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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사진과 영상
인간의 묘한 기능 중 하나는 남겨둬야 하는 일을 반드시 머리에 새겨 두는 습관이다. 이 현상을 ‘우리는 기억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진과 영상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면 건강에 해가 된다. 그 일이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그 일은 더욱더 당신에겐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영상은 당신이 관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아있으며 이외의 기억하지 못하는 영상들에 대해 당신은 원망 없이 살게 된다. 그런데도 기억하려 애쓰는 일은 거짓을 덧붙이려는 체계적인 작업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입학할 때나 그 이전의 어린 시절 기억들이 영상으로 남아있다면 당신은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지만, 사진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입학 때의 기억은 사진으로 남아있지만, 만약에 초등학교 입학식에 불이 나서 소방차들이 몰려왔다면 아마도 그 입학식은 영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별을 늘 동반하는 사랑이다. 사랑하던 시기에 겪던 이별의 아픔은 대부분 영상으로 기억하게 되는데 사랑은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드시 기억돼야 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은 대부분 영상으로 기억한다. 이외의 추억들은 대부분 사진으로 남거나 기억에서 사라진다. 술자리에서 어설픈 한탄을 섞어 떠벌리는 사람을 볼 때가 있는데 대부분 사진 한 장으로 쓰는 소설이다. 사진에 살을 붙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 사진이 아쉬워 영상으로 만들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영상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자연재해나 사고 같은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행복했던 영상보단 떠올리기 싫은 영상을 자주 기억해 내는데, 그 이유는 행복했던 영상과 떠올리기 싫어하는 영상이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한 사람은 불행했던 지난날을 거울로 삼고, 지금 불행한 사람은 행복했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갖가지 영상들을 떠올린다. 내 경험상 비교적 영상으로 남는 행복보단 영상으로 남는 불행이 많다. 수많았던 대부분의 일들은 사진으로 남아있고 슬펐던 순간은 기억 속 영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행복이 오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불행이 닥치면 충격적으로 생각할까? 행복한 매 순간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순 없을까?
묘한 것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과 달리, 미래를 꿈꿀 때는 대부분 영상으로 제작한다는 것이다. 꿈꿨던 영상대로 미래가 오지 않으면 사진으로 만들어 처박아 두거나 지워버린다. 왜냐면 미래를 꿈꾸던 그 날을 행복하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순간의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과거와 미래에만 집착해 만든 사진과 영상은 쓰레기가 되기 쉽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건 대부분 오늘 이 시간에 만족하지 못할 때 꾸게 된다. 한창 사랑할 때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데 그것은 사랑이 이별을 동반하기에 준비하는 계산된 무의식이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기억하는 모든 사진과 영상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훗날 오늘을 떠올려 본들 사진 한 장 남아있겠는가. 오늘을 사는 것이 과거가 되는 것이며 미래로 가는 열쇠다. 기억 속 사진과 영상들은 내가 살아있기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심장이 뛰고 있음에 필름을 아낄 필요는 없다. 미래를 꿈꾸라고 쥐어지는 모든 필름은 무료다. 치열하게 찍어대고 기뻐 날뛸 필요는 없어도 행복한 오늘의 미소 한 모금이 눈보라가 치는 추운 오늘일지언정 목화솜 이불이 된다.
추억 속의 영상은 사진과 달리 필요 이상으로 낡으면 더욱 또렷해지는데 그것은 자주 꺼내어 닦기 때문이다. 자꾸만 떠올리면 더 새로워지고 잊었던 영상도 뜬금없이 떠오른다. 매우 충격적인 일일수록 그 영상은 자주 떠오르며 가장 흔한 예가 이별로 만들어지는 영상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되돌아가고 싶고 지나가 버린 시간을 향한 억울한 외침이다. 이별이 만든 영상은 종종 술이나 슬픔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시로 남겨지면 노래로 불리는 명곡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머릿속 영사기에서 재생되는 모든 것은 필름이 없어도 만년필 하나로도 그려낼 수 있고, 낙서가 되어 버려지기도 하지만 어떤 이별은 수천 년 지나 지금도 노래로 부르고 있다. 한문으로 쓴 것도 헤아릴 수 없으며 문자가 없던 시대엔 그림으로도 이별을 그렸다. 묘한 것은 인간은 사랑보다는 이별에 대한 사유가 더 짙다는 것인데 사랑할 땐 대부분 이별을 잊고 지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랑이 주는 행복은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는 최강의 무기다.
이별을 말할 땐 과거형으로 말하고 사랑을 말할 땐 대부분 미래형으로 말한다. 바라보는 시각과 대화 내용이 다른 이유는 슬픔을 잠재우고 행복을 바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 속 사진과 영상이 밝은 사람이 미래가 환하다는 말은 옳은 말이고 그런 사람이 겪은 충격은 기쁜 충격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기쁜 충격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필름도 두둑하고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요지에 서 있으며 많은 손님을 만나야 하고 찾아가야 하는 이점이 있다. 그 희망과 펼쳐질 꿈들 안에서 남는 행복이 있다면 나누면 좋지 않은가. 받는 사람이 충격으로 새길 정도로 말이다.
영화감독들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촬영하듯이 내 삶이 족하지 않으면 어두운 영상은 잠시 접고 다시 찍자. 기억 속의 사진과 영상이 당신의 미래에 오롯이 거름이 된다는 걸 안다면 오늘을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 10년 후 오늘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평지풍파 없이 참 잘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추천하는 바 추억 속 사진과 영상은 100세나 넘겨 떠올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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