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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19호
2012.11.1 (음9.18)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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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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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품위있고 정중하게 받는 것은 보답할 것이 없더라도 보답하는 셈이 된다. - 리 헌트(英 수필가, 1784~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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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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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야
‘세노야’(senoya)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뷔페식당이다. 곽재구 시인은 1990년에 ‘서울 세노야’를 발표했다. 김혜수와 변우민이 출연한 일일연속극 ‘세노야’는 1989년에 방송되었고, 가수 남진과 하춘화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 ‘세노야’는 1973년에 개봉했다. 노래 ‘세노야’는 조영남, 최백호, 최양숙, 나윤선, 김란영 등의 가수는 물론 배우 최민수도 불렀다. 양희은의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방송에서 처음으로 노래한 이는 작곡자인 김광희이다. ‘세노야’의 노랫말은 고은 시인이 1970년에 발표한 시다. ‘세노야’는 미국 피아니스트 짐 브릭먼의 음반에도 들어 있다. ‘세노야’가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타고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때는 1970년 이맘때인 가을이었다.
‘세노야’의 역사와 존재를 더듬은 까닭은 어느 선배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에야누 야누야…’가 일본 ‘뱃노래’에서 왔다”는 얘기를 건네니 “‘세노야’도 그렇다”며 나직하게 응답한 그는 <한국민요대전>을 엮어낸 최상일 민요전문 피디(PD)다. 그가 자신의 누리집에 올린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세노야’가 일본말이라는 사실은 민요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노야’는 일본 어부들이 배에서 (주로 멸치잡이)그물을 당기면서 부르던 뱃노래 후렴이다. 남해 지역에서 취재한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일본말이 많아진다. ‘세노야’는 우리말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은 시인이 나고 자란 곳은 전북 군산시(당시 옥구군). 어릴 때 들었던 그물질 소리의 뿌리가 일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물 올리며 메기고 받는 흥겨운 소리 ‘세노야’는 훗날 시가 되었고, 처연함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거듭났다. 이런 이유로 1990년 <한겨레>가 창간 두 돌을 맞아 뽑은 ‘겨레의 노래’에 ‘세노야’가 꼽혔을 때 이의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질곡의 역사가 반영된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글쎄,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까.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결단과 결딴
“1월 1일부로 금연할 거야!” “내년엔 운동을 시작해야지!” 새해를 앞두고 이런저런 ‘결딴’을 내리는 이가 많다. 신중을 기해 결심을 하듯 이 단어를 쓸 때도 주의해야 한다.
금연·운동 등 세밑에 내리는 이런 중요한 판단을 ‘결딴’이란 말로 표현하는 건 부적절하다. ‘결단’으로 바루어야 의미가 통한다. 결정적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리는 것 또는 그런 판단이나 단정을 이르는 말은 ‘결단(決斷)’이다. 발음이 [결딴]으로 난다고 ‘결딴’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사생결딴으로 나서다” 역시 ‘사생결단’으로 고쳐야 맞다.
‘결딴’은 어떤 일이나 물건 따위가 아주 망가져 도무지 손쓸 수 없게 된 상태, 살림이 망해 거덜 난 상태를 일컫는 말로 그 쓰임새가 다르다. “경제가 결딴이 날 지경인데도 시장에 대한 믿음은 견고하고 정부 개입에 대한 불신이 큰 게 미국이다”처럼 사용한다. 간혹 ‘결딴’이 올 자리에 ‘결단’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두 단어를 혼동해선 안 된다.
“농가 사육 사향쥐, 풀리면 생태계 절딴” “연이은 폭설로 배농사 절단”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딴’으로 고쳐야 바르다. 절단(切斷)은 자르거나 베어 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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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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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論에 대하여 - 김기산
농로에서 새참을 때우던 서민들의 컬컬한 소리가 들어있고 가라앉은 탁한 끝 맛에는 배곯던 시절 허기를 덮어주던 여운도 있다
그래도 국주란 말은 어색하다 나라마다 국주는 국민성을 담보하고 있으니 보드카는 슬라브의 저력이고 스카치는 앵글로 섹션의 끈질김이다 맥주는 겔만족의 여유이고 라틴족은 와인빛에 젖어서 산다 벚꽃 향의 일본 청주가 있는가 하면 중화대륙은 화주火酒의 품에 들어있다
오랜 숙성시간이 들어있지 않은 막걸리 그 위의 맑은 것은 다 떠내고 나머지를 막걸러 탄생시킨 술, 하늘 냄새 흙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품고 산 서민들의 땀 냄새가 익어서 일까 잔과 입술에 묻어나는 희끗한 앙금 탁한 살은 무겁지만 컬컬한 취기는 하늘을 난다
맑은 빛과 향의 취기가 배어있는 안동골과 대동강변, 경주, 전주 산기슭에서도 고유의 취기를 담은 맑은 물소리 들리니 막걸리에 너무 큰 이름은 붙이지는 말자 서민들이 지켜온 술 그냥 즐기면 되지
자-맑은 술과 함께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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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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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3. 배움과 가르침을 위한 수프
잃어버린 짐
인도를 여행하던 나는 북인도 사막지대인 자이푸르에서 조드푸르로 가는 특급 열차의 일등 칸에 타고 있었다. 내가 탄 칸에는 매우 화목해 보이는 인도인 가족이 타고 있었다. 나는 여행 가이드북에서 배운 대로 배낭에 자물쇠를 채워서 수하물 선반에 설치된 쇠사슬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인도 여행 기간중 처음으로 지갑 벨트를 풀어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사막을 건너는 동안 그것을 허리에 차고 있으면 덥기도 하거니와 땀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번 여행에서 번번이 땀에 흠뻑 젖은 100루피짜리 지폐를 꺼내곤 했었다. 인도의 방식답게 기차는 20분 간격으로 멈춰 섰으며, 그럴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와서는 창문을 통해 차나 시원한 음료, 과자 부스러기들을 사라고 고함을 쳐댔다. 여행의 절반쯤 갔을 때 나는 나한테 미네랄 생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무더운 날씨에 탈수증에 걸릴 것이 걱정된 나는 다음 역에서 생수를 더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인도인 가족은 기차가 5분 내지 10분 정도 정차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설명했다. 나는 기차가 서자마자 생수를 사려고 뛰어갔다. 그런데 불행히도 플랫홈에는 생수 파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역 바깥에 늘어서 있는 가게들로 달려갔다. 생수 파는 곳을 물을 때마다 인도인들은 멍하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기 수도꼭지가 있지 않은가? 왜 병에 든 물을 사 마시느라고 돈을 낭비하지? 별 이상한 친구 다 보겠어.' 영어도 잘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생수 사는 걸 포기하고 망고 주스를 두 박스 샀다. 그러느라 4분 정도를 지체했기 때문에 돈을 치르자마자 나는 황급히 역 안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내가 플랫홈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는 것은 텅빈 선로뿐이었다. 기차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었다.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과 공포를 난 아마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아니 인도였다! 최악의 악몽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 기차 안에 있었다. 배낭, 옷, 카메라, 필름, 의약품, 대부분의 돈, 그리고 여권과 여행자 수표가 든 지갑 벨트까지. 내가 가진 것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100루피(1루피는 30원 정도) 쯤 되는 잔돈, 그리고 열 개들이 망고 주스 두 박스뿐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플랫홈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면서 기차가 어디로 갔는가 물었다. 선로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에 커번을 두른 한 인도인이 느릿느릿 먼 방향을 손짓하는 걸로 보아 기차가 날 내려놓고 떠나 버린 게 분명했다. 나는 정신없이 역장 사무실로 달려가서 숨을 헐떡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했다. 그런데 영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역장은 종이를 꺼내더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 위에 적으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좌절스런 30분이었다. 내 짐이 기차에 실려 메마른 사막지대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동안에 나는 볼펜과 종이를 들고 씨름을 해야만 했다.
나는 또다시 냉정을 잃기 시작했다. 인도인답게 역장은 모든 상황을 알고도 전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나는 코미디언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욕을 하고 벽을 주먹으로 치고 가구들을 발로 차기도 하면서 역장실 안을 우왕좌왕했다. 이미 근처에 있던 인도인들이 한 떼나 몰려와서 문짝에 기대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우스꽝스럽게도 영국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에서 호켈 주인이 멕시칸 웨이터에게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까무러치기 전에 제발 내 말 좀 이해해 다오!"하고 소리치던 대사였다. 역장과 몇 장의 종이를 주고받은 끝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45킬로미터 떨어진 다음 정거장이자 조드푸르 전 정거장인 데가나 역에 내 짐을 내려놓도록 시도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 데가나 역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역장은 느릿느릿 데가나 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그것이 전혀 자신감 있는 시도로 보이지 않았다. 전화는 자꾸만 끊어졌다. 게다가 그것은 손잡이를 돌리도록 된 수동식 전화였다. 고통스런 30분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데가나 역에서 연락이 왔다. 내 짐이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짐의 안전을 믿지 못한 나는 다음 기차가 그것을 싣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앉아 있기보다는, 자도차를 타고 데가나 역으로 가서 짐을 찾기로 결심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그 곳까지 갈 수 있는 차를 물색하기 위해 기차역과 택시 정류장 사이를 육상선수처럼 두 번이나 왕복했다.
마침내 나는 두 시간 거리으 여행에 250루피의 택시비를 지불하기로 했다.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당황했을 때 이미 사태를 알아차린 것이다. 이 무렵 나는 한 무리의 팬클럽을 갖고 있었다. 서른 명이 넘는 그 지역 인도인들이 이 괴상한 서양인 친구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구경하기 위해 내가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우르르 따라다녔다. 그들은 나보다 더 열심히 달리고,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외치며, 더 열심히 손을 흔들고, 더 세게 가구들을 쥐어박았다. 그들은 내가 다시 상점으로 뛰어가서 사막을 통과하려면 망고 주스 두 박스가 더 필요하다는 걸 셜명하자 까무러치도록 신나했다. 상점 주인은 입이 벌어졌고, 인도인들은 서양인 여행자가 망고 주스로 가득한 두 개의 비닐백을 들고 피날레를 장식하며 택시에 뛰어오르자 일제히 박수를 쳤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데가나 역에 도착했을때 정말로 내 짐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들은 선반의 쇠사슬을 절단해 배낭을 내렸을 뿐 아니라, 배낭의 잠겨 있지 않은 주머니와 배낭 뚜껑 주머니에 들어 있던 내용물들을 꺼내 비닐 봉지에 넣고 왁스로 봉해 놓았다. 아무도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내가 도착할때까지 그것들은 잘 정리되어 자물쇠가 달린 벽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놀라운 조직력이었다. 나는 음식과 음료수를 대접받았다. 역장이 자기 집에서 직접 음식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이 어떤 과정으로 짐을 내렸는가를 설명했다 그런 다음 나는 다른 기차를 타고 조드푸르로 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새 기차표가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기차차표를 사용해서. 나는 다음 날 새벽 다섯시에 조드푸르에 도착하는 야간열차에 안전하게 승차했다. 그곳에 도착해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 보든 일이 꿈만 같았다.
나는 떠나면서 감사의 표시로 데가나 역의 직원들에게 약간의 돈을 지불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감사표시를 하고 싶다면 내가 가진 카메라로 단체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한 장 보내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내가 무척 행운아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둑과 소매치기로 가득하다는 인도의 기차 여행은 사실과 달랐으며, 새벽에 조드푸르에 도착했을때 인도와 인도인들은 더욱 새롭고 신비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프란시스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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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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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본질 철학은 인간을 탐구할 때 인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함에 비해, 실존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실존의 문제는 다른 어떤 존재자도 아니고 오직 인간에게만 일어난다. 실존주의는 존재나 존재자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탐구 과제로 삼는다. 전통적 서양 철학은 주로 본질의 문제를 탐구했음에 비해 실존주의는 실존의 문제를 탐구한다. 본질철학은 인간을 탐구할 때 인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데 비해 실존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본질철학은 인간의 본질(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거로서의 이성이나 정신)을 탐구함에 비해 실존철학은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단 앞에 선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1813~1855)에 의하면 헤겔의 변증법은 양적 변증법에 불과하고 자신의 변증법은 질적 변증법이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은 형식주의에 빠져 있으므로 양적 변증법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변증법이 양을 극복하고 비약을 포함하기 때문에 질적 변증법이라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각 단계는 특정한 실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미적 실존의 단계이다. 돈 주앙의 삶이 그것을 대변한다. 돈 주앙은 오직 향락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다. 돈 주앙은 한 가지 일에 곧 싫증을 내고 끊임없이 새로운 향락의 대상을 따라 다닌다. 이 단계에서 흔히 사람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다.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실존은 미적 실존으로부터의 비약이다. 이 단계는 성실한 결혼 생활에 어울린다. 서로 다른 성의 남녀가 만나 엄숙한 결혼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며 사랑하지만 사랑은 습관화되어 권태를 초래한다. 부부는 권태를 탈피하기 위해서 결혼 당시의 황홀한 사랑으로 되돌아와서 사랑을 유지하며 서로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나 항상 후회와 오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실존은 윤리적 실존으로부터의 비약이다. 종교적 실존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맺어진 생활을 영위한다. 영원한 하느님은 그리스도라는 인간 존재에 의해 현실화된다. 그리스도는 영원이지만 현실의 시간상 제한 받기 때문에 타락의 가능성이다. 그렇지만 영원한 시간을 소유하기 때문에 신앙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인 실존적 의미가 성립한다. 신이면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삼음으로써 인간은 종교적 실존자가 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의 출발점은 자기이다. 그의 자아는 불안을 안고 있다. 이 불안으로부터 하느님이 요청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하느님이 은폐되어 있으므로 자아는 불안하다. 인간은 불안한 가운데서 하느님을 구하고 하느님 안에서 본래적 자기로서 구원될 수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앞에 항상 단독자로 선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의 좌절로부터 종교에의 비약을 수행하기 때문에 종교적 실존에서 인간의 참다운 실존적 의미를 발견한다.
암호 해독과 야스퍼스 야스퍼스는 현존재 분석을 통해서 실존철학의 사유를 밝히고자 한 독일의 대표적 실존철학자이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했음에 비해, 야스퍼스는 유태인 부인과 이혼하면 교수직을 계속 지녀도 좋다는 나치의 지시를 거부하여 교수직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적 사유에 의해 인간은 참다운 자기 자신을 획득한다. 실존적 사유는 개별 대상에 대한 인식을 초월해 자신의 자유에 호소함으로써 초월자(포괄자)를 만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위한 무조건적 행위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야스퍼스의 주장이다. 야스퍼스의 실존은 개별 대상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의해서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인간 현존재를 일컫는다. 우리들 인간은 누구나 고통, 우연, 죄, 죽음 등의 한계 상황에 던져져 있으며 그 앞에서 항상 좌절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사유는 개별적 대상에 대한 사유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것은 한계 상황과 아울러 자신의 무제약성, 곧 자유를 조명한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현존재 인간의 실존을 증명한다. 인간 현존재는 고통, 우연, 죄, 죽음 등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되면 세계 과정의 모순과 파괴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한계 상황은 없다가 있고 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현존재 인간이 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가능적 실존은 한계 상황에 처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할 때 비로소 현실적 실존이 된다고 말한다. 야스퍼스의 실존은 자신의 자유를 구현하는 자유로운 인간 존재이다. 인간 현존재가 한계 상황에 처해 좌절로 인해 고뇌하면서 드디어는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할 때 인간은 각성적 진단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각성적 진단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회상하게 하는 작업이다. 각성적 진단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나는 염세주의적 경향이다. 즉 인간의 역사는 자유롭게 되려고 하는 헛된 시도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비록 현실적이라고 할지라도 무의미하며 매순간 좌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수면 상태의 현존재 중에서 우선 자연적 현존재를 다음으로는 기술적 현존재를 말할 수 있다. 자연적 현존재는 무의미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이며, 기술적 현존재는 단지 수단적 과학 기술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양자는 모두 인간의 소멸과 종말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뜻하지 않는다. 각성적 진단은 또 다른 한편으로 낙관적 경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즉 몰락과 좌절이라는 염세주의의 절정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기 존재의 원천성을 통찰한다. 인간 현존재는 세계의 모든 것들이 암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각성한다. 불가피하게 여겨지는 한계 상황은 모두가 암호에 불과하다. 암호를 모두 풀고 나면 초월자(포괄자)와 대면해 있는 자유로운 자기를 보게 된다. 야스퍼스는 현존재 인간이 암호를 해독해 초월자와 대면하는 것을 일컬어 초월자를 향한 실존의 비약이라고 본다. 야스퍼스는 후기의 대표 저술 <이성과 실존>에서 비대상적, 초월적 존재를 포괄자라고 부른다. 포괄자는 우선 주관적 존재로서의 포괄자와 객관 존재로서의 포괄자로 구분된다. 주관적 포괄자는 다시금 내재적 포괄자(현존재, 의식 일반, 정신)와 이것들의 바탕인 실존으로 구분된다. 객관적 포괄자는 세계와 포괄자 자체인 초월자로 구분된다. 이들 모든 포괄자를 결합하는 것이 이성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이성에 의해서 실존이 해명될 수 있고 또 실존에 의해서 이성은 내용을 가질 수 있다. 각성적 진단은 이성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며 인간 현존재는 각성적 진단에 의해서 주관적 포괄자와 객관적 포괄자 그리고 궁극적으로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결국 실존으로부터 초월자로의 비약을 성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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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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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門揖盜(개문읍도) 開(열 개) 門(문 문) 揖(읍할 읍) 盜(훔칠 도)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말년,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강동(江東)의 손책(孫策)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강동 오군(吳郡)의 태수인 허공(許貢)은 황제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손책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손책에게 발각되어 죽고 말았다. 한편 사냥을 나갔던 손책은 허공에게 큰 은혜를 입은 식객들이 쏜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당시 손책의 아들 손권(孫權)은 겨우 15세. 부친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군정을 살피지 않자, 장소(張昭)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들을 뒤쫓아오고, 이리 같은 놈들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자네는 부친의 죽음만을 슬퍼하고 대사(大事)를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네(是猶開門揖盜)."
開門揖盜는 개문납적(開門納賊) 이라고도 하며, 스스로 화를 자초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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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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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10. 종교의 어렴풋한 모습
나는 예닐곱 살 때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학교에 다니는 동안 갖가지 것들을 다 배우면서도 종교만은 배우지 못하였다. 선생들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을 내가 배우지 못하고 말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주위에서 이것저것을 주워 넣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종교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는 말로서, 자기 실현 또는 자아의 깨달음을 뜻하는 것이다. 바이슈나바 신앙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자주 하벨리에 갔었지만 별 감동은 못받았다. 나는 그 화려와 사치가 싫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도덕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모든 흥미를 잃어버렸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하벨리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얻지 못한 것을 나는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종살이해 온 늙은 유모에게서 얻었다. 그녀의 애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유령이나 귀신에 무서움을 탄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람바(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는데)는 나에게 그 무서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라마나마*1를 외우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가르쳐 준 그 방법보다도 가르쳐 준 그 사람을 더 믿었으므로 어릴적부터 유령과 귀신에 대한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라마나마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물론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려서 뿌려진 그 선한 씨는 헛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라마나마가 틀림없이 고쳐 주는 힘을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착한 여자가 심어준 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때쯤해서 라마야나*2의 신자였던 내 사촌 한사람이 내 둘째 형과 나를 위해 람 라크샤를 배울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따로 외워가지고 아침마다 목욕후에 외우곤 하였다. 우리가 포르반다르에 있는 동안 그것은 계속됐다. 그러나 라지코트에 오자마자 잊어버렸다. 나는 거기에 대한 깊은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외웠던 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람 라크샤를 저확한 발음으로 외울 수 있다는 자랑에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라마야나를 외우던 일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병석에 계시던 한동안은 포르반다르에 계셨는데, 거기서 그는 매일 저녁마다 라마야나를 듣고 있었다. 그것을 외운 사람은 라마*3의 독실한 신자였던 빌레슈바의 라다 마하라즈였다. 그에 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그는 문둥이였는데, 아무 약도 쓰지 않고, 빌레슈바 사원에 있는 마하데바 신상앞에 들렀다가 내버린 빌바 잎사귀를 아픈 데 붙이고, 라마나마를 규칙적으로 외움으로써 나았다는 것이다. 그의 믿음이 그를 온전케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어쨌거나 그 이야기를 믿는다. 그리고 라다 마하라즈가 라마야나를 읽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서 문둥병이 온전히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아주 음악적인 목청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하스와 쵸파이스를 부르고는 그것을 설명하곤 했는데, 그때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또 듣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마 열세 살이었을 텐데, 그 읽는 소리에 황홀해 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나의 라마야나에 대한 깊은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 오늘날 나는 툴라시다스의 라마야나를 모든 신앙문서 중에서 최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달 후 우리는 라지코트로 왔다. 거기서는 라마야나를 읽는 일은 없었지만, 에카다쉬*4 날마다 바가바트를 읽었다. 이따금 그걸 읽는데 나도 참석했었으나, 읽는 사람을 별로 영감을 받는 것이 없었다. 지금 나는 바가바트는 신앙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구자라트어로 읽었는데, 한없는 흥미를 가지곤 했다. 그러나 내가 21일간 단식하는 동안 판디트 마단 모한 말라비야가 그 부분부분을 원어로 읽는 것을 들었을 때는 내가 어린 시절에 그같은 신앙 깊은 이에게서 그것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내가 어릴 적부터 그 책을 좋아하게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 형성되는 인상은 인간의 본선에 깊이 뿌리를 박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그런 종류의 좋은 책을 좀더 많이 얻어 들을 수 없었던 것이 나의 잊을 수 없는 한이다.
그러나 라지코트에서 나는 힌두교의 모든 종파와 여러 자매 종교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벨리뿐 아니라 시바*5와 라마의 절에도 다녔는데, 우리 어린이들을 데리고 거기에 가기도 했고 우리더러 가라고 보내 주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자이나교 중들이 때때로 아버지를 찾아오기도 했는데, 그러면 자기네의 규칙을 떠나서 비자이나 교도로서 우리의 음식을 들기까지 했다. 그들은 아버지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와 세속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그는 그밖에 이슬람교와 파르시교*6의 친구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버지께 자기네 종교 이야기를 했고, 그러면 아버지는 언제나 존경하는 태도로, 때로는 아주 흥미를 가지고 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화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이 여러가지 일들이 작용하여서 내 안에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하는 태도를 심어 주었다. 다만 기독교만은 그때에 예외였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일종의 싫어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중학교 가까이의 거리 모퉁이에 서서 힌두교도와 그들의 신에 대해 욕설을 퍼붓곤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꼭 한번 서서 들은 일이 있었는데, 그 한번만으로 다시 들을 생각이 없어졌다. 같은 무렵에 어떤 유명한 힌두교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들었다. 읍내에 돌아다니는 말로는, 그는 세례를 받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그 복장을 고쳐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나는 과연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옷을 바꿔 입기를 강요하는 종교는 종교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또 그 개종자가 제 조상의 종교와 풍속과 제 나라를 비방한다는 말도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속에 그리스도교를 싫어하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하기를 배웠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하느님에 대한 어떤 산 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 무렵, 어떻게 해서 아버지가 수집해 둔 수집품 가운데서 우연히 마누스므리터*7를 본적이 있었는데, 그 속의 창조 설화와 그와 비슷한 설화들은 내게 별로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어느 정도 무신론적인 경향을 내 속에 만들어 주었다. 내게 사촌이 한 사람 있다. 아직 살아 있는데, 나는 그의 지식을 높이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 의심을 털어 놓았지만 그도 그것을 풀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를 보내면서 하는 말이 이러했다. 네가 자라면 그 의심을 너 자신이 풀 수 있을 것이다. 너희 나이에는 그런 의심은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을게다. 나는 잠잠했지만, 속이 시원치는 못했다. 마누스므리티의 음식, 또는 그밖의 그런 것들에 대한 장은 내 눈에는 일상의 실제와는 역행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것들에 대한 나의 의문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해답을 얻었다. 지식이 더 자라고 책을 더 많이 읽으면 나는 이것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하여튼 마누스므리티는 그때 내게 아힘사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앞서 육식 이야기를 했지만, 마누스므리티는 그것을 지지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또 뱀.빈대따위를 죽이는 것은 온전히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빈대나 그따위 벌레들을 죽이면서 그것은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박았다. 즉, 도덕이 모든 사물의 근본이요, 진리가 모든 도덕의 알짬이라는 확신이다. 진리만이 나의 목적이 됐다. 그것은 나날이 광대한 것으로 자라갔고 그것에 대한 나의 정의도 갈수록 넓어갔다. 구자라트의 한 교훈시가 내 마음과 심정을 함께 사로잡았다. 선으로써 악을 갚으라는, 그 교훈이 나의 지도 원리가 됐다. 그것이 점점 나의 열정으로 되어 갔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실험해 보게 되었다. 이것이 그 놀라운(나에게는) 귀절이다.
물 한 잔을 밥 한 상으로 갚고 한마디 정다운 인사에 넙죽이 절을 하며, 피천 한 푼을 금으로 갚고 네 목숨을 건져 주었거든 목숨도 아끼지 마라. 모든 어진말과 행동을 그렇게 존중하고 조그만 섬김도 그 갚음은 열 곱으로 하라. 그러나 참 성자는 만인을 하나로 알고 기쁘게 선으로써 악을 갚느니라.
*1. Ramanama : 염불처럼 라마신의 이름을 외우는 것 *2. Ramayana : 마하바라타와 함께 인도 고대의 유명한 서사시 *3. Rama : 비뉴수 신의 화신의 하나. *4. Ekadashi : 음력에서, 초하루와 보름에서부터 각각 열하루째 날 *5. Shiva : 브라라마, 비슈누와 더불어 힌두교의 3대 신격의 하나 *6. Parsi :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 계통의 한 종파 *7. Manusmriti : 마누의 법전, 힌두교에서 권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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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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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3장 그리스의 태초 신들
12. 오케아노스
오케아노스(Oceanus)는 강력한 권세를 가진 바다의 신으로 지상과 자하계의 주류를 이루는 강(알페오스, 페네이오스, 스트류몬 등)을 지배하였다. 우라노스와 폰토스 혹은 가이아의 아들이며, 동생 테튜스를 아내로 맞아들여 오케아니데스라 부르는 많은 딸을 두었다. 그 중 하나인 에우류노메는 그녀의 남편 오피온과 함께 크로노스 이전에 티탄족을 지배하였는데 크로노스와 레아에게 밀려나 바다로 도피하였고 천공에서 떨어진 헤파이스토스를 테티스와 함께 구조하여 환대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카리테스와 아소포스를 낳았다 한다. 도 다른 딸 칼리로에는 크류사오르와 결혼하였으며 에키드나, 오르토스 및 케르베로스가 그 소산이라는 설도 있다. 호메로스에 의하면 모든 신의 아버지가 이 오케아노스이며, 자주 신들의 예방을 받는다고 한다. 그는 긴 수염을 가진 노인으로 파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먼 곳으로 항해할 때는 존엄하게 모셔지는 신이다. 거신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아 승리한 신족에게서 원한을 사지 않았고 타르타로스로 밀려나지도 않았다. 주로 육지 주변의 바다의 파도치는 것을 다스렸다.
네레우스 네레우스(Nereus)는 오케아노스와 테튜스의 아들로, 에게해에 사는 바다의 신이다. 여동생 도리스를 아내로 삼고 아름다운 인어(요정) 50명을 두었는데, 이 요정들을 네레이데스라고 부른다. 그는 빨간 머리카락에 긴 수염을 가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개 그의 딸들이 그를 에워싸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다. 매우 지혜가 뛰어나며 앞일도 잘 예측하는 재능을 가진 그는 에게해 세계의 가장 옛 신으로 모셔졌으며 바다의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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