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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18호
2012.10.30 (음9.16)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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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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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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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낭비했다고 말하지 말라. 애정이란 절대로 낭비되지 않는 것이다. - 헨리 W.롱펠로우(美 시인, 1807~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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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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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여차
어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푸른 물결 한껏 즐기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 세상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구나. 고산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사’ 가을편의 한 대목이다. 말년을 전남 보길도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고산. 그가 자신의 거문고 ‘아양’(峨洋)을 뜯으며 읊었을 이 노래의 여음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는 예스러움을 즐기는 이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구절이다. ‘지국총’은 ‘노를 젓고 닻을 감는 소리’이며 ‘어사와’는 ‘어여차(어기여차)를 예스럽게 이르는 감탄사’이다.(표준국어대사전)
‘어부사시사’의 여음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는 노 저으며 용쓰는 사공들이 서로 메기고 받는 ‘어기여차 에헤야…’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 민요 ‘뱃노래’의 후렴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소리이다. 어부들은 일하는 과정에 따라 ‘배 닦는 소리’, ‘닻 감는 소리’, ‘노 젓는 소리’, ‘그물 올리는 소리’, ‘고기 푸는 소리’ 등을 부르는데 이 가운데 후렴구가 익숙한 노래가 ‘노 젓는 소리’이다.(브리태니커)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 히라도 항구의 ‘뱃노래’ 후렴구가 귀에 익어 깜짝 놀랐다”는 글을 보았다. 지난봄 경기도 과천에서 열린 ‘한-일 전통민요 교류 공연’을 찾았던 한 관객이 인터넷에 남긴 글이다. 지난 주말 입학 30주년에 즈음한 모교방문 행사장에서도 ‘뱃노래’를 불렀다. 모처럼 만난 동창들과 어깨 겯고 부른 노래는 학창 시절의 그것과 달랐다. 일본 전통민요 공연단의 그것과도 달랐을 것이다. ‘에야누 야누야 에야누 야누…’는 ‘어기여 디여차 어기여 디여…’로 바뀌어 있었다. 학교 쪽에 물어보니 1990년대 중반 가사를 바꾸었단다. ‘에야누 야누야…’는 일본 ‘뱃노래’의 후렴구에서 흘러들어온 것임을 뒤늦게 안 때가 그 시기였던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하릴없이, 할 일 없이
얼마 전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1930년대 근대화돼 가는 경성을 배경으로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 소설가 구보의 하루를 담고 있다.
소설가 구보는 ‘하릴없는’ 하루를 보낸 걸까, ‘할 일 없는’ 하루를 보낸 걸까. 각각의 의미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 ‘할 일 없는’을 사용해야 할 자리에 ‘하릴없는’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릴없다’는 “버스 파업 소식을 접하지 못한 시민들이 승강장에서 하릴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다” “내가 잘못해 일어난 상황이니 혼이 나도 하릴없는 일이다”에서처럼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또 “머리도 못 감은 듯한 모습이 하릴없이 폐인의 형국이다” “누더기를 기워 입은 듯한 모습이 하릴없는 거지였다”에서와 같이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할 일 없이’는 말 그대로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의미로, 한 단어가 아니므로 ‘할일없이’와 같이 붙여 쓰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영락없이’로 바꿔 쓸 수 있다면 ‘하릴없이’, ‘빈둥빈둥’의 의미를 지닌다면 ‘할 일 없이’를 쓴다고 기억하면 된다. 구보는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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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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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월 - 박무웅
사랑 하나 훔치고 싶다 능소화 핀 후원 담장을 몰래몰래 넘어가 정지문을 밀치고 심장의 숨소리 죽이고 오동나무에 걸린 달 하나 훔치는 밤을 갖고 싶다
어둠의 보자기에 달빛 환한 사랑을 서리해서 바람소리도 풀빛소리도 그친 지름길로 돌아와서 추억의 귀밑머리를 풀어 오동나무 꽃씨 같은 기쁨을 터뜨리고 싶다
별당의 황촛불 펄럭이는 그림자 아래서 사랑과 천년 가약을 맹서하는 어리석은 사내가 되고 싶다
내 전생과 후생에서 사랑의 소문 하나 훔쳐 이름을 감춘 임꺽정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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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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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3. 배움과 가르침을 위한 수프
동물학교
옛날에 동물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미래'의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어떤 기념비적인 일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를 만들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달리기, 나무오르기, 날기, 헤엄치기 등으로 짜여진 교과 과목들을 만들었다. 편리한 교육 일정의 진행을 위해 모든 동물들이 예외없이 전 과목을 공부해야만 했다. 오리는 수영 과목에서 실로 눈부신 실력을 발휘했다. 사실 그 과목에 있어선 가르치는 지도 교사보다 오리가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오리는 날기 과목에선 겨우 낙제점을 면했으며, 달리기 과목은 더 형편없었다. 달리기 점수가 너무 낮았기 떼문에 오리는 방과후에도 혼자 남아 더 배워야 했으며, 달리기 연습을 위해 수영 과목을 포기해야만 했다. 달리기 연습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오리는 발의 물갈퀴가 너덜너덜해졌고, 그 결과 수영 과목에서조차 겨우 평균 점수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평균 점수만 받아도 다음 학년으로 무난히 진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토끼는 달리기 과목에서 선두를 차지하며 당당하게 학교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영 과목의 기초를 배우느라 너무 많이 물 속에 들어간 나머지 토끼는 신경 쇠약증에 걸리고 말았다. 다람쥐는 나무오르기 과목에선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날기 과목에서 교사가 땅바닥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날기를 시키는 바람에 다람쥐는 좌절감만 커져 갔다. 그리고 무리한 날기 연습 때문에 근육에 자주 쥐가 났으며, 그 결과 나무 오르기 과목에서조차 미, 달리기 과목에선 당연히 양을 받았다. 독수리는 문제아였다. 그래서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나무오르기 과목에서 독수리는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큰 날개를 퍼덕여 다른 학생들을 방해하는 바람에 자주 지적을 받았다. 독수리는 교사에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해 달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누구보다도 가장 높이 날고 탁월한 활공 능력을 가진 독수리였건만 졸업할 때까지 끝끝내 문제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학년이 끝날 무렵, 수영도 곧잘 하고 달리기와 오르기와 날기까지 약간 할 줄 아는 비정상적인 뱀장어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어, 졸업식장에서 답사를 읽는 학생으로 뽑혔다.
한편 대초원에 사는 야생 개들은 학교에서 땅파기와 굴파기를 교과 과목에 포함시키지 않는 바람에 남들처럼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학교 밖에서 힘들게 일하면서도 교육과 관련된 세금을 꼬박꼬박 내야만 했다. 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을 오소리에게 보내 개인지도를 받게 했으며, 훗날 땅돼지와 뒤쥐(굴을 파서 땅 속에서 사는 북미산 쥐) 등과 힘을 합쳐 성공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했다.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조지 리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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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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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힘에의 의지와 초인을 믿은 니체
니체(1844~1900)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과학적 생물학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삶의 의지의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의 생동감 없는 합리적, 관념적인 체계의 철학을 과감히 해체하고자 했다. 형식주의를 붕괴시키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들이 니체를 자기들의 선구자로 여기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니체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현대 사상의 전환점을 장식한 사상가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현대 초기까지의 세계관을 전도시킨 점이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대한 종래의 고정된 형식주의를 타파해 버림으로써 우리들에게 은폐된 것 그리고 고정된 이론이 아니라 생동하는 실천과 실천에 걸맞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들과 공통된 입장을 유지하면서 특히 니체는 관념론 및 형이상학과 기독교에 의해 채색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가치의 전도를 꾀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초인 사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형식적 이성주의를 타파하고자 한 노력은 마르크스를 위시해서 베르그송,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 현대 철학자들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철학은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마르크스), 삶을 이론에 의해 형식적으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 삶을 순수 지속으로서 직관해야 한다는 견해(베르그송), 계몽 변증법에 의해서 도구 이성만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천적 부정 변증법에 의해서 사회를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은 모두 이성적 형식주의를 타파하려는 시도들이다.
니체 철학은 문명 비판의 특징을 가지는데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철학이 소크라테스주의가 대변하는 형식적 이성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전통형이상학이나 단순한 관념론은 니체에 의하면 염세주의이다. 니체에 의하면 "사람은 확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 되며, 용감하게 자신의 두 다리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전혀 사랑할 수 없다." 니체는 형식적, 고정적인 소크라테스주의와 기독교도덕을 가면 또는 허구라고 하여 그것들을 배격하고 전도시키고자 한다.
니체는 형식주의적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를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에 의해서, 곧 부정의 부정에 의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결국 니체는 삶을 긍정한다. 니체는 타락한 본능과 최고의 긍정을 대립시킨다. 타락한 본능의 예들은 기독교, 소크라테스주의이며 이것들은 관념론의 형태를 가진다. 니체는 초기에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쇼펜하우어가 칸트를 넘어서서 불가지론을 극복하고 '삶에의 의지'를 제시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말기에 와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관념론으로 낙인찍고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형식주의적 염세주의와 타락한 본능에 속한다고 본다. 니체는 부정의 부정에 의해 최고의 긍정을 찾는다.
고통과 죄와 현존재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들을 주저하지 않고 긍정하는 것이 최고의 긍정이다. 삶에 대한 긍정을 가장 잘 제시해주는 것은 그리스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은 형식주의를 붕괴하고 동적 디오니소스와 정적인 아폴론의 조화를 창조함으로써 역동적인 삶 자체를 표현한다. 니체가 염세주의의 극복이나 삶에의 긍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운명애와 일맥상통한다. "자. 일곱 번째 넘어졌으면 여덟 번째는 다시 일어나라"는 니체의 외침은 삶에 대한 긍정과 운명애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니체 철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영겁회귀이다. "영겁회귀는 만물의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반복된 순환 운동이다"라는 니체의 말에서 세계는 양적으로는 동일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질적으로는 무한한 운동과 변화 과정에 있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니체의 영겁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겁회귀'라고 일컬어진다. 니체는 "보편적 해결과 불완전에 대한 경직된 감정에 대립해 나는 영겁회귀를 주장한다"라고 말한다.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사상과 비슷하고 또한 불교의 '제행무상'과도 유사하며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에도 근접한다. 니체는 결국 모든 가치들을 전도시킴으로써 초인을 정립하고자 한다. 니체는 스스로 '비도덕자'가 되어 무화의 쾌락을 맛보고자 하며 모든 가치들의 전도를 통해 최고의 자기사려를 획득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과 악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들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는 미래의 철학, 곧 낙관적인 세계관을 구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초인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모든 가치들의 전도를 제시했다. 그것은 형식적이며 관습적인 것을 반박하고 생동감 넘치는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고 더 나아가서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기독교 도덕과 소크라테스주의의 허구를 파괴하기 위한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다. 니체는 특히 <이 사람을 보라>에서 관념론과 기독교를 파괴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염세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운명애에 의해 삶을 긍정하고 모든 가치들을 전도해 영겁회귀를 인정하고 힘에의 의지를 긍정함으로써 초인을 정립한다. 이와 같은 철학적 주제들의 전개는 니체의 전체 저술들에서 일목요연하게 전개되고 있다. 니체의 초인은 실존적 인간을 말한다. 초인의 본질은 힘에의 의지이다.
니체는 현대 문명의 허구성과 제한성 및 일차원적 단편성을 날카롭게 비판함으로써 창조적 인간상과 인간의 본질을 창출해 열린 문명에의 가능성을 제시한 점에서 현대인들의 가치관에 일대 혁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러한 점에서 하이데거를 비롯해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인 푸코, 리오타르, 데리다 등은 니체의 해체주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삶의 창조적 진화와 베르그송
베르그송(1859~1941)은 특히 생명의 창조적이며 유동적인 특징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생명(삶)을 형이상학적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를,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았다면, 베르그송은 '삶의 약진'을 핵심으로 하는 생명을 형이상학적 원리로 고양했다.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한 또 하나의 철학자는 짐멜이다. 베르그송은 삶을 창조적 활동성 자체로 보았다. 기계론이나 목적론은 고정된 형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삶 자체를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삶은 정지되어 있지 않으며 미리 결정된 일정한 계획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매순간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한다. 베르그송은 삶이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근원적 힘을 삶의 약진(elan vital)이라고 부른다. 삶의 약진은 스스로 전개되어 본능과 지성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기능으로 된다. 본능은 현실에 직접 적응하기는 해도 의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대상을 알지 못한다. 지성은 의식을 가지긴 해도 현실을 공간화하고 간접적 상징 개념에 의해서 현실을 파악한다. 따라서 지성은 현실 자체와 삶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삶의 피상적 단편만을 이해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철학은 본능에 의존해서도 안되고 지성에 의존해서도 안되며 오직 내적 직관에 의해서 삶의 본질인 순수 지속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베르그송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롯해 전통 철학의 형식성을 비판하고 삶의 약진에 의해서 전개되는 순수 지속으로서의 삶을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이 참다운 철학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삶이 창조적으로 진화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유기체 진화설을 근거로 삼아 성립한 것이다. 베르그송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예리하고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그의 직관 이론은 다분히 신비주의 철학의 색채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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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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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奇制勝(출기제승) 出(날 출) 奇(기이할 기) 制(마를 제) 勝(이길 승)
사기(史記) 전단(田單)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은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가,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제나라는 민왕의 먼 친척인 전단장군의 선전(善戰)으로 거성과 즉묵(卽墨)성은 잃지 않았다. 그후 연나라의 소왕의 뒤를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안 전단은 간첩을 보내어 악의와 혜왕을 이간질하였다. 그 결과 연왕은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보냈다. 기겁의 학대를 받은 연나라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단은 이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밤중에 꼬리에 횃불을 단 소들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사마천은 손자(孫子) 의 말을 인용하여 전단의 용병술을 묘사하였다. 전쟁이란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나, 유격(遊擊)인 기병(奇兵)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기병을 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兵以正合, 以奇勝. 善之者, 出奇無窮). 라고.
出奇制勝이란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 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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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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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9. 아버지의 돌아가심과 내 이중의 수치
지금 얘기하려는 것은 내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이미 말한 대로 아버지는 누를 앓아서 자리에서 꼼짝 못하셨다. 어머니와 우리집의 늙은 종과 그리고 내가 주로 곁에서 돌보아 드렸다. 나는 간호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주로 상처를 싸매고, 아버지께 약을 갖다 드리고, 그리고 약을 집에서 장만할 때 그것을 조제하는 일이었다. 밤마다 나는 다리를 주물러 드렸는데, 아버지가 가라고 하거나 잠이 든 뒤에야 나는 물러나왔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한번도 소홀히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매일의 임무를 다한 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둘로 나누어 학교에 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곁에 가 있었다. 아버지가 허락을 하거나 또는 그가 조금 평안한 것을 본 때에만 나는 저녁 산책을 하러 나갔다. 이때는 또한 내 아내가 만삭중이었는데, 이런 일은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내게 이중의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가지는 내가 그때 아직 학생의 몸으로 자제해야 할 때에 자제하지 못한 것이요, 둘째는 나의 정욕이 내가 의무로 생각하는 공부를, 그리고 어려서부터 슈라바나를 이상으로 삼는 나로서, 그보다도 더 큰 의무로 생각해야 하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눌러 버린 것이다. 밤마다 손은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기에 바쁜 동안에도 내 마음은 침실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때는 종교적.의학적 견지에서 보나, 상식에 비추어 보나, 성교는 할 수 없는 때였다. 나는 항상 그 임무를 어서 마치고 나오고 싶었고,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는 곧장 침실로 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에 아버지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아유르베다의 의사들은 그들의 여러가지 고약으로 치료를 하였고, 이슬람교의 의사들도 그들의 고약을 발랐으며, 지방의 돌팔이 의사들은 그들대로의 비방을 썼다. 한 영국 외과의사도 또한 그의 의술을 써보았다. 마지막이요, 또 유일한 방법으로 그 의사는 외과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주치의가 반대했다. 아버지가 연만하여 수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주치의는 유능하고 유명한 분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충고가 마침내 이겼다. 수술은 포기하였고 수술에 사용할 목적으로 사들였던 약은 못쓰고 말았다. 만일 주치의가 수수을 허락했더라면 상처는 쉬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또한 수술은 그당시 봄베이에서 유명한 외과의의 손으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달랐다. 죽음이 임박하였는데 사람이 바른 치료를 생각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수술에 쓰일 여러가지 기구를 가지고 봄베이에서 돌아왔으나 이제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는 이 이상 더 살 것을 단념했다. 그는 점점 쇠약하여져서 마침내 식사와 대소변을 침대 위에서 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고 언제나 애를 쓰며 침대를 떠나서 하기를 주장했다. 바이슈나바교의 교리는 외적 정결에 관하여서 그렇듯 엄격하였다. 그러한 정결은 절대로 필요한 요소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그런 모든 일을 목욕까지도 포함해서, 정결을 유지하면서도 침대 위에서 할 수 있으며, 환자에게 조금도 불편을 주지 않고 자리에 얼룩 하나 내지 않고 늘 깨끗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결은 바이슈나바 교리에 아주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굳이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볼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칭찬해 드릴 수 밖에 없었다. 무서운 밤이 왔다. 그때 숙부는 라지코트에 있었다. 내 희미한 기억으로는 그는 아버지가 점점 위독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라지코트에 왔다. 두 분 형제는 정이 매우 두터웠다. 숙부는 온종일 아버지의 침대 가까이 앉아 있었으며, 우리를 자러 보내고는 자기는 굳이 아버지 침대 곁에서 주무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운명의 밤일 줄은 누구나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위험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밤10시30분이나 11시쯤, 나는 안마를 하고 있었다. 숙부는 내게 그만두고 가보라고 하셨다. 나는 좋아서 곧장 침실로 갔다. 가엾은 아내는 잠이 깊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왔는데 어떻게 잠을 자고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그녀를 깨웠다. 그러나 5,6분도 지나지 않아서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일어나세요. 그는 말했다. 아버님께서 매우 위독하십니다. 나는 아버지가 매우 위독한 줄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 순간에 매우 위독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일이냐? 빨리 말해라! 아버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다 끝났다. 나는 다만 두 손을 비빌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고, 앞이 캄캄했다. 나는 아버지 방으로 달려갔다. 만일 동물적 정욕이 내 눈을 어둡게 하지만 않았던들 아버지의 임종을 못지키는 형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됐다. 내가 아버지께 안마를 해드리고 있었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내 팔에 안겨 돌아가셨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특권은 숙부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 형에게 극진하였으므로 자기 형에게 최후의 봉사를 해드릴 수 있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을 미리 예감하시고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는 시늉을 하셨다. 그러고는 쓰셨다. 마지막 예배를 준비하라. 그러고는 팔에서 호신패를 끄르시고 툴라시 염주의 금목걸이를 끌러서 떼어 놓았다. 그러고는 곧 숨지셨다. 앞장에서 내가 수치라고 말한 것은, 정신차려 봉사해야 하는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에도 이기지 못하였던 이 정욕의 수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워 버릴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는 나의 흠이다. 내 효성이 아무리 지극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달게 버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그와 동시에 정욕에 붙들려 있었으니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결함이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충실은 하지만 정욕적인 남편이라 인정해 왔다. 내가 정욕의 얽매임에서 해방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많은 시련을 겪고 난 뒤에야 고쳤다. 나는, 내 이중의 수치에 관한 이 장을 끝내기 전에 내 아내에게서 태어난 그 가련한 꼬마는 3,4일도 못살고 죽었다는 것을 말해 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결혼하는 모든 사람은 내 일을 참고해서 깨우침을 받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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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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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3장 그리스의 태초 신들
10. 브리아레오스
브리아레오스(Briareu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로 100개의 손과 50개의 머리를 가진 유명한 기가스이다. 인간들은 그를 아이가이온이라 부르고 신들만이 브리아레오스라 불렀다. 헤라, 제우스 및 아테나가 크로노스를 신권에서 몰아내기로 공모했을 때 브리아 레오스가 청공으로 올라와 크로노스 쪽에 대좌하였는데 그의 사납고 위협적인 외모에 기가 질려 공모를 단념하였다. 후에 신권전쟁에서 거인족측에 가담하였다가 에트나 산으로 추방당하였다.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브리아레오스는 큐클로페스로 올림포스 신족이 공모하여 제우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테튜스의 부름을 받고 달려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제우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또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코린토스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키자 중재에 나서서 아크로코린토스는 아폴론에게, 나머지는 포세이돈에게 나누어 주었다.
11. 코토스 코토스(Cottu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로 5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헤카톤케이레스(백수거인족)의 한 명으로 규게스, 브리아레오스와 형제간이다.
카이오스 카이오스(Caeus, Coeus)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로 포이베와 결혼하여 레토와 아스테리아를 낳았으며,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는 트로이젠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휴페리온 휴페리온(Hyperion)은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테이아와 결혼하여 아우로라(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낳았다. 그를 태양신 헬리오스로 표현하기도 한다.
므네모슈네 므네모슈네(Mnemosyne)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로, 목동으로 변장한 제우스와 피에리아에서 아홉 밤을 지내고 1년 후에 아홉 명의 뮤즈를 두었다. 므네모슈네는 기억(memory)이라는 뜻이며, 시에서 뮤즈의 어머니를 메모류(Memory)라고 부른다. 또한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을 받아 마시는 보이오티아의 샘물을 므네모슈네라고도 하였다.
호라이 호라이(Herae)는 봄, 여름 및 겨울의 계절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다.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에우모니아(질서), 디케(정의) 및 이레네(평화) 3자매가 그들로, 올림포스 신들과 같이 배석하여 모든 것을 성장하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 언제나 환영받고 향연에 초대되었다. 또한 아프로디테의 딸들 혹은 시녀라고 부르는 성 창녀도 호라이라 하는데, 황도 12궁을 도는 시간의 춤을 추며 신들의 산파역을 하고 지상의 호라이(사원 창녀)를 이끌고 성적 비밀 의식에서 남자를 가르쳤다. 고대의 창부들은 높은 지위와 학식으로 존경받았으며 여왕처럼 떠받들어졌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들 세 여신을 탈로(싹틈), 아우코(성장) 및 카르포(수확)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사물의 성장을 관장하는 자연의 3여신으로 추앙하였다. 호라이는 모이라이와 자매간이나 성격이 다르고 우아한 여신으로 꽃과 식물이 있는 들판에 나타났다. 그러나 카리테스나 마찬가지로 신화상 어떤 특이한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다. 후기 우화에서 꽃과 풍요를 상징하는 플로라는 서풍신 제퓨로스의 아내가 되어 카르포스라는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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