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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0호 - 2024.12.05. 목요일(음력 : 11.05.)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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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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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은 울리는 종을 멈추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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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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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地名)의 장단음
우리나라 이름의 성씨에 장단음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지명에도 장단음이 있어 각각의 지명에 맞는 소리의 길이를 정확히 알고 발음해야 한다.
먼저 광주(光州)광역시는 첫음절 ‘광’을 짧게 [광주]로 발음하지만 경기도 광주(廣州)시는 ‘광’을 길게 [광ː주]로 발음한다.
강원도 대관령 동쪽에 있는 영동(嶺東) 지방은 ‘영’을 짧게 [영동]으로 발음하지만 충북 영동(永同)군은 ‘영’을 길게 [영ː동]으로 발음한다.
우리나라 국토를 지형적으로 일컫는 한반도(韓半島)와 우리나라의 국명인 대한민국(大韓民國), 한국(韓國)은 모두 첫음절을 길게 [한ː반도], [대ː한민국], [한ː국]으로 발음한다.
우리나라 광역자치단체 중에 첫음절을 길게 발음하는 곳으로 경북(慶北), 경남(慶南), 제주(濟州), 세종(世宗) 등이 있다. 대구(大邱)와 대전(大田)은 첫음절이 장음인 ‘대(大)’로 시작하지만 예외적으로 단음으로 발음한다.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 중에 첫음절을 길게 발음하는 곳으로는 서울 광진(廣津), 서초(瑞草), 영등포(永登浦), 부산 해운대(海雲臺), 인천 계양(桂陽), 부평(富平), 대전 대덕(大德), 경기도 과천(果川), 부천(富川), 시흥(始興), 이천(利川), 포천(抱川), 충북 보은(報恩), 진천(鎭川), 충남 금산(錦山), 보령(保寧), 서산(瑞山), 서천(舒川), 전북 무주(茂朱), 임실(任實), 진안(鎭安), 전남 무안(務安), 보성(寶城), 순천(順天), 해남(海南), 경북 경산(慶山), 경주(慶州), 봉화(奉化), 영천(永川), 예천(醴泉), 의성(義城), 경남 거제(巨濟), 사천(泗川),
진주(晉州), 통영(統營) 등이 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불규칙용언 (4)
‘(등이) 굽다’는 ‘굽고, 굽지, 굽은, 굽어’에서 보듯이 어떤 어미를 만나더라도 어간의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기를) 굽다’는 ‘굽고, 굽지, 구운(굽+은), 구워(굽+어), 구웠다(굽+었다)’에서 보듯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를 만나면 어간 끝음절의 ‘ㅂ’이 ‘ㅜ’로 바뀐다. 이런 용언을 ‘비읍불규칙용언’이라 한다. ‘가볍다(가벼운, 가벼워), 새롭다(새로운, 새로워)’ 따위도 비읍불규칙용언이다.
예전에는 모음조화가 적용되어 ‘가깝다, 아니꼽다’는 ‘*가까와(가깝+아), *아니꼬워(아니꼽+아)’로 활용되었으나, 현행 한글맞춤법에서는 모음조화를 적용하지 않고 모두 ‘-어’ 계열로 적도록 하고 있다. 즉, ‘가까워(가깝+어), 아름다워(아름답+어), 아니꼬워(아니꼽+어)’가 바른 표기인 것이다. 단, ‘돕다, 곱다’처럼 2음절로 된 용언에 한해서는 ‘도와(돕+아), 고와(곱+아)’처럼 ‘-아’ 계열로 적는다.
‘-스럽다’로 끝나는 말도 비읍불규칙용언이다. 따라서 어미 ‘은’을 만나면 ‘-스러운’으로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사랑스러운 아내, 자랑스러운 아들’이 맞고, ‘*사랑스런 아내, *자랑스런 아들’은 잘못이다. ‘줍다’도 비읍불규칙용언이므로 ‘주운, 주워, 주우니, 주웠다’가 된다. 그런데 실제 발화에서는 ‘줏은, 줏어, 줏으니, 줏었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줏다’는 ‘줍다’의 옛말이긴 하나 표준어는 아니니 가려 써야 할 것이다.
‘(선물을) 주다’는 ‘주어→줘, 주었다→줬다’가 된다. 그런데 ‘(흙을) 푸다’는 ‘*푸어→풔, *푸었다→풨다’가 되지 않는다. ‘퍼(푸+어), 펐다(푸+었다)’가 된다. ‘ㅜ’가 탈락하므로 ‘우불규칙용언’이라 하는데, ‘푸다’가 유일하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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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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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 - 윤동주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따러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 년 오래인 연륜에 짜들은 유암한 사림이,
고달픈 한몸을 포옹할 인연을 가졌나 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 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 바람이
솨~ 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 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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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볍전서와 혁명 - 김수영
기육법전서(旣六法全書)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불상한 백성들아
불상한 것은 그대들 뿐이다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그대들 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한
혁명을-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 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팔천구백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이팔(零下二八)환인데
이래도 그대들은 유구(悠久)한 공서양속정신(公序良俗精神)으로
위정자가 다 잘해줄줄 알고만 있다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을 세우는 문인들
너무나 투쟁적인 신문들의 보좌를 받고
아아 새까맣게 손때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 등에 장을 지져라
4.19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허기야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물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쓰는 말밖에는 아니되지만
그보다도 창자가 더 메마른 저들은
더 이상 속이지 말아라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1960.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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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바다처럼 - 이해인
산을 좋아하는 친구야
초록의 나무들이
초록의 꿈 이야기를 솔솔 풀어내는
산에 오를 때 마다
나는 너에게 산을 주고 싶다
수많은 나무들을 키우며 묵묵한 산
한결 같은 산처럼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 함께 새롭히자.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야
밀물과 썰물이 때에 따라 움직이고
파도에 씻긴 조가비들이
사랑의 노래처럼 널려있는
바다에 나 갈 때 마다
나는 너에게 바다를 주고 싶다
모든 걸 받아안고 쏟아낼 줄 아는 바다
바다의 넉넉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우리 함께 배우자.
젊음 하나만으로도
나를 기쁨에 설레이게 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목말라하는 너를 위해
나는 오늘도 기도 한다
산의 깊은 마음과 바다의 어진 마음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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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단상 - 이해인
1
어려서부터
나는 늘
해질녘이 좋았다.
분꽃과 달맞이꽃이
오므렸던 꿈들을
바람 속에 펼쳐내는
쓸쓸하고도 황홀한 저녁
나의 꿈도
바람에 흔들리며
꽃피기를 기다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이 핑 도는 슬픔을
아이는 처음으로 배웠다
2
헤어질 때면
“잘 있어. 응”하던 그대의 말을
오늘은 둥근 해가 떠나며
내게 전하네
새들도 쉬러 가고
사람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겸허한 시간
욕심을 버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
문득 아름다운 오늘의 삶
눈물나도록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견디고 싶은 마음이
고마움이 앞서네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래야 내일의 밝은 해를 밝게 볼 수 있다고
지는 해는 넌즈시 일러주며 작별인사를 하네
3
비바람을 견뎌내고
튼튼히 선 한 그루 나무처럼
오늘이란 땅 위에 선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견뎌내야
조금씩 철이 드나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터무니없는 오해도 받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도 하면서
어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가볍지 않은 웃음을 웃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도
좀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나 보다
4
찬물로 세수하고
수도원 안정원의 사철나무와 함께
파랗게 깨어나는 겨울 아침
흰눈 속의 동백꽃을
자주 찾는 동박새처럼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즐겨 먹는다는 붉은 새처럼
나도 이제는
붉은 꽃, 붉은 열매에
피 흘리는 사랑에 사로잡힌
한 마리 가슴 붉은 새인지도 몰라
겨울에도 쉬지않고
움직이는 기쁨
시들지 않는 노래로
훨훨 날아다니는
겨울새인지도 몰라
5
귀에는 아프나
새길수록 진실인 말
가시 돋혀 있어도
향기를 숨긴
어느 아픈 말들이
문득 고운 열매로
나는 먹여 주는 양식이 됨을
고맙게 깨닫는 긴긴 겨울밤
좋은 말도 아껴 쓰는 지혜를
칭찬을 두려워하는 지혜를
신께 청하며 촛불을 켜는 겨울밤
아참의 눈부신 말은 준비하는
벅찬 기쁨으로 나는
자면서도 깨어 있네.
6
흰 눈 내리는 날
밤새 깨어 있던
겨울나무 한 그루
창을 열고 들어와
내게 전하네
맑게 살려면
가끔은 울어야 하지만
외롭다는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말라고
사랑하는 일에도
자주 마음이 닫히고
꽁해지는 나에게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가
또 말하네
하늘을 보려면 마음을 넓혀야지
별을 보려면 희망도 높여야지
이름 없는 슬픔의 병으로
퉁퉁 부어 있는 나에게
어느새 연인이 된 나무는
자기도 춥고 아프면서
나를 위로하네
흰 눈 속에
내 죄를 묻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나의 나무는 또 말하네
참을성이 너무 많아
나를 주눅들게 하는
겨울나무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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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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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햇살 한 자락 - 권영세
거미줄에
햇살 걸렸다.
금빛
반짝이는
아침 햇살.
바람 사알랑
스쳤다 가면
그 가느단 줄에 매달린
햇살자락 일렁인다.
누가 저리도 고운 햇살
아침마다 걸어 둘까?
온종일
길목에 두고
눈길 끄는
거미줄에 걸린
금빛 햇살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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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 - 임원재
새벽길
숲 속 하얀 길은
어머니 곱게 빗은
머리 가르마
달님이 밝고 간 발자국 따라
땅서리가
하얗게 그려 놓았다.
나무들 숨소리만
새록새록
바람도
조심조심 지나가는
이른 새벽길
들쥐가 몰래몰래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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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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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빤지에서 널빤지로 - 디킨슨 / 강은교 역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 밑엔 바다가 있는 것같이.
난 몰랐네 -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
어떤 이는 경험(經驗)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시집 :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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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감성사전
창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 또는 만들어 놓은 것을 파괴시키는 일. 소망으로써 창조되어진 피조물은 신에 가깝고 욕망으로써 창조되어진 피조물은 악마에 가깝다. 소망은 만인에게 이롭고 욕망은 개인에게만 이롭다. 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신이 인간과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에 신은 단 두명의 인간을 창조해 낸데 불과했으나 오늘날 인간은 수천 종의 신을 창조해 내고 있다.
악마
인간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신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영적 존재의 총칭. 생각의 신생아 실에서 탄생하여 마음의 영안실에서 소멸한다. 낙원에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천국에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다. 증오의 크기와 악마의 크기는 정비례하고 사랑의 크기와 악마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질서
자연적인 질서와 인위적인 질서로 대별된다. 자연적인 질서는 만물이 우주의 순환원리대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수행하는 상태를 말하며 창조주의 주관 하에 완벽한 아름다움을 영구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인위적인 질서는 자연으로부터 이탈한 인간들이 보다 부자연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도덕과 양심을 담보로 조리와 순리를 지켜 스스로를 속박하는 상태를 말한다.
훈시
어떤 의미에서건 자신을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들의 위상을 자신보다 하급서열로 설정하여 말로써 어떤 가르침을 하달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그 가르침을 일컬어 훈시라고 한다. 대부분이 상투적인 어휘와 구태의연한 문장들로 조제된 무해무득의 첩약들이며 때로는 두통을 유발시키거나 오한을 유발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길어지면 고문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탁월한 언어의 조제술을 가진 명의는 훈시로써 집단과 개인의 고질병을 치유하고 역사와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각설이
끼니때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타령으로 깨달음을 설하고 한 덩어리의 식은 밥으로 개런티를 대신하는 무명 연예인들이다. 배부른 사람들이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배역을 맡고 있다. 일정한 주거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철새처럼 유랑한다. 급속도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그 수가 줄어들어서 거의 멸종 상태다. 그들의 허기진 배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먹이는 지천에 깔렸어도 그들의 허기진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랑은 가문 여름 논바닥처럼 메말라 버린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존경심
자신을 낮추고 상대편을 높이어 공경하는 마음이다.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피어나지 않는 연꽃이다. 겸양이라는 이름의 연못을 마음 안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피어나는 연꽃이다. 강요에 의해서 드러나는 존경심이나 두려움에 의해서 드러나는 존경심은 모두 모조품이다. 인품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모조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존경심은 높이 세워져 있는 스탈린의 동상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상의 머리 위에다 똥을 싸갈기는 비둘기를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이다.
배금주의자
세상에는 염라대왕까지도 황금으로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금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황금을 보기를 신같이 하고 인간을 보기를 돌같이 한다. 황금은 그들의 우상이요 종교며 경전이다. 그들은 오로지 재산을 모으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일 뿐 베푸는 일에는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다. 그러나 그들도 염라국으로 떠날 때는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털이가 된다. 이 세상 황금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 있어도 염라대왕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배금주의자들이란 결국 자신의 전 인생을 변변히 써보지도
못할 돈과 맞바꾸어 버리는 청맹과니에 불과한 족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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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외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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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 생떽쥐베리
어린왕자 - (5/5)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철도의 전철수가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어린 왕자가 물었다.
"한 꾸러미에 1천여 명씩 되는기차손님들을 꾸러미 별로 가려내고 있어. 그들을 싣고 가는 기차들을 어느 때는 오른쪽으로, 어느 때는 왼쪽으로 보 내는 거지." 전철수가 말했다.
불을 환히 밝힌 급행열차 한 대가 천둥처럼 소리를 내며 조종실을 뒤흔들었다.
"저 사람들은 몹시 바쁘군. 그들은 뭘 찾고 있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기관사 자신도 몰라." 전철수가 말했다.
그러자 반대 방향에서 두 번째 불을 밝힌 급행열차가 소리를 냈다.
"그들이 벌써 돌아오는 거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아까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지. 서로 엇갈리는 거지."
"그들은 있던 곳에서 만족하지 않았나 보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만족하지 않는단다." 전철수가 말했다.
그러자 세 번째의 불을 밝힌 급행열차가 우렁차게 달려왔다.
"저 사람들은 먼젓번 승객들을 쫓아가고 있는 거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쫓아가고 있지 않아." 전철수가 말했다.
"그들은 저 속에서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하품을 하고 있어.오직 어린아 이들만이 유리창에 코를 납작 대고 있을 뿐이지."
"어린아이들만이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들은 누더기 같은 인형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그것은 그들에겐 아 주 주요한 게 되거든.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아가면어린아이들은 울지......"
"아이들은 행복하군." 전철수가 말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장사꾼이 말했다.
그는 목마름을 가라앉혀 주는 새로 나온 알약을 파는 사람이었다.일주일에 한 알씩 먹으면 마시고 싶은 욕망을 영영 느끼지 않게 되는 약이었다.
"왜 그걸 팔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시간을 굉장히 절약하게 해주거든. 전문가들이 계산을 해보았어. 매 주 오십 삼 분씩 절약하게 되는 거야." 장사꾼이 말했다.
"그 오십 삼 분으로 뭘 하지?"
"하고 싶은 걸 하지......"
(만일 나에게 마음대로 사용할 오십 삼 분이 있다면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텐데......) 하고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사막에서 비행기가 고장을 일으킨 지 여드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비축해 두었던 물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을 마시며 장사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네 체험담은 참 아름답구나.하지만 난 아직도 비행기를 고치지 못했어. 마실 거라곤 없고.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수만있다면 나도 행복하겠 다!" 라고 말했다.
"내 친구 여우는......" 그가 말했다.
"꼬마 친구야. 여우 이야기할 때가 아냐!"
"왜?"
"목이 말라 죽게 되었으니까 말야......"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죽어간다 할지라도 한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좋은 일이야.난 여우 친구가 있었다는 게 기뻐......"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못하는군)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배고픔도 갈증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햇빛만 조금 있으면 그에겐 충분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내 마음을 안다는 듯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도 목이 말라...... 우물을 찾으러 가......"
나는 소용없다는 몸짓을 했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무턱대고 우물을찾아 나선다는 건 당치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을 말없이 걷고 나니 밤이 내리고 별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갈증 때문에 나는 열이 조금 나고 있었으므로 그 별들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어린 왕자의 말이 내 기억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너도 목이 마르니?" 내가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물은 마음에도 좋은 것일 수 있는데......"
나는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잠자코 있었다......그에게 질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그는 앉았다. 나도 그의 곁에 앉았다.그러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들은 아름다와. 보이지 않는 한 송이 꽃 때문에......"
나는 "그렇지"하고 대답하고는 말 없이 달빛 아래서 주름처럼 펼쳐져 있는모래 둔덕들을 바라보았다.
"사막은 아름다와." 그가 다시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막을 사랑해 왔다. 사막에서는 모래 둔덕 위에 앉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무엇인가 침묵 속에 빛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막의 그 신비로운 빛남이 무엇인가를 나는 문득 깨닫고 흠칫 놀랐다. 어린 시절 나는 해묵은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것을 찾으려 든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보물로 하여 그 집 전체는 매력에 넘쳐 있었다. 우리 집은 저 가장 깊숙한 곳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집이건 별이건 혹은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 지 않는 법이지......"
내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나의 여우가 같은 의견이어서 기뻐." 그가 말했다.
어린 왕자가 잠이 들었으므로 나는 그를 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감동되어 있었다. 부서지기 쉬운 어떤 보물을 안고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 지구에는 그보다 더 부서지기 쉬운 게 없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창백한 이마. 감겨 있는 눈, 바람결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달빛 아래에서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여기 보이는 건 껍질뿐이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방싯 열린 그의 입술이 보일듯 말듯 미소를 띠고 있었으므로 나는 또 생각했다. (이 잠든 어린 왕자가 나를 이토록 몹시 감동시키는 것은 꽃 한 송이에 대한 그의 성실성, 그가 잠들어 있을 때에도 램프의 불꽃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는 한 송이 장미꽃의 모습이야......) 그러자 그가 더욱더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짐작이 들었다. 램프의 불은 잘 보호해 주어야 한다. 한 줄기 바람에도 그것은 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걸어가다가 나는 동틀 무렵에 우물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급행열차에 올라타지만 그들이 찾으러 가는 게 무엇인지 몰라. 그래서 초조해 하며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소용없는데......"
우리가 도달한 우물은 사하라의 우물과 달랐다.사하라의 우물은 그저 모래에 파놓은 구멍 같은 것이다. 그 우물은 마을 우물과 흡사했다. 그곳엔 그러나 마을이라곤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꿈을 꾸는게 아닌가 싶었다.
"이상하군." 내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모든 게 갖추어져 있잖아. 도르래. 물통 밧줄......"
그는 웃으며 줄을 잡고 도르레를 움직였다.그러자 도르래는 바람이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을 때 낡은 풍차가 삐걱이듯 그렇게 삐걱였다.
"들리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게 하지 이 우물이 노래를 하잖아."
나는 그에게 힘드는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께." 내가 말했다.
"너에겐 너무 무거워."
천천히 나는 두레박을 우물 둘레의 돌까지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돌 위에 떨어지지 않게 올려놓았다. 내 귀에는 도르래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울렸고,아직도 출렁이고 있는 물 속에서는 햇살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이 물을 마시고 싶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물을 좀 줘......"
그러자 나는 그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두레박을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축제처럼 즐거웠다. 그 물은 필경 음료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별빛 아래서의 행진과 도르래의 노래와 내 두 팔의 노력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과 자정미사의 음악과 사람들의 미소의 부드러움이 내가 받는 선물을 마냥 황홀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었다.
"아저씨 별의 사람들은 한 정원 안에 장미꽃을 5천 송이나 가꾸지만....."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들이 찾는 것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해......"
"그래. 발견하지 못한단다."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발견될 수도 있어......"
"물론이지."
그가 대답했다. 그러자 어린 왕자가 덧붙였다.
"그러나 눈은 보지를 못해. 마음으로 찾아야 해."
나도 물을 마시고 난 후였다. 편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해가 돋으면 모래는 꿀빛깔을 띤다. 나는 그 꿀빛깔에도 행복했다. 괴로워할 필요가 어디있었겠는가......
"약속을 지켜 줘야 해."
어린 왕자가 내게 살며시 말했다. 그는 다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무슨 약속?"
"약속했잖아......양에게 굴레를 씌워 준다고...... 난 그 꽃에 책임이 있 어!"
나는 끄적거려 두었던 그 그림을 포켓에서 꺼냈다. 어린 왕자는 그림들을 보고 웃으며 말헸다.
"아저씨가 그린 바오밥나무들은 뿔 비슷하게 생겼어......"
"아, 그래?"
바오밥나무 그림에 대해 난 몹시 우쭐해 있지 않았던가!
"여우는...... 귀가...... 뿔 비슷하다고...... 너무 기다랗고!" 그리고는그는 또 웃었다.
"너는 너무 심하구나. 나는 속이 뵈거나 안 뵈거나 하는 보아 구렁이밖에 못 그린다니까."
"아, 괜찮아. 아이들은 알고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나는 그래서 연필로 굴레를 그렸다. 그 굴레를 어린 왕자에게 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구에 떨어진 지도...... 내일이면 1년이야......"
그리고는 잠시 묵묵히 있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이 근처에 떨어졌었어......"
그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나는 또 다시 야릇한 슬픔이 솟구쳤다. 그런데도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일주일 전 내가 너를 알게 된 날 아침 사람 사는 고장에서 수천 마 일 떨어진 여기서 네가 혼자 걷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구나.떨어진 지점으로 돌아가고 있어?"
어린 왕자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나는 말을 이었다.
"아마 1년이 되어서 그런 거겠지?......"
어린 왕자는 또 얼굴을 붉혔다.그는 묻는 말에 결코 대답하진 않았으나 얼굴을 붉힌다는 것은 그렇다는 뜻이 아닌가?
"아! 난 두려워지는구나......"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이제 일을 해야 해. 아저씨 기계로 돌아가. 난 여기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을께 내일 저녁에 돌아와......"
하지만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여우 생각이 났다. 길들여졌을 때는 좀 울게 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우물이 있는 쪽에는 폐허가 된 해묵은 돌담이 있었다. 다음날 저녁, 일을하고 돌아오면서 보니 어린 왕자가 그 위에 앉아 다리는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들렸다.
"아니야, 아니야. 날짜는 맞지만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나는 담벽을 향해 걸어갔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데도 어린 왕자는 다시 대꾸를 하고 있었다.
"......물론이지. 모래 위의 내 발자국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가서봐. 거기 서 날 기다리면 되. 오늘 밤 그리고 갈께."
나는 담벽에서 20미터쯤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눈에 띄지않았다. 어린 왕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독은 좋은 거니? 틀림없이 날 오랫동안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우뚝 멈춰섰다. 아무래도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알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가봐." 그가 말했다.
"내려갈 테야!"
그래서 나도 담벽 밑으로 시선을 내리뜨려 보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삼십초 만에 사람에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그 노란 뱀 하나가 어린 왕자를 향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권총을 꺼내려고 호주머니를 냅다 뒤지며 나는 막 뛰어갔다. 그러나 내 발자국소리에 뱀은 모래 속으로 스르르 물줄기 잦아들듯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가벼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돌들 사이로 조금도 허둥대지 않고 교묘히 몸을 감추어 버렸다. 나는 담 밑까지 이르러 눈처럼 새하얘진 나의 어린 왕자를 간신히 품에 받아안을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이젠 뱀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나는 그가 밤낮없이 목에 두르고 있는 그 금빛 머플러를 풀렀다. 관자놀이에 물을 적시고 물을 마시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 무어라 물어 볼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진지한 빛으로 바라보더니 내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카빈총에 맞아 죽어가는 새처럼 그의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저씨 기계 고장을 고치게 돼서 기뻐. 아저씬 이제 집에 돌아가게 됐지. ....."
"그걸 어떻게 알지?"
천만뜻밖에 고장을 고치는 데 성공했다는 걸 그에게 알리려던 참이 아니었던가! 그는 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
그러더니 쓸쓸히,
"내가 갈 길이 훨씬 더 멀고...... 훨씬 더 어려워......"
무엇인지 심상치 않은 일이일어 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어린 아기처럼 품안에 꼬옥 껴안았다. 그런데도 내가 붙잡을 사이도 없이 그는 깊은 심연 속으로 곧장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심각한 눈빛이었다.
"나에겐 아저씨가 준 양이 있어. 그리고 그 양을 위한 상자도 있고.굴레 도 있고......"
그리고는 쓸쓸히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가 조금씩 조금씩 몸이 더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얘, 넌 겁이 났었지......"
그가 무서워하고 있었던 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저녁엔 더 무서울 거야......"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다시금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웃음소리를 영영 다시 들을 수 없게 되리라는 생각이 견딜 수 없는 일임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게는사막의 샘 같은것이었다.
"얘, 네 웃음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으로 꼭 일 년째가 돼. 나의 별이 내가 작년 이맘 때 떨어져 내린 그 장소 바로 위쪽에 있게 될 거야......"
"얘, 그 뱀이니 만날 약속이니 별이니 하는 이야기는 모두 못된 꿈 같은거 아니니......"
그러나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물론이지......"
"꽃도 마찬가지야. 어느 별에 사는 꽃 한 송이를 사랑한다면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게 감미로울 거야. 별들마다 모두 꽃이 될 테니까."
"물론이지......"
"물도 마찬가지야.아저씨가 내게 마시라고 준 물은 음악 같은 것이었어. 도르래와 밧줄때문에...... 기억하지...... 물맛이 참 좋았지."
"그래......"
"밤이면 별들을 바라봐.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지금 가리켜 줄 수가 없어. 그 편이 더 좋아.내 별은 아저씨에게는 여러 별들 중의 하나 가 되는 거지. 그럼 아저씬 어느 별이든지 바라보는게 즐겁게 될 테니까.. .... 그 별들은 모두 아저씨 친구가 될 거야.그리고 아저씨에게 내가 선 물을 하나 하려고 해......"
그는 다시 웃었다.
"아, 얘, 그 웃음소리가 난 좋다!"
"그게 바로 내 선물이 될 거야...... 이건 물도 마찬가지야......"
"무슨 뜻이지?"
"사람들에 따라 별들은 서로 다른 존재야. 여행하는 사람에겐 별은 길잡이 지. 또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학자인 사람에게는 연 구해야 할 대상이고.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지.하지만 그런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아저씬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별들을 가지게 될 거야......"
"무슨 뜻이니?"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 겐 웃고 있는 듯이 보일 거야.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아저씨의 슬픔이 가셨을 때는 (언제나 슬픔은가시게 마련이니까) 나를 안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아저씬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웃고 싶을 거고.그래서 이따금 그저 괜히 창문을 열게 되 겠지...... 그럼 아저씨 친구들은 아저씨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걸 보고 꽤나 놀랄 테지.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줘.<그래.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오거든!> 그들은 아저씨가 미쳤나 보다고 생각하겠지. 난 그럼 아저씨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 되겠지......"
그리고는 그는 다시 웃었다.
"별들이 아니라 웃을 줄 아는 조그만 방울들을 내가 아저씨에게 잔뜩 준 셈이 되는 거지......"
그리고 그는 또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심각한 기색이 되었다.
"오늘 밤은...... 오지 말아."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걸."
"난 아픈 것같이 보일 거야...... 좀 죽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러게 마련 이거든. 그런 걸 보러 오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그러나 그는 근심스러운 빛이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뱀 때문이야. 뱀이 아저씨를 물면 안되거든. ..... 뱀은 사나워, 괜히 장난삼아 물기도 하거든......"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안심하는 듯했다.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다는 게 사실이야......"
그날 밤 나는 그가 길을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소리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뒤쫓아가서 그를 만났을 때그는 잰걸음으로 주저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 아저씨 왔어......"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걱정을 했다.
"아저씨가 온 건 잘못이야. 마음 아파할 텐데. 내가 죽은 듯이 보일 테니 까. 정말로 죽는건 아닌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조금 풀이 죽어 있는 듯이 보였다.그러나 그는 다시 기운을 내려 애쓰고 있었다.
"참 좋겠지. 나도 별들을 바라볼 거야. 별들이란 별은 모두 녹슨 도르래가 있는 우물로 보이게 될 테니까, 별들이 모두 내게 마실 물을 부어 줄 거야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재미있겠지! 아저씬 5억 개의 작은 방울들을 가지게 되나 난 5억개의 샘물을 가지게 될 테니......"
그리고는 그도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야. 나 혼자 한 발짝 걸어가게 내벼려둬 줘."
그러더니 그는 그 자리에 앉았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아저씨...... 내 꽃 말인데...... 나는 그 꽃에 책임이 있어! 더구나 그 꽃은 몹시 연약하거든! 몹시도 순진하고, 별것도 아닌 네 개의 가시를 가 지고 외부세계에 대해 자기 몸을 방어하려고 하고......"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앉았다.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다 끝났어......"
그는 또 조금 망설이더니 다시 일어섰다.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발목에서 노오란 한 줄기 빛이 반짝했을 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소리치지 않았다. 나무가 쓰러지듯 그는 천천히 쓰러졌다. 모래 때문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여섯 해 전의 일이었다......이 이야기를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나와 다시 만나 친구들은 내가 살아 돌아온 걸 매우 기뻐했다. 나는 슬펐지만 피곤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는 내 슬픔도 조금 가셨다. 다시 말해......완전히 싹 가셔 버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의 별로 돌아갔다는 걸 알고 있다다음날 해가 떳을 때 그의 몸을 다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몸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면 나는 별들에게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그것들은
흡사 5억 개의 작은 방울들 같다...... 그런데 이상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가! 어린 왕자에게 그려 준 굴레에 가죽끈을 붙이는 걸 내가 잊어버린 것이다! 그걸 양에게 잡아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양이 꽃을 먹었을까......)하고 궁금해 하곤 했다. 어느 때는 (천만에, 먹지 않았겠지! 어린 왕자는 그의 꽃을 밤새도록 유리덮개로 잘 덮어 놓겠지. 양을 잘 지킬 테고......)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면 나는 행복해진다. 그러면 뭇별들이 모두 부드럽게 웃는다.
어느 때는 (한두 번 방심할 수도 있지. 그러면 끝장인데! 어느날 밤 그가 유리덮개를 잊었거나 양이 밤중에 소리없이 밖으로 나왔을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작은 방울들은 모두 눈물방울로 변한다!...... 그것은 정말 커다란 수수께끼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는 나에게도 그렇듯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한 마리 양이 한송이 장미꽃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천지가 온통 뒤바뀌게 될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라. 생각해 보라. 양이 그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거기에 따라 모든 게 변함을 여러분은 알게 되리라. 그런데 그것이 그다지도 중요하다는 걸 어른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이 세상에서가장 아름답고 그리고 가장 슬픈 풍경이다. 앞 페이지의 것과 같은 풍경이지만 여러분에게 잘 보여 주기 위해 다시한번 그린 것이다.어린 왕자가 지상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 곳이 여기다.
이 그림을 찬찬히 잘 보아두었다가 여러분이 언제고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할 때, 이와 똑같은 풍경을 꼭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혹시 그리로 지나가게 되면,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잠깐 별빛 밑에서 기다려 보길 간곡히 부탁한다! 그때 만일 한 어린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오면, 그가 웃고 있고 머리칼이 금빛이면, 그리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가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러면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길! 내가 이처럼 마냥 슬퍼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그 애가 돌아왔다고 빨리 편지를 보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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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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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 삼국유사 - 박남일
5. 드디어 머리를 깎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연이 설악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창 단풍잎이 물든 설악산은 불이 붙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마치 한폭의 그림 같았다.
"아!"
일연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일연은 한동안 설악산을 바라보며 곱게 물든 아름다움에 빠졌다. 설악산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머니 같기도 하고, 저녁 놀 같기도 했다. 일연은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풍잎이 계곡물에 실려 어디로인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설악산의 풍경을 마주하고 보니 몇 달 동안 오랜 여행으로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일연은 설악산의 맑은 계곡물에 얼굴을 씻었다. 물에 떠 있는 단풍잎을 건져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참 곱다."
일연은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단풍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단풍잎이 더 큰가 자기 손이 더 큰가 대보던 기억이 났다. 일연은 일찍이 금강산과 더불어 이 설악산이 하늘이 만든 명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설악산은 부처님의 뜻과 같이 드넓은 산이기도 하였다.이렇듯 아름다운 산이 오랑캐들에게 짓밟히고,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사는 백성들의 고생이 너무도 크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붉게 물든 산자락에는 백성들의 피가 흠뻑 묻어 있을 것 같았다. 일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진전사를 찾아 끝없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진전사는 설악산 대청봉이 바라다보이는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었지만, 신라의 도의스님 같은 유명한 스님들이 숨어 지내던 곳으로 아주 역사가 깊은 절이었다. 지금은 '대웅선사'라고 하는 이름난 스님이 주지로 있다고 하였다. 일연은 진전사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절 안이 조용했다.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낭랑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일연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 달음에 법당으로 달려가 불상 앞에 서서 합장하였다.
"뉘신지요?"
일연이 불상 앞에서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등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자승(나이 어린 스님)이었다. 일연보다 두세 살 어려 보였다. 일연은 동자승에게 합장을 하고 나서 말했다.
"대웅선사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받으러 온 일연입니다."
동자승은 대답 대신 합장을 하고 일연을 대웅선사에게 안내하였다. 대웅선사는 일연이 가지고 온 편지를 받아 읽었다. 일연은 그런 대웅선사의 맑은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한동안 말이 없던 대웅선사가 입을 열었다.
"너의 스승이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구나."
일연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고?"
대웅선사는 일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일연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승이 되고 싶습니다."
대웅선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서 바람이 살포시 들어와 늙은 선사의 하얀 수염이 날렸다. 그것은 일연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이었다. 일연은 그 앞에서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일연이 진전사에 온 이듬해. 봄 날이었다. 몇 명 안 되는 진전사의 식구들은 새벽부터 바삐 움직였다. 마침내 일연이 승려가 되는 날이었다. 여러가지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여 절 식구들은 대청봉 꼭대기 부근의 작은 암자로 올라갔다. 대청봉 꼭대기에 가까이 다다르자 동쪽으로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바다는 막 떠오르는 햇빛에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일연은 벌건 물결로 출렁대는 바다를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암자는 큰 바위 옆에 붙어 있었다. 암자 옆 바위의 벽면에는 큰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서 일연은 동쪽을 향하여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웅선사는 목탁을 두드리며 오랫동안 염불을 하였다. 그 사이 일연의 머리카락은 한 웅큼씩 잘려 나갔다. 머리카락이 한 줌씩 무릎 위에 떨어지자 온갖 기억들이 떠올랐다. 자상한 어머니와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 무량사 주지스님 밑에서 글을 배울 때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또한 무량사를 떠나 설악산으로 오면서 만났던 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일연의 눈에서는 드디어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일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일연은 승려로 다시 태어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일연은 동해 바다의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햇덩어리를 가슴으로 안고 싶었다. 의식을 치루면서 일연은 '회연'이라는 법명(중에게 지어주는 이름)도 받았다.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일연은 드디어 스님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 날부터 일연은 대웅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차가운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청결히 하고 가부좌(다리를 꼬아서 앉는 것)를 하고 앉아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겼다.
그리고 오후에는 대웅선사 앞에서 불경을 펼쳐놓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웠다. 또한 일연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머리가 무거울 때는 밖으로 나와서 널바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 전쟁,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것들이 다 무슨 뜻이 있는가 생각했다. 그런 한편 일연은 오대산 산적 두목에게서 얻은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을 틈틈이 읽었다. <삼국사기>는 50여년 전, 인종의 명령을 받아 김부식이라는 사람이 쓴 역사책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주로 신라를 중심으로 씌어져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 아부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김부식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신라에 비중을 두어 쓴 것은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중국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썼다는 것이 일연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삼국사기> 안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이 언제 세워졌으며 언제 멸망했는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일연이 산적 두목에게 받은 <삼국사기>는 고작 두 권이었다. 나머지 여덟 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일연은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일연은 불경 대신 잠시
<삼국사기>를 꺼내 읽고 있었다. 그 때 대웅선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웅선사는 긴 승복을 앞으로 여미며 앉아 일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책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고 있었느냐?"
대웅선사가 그윽한 눈빛으로 일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저 <삼국사기>를 읽고 있었사옵니다."
일연은 읽던 책이 불경이 아니라서 조금 주춤거렸다.
"호, 그래 어떻더냐?"
대웅선사는 여전히 인자한 눈빛으로 물었다.
"재미는 있사오나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옵니다."
"허전해? 무엇이 그리 허전하단 말이냐?"
"소승도 그것을 잘 모르겠사옵니다.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일연은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대웅선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마도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책임일 것이다."
"...?"
일연은 스승의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웅선사는 말을 이었다.
"김부식은 중국을 어버이 나라로 섬기다 보니까 우리 나라를 아주 작은 나라로 썼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은 중국 임금을 황제로 모시게 된 거야. 네가 허전함을 느낀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일연은 확실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연이 알고 있는 중국은 고려보다 훨씬 크고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옛날에는 우리 민족이 저 너른 중국땅을 호령하던 시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중국에 비해 너무도 조그만 나라이지 않은가? 의아해 하는 일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대웅선사는 다음 말을 이었다.
"물론 중국은 큰 나라다. 불경도 중국을 거쳐서 들어올 만큼. 그렇지만 우리 나라도 중국에 못지 않은 훌륭한 역사가 있다. 중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우리 선조들의 슬기도 뛰어났고. 그런데 굳이 중국을 어버이 나라로 모실 필요가 있었겠느냐?"
일연은 이제야 스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대웅선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맞는 불교가 있을 게다. 중국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중국의 불교를 굳이 우리가 좇을 필요가 있겠느냐?"
우리나라에 맞는 불교라는 말이 일연의 마음에 남았다. 일연은 단 한번도 우리나라에 맞는 불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맞는 불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일연의 질문을 받은 대웅선사는 그윽하지만 힘 있는 눈으로 일연을 바라보았다.
"그것이야말로 네가 이루어야 할 숙제이다. 열심히 불경을 읽어 그 뜻을 새기다 보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불교가 단지 중국에서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찾아보면 우리나라 곳곳에는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전의 발자취들이 있다. 그것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 일을 우리 승려들이 맡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렇게 어려운 때를 살아가는 고려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친 대웅선사는 방을 나섰다. 일연은 가슴 속에 큰 불덩이가 날아든 것 같은 충격을 감출 수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에게 맞는 불교... 그것을 내가 이루어야 한다?' 일연으로서는 도무지 모를 말이었다. 우리에게 맞는 불교란 도대체 무엇일까? 일연은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삼국사기>의 나머지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었다. 일연은 비로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려 땅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먼 나라에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오래 전부터 계셨음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삼국사기>에서 빠져 있는 알맹이를 찾아내는 길이기도 하였다. 일연은 언제가는 이 땅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밝혀내고 불심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겠다 다짐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엉 부엉...'
깊은 산골짜기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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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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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Une Vie:1883) - 모파상 (2/2)
어느 날 저녁 이상하게 흥분한 백작 부인은 줄리앙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연상 박차를 가해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갑자기 말이 우뚝 서서 땅을 차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었다.
"조심하지 않고 뭐야, 질베르트!"
걱정이 된 백작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부인은 백작의 말에 도전하는 듯이 오히려 사납게 채찍으로 양쪽 귀 사이를 쳤다. 훌쩍 뛰어오른 말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을 달렸다. 백작은 나직히 신음 소리를 내더니 자기 말의 목을 안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전력을 다해서 말을 앞으로 내몰았다.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모양은 마치 거인이 말을 다리 사이에 끼고 날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두 마리 말은 쏜살 같이 달려 잠시 동안에 목장 저쪽에 조그맣게 되고 마침내 지평선 넘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잔과 줄리앙이
그 뒤를 쫓았다. 15분쯤 달리더니 되돌아오는 백작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네 사람이 만났다. 백작은 새빨개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부인은 새파랗게 굳어진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잔은 백작이 그의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백작 부인은 그 후 한 달 동안 일찍이 본 적이 없을 만큼 쾌활했다. 항상 소리내어 웃으며 충동적인 애정을 가지고 잔을 포옹했다. 무언지 신비스럽고 황홀한 상태가 백작 부인에게 찾아든 것 같았다. 백작 역시 무척 행복한 듯이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아내의 손과
옷자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줄리앙도 또한 아주 딴사람처럼 쾌활하고 상냥해졌다. 마치 두 집의 친밀이 곧 각자의 평화와 기쁨의 원천인 듯했다. 그 해 봄은 유난히 더 일찍 왔다. 어느 날 아침 잔은 조그만 흰 말을 타고 들로 나갔다. 줄리앙은 아침 일찍부터 어딘가 가고 없었다. 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옛날 줄리앙과 사랑을 속삭이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막 좁은 길을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잔은 그 길 막다른 데 있는 나무에 매어둔 두 마리의 말을 보았다. 분명히 줄리앙과 백작 부인의 말이었다.
여자 장갑 한짝과 채찍 두 개가 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잔은 말에서 뛰어내려 나무줄기에 기대섰다. 바로 옆 풀 속에서 두 마리 산새가 날아 앉았다. 한 마리가 열심히 쭉지를 펴고 몸을 떨면서 상대방 둘레를 훌훌 날다가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울고 있더니 별안간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렸다.
"참 그래 봄이니까"
중얼거리는 동안에 문득 어떠한 의혹이 잔의 머리에서 번쩍였다. 잔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정신 없이 말을 몰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은 어린애에게 뛰어가서 몇 번이나 키스를 했다. 잔의 그 가슴 속에는 이미 질투도 증오도 없었다. 다만 살을 찌르는 듯한 고독감과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에 괴로워할 따름이었다. 또 다시 봄은 돌아왔다. 지난 1년 동안 잔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어머니 아델라이드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남작 부부는 딸과 함께 따뜻한 계절을 보내기
위해 5월 20일 루앙에서 레페플에 왔었다. 어머니 모습을 대하는 순간 잔은 깜짝 놀랐다 지난 6개월 동안 남작 부인은 10년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토실토실하던 볼이 자주빛이 되고 눈은 빛이 사라졌으며 숨을 쉬기도 괴로워했다. 줄리앙까지도 그 변화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 날은 도리어 보통 때보다도 몸이 좋은 편이었다. 점심 때에는 수프와 달걀을 두개나 먹고 평상시처럼 플라타너스 우거진 오솔길을 산책했다. 그런데 별안간 길에 쓰러져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밤 잔은 싸늘한 어머니 손을 쥔 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잔의 희망에 따라 어머니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잔은 어머니가 운명하기 전에 예전 편지를 다 꺼내서 읽으며 울고 있던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소녀 시절 이래 할머니나 친구들한테서 받은 것이었다. 잔은 아직 그대로 있는 어머니 편지 상자 쪽으로 눈을 돌린 다음 일어나서 그것을 끌어내렸다. 갑자기 읽고 싶어진 것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편지는 다 쓸데없는 그러나 열렬한 사랑의 편지였다. 사소한 집안 일들이 세밀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다른 뭉치를 풀어서 읽기 시작한 잔은
넋을 잃었다. '소생은 이제는 그대의 애무 없이는 지낼 수 없습니다. 미칠 듯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그가 나가는 대로 곧 와 주십시오. 한 시간은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생은 그대를 열애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게 그대를 요구하면서 괴로운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있는 당신을 생각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격정을 느꼈습니다...' 폴덴느마르 그 이름은 아버지가 지금도 폴 그놈이라고 부르면서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제일 친한 사란이었다. 잔은 별안간 그 편지들을 집어
던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을 느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잔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실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잔은 더럽게 느껴지기만 하는 편지들을 난로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남작은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후에 루앙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 폴이 병이 났다. 잔은 열 이틀 동안 한잠도 못자고 거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냈다. 폴은 나았으나 잔은 앞으로도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딸을 이 생각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잘리의 사건이 있은 후로 잔은 줄리앙과 별거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남편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잔은 남편의 애무를 받기가 몸서리나도록 싫었다. 어느 날 잔은 아베 피코
신부를 찾아갔다. 수줍은 낯으로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신부는 싱글싱글 웃었다.
"잘 알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몸도 건강하시지요. 잘 알겠어요. 줄리앙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신부가 자상하게 마음을 써 주었지만 잔은 부끄러운 나머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불안한 1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줄리앙이 이상한 주름을 입가에 띄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산책을 하는 동안 줄리앙은 아내의 귓전에 속삭였다.
"이제 아마 우리는 화해를 한 것 같군. 나로선 마침 잘 되었어"
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모든 인간으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슬픔의 가슴을 억눌렀다. 오열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잔은 남편의 가슴에 쓰러지면서 울었다. 놀란 줄리앙은 아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잔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옛날 관계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 일을 의무처럼 해치웠으나 잔은 가슴이 느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참고 견디었다. 이번에 임신한다면 그것을 최후로 영원히 줄리앙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잔은 남편의 애무가
그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서지"
"어머나 왜 애가 싫어요?"
"체! 하나면 그만이야 귀찮기도 하고 돈도 들고..."
다시 잔은 신부한테 갔다. 신부는 마치 단식한 사나이의 식욕과도 같은 호기심으로 꼬치꼬치 캐묻더니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
"수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인이 임신했다고 믿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엔 정말 임신하실 걸요"
잔은 눈 속까지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만일 제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웃에 소문을 내십시오. 결국은 주인께서도 믿을 테니까"
사제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는 사제의 예상대로 되었다. 잔은 임신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미칠 것 같은 환희에 넘쳐 어머니를 여윈 슬픔을 겨우 잊을 수가 있었다. 9월 하순에 아베 피코 사제가 새삼스러운 태도로 찾아왔다. 고르데빌의 수도원장으로 영전하게 되어 후임의 젊은 사제를 소개했다. 아베톨비악은 마르고 키가 작은데다 눈이 침울해 보여서 대단히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신임 사제는 준엄하고 매서운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경멸 인간 만사에 대한
혐오 무경험에서 오는 옹졸함 이러한 모든 것이 그를 순교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사제는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다. 절교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격해서 성욕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서로 아니꼬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차츰 밀렵자를 쫓아다니는 산지기처럼 정부들끼리 밀회하는 것을 감시하고 방해를 놓고 해서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미사에 나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줄리앙은 거의 매일 푸르빌 백작 집에 출입했다. 이제는 줄리앙 없이 지낼 수 없게 된 백작과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하고 백작 부인과 승마를 하기도 했다. 남작은 11월 중순경에 다시 잔의 집으로 돌아왔다. 골수에 사무친 슬픔 때문에 더 늙고 수척했다. 겨울도 다갈 무렵의 어느 날, 아베 톨비악 사제가 찾아왔다. 그는 줄리앙과 질베르트와의 정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 부인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사제님께선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세요?"
"한사코 이 죄를 막아야 합니다"
잔은 눈믈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제 남편은 제 말 같은 건 들어 주지 않아요. 심부름하는 계집애를 상대해서 저를 배신할 일도 있답니다. 전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부인께선 그러고도 한 사람의 아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신앙이 있는 여성이신가요? 눈앞에선 죄를 저지르는 걸 보고서 모른척 하시다니 비겁한 마음이 부인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부인은 천주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분인 못되는 줄 압니다"
"아, 사제님!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푸르빌 씨의 눈을 뜨게 하십시오. 이 관계를 끊는 것이 그분의 할 일이거든요"
잔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녜요. 그러다간 그가 두 사람 다 죽이고 말아요!"
"그렇다면 부인은 언제까지라도 치욕과 죄악 속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군요. 저는 이 이상 이런 데 있을 수가 없소"
사제는 잔을 저주하는 듯 들고 있던 우산을 쳐들고 잔뜩 화를 낸 채 돌아갔다.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말을 타고 다니는 산책 도중에 늘상 사제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때는 들녘 끝이나 낭떠러지 위에 검은 점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두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는 계곡에서 기도책을 탐독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윽고 봄이 왔다. 나뭇잎들이 아직 투명해 보일 정도고 들은 축축했기 때문에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대개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에 숨곤 했다. 막사는 작년 가을 이래 보코트의 언덕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고 계곡의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온종일 맹렬한 바람이 불어대는 어느 날이었다. 잔이 날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푸르빌 백작이 허둥지둥 찾아왔다. 안색이 몹시 창백해서 빨간 수염이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핏기 어린 눈은 사고력을 잃은 듯이 자꾸 움직였다. 백작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질베르트가 여기 와 있겠죠"
잔은 놀라서 대답했다.
"아아뇨! 오늘은 통 안 보이셨는 걸요"
그러자 백작은 두 다리가 잘리기라도 한 듯이 털썩 주저 앉아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씻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내밀며 입을 딱 벌리고 무언가 무서운 괴로움을 호소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고서 상대방을 우두커니 보고 있더니 혼자 입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뛰어나갔다. 잔은 그 뒤를 쫓았다. 공포에 싸여 쥐어짜는 듯한 가슴을 안고 그러나 거인의 발걸음을 따를 수가 없었다. 백작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다라 한사코 달렸다.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고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초목과 곡식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보코트 언덕이 보였다. 양이 없는 우리 한쪽에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가 있고 말뚝에 말 두 마리가 매어 있었다. 백작은 당에 엎드려 그 막사 옆으로 접근해 갔다. 두 마리의 말은 백작의 모습을 보자 몸부림쳤다. 백작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로 고삐를 끊었다. 말은 바람과 함께 뛰어갔다. 백작은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켜 문 틈에 눈을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작은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일어났다. 이어 밖에서 대문
빗장을 힘껏 밀어 넣자 두 손에 막대기를 쥐고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그는 상체를 구부리고 죽을 힘을 다해서 황소처럼 끌기 시작했다. 오두막 안에서는 주먹으로 판자를 두들기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비탈의 절벽까지 오자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놓아버렸다. 오두막은 비탈을 구르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제 무게 대문에 더 속력이 가해지며 살아 있는 것처럼 뛰고 부딪치고 하면서 굴러갔다. 안에서는 무서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움푹 팬 곳에서 한바탕 곡선을 그리며 훌쩍 뛰어오른 그 다음 순간 깊숙한 땅에
여지없이 떨어져 마치 달걀처럼 부서져 버렸다. 끔직한 두 시체가 그 속에 깔려 있었다. 남자의 이마에는 구멍이 뚫리고 얼굴은 형편 없이 깨져서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여자는 턱이 빠져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부러진 손발이 뼈가 없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참사를 폭풍우를 피하려고 뛰어들어 간 오두막이 거센바람에 뒤집혀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날 밤 잔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계집애였다. 잔은 석 달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몹시 몸이 쇠약하고
조그마한 소리만 들어도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잔에게는 오직 폴이 전부였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되어 아브르의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집 안에는 그래도 평화와 사랑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남작도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 늙은 독신인 리존도 리페플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폴은 세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났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된 시월 어느 날 아침 그는 세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아브르로 출발했다. 그는 생후 처음 가족의 손을 떠나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날 밤 레페플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러나 폴은 이윽고 이틀만에 한 번씩 만나러 오는 어머니가 그다지 반갑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보다도 처음 사귄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측에서도 면회를 금했다. 잔은 하는 수 없이 폴이 돌아올 휴일을 고대하며 살아야 했다. 폴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금발의 아주 훌륭한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낙제를 두 번씩이나 하고 겨우 수사과에 올라 갔을 때는 벌써 스무 살이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휴일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는 습관을 차츰 게을리 하게 되고 어떻게든지 구실을 붙여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아침에는 초라한 옷을 입은 유태인 노인 하나가 잔에게 면회를 청했다.
"마님께 보여 드릴 쪽지를 가져 왔습죠"
노인은 대 묻은 쌈지 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어 잔에게 주었다. 그것은 폴의 사인이 들어 있는 차용 증서였다. 잔은 전신이 떨렸다. 폴은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불량 소년들과 함께 도박장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즉시 아브르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이미 한 달이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교장이 잔의 사인이 있는 편지 네 통과 의사의진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다만 놀랄 따름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읍내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경찰의
손을 빌려 시중에 숨어 있는 여자한테서 폴을 찾아 냈다. 그들은 이 젊은이를 데리고 레페플로 돌아왔다. 잔은 도중 내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으나 폴은 실로 태연한 낯으로 창밖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폴은 시골에서 번들번들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배를 타고 아브르로 도망쳐 버렸다. 경찰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시는 폴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전 여자 역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잔은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무 걱정 말아 주십시오. 저는 지금 런던에 있습니다.그런데 너무도 옹색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날도 있습니다. 저와 같이 있는 여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유산에서 1만 5천 프랑만 미리 쓰게 해 주십시오. 얼마 후에 저도 성년이 되니까요...'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던 잔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아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돈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있는 여자에 대한 증오는 악착스러우리 만큼 큰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섯 달 동안 또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년에 달한 아들의 대리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청구했다. 12만 프랑을 받은 폴은 그 후 여섯 달 동안에 간단한 편지 네 통을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날아든 절망적인 편지가 세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머님 저는 지금 막다른 데까지 왔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폴의 편지는 또 8만 5천 프랑을 청구해 온 것이다. 토지를 저당해서 돈을 보내 주었더니 1년쯤 있다 "폴드라마르 주식회사"라는 기선 회사가 파산했다는 통지가 왔다. 결손은 23만 5천 프랑이었다. 남작은 저택과
두 농장을 저당에 넣고 최후의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졸도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겨울이 다간 어느 날 리종 이모가 기관지염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잔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괴로워할 것 없이 자기도 죽어버리고 싶다고 빌면서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건장한 농촌 여자 하나가 잔을 번쩍 안아 들고 집으로 데려왔다.
"당신은 누구지...?"
밤중에 눈을 뜬 잔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면이 있는 그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어 보았다.
"가엾은 잔 부인! 저를 몰라보시는가요?"
"앗, 로잘리!"
잔은 정신없이 로잘리를 얼싸안고 키스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언제까지나 흐느껴 울고 있었다. 로잘리도 이미 남편이 죽고 줄리앙의 아들은 장가를 들여서 훌륭한 일꾼이 되어 있었다. 로잘리는 집을 아들 내외에 넘기고 외로운 잔을 돌보아 주기 위해서 24년만에 레페플에 돌아온 것이다. 잔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정든 저택을 팔아서 조그마한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로잘리는 여러 가지로 잔을 위로하고 시중해 주었다. 사실 잔은 이제 아주 늙어 버렸고 슬픔에 지쳐 소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왜 나는 남처럼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왜 나는 조용한 행복마저도 은혜받지 못했을까?"
잔은 자신의 불행한 일생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힘없는 한숨을 내쉬는 날이 계속되었다. 돈을 보내 주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귀여운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들고 일년 내내 하녀 하나밖에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 좀 해다오. 나는 지금 큰 길가의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단다. 참 슬픈 일이다. 그러나 너만 있어 준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는 없으면서도 칠 년 동안이나 너를 못 만나 보고 있으니...네 어미는 얼마나 불행했었는지 얼마나 내 마음을 네게 의지해 왔었는지 너는 도저히 모를 것이다. 너는 나의 생명이었다. 나의 꿈, 오직 내 하나의 희망, 내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배반했고 또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아아! 돌아와다오. 나의 귀여운 폴아 돌아와서 네 어미에게 키스해다오. 절망의 팔을 내밀고 있는 네 늙은 어미의 곁으로 돌아와 다오. 잔'
'그리운 어머님, 진작 편지를 드리지 않은 것은 파리에 소용없는 여행을 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자신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찾아뵈어야만 했기 때문에 저는 현재 몹시 불행한 처지에 빠져서 대단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 처는 사흘 전에 계집애를 낳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전 한푼도 없습니다. 애는 문지기가 간신히 키우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어린애를 길러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죽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가 됩니다. 어머님이 맡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정말이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모에게 맡기자니 돈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대로 곧 회신을 바랍니다. 어머님을 사랑하고 있는 아들 폴'
잔은 의자에 맥없이 앉아서 로잘리를 불렀다.
"제가 아이를 맡지요. 부인 아무래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로잘리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 줘, 로잘리"
"그리고 공증인한테 갑시다. 아드님 결혼 수속을 해야 해요. 만약에 그 여자가 죽는다면 어린애의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로잘리는 그 날 밤 곧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사흘만에 돌아왔다.
"그래 어땠어?"
잔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죽었어요. 결혼식은 올렸답니다. 아드님은 장례식을 마치고 오실 거에요. 이게 손녀입니다"
이불에 싸여 보이지 않는 갓난애를 내밀었다. 잔은 '폴'하고 중얼거릴 뿐 입을 다물었다. 잔은 허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포근한 온기가 생명의 체온이 잔의 옷을 통해서 다리로 전해 오고 살 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그것은 무릎 위에서 잠들고 있는 어린 것의 체온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감동이 잔의 온 몸에 파고들었다. 잔은 왈칵 아직 보지 못했던 어린 것의 얼굴을 덮은 헝겊을 벗겨 버렸다. 자식의 딸 그러자 이 연약한 것이 불안에 싸인 채 심한 광선을 받고 입을 움직거리면서 파란 눈을 떴을 때
잔은 품 안에 들어올리고는 꼭 껴안고 빗발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로잘리는 무뚝뚝하면서도 즐거운 낯으로 그것을 말렸다.
"자, 자. 부인, 그만 좀 두세요, 그러시다가는 울려요"
로잘리는 아마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답하려 하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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