 책은 종래 신문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적 서술계획에 입각하여 작가자신의 특유의 역사구상으로 이루어진 인류최초의 역사서다. 인간본위가 아닌 신중심으로 서술된 점도 없지 않으나, 우리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의 승리를 폭군의 통치에 대한 법의 통치의 승리로 보고, 동방 대국의 침략을 물리친 그리스인의 자부심과 유럽적 자기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초를 읽을 수 있다.
광범위한 여행으로 견문 넓혀
키케로에 의해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려진 헤로도토스. 그는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명문가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나, 그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일찍이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시참주인 리그다미스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사모스로 추방당하고 40세 때 아테네로 갔다. 그러나 곧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동서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방랑생활중에 페리클레스와 소포클레스와도 교제했으며, 특히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감탄하기도 했다. 동서양의 첫대결인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저술인 '역사(일명 페르시아 전쟁사, Historia)'는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등 여러 지방에 걸친 그의 여행과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비단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에 관한 서술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세계사라 할 수 있다. 그후 아테네 시가 BC 444년에 건설한 남이탈리아의 식민지 투리오이 시로 가서 역사를 저술하며 일생을 보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관
역사관이란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 즉 역사가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해석할 때 가지는 통일적인 견해를 말하는데, 역사가는 나름대로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실 가운데서 취사선택의 기준과 사실해석 방법은 역사가의 자유여서 역사가의 인간관, 종교관, 국가관, 세계관 등에 의해 다를 수 있다.그러나 동시대에 동시대인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가지는 역사관은 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의 순환사관, 중세 그리스도교의 관 등이 그것이다. 한편 역사관의 형성에는 역사서술에 대한 구상력과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직관력 등이 작용한다. 이 역사관의 근저에는 종종 역사철학이 개입된다. 서양의 역사기술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헤로도토스와 투키디테스의 역사서술 방법은 이후 서양 역사학의 발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역사'에서 나타난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객관적 역사서술
저자는 역사의 사실, 즉 사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사료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눈은 귀보다 정확한 증인이다"를 실천에 옮긴 셈이다. 많은 여행을 통해서 직접 수집한 자료를 자신의 냉철한 이성에 의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서술하고, 그리스와 페르시아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엄정함을 보여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함께 그리스 인들로부터는 '친 페르시아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신의 섭리 인정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서술 속에서 인간행위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확인하고, 전쟁도 신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불경하면 신이 벌을 내린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흥망사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즉, 그에게는 신이야말로 역사의 동인이었던 것이다. 절대적인 신의 능력 앞에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이 숙명에 의해 역사는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생각은 "운명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지 인간이 운명을 결코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고대인들의 믿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밖에도 후세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그는 "그리스 인들과 이방인들간의 위대한 행위와 업적이 쓸모없이 잊혀져버리지나 않을까 해서였다"고 말하고 인간의 역사적 발자취를 후세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사
이 작품은 중간중간에 많은 일화와 에피소드가 들어 있어 산만한 감도 있으나 전체적인 통일성은 유지되어 있다. 역사는 9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 내용상으로 보면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저서를 살펴보면 그가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세계여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리스 본토와 그 식민지는 물론이고 동으로는 바빌로니아, 서로는 이탈리아, 북으로는 스키타이, 남으로는 이집트까지 그의 족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많은 여행을 통해서 접촉한 사람들의 구전적인 역사적 사실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않고 역사의 사실을 캐내는 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가 다룬 주제는 페르시아 전쟁과 그 전쟁의 예비단계에 관한 내용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는 9권인데, 1~5권은 페르시아전쟁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고, 제 6~9권은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중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7권)과 그리스가 대승을 거둔 살라미스, 플라타이아, 미칼레 전투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제 1~4권은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구성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설명할 때 그는 제국의 각 측면을 지리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역대 왕들(키루스, 캄비세스, 다리우스)이 정복한 순서에 따라 기술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단 이 배열법에서 한 가지 예외는 리디아인데, 리디아는 맨 처음에 다루어져 있다. 그것은 리디아가 맨 먼저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여 정복한 첫번째 나라였기 때문이다. 제1권의 서두에서 이 책의 집필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헤로도토스가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져가고 그리스 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업적들(특히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연구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다."
이어서 리디아 왕국에 대한 설명과 페르시아의 리디아 정복을 다루고, 키루스 왕이 메디아 인을 무찌른 이야기와 페르시아에 대한 설명, 키루스의 마사게타이 공격, 그리고 키루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2권에서는 왕위를 계승한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계획을 다룬 뒤, 이집트의 국토와 정복과정, 캄비세스의 광기와 죽음, 페르시아의 권력투쟁과 내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의 거대한 제국건설, 그리고 다리우스가 진압한 국내의 반란 등을 다루고 있다. 제4권의 서두에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 인에 대한 그들의 설명과 그들의 역사, 다뉴브 강에서 돈 강에 이르는 그들의 활동지역과 흑해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다리우스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이들을 원정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페르시아의 스키타이 침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침략과정에서 비잔티움을 비롯한 몇몇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다. 페르시아는 스키타이를 공격하는 동시에 이집트를 거점으로 하여 그리스 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한 리비아를 공격했다. 4권의 마지막에는 리비아와 그 식민지건설에 대한 기술이 나온다. 제5권에서는 페르시아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깊숙이 진격하는 과정,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및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과정이 기술되고, 이어서 BC 499년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가 나온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작품 전체의 주요 주제로 넘어간다. 제6권에서는 이오니아 반란의 진압에 이어서 마침내 페르시아군의 그리스 원정으로 페르시아 전쟁의 막이 오른다. 마라톤의 싸움과 용장 밀티아데스에 관해서도 언급된다. 제7권에서는 크세르크세스의 즉위와 대원정의 준비, 그리스 측의 항전, 테르모필레의 싸움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제8권은 아르테미시온의 해전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 군의 진공과 아테네의 함락을 거쳐서 전쟁의 클라이맥스인 '살라미스 해전'과 페르시아군의 패주, 나아가 마르도니오스의 잔류군의 동태를 기록한다. 제9권에선 '살라미스 해전'과 함께 페르시아 전쟁의 2대 전투인 '플라타이아이의 싸움'과 아테네 군의 세스토스 포위로 사실상 페르시아 전쟁을 종결짓고 있다.
그는 설화작가인가, 역사가인가
통일성 유지
헤로도토스는 최초의 문화사가라는 평을 받는데, 그 이유는 지중해 세계를 두루 여행하면서 제민족의 전통과 풍습, 법률과 종교는 물론 토지와 기후 등을 관찰하여 이들이 각국의 민족성과 문화적 특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여행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상세하게 서술한 여행가요, 지리학자였다. 그가 본래 지리학자로서 시작하여 후에 역사가로 변모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의 선배작가들이 한 도시에서 오랜 세월이 걸쳐 일어난 지엽적인 사건에 대해 연대기나 여행용 안내서를 쓴 것과는 달리, 그는 그것들 가운데 유기적 구조를 가진 완전한 통일체, 즉 전체적 일관성을 가진 유기적 통일체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서양 최초의 역사가로 꼽힌다.
과학성 결여
그러나 '역사'의 곳곳에서 보여지는 삽화풍의 이야기, 설화적인 내용, 그리고 과장이나 부정확성으로 인해 '이야기식 역사'라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이처럼 헤로도토스를 역사가보다는 설화작가로 취급하는 태도는 그리스의 위대한 과학적 역사가 투키디데스 이래 지속되어왔다. 헤로도토스가 역사가로 명예를 회복한 것은 고고학, 지정학, 비문학 등 역사학의 주변학문이 확립된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이집트와 오리엔트 지역의 발굴성과가 그의 기록의 신뢰성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은 마치 독일의 슐리만이 호메로스의 작품을 근거로 트로이 유적을 발굴했던 것과 흡사한 면을 보여준다. 또한 어떤 비평가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 방법이 지나치게 신 중심으로 서술되어 역사적 상관성과 인과관계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도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신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다고 해서 그것을 그의 한계라고 단언하는 것은 역사의 정신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의 오만함을 심판하는 신의 존재는 믿었지만, 역사적 사실을 기술할 때는 항상 신의 개입보다는 인간의 행태를 강조했고, 나아가 그가 조사탐구하고자 했던 대상은 궁극적으로 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헤로도토스를 조소적인 의미에서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지칭했으나, 이상과 같은 헤로도토스의 조사연구 자세와 인문주주의적 역사관, 전 세계사 속에서 신의 섭리를 발견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후세에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점에서 뉴턴의 지적대로 진정한 역사의 아버지로 평가함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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