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소통
내가 말하는 성격이 곧다는 말은 군대식 말투나 사무적 말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며 만들고 키운 지조를 말한다. 때문에 여러 지조들 속에 살다보면 가끔 오해를 살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을 정도는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혼자 생각으로 일으키는 오해라 쉽게 풀린다. 말에 살을 좀 붙여서 부드럽게 하려고 애는 쓰는데 쉽지 않다. 글이라면 억지로라도 좀 꾸며보겠는데 말은 참 힘들다. 어릴 적 별명이 많았는데 그중 코미디언도 있었다. 말을 잘하고 남을 잘 웃기곤 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대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공부하고 독서를 즐기며 나이 들수록 말은 줄어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경우가 줄어들게 됐다. 잘난 지조 때문에 회사 같은 조직엔 못 들어가니 사업도 해보고 장사도 해봤는데 내가 할 일들이 아니라기 보단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니었다.
홀로 지내면 많은 철학도 하지만 필요 없는 상상도 하게 된다. 직업으로 말하는 수도자가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외로움에 빠지게 되고 즐기던 고독도 괴로울 때가 온다. 견디기 싫어 사람들을 만나 대화도하고 놀이문화도 찾아 나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나의 존재가 주변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오해가 생기고 해명해야 하는 하기 싫은 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다시 나 홀로의 생활로 돌아가기 싫었다. 감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해가 생기면 풀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보편적 지성 외에 개인마다 지조가 다르기 때문이고, 마음그릇도 크기가 다 다르고, 배워온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 언어와 일상 언어는 차이가 있다. 시나 소설을 보고 글쓴이의 현재 마음이나 미래 삶을 짐작함은 어리석은 짓이다. 문학은 문학의 눈으로 봐야지 문학을 일기로 보면 오해가 생긴다. 설사 내 심정을 적은 일기를 누리터를 통해 읽었다 하더라도 사실을 확인해봐야 한다. 말로 하는 의사소통과 글로 하는 의사소통은 쓰임부터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글이 조금 더 내 마음을 털어 놓는데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만나서 확인도 안 해본 글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한다. 영혼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지만 일기는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일기가 편하게 생각나는 대로 막 쓰기 때문에 바로바로 마음을 적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 의견이야 어떻던 잡 글이나 일기, 편지 등 문학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오해를 살만한 글은 전화를 걸어보거나 직접 만나서 대화로 확인하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그 확인 작업 없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겠다던 사람이 글만보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 적이 있는데, 되레 잘 됐다는 생각이다. 어떤 글인지 그 글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단순한 판단도할 수 없는 정도의 지식인이면 옆에 없는 편이 낫다. 끝없는 오해와 해명만 하다가 늙을 것 아닌가.
문학은 평론가들이 텍스트로 해석을 하던 작가의 전기와 엮어 비평을 하던 작가의 손을 이미 떠난 것이다. 이미 출판이 끝났으면 어떤 방법론으로 해석을 하던 독자와 평론가들의 몫이다. 작가는 손을 떼야 하고 작품을 깎아내리는 비평이 있다고 해서 작가가 나서서 해명하는 일은 큰 의미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위한 글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면 확인을 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일기에 ‘괴롭다.’ 라고 썼는데 ‘저 사람은 나 때문에 괴로운 거야.’ 하거나, ‘가난하다.’ 라고 썼는데 ‘저 사람은 가난뱅이군.’ 하며 그 사람을 특정한 환경과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괴로운지, 돈이 없어 가난한지 아니면 마음이 허해 마음이 가난한지를 물어야 한다. 문학도 작가와 독자 사이를 잇는 소통역할을 하지만 수시로 나눌 수 있는 일상 언어는 아니다. 문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글들은 일상 속 의사소통이다. 두 가지를 헛갈려한다면 공부가 덜 된 것이고 낙서 같은 글을 보고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정짓는 사람은 인생을 어둡게 걷고 있는 사람이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끊어지는 경우가 있다. 통신기지의 병목이든 일시적 고장이든 그런 경우에 당황하기도 한다. 다시 전화가 걸려오면 “말하고 있는데 버릇없이 왜 전화를 끊어?”하고 화를 낸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그냥 끊어졌어요.” 라고 말하면 “웃기고 있네. 듣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 라고 한다. 이때부터 피가 역류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에 쓸데없이 격렬히 뇌가 회전하는 억울한 경우다. 오해는 매우 작은 의견차이로 또는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을 때 생긴다. 아니면 그냥 넘어가도 될 사소한 일을 꺼내 드러내며 생긴다. 잡던 손을 놓게 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그 기억을 꺼내 거리를 두게 된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사랑과 이별노래를 해오고 있다. 그 수천 년 전 사랑과 이별 노래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점은 소통수단이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말도 편지도 실시간으로 받아본다. 기계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도 한다. 이런 빠른 소통수단이 오해를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느긋함이 없고 당장 연락이 되지 않거나 소식이 없으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왜 그러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오해를 하지 않는 경지엔 가까이 온 듯하다. 이별이란 단어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별은 오해를 사서하게 만드는 슬픈 단어다. 풀리는데 참 오래 걸리는 많은 오해를 억지로 만든다. 묘한 건 이별하며 만든 수많은 오해들이 어느 날 어느 한 순간 한꺼번에 풀려버린다는 것이다. 체념, 용서, 이해 같은 말을 하지만 내 경험으로 이별을 버리고 사랑을 담으면 쉽게 풀린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시대적 암울함을 떠나 사랑노래로 보면 오해 같은 건 없다. 되레 이별로 인한 원망과 슬픔을 정화하고 있다. ‘즈려밟는’ 고통은 있어도 오해는 없다. 김소월은 오해를 사지도, 하지도 않는 경지에 오른 건 아닐까?
우리네 삶 속에서 오해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풀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씩 풀어서 그 인연의 끈으로 서로를 엮으라고 있는 것이다. 나를 반성할 때 내가 오해를 하는 쪽인지 오해를 당하는 쪽인지를 생각해본다. 오해를 당하게 만드는 언행도 어리석게 오해를 하는 것도 모두 좋지 않다. 그 바탕에 말과 글이 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오해가 반응한다. 동물들끼리는 오해가 없다. 사냥을 위한 신호, 이동을 위한 신호, 가족보호본능 등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유독 생명체 중 사람만 오해를 한다. 말과 글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말과 글을 얼마나, 어떻게 습득하며 자라고 성장하는 가에 따라 오해가 발생하는 빈도가 결정 된다. 그러나 사는 내내 언제든 갈고 닦아 오해라는 단어를 아예 잠재우는 경지는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나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숙고해보면 나는 아직 그 경지까지는 먼 듯하다.
2010.05.17 16:21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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