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좀 든다(入魂)
터지려다가도 기도하며 잠재우기가 몇 번인가.
터지고 싶은데 터지면 온갖 꼬투리 잡아 욕질이다.
심지어 단어하나 잡아가지고 욕으로 소설을 쓰니 폭약만 쌓여갈 뿐이다.
폭약 덜어내는 것이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인가? 결코 아니다.
그건 그렇고,
나이?
이 길에 들어서도 위아래가 있다. 어딜 가든 없겠나.
그러나 이 길에 들어서면 사라져야 하는 예절이 있다.
너의 작품에 반말이 가능하며 이 길과 상관없는 너의 자찬에 얼굴을 마주보고 있더라도 욕이 가능하다. 나이만 먹으면 무슨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뇌들이 싫다.
다른 길(道)에서야 주도, 차도, 법도 등 많은 길을 지킬 수 있지만 이 길에 들른 주막에선 길은 의미 없다. 이 길은 하나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길’이라 부르는 것도 의미 없다. 다른 길이 없는데 이길 저길 어디에 있나.
이 길에서
나이로 누르든 배운 지식으로 누르든 예절로 누르든 욕으로 누르든 나는 눌리지 않는다.
다른 길에서 눌러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르지 않아도 숙인다.
그건 그렇고,
어느 자리에서 늘어놓는, 주로 남들은 궤변이라 하는 것들을 늘어놓으면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어쩌다 내가 미친놈이 됐는지는 모르나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놈이 아닌지 생각도 든다.
나는 나의 얄팍한 지식이 아닌 커가는 사상을 푼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든 플롯을 복권 추첨하듯이 섞어 풀든 내 마음이고 내가 할 말이다. 논리로 까서 들어먹는 놈이 있고 논리를 거부하는 놈도 있다. 왜? 자신의 논리를 거부하는 발언에 대해 벽을 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 두드려 열리지 않으면 그냥 내가 접는 것이 몸에 좋다. 웃고 살아도 짧다.
그건 그렇고,
이 길에서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70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 벌이다. 60 전후의 형들도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 벌이다. 그 이하의 나이로 대화로든 작품으로든 나에게 충격이나 감동을 준 사람은 이미 죽거나 없다. 또는 내가 못찾고 있는 것일 게다. 따라서 나와 동갑이거나 내 또래와는 진지한 대화는 없다.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이사 온 후로 형들마저 못보고 지낸다. 술자리에서 막내로 내가 엉덩이 붙일 일 없이 잔심부름을 하더라도 나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좋다. 존경할만한 분은 대부분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 소박함을 만든 것은 존경할 만한 철학과 지식 그리고 경험이다. 그리고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평화롭게 살자고 내려간 사람들 대부분은 쪽박을 차고 다시 상경한다. 평생을 농사라는 길을 걸어온 농사를 전공한 철학자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여러 서적, 누리망, 현지 공무원의 안내, 이론으로 무장하고 내려갔기 때문이다. 김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지저분한 옷이 초라해 보이나? 내로라하는 전공 교수들과 농사 경합을 한다면 당신이 초라하게 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백전백승이다. 그 길을, 자신 춘추만큼 걸어 온 분들이다. 농사 공부는 절정에 오르신 ‘달인’이다. 그만큼 그 분들의 농사작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실패해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짓는 생명들이라 여기고 내년을 기약하지만 농사 초보들은 이해 못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그분들에게는 이론도 쓰신 논문도 없다. 그러니 달인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잡다한 개똥철학이 나를 미친놈으로 몰고 가지 않나 싶다. 끝없이 써왔고 틈만 나면 누리망에 들어가 관련 유력설을 뒤지거나, 도서관가서 사실인지 찾고 또 쓰고 수정하고 집어던지는 공중에 뜬 삶.
남는 건 종이쓰레기. 방바닥을 뒹구는 몸뚱이. 차라리 그 시간에 돈만을 위해 살았다면 더 나은 생활을 하지 않겠냐는 충고가 잇딴단다. 나 때문이 아닌 내가 돕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말도 맞다. 당장 그 사람을 돕고 싶은데 그런 마음이 드는데…….
그들을 위해 마음으로 늘 기도한다.
그건 그렇고,
누군가 밟고 지나간 민들레, 제비꽃, 개망초 들을 보고 한참을 서있다. 왜 사람들은 산책로로 걷지 않을까? 저것들을 밟아 죽일 급한 일이 있었나? 나는 쪼그려 앉아 다시 세운다. 밟혀도 꺾여도 나처럼 다시 일어나라고. 나처럼 다시 일어나 살라고 짓밟힌 것들을 세운다. 재개발에 미친 공사장 천지의 나라 우리나라는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밟아 버리고 새롭다며 콘크리트로 도배를 하고 있다. 철거 촌을 떠나 왔지만 그곳의 이웃들이 생각난다. 나만 편한 것이 아닌지 생각도 든다. 나를 짓밟은 사람 원망 말고 그런 사람을 위해 스스로 뿌리 깊은 나무가 돼야 할 것이다. 다시 일어서야 하니까. 그게 사는 이유고.
그건 그렇고,
며칠간 매우 몸이 좋지 않았다. 정신이 좀 든다. 지인에게 부탁해 병원에 가볼 생각이지만 용기가 나질 않는다.
차분차분 살 일이다. 저 고목이 하루아침에 저처럼 위엄 있게 설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은 위대하며 자연스러운 건 모두 천천히 이루어진다. 자고 일어나니 내 이름을 알아주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이 됐다는 말은 천천히 살아온 결과물이다.
조급하기 싫어 10년 전 회사라는 조직을 떠났지 않았나.
너희들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안타까워 나를 위해 떠났다.
여전히 후회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안타깝다.
몽롱하다.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 연한 블랙으로.
2010.05.23 23:05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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