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時)와 시간
1998년부터 빈 책에 글을 쓸 때 나는 끝에 시간을 적어 왔다. 1988년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흔적이 있고 1992년 군 시절에도 있지만 본격적인 마감을 위한 글 시(時) 기입은 어림잡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작품을 썼기에 시간을 쓴 것이 아니라 나름 일기나 탈고의 기록이라는 의미로 남긴 것이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각 가정에 모두 보급되다 보니 웹페이지 상에 글을 올릴 때 역시 글이 만들어진 시간을 입력하는 명확한 시간을 표기한다. 누리터상에서 활발하게 문학 동호회 활동을 할 때나 기타 온라인상에서도 나는 내 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늘 표기해왔다.
‘2008.02.19 04:17 風磬 윤영환‘
’2008.02.19 04:17 風磬‘
'2008.02.19 04:17 윤영환‘
’2008.02.19 04:17 바람의 종‘
위와 같이 글의 마지막 줄에 입력해왔다. 연월일시초까지 입력한다. 그런데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요즘 들어 저런 표기방식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처럼 쓰다가 조선왕조실록의 편년체로 돌아가는 끝맺음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뭔가를 자꾸 남기려 든다. 글로든 그림으로든 흔적으로든 말이다. 이런 묘한 습성에 대해 심리학, 사회학 적으로 나름대로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다지 신뢰감이 없는 떨거지 이므로 접는다.
위에 예를 든, 내가 쓰는 저런 표기는 정확한가?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쓰고 있는 동경표준시와 KBS 9시뉴스의 시계,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428-50 1층 반 지하 뒷골목 첫 번째 집의 시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금사리 765번지 시계가 똑같나? 저 시간에 정확히 탈고 했나? 위에 적힌 2월 19일은 정확한 날짜인가? 정말 2월 19일인지 누가 정의 하는가? 당신은 펼쳐진 오늘의 달력을 보고 오늘의 날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달력에 표시된 날짜는 진실인가? 그렇다면 음력은 뭐고 양력은 뭔가? 서기는 뭐고 불기는 뭐고 단기는 뭔가? 자전은 뭐고 공전은 뭔가?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이 시간을 문자로 적어 낼 수 있는가? 적는 순간 시간은 가고 없는 것이다. 수천만 원짜리 고성능 카메라가 민들레를 찍었다고 치자. 그게 정확한 시간을 포착했다고 믿나? 오차 없는 찰나를 진실로 포착했다고 보는가? 공간을 찍은 것이지 시간을 찍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물어 보자. 일 년이 365일이라 믿는가? 아니지 않는가. 대충의 짐작이지 정확함은 없는 것으로 사는 게 현실이다. 자꾸만 정확함을 따지려하니 인생이 곤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에 물든 직선으로 흐르는 역사의 개념이고 시간의 개념이다. 0부터 2008년. 1분은 60초.
어떻게 해서든지 숫자로 표기하려하니 머리에 새치만 늘고 이마의 주름도 몇 개나 되는 지까지 숫자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9시까지 출근해서 12시에 점심 먹고, 1시에 업무시작해서 6시에 퇴근하고, 집까지 45분에서 50분이 걸리고 옷 갈아입는데 5분, 씻는데 3분, 저녁 먹는데 30분, 이를 닦는데 3분, 방에 들어와 독서 2시간 30분, 몇 시까지 자야하니 불 끄고, 내일 몇 시 몇 분에 일어나서 전철역까지 몇 분, 그 전철을 타고 회사까지 몇 분...... 하다가 출근카드 찍고 지각을 모면한 마음에 한숨 돌리며 커피 한 잔 하는 것이다. 월급 895,740원에서 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방세, 전기세, 주민세...... 하다가 얼마 남고, 저축 들어가고, 자동이체네 뭐네 제하고...... 이게 뭐여? 이게 사는 겨? 하다가 시계보고 내일 출근 시간 맞춰 알람시계 확인하고...
순간마다 확인하는 이런 시간들. 의미 있나? ‘완벽하지 못해 표기 불가능한 시간' 중 대충 그 즈음이 부모 기일이고, 내 생일이고, 출근 시간인 것이다. 당신이 맞이하는 생일이 당신이 태어난 정확한 시간이라 믿는가? '가'라는 기업이 있다고 치자. 울산 지점과 서울 본사에서 동시에(불가능 하지만) 출근카드를 찍었다고 하자. 문자로 찍혀 나오는 시간이 같다고 완벽하게 동일한 시간이라 보는가? 정확한 시간을 누가 말할 수 있나. 나름 과학이라고 서양에서 들어온 이런 숫자개념의 시간은 동양인에겐 맞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저녁 6시까지 모임이 있다. 10초 늦었다고 욕을 하는 사람 없고 5분 늦었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 없다. 역으로, 몇 분 일찍 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6시라고 하는 것은 그 즈음이다. 그 언저리가 인간의 의식이다. 시계라는 기계에 더 이상 집착을 말아야 한다. 이처럼 어리석게 스스로 생산하는 스트레스가 어디에 있나. 시간 관리가 성공이라는 서적들이 판을 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기계의 노예인가 한탄이 인다. 경도 상으로 말하는 울릉도에서 해를 맞는 시간이 동경 시(時)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더 세밀하게 말해서 당신의 손목시계 1초와 내 손목시계 1초가 같지 않다. 1초에서 벗어나자. 그 작은 기계에서 벗어나자.
늘 책장 꼭대기에 시곗바늘이 보이지 않는 먼 곳에 두지만, 저 탁상시계를 만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저 시계가 내 표준시다. 컴퓨터에도 시간이 표시된다. 그러나 내 눈에 먼저 띄는 것이 내 표준시다. 단순한 기계일 뿐이고 그리 마음먹으면 여간 편안한 것이 아니다. 가끔 건전지가 늙어 죽으면 건전지하나 갈아 끼운 후 9시뉴스를 보고 예의 상 분침 돌리면 끝이다. 초침까지 뭣 하러 맞추려 애를 쓰나. 대충 맞춘 저 초침이 내겐 ‘완벽한 시간’인 것이고, 마침표 찍던 그 시공간에서 공간을 제외한 표기가 내 글의 생일인 것이다. 시계가 5분 빨리 돌고 있는 친구 집에서 글을 썼다고 치자. 그럼 그 친구네 시계가 나의 표준시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정한 표준시는 개인에겐 의미가 없는 것이고, 내 방안에 있는 시계들도 각자 돌아가는 기계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 시(時)를 남기는가. 이 질문은 '당신은 왜 사진을 찍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추억이 되며 훗날 내 글들을 볼 때 '아! 이 시절이었지.' 하며 추억하려 남긴다. 인생의 목차가 될 수도 있고, 훗날 과거를 볼 때 그 시절의 글 테두리의 너비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식 태어날 때 그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충 그 시절 쓴 것일 뿐 이외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지금도 거짓 시(時)인데 미래엔 명확한 거짓 아닌가.
2008.02.19 06:01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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