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3장 서양사상
사회계약설(Contract Social) - 루소(Rousseau, 1712-1778)
자연으로 돌아가라.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도처에 그는 얽매여 있다. 구속을 싫어하고 자연을 좋아한 저항적인 자유인 루소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한 인류해방의 고전, 프랑스 대혁명의 여명기에 쓴 이 책 속에서 루소는 사회계약, 주권, 일반의지의 3단계 구성을 통해 종래의 정신세계 질서에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기존의 가치관에 일대변혁을 가져와 프랑스 혁명의 성서로 불린다.
생애와 작품활동
'루소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지적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물러난 루이 16세는 '나를 몰아낸 것은 바로 이 두 놈이다.'라고 말한 두 놈 중 한 사람이 바로 루소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이자 반문명가인 루소는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동시대인이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출생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출산시 사망했다. 열 살 때 부친마저 잃은(가출) 그의 유일한 낙은 어머니가 남겨준 상당한 양의 책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지나친 독서로 인한 두뇌비대증은 노년에 그를 정신이상으로 몰고간 원인이 되었다. 그는 1세때 제네바에서 가출하여 고향을 등지고 방황한다. 그때 자애의 손길을 내민 어느 남작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은 그를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시켰으며, 사실상 그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그녀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루소는 정서적 안정 속에 여러 학문을 닦아 교양을 쌓았다. 그후 1740년경에는 잠시 가정교사 생활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겸험이 그로 하여금 교육문제에 평생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1742년 파리로 나와 음악 비평가로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백과전서파의 디드로와 사귀면서 사전편찬에도 협력하여 음악항목의 집필을 담당한다. 그러나 디드로와 결별한 후 영원히 그들의 우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1750년 과학과 예술은 풍속을 좋게 만드는데 도움이되는가(학문예술론) 라는 현상논문에 당선되어 비로소 사상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이 논문을 통해 그는 발달된 문명이 끼치는 해악을 낱낱이 지적하여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로써 갑자기 파리사상계의 유명인이 되었다.
1752년 마을의 점쟁이 라는 가극을 발표하여 또 한번 파리의 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1754년에는 사유재산제도가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는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여 당시의 사회제도를 비판했다. 같은 백과전서 5권의 정치경제 항목을 집필하고, 이것을 후에 정치경제론으로 독립 출간했다. 1762년에 불평등 기원론 과 정치경제론 을 발전시킨 사획계약설과 교육에 관한 혁명적인저서인 에밀을 발표했다. 그러나 파리 제네바 등지에서 사회질서의 혼란과 크리스크 교의 가르침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받는다. 실망한 루소는 파리를 떠나 제네바로 피신하려 하였으나, 제네바 정부 역시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유럽 각지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깊어가는 고독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자전적인 작품 고백록을 완성했다. 그가 쓸쓸하고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에름농빌에는 루소 공원이 있고, 또 프랑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의 무덤인 팡테옹 에는 루소가 볼테르를 마주해 가장 큰 크기로 묻혀있다.
자연법 사상과 사회계약설
자연법 사상, 17세기의 정치이론은 16세기의 마키아벨리와 같은 현실정치의 직접적 방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권리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하는 근본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고의 결과였다. 한마디로 17세기는 자연법과 자연권의 고전시대였다. 17세기의 과학혁명으로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것과 똑같은 법칙이 인간의 사회생활에도 있을 것이란 확신이 굳어졌다. 다시말하면 사회의 자연적 질서 가 있으며 영원불변의 자연적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법의 관념은 17세기에 활발히 논의되고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널리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자연권 회복은 18세기 혁명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자연법이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데에는 일치된 견해가 있을 수없으나, 간단히 말해서 정과 부정내지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법이 시간과 지여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에게 적용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법과 권리는 궁극적으로 모든 지역과 민족,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있다. 이러한 자연법과 자연권은 모든 인간에 있는 이성을 통해서 인식된다. 그리고 나라의 사람들이 차별없이 합리적 능력과 이해력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은 공통된 목적, 즉 자유, 평등, 박애를 성취하려고 할 것이다.
사회계약설, 홉스는 17세기 과학혁명의 정신을 그의 저술 속에 잘 반영 시켰다. 그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 로 보고, 사회계약에 있어서는 자연권의 전면적인 양도설을 내세웠으며, 정치적으로는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 군주제를 옹호했다. 반면 명예혁명 시기의 로크는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을 전제로 한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반대였다. 즉, 그는 자연상태를 평화로운 것 으로 가정한다. 자연권의 일부를 국가에 양도한다는 일부양도설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도 저항권 을 인정했고 대다수의 의사에 따르는 대의제도 를 주장했다. 바로 이 점에서 불만을 느낀 루소는 다수파가 소수파에 대해 행사하는 전제의 위험을 극복하고자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였다. 루소도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합의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런데 로크는 합의를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계약으로 본 반면 루소는 인민들 상호간에 맺는 계약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상호간에 자연적 자유를 양도함으로써 전체가 융합된 일반의지(공동체자체간의 의지)를 만들며 각 개인은 절대로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일반의지는 바로 주권자이며. 그것은 절대 신성하고 불가침하다. 일반의지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전체를 결합시키는 공동이익 에 의해 결정된다. 루소의 일반의지 관념을 결과적으로 대의제에 의한 간접 민주정치 및 다수결 원칙 등을 거부하게 된다.
사회 계약설 의 주요내용
사회계약론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전에 발표된 인간불평등 기원 에서 제기된 문제, 즉 자유와 평등을 누리던 인간이 자연상태를 상실하여 생긴 지배와 피지배 등의 해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올바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성격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제1부는 어떻게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옮아가는다. 또 사회계약의 본질적 조건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고, 제 2부는 주권과 법률, 제3부는 정부형태, 제4부는 국가의 체제가 다루어지는데, 제1부가 핵심이다. 제1장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는 태어났음에도 도처에 묶여 있다. 자신이 타인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도 사실은 그들 이상으로 노예인 것이다.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났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그것을 정당하게 만드는가를 나는 안다.' 여기에 보듯이 루소의 관심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곳에서 사슬에 묶여 있는 상태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자연상태에 관한 이론부터 시작한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는 각 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자연상태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주권자인 개인은 서로 결합하여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계약을 한다는 것이다.
1. 일반의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며, 이 국가의 통일과 바른 정치를 위해 일반의지 라는 기준이 필요한다고 했다. 일반의지란 항상 전체(국가)가 부분(개인)의 보존과 행복을 지향하고 법률의 원천이 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은 어떻게 하면 일반의지가 관철되는 국가를 형성하고,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가졌던 자유와 평등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각 구성원의 합의로 각 개인의 자연권을 위임하는 대신 개인은 시민적 자유를 얻게 되고, 정치체제를 일반의지라는 최고의지(주권)에 두도록 했다. 이 일반의지가 정치기구의 최고결정자이며, 주권, 법, 권리, 정부도 모두 이 의지의 표현이요, 속성이다. 다시말해 이것은 가장 철저한 인민주권론이며, 종래의 모든 국가관을 뒤엎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인민의 일반의지는 절대적이며 잘못되는 일도 없을 뿐더러 예외를 인정하는 일도 없고, 또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분할되거나 하는 일도 없다.
2. 주권, 일반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곧 주권이므로 주권도 또한 절대적인 불가양, 불분할의 것으로서 확립된다. 루소는 주권이란 누구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분할할 수도 없으며 전 인민의 의사를 대변할 수 없는 신분제의회에 의해 대행될 수도 없다 는 것이다. 이 이론은 홉스의 국가론을 계승하여 그것을 역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의지는 국가 또는 정체체제를 구성하는 일반의지의 행위가 사회계약 이다.
3. 복종계약 거부, 사회계약설은 물론 루소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사회계약설은 소위 복종계약설 이어서. 그것은 어떤 특정 지배자의 존재를 미리전제하고 이 지배자와 국민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다 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국민보다는 지배자를 위한 복종계약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러한 계약방식을 거부하고 사회주권을 개인간의 결합계약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루소의 이러한 착안은 큰 공적이었다. 기르케는 루소가 계약이론에서 복종계약을 배제했을 때 그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고 말했다. 루소의 정치이론은 당시 프랑스에서 지배적이었던 백과전서파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디드로가 주장한 이론은 국가의 형성을 인간의 자연적 성질인 사교성에서 설명하고, 인민의 자연적인 권리, 특히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복종계약이 맺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백과전서파의 이 사상은 실은 푸펜도르프나 로크에 의해서 대표되는 근대 자연법학의 고전이론을 계승 한것이다. 따라서 루소는 고전이론이 배척한 홉스의 사상에 깊이 감동받고 그에게서 가장 많이 배우게 된다. 홉스는 자연적 사교성의 이론을 부정하고 자연상태를 적대관계로파악,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권력을 이끌어냈다. 루소는 그 영향을 받아서 똑같이 자연적 사교성의 이론을 부정하긴 했으나 자연상태를 투쟁상태로는 보지 않고 투쟁상태를 사회상태 속에 옮겨놓음으로써 홉스와 똑같이 절대권력을 이끌어냈다. 어느 경우에서든 복종계약 은 부정되었던 것이다. 단 , 루소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연적 선과 인민의 일반의지가 전제되어 있느데, 이 점에서는 홉스와는 다른 민주주의적인 국가론이 주장된다.
정치사상적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 사회계약론을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그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구성원들의 자유의지를 묶어 일반의지 라 하고 이 절대적인 일반의지에 복종케 함으로써 개인 및 전체의 자유와 평등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의지는 반드시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전체를 결합시키는 공동이익에 의해 결정된다. 루소의 일반의지 관념은 결과적으로 주권재민설에 입각한 민주주의 와 공동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를 동시에 다 같이 합리화시키는 이중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그것이 선용될때는 진정한 민주주의 역활을 하지만, 악용될 때는 전체주의 지배체제의이론적 무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루소의 사상의 차이는 디드로가 천국과 지옥의 차이 라고 당시 기술한 것처럼, 당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나 볼테르는 보수적인 사회계혁을 주장한 면이 있다. 반면 루소의 그것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어서 부르주아에게 있어 루소의 평등사상은 매우 못마땅한 것이었다. 루소는 인간의 평등을 개인의 이성과 개성의 상위에 두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합리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선구자이기도하다. 아무튼 18세기 사상가 중에서 루소만큼 신비스럽고 흥미로운 인물도 드물다. 그는 당시의 이성존중 풍소에 반항하여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러 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발전시켜나가. 학문예술론 과 인간불평등 기원론으로 당시 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사회계약론으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설 신 엘로이즈는 낭만주의 소설로 퇴폐적 문명을 비난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교육사상을 밝힌 에밀에서는 개인의 잠재능력과 개성의 계발을 강조하였고, 고백록에서는 근대적인 고백문학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에밀을 통해 칸트의 이상주의와 실러의 낭만주의를 낳게 했고, 현대의 심리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칸트는 이 책에 심취한 나머지 규칙적이던 산책시간을 잊었는데, 그의 산책시간에 맞춰 저녁식사를 하곤 했던 동네부인들도 그를 기다리다 저녁준비가 늦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