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서 - 윤영환
마른장마도 끝나고 여름 휴가철도 지났다. 태풍도 몇 개나 지나갔고 며칠 후면 추석이라 시원할 법도 한데 어째 날씨는 한여름이다. 산책 삼아 아파트 주변을 몇 걸음만 걸어도 발바닥이 뜨겁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해마다 여름이 길어지면서 24절기의 느낌도 사라졌다. TV에서는 입추가 왔다는 둥, 마치 가을이 온 것처럼 말하지만 초복처럼 느껴진다. 올해도 열대야 속에서 송편을 빚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도심 복잡한 빌라에 살다가 외곽에 있는 아파트 6층으로 이사 온 지 2년이 됐다. 거실에 앉아 발코니 밖을 보면 논과 밭들이 보이고 오래된 나무들은 논밭을 빙 둘러 풍성하게 서 있다. 저 논에 봄이 올 때 농부는 물을 채우고 매년 모내기를 한다. 5월엔 개구리들이 짝을 찾아 사정없이 울고 그쯤 백로들이 날아든다. 풀벌레 소리 정겹던 더운 여름이 지나는 지금을 지나 보름 정도만 있으면 저 논은 황금색으로 변할 것이다. 농부는 봄에 심어 놓은 것들을 말없이 걷어 갈 것이다.
바라만 보기엔 너무도 궁금해서 논두렁을 직접 걸어봤다. 아파트 단지 산책로와 달리 발바닥이 푹신 거렸다.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 가져 간 냉커피를 한 모금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람들은 왜 시멘트, 아스팔트로 숨 쉴 틈 없이 흙을 덮어놓고 덥다고 할까?”
도심 어딜 가든 모든 흙을 인간은 무언가로 덮어놓았다. 고요했던 어딘가가 개발만 허가되면 방대한 면적에서 숨 쉬던 모든 흙은 단시간에 무언가로 덮인다. 언제부터인가 흙은 덮여갔고 하늘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수십 종의 가스와 매연으로 덮여갔다. 자연스러워야 할 것들이 자연스럽지 않게 되면, 자연스러움을 건드린 자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는 말은 수천 년을 이어온 진리임을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건 그렇고 커피 맛 하나는 참 시원하고 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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