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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14호
2012.10.8 (음8.23)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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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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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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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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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전년도, 회계연도
“1만2768건. 지난 회계년도에 시 민원전화에 접수된 빈대 발생건수다. 이는 전년도 회계년도에 비해 16%나 증가한 수치다.” 최근 뉴욕의 빈대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주는 이 보고 자료에 나오는 ‘년도’는 맞게 적은 걸까?
‘전년도’는 어법상 문제가 없지만 ‘회계년도’는 ‘회계연도’로 바루어야 한다. ‘年度’를 한글로 옮길 때 ‘년도’로 사용해야 할지, ‘연도’로 사용해야 할지 헷갈린다는 이가 많다.
“년도별 입국자 현황을 파악하라”에서 ‘년도별’은 ‘연도별’로 고쳐야 맞다. ‘녀·뇨·뉴·니’로 시작하는 한자음이 단어 첫머리에 올 때는 두음법칙에 따라 ‘여·요·유·이’로 표기한다. 단어의 첫머리가 아닌 경우엔 본음대로 적는다.
이 기준에 따라 ‘회계년도’로 표기하지 않고 ‘회계연도’로 적는 이유는 뭘까? 독립성 있는 단어에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말이나, 두 개의 낱말이 결합해 합성어가 된 경우 뒤의 단어에도 두음법칙이 적용된다는 예외 규정 때문이다. ‘會計+年度’로 분석되므로 ‘회계연도’라고 한다. ‘전년도’의 경우 ‘前+年度’가 아니라 ‘前年+度’로 분석되는 구조이므로 이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연도’로 써서는 안 된다.
[우리말바루기] 이었다, 이였다
‘너여서(너+이어서)’ ‘나였고(나+이었고)’ ‘지쳐(지치+어)’에서처럼 모음 뒤에 어미 ‘-어’가 올 때 줄여 쓸 수 있는 현상과 관련해 틀리기 쉬운 사례들을 살펴보자.
ㄱ. 온통 모순투성이었고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ㄴ.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혜린이었다. ㄷ. 학교 못미쳐에 조그만 문방구가 있었다. ㄹ. 안을 볼 수 없도록 창문엔 발이 처져 있었다.
ㄱ은 ‘모순투성+이다’가 아니라 ‘모순투성이+이다’에서 활용한 것이므로 ‘모순투성이+이었고’ 또는 ‘모순투성이+였고’로 써야 한다. ㄴ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혜린+이었다’로 보면 바른 문장이다. 그러나 ‘혜린이+었다’로 끊을 경우는 역시 ‘혜린이+이었다’ 또는 ‘혜린이였다’가 옳다. 모음 다음에는 ‘이었다’보다는 ‘였다’가 일반적이다. ㄷ의 경우는 명사인 ‘못미처’를 써야 한다.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다’에서는 ‘미치다’에서 활용한 것이므로 ‘미쳐’가 옳다. ㄹ의 ‘처져’는 ‘치다’에 ‘지다’가 붙은 말로 ‘치+어’ ‘지+어’가 준 것이므로 ‘쳐져’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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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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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의 미학 1 - 김동호
모른다 옆집 밤나무의 뒤통수를 모르고 우리 바둑이의 이십사 시간 거동을 모른다
처마에 듣는 빗방울이 내일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모른다 뒤뜰의 대추나무는 내년에 얼마나 열릴까 베란다 카나리아는 내년에 얼마나 낳을까
TV화면에선 숫놈 사자가 암놈 사자를 향해 돌진한다 나의 앎은 또 빗나간다 놈은 그녀의 입에 문 먹이를 향해 달렸던 것이다 픽! 나의 입에서 웃음이 터진다 아기가 자다 말고 사알짝 실웃음을 웃는다
모름! 모르기 때문에 油田은 깊어진다. 모르기 때문에 광맥은 무한으로 뻗어있다.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조용히 놀라는 가슴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샛별같은 눈빛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앎이 많은 사람에겐 귀를 주어라 모름이 많은 사람에겐 마음을 주어라 새벽은 나에게 또 이렇게 일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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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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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3. 배움과 가르침을 위한 수프
손
추수감사절날, 초등학교 여교사가 1학년 학생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대상을 그려 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여교사는 미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빈민가에 사는 그 아이들이 과연 감사하게 여길 대상이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식탁에 차려진 칠면조나 맛있는 음식들을 그릴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더글라스가 내미는 그림을 보고 여교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어린아이의 필체로 단순한 손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손일까? 더글라스의 그림을 보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말했다. "그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는 하나님의 손이 틀림없어요."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그건 농부의 손이에요. 칠면조를 기르니까요." 마침내 여교사는 더글라스의 책상으로 다가가 그것이 누구의 손을 그린 것인가를 물었다. 더글라스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건 선생님의 손이에요." 그러고 보니 여교사는 쉬는 시간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더글라스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곤 한 것이 기억났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종종 그렇게 했었다. 하지만 더글라스에게는 그것이 매우 큰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추수감사절의 의미이리라.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아무리 작은 방식이라도 누군가에게 베풂을 주는 기회를 갖는 것이 참다운 감사인 것이다.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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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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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5부 독일 관념론 철학 이야기
절대 자아를 확립한 피히테
세계는 자아에 의해 성립하므로 인식의 근거는 자아이다. 자아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순수한 충동에 의해 움직임으로써 자발적이며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한다.
칸트가 남긴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계와 가지계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서 현상과 물 자체간의 틈이었다. 칸트는 인식 형식의 조건 아래에서만 대상을 현상으로 인식할 뿐 대상 그 자체(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으므로 단지 물 자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칸트의 진지하고 성실한 학문 태도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다운 존재 자체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은 지식 체계의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 그들은 자연과학, 윤리학 및 목적론의 원리들에 대한 공통된 기초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물 자체란 무엇인지, 신의 관념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유와 영혼 불멸의 관념을 또한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통해서 기계론, 숙명론, 무신론, 이기주의, 쾌락주의 등에 반대했고, 인간 오성을 현상에 제한함으로써 인간의 가치에 대한 합리적 믿음을 위한 여지를 마련했다. 물 자체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는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되었지만 나머지 두 비판에서는 이성의 필요한 관념이 되고 나아가서 규제적 원리가 된다. 인식의 영역에서 물 자체는 추상개념에 불과하지만 실천 영역에서 그것은 자유, 실천 이성 및 의지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칸트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현상과 물 자체의 조화할 수 없는 이원론이 지배적이다. 피히테는 인간의 실천 활동에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여 절대 자아의 관념론을 확립하려고 했다. 셸링은 동일자에게서 세계의 절대적인 통일과 조화를 찾으려 동일 철학을 구상했다. 헤겔은 세계의 역사 과정을 절대 정신인 신의 전개로 파악하는 변증법을 체계화함으로써 독일 관념론의 절정을 이루었다. 독일 관념론 철학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체계의 종합 내지 통일에 대한 노력은 우선 철학적 문제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반영하고 다음으로는 당시 현실적으로 다수의 봉건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게르만족의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이론 철학 피히테(1762~1814)는 작센 출신으로 가난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예나, 라이프치히, 비텐베르크 등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상당 기간 가정교사 노릇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1790년 칸트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794년 예나 대학의 교수가 된 후 과학과 철학 그리고 삶 자체를 개혁하고자 하는 새로운 관념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9년 '무신론 논쟁'으로 인해 교수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피히테는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강의했다. 피히테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하고 있는 것에 분개해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그러한 강의를 행했다. 1810년 그는 새로 건립된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 되어 1814년 사망할 때까지 철학 탐구에 몰두했다. 피히테는 칸트의 현상과 물 자체는 매우 큰 모순을 안고 있다고 본다. 칸트의 현상과 물 자체는 서로 매개될 수 없는 대립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칸트는 주관적인 인식 형식과 인식의 내용 내지 재료를 구분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현상과 물 자체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식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규정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피히테에게는 인식(앎)의 근거와 세계의 근거는 똑같은 것이다. 피히테는 주관은 객관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보았다. 칸트의 인식의 근거는 선험적 통각, 다시 말해서 순수 자아의 형식적 통일이었다. 피히테는 이론적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자아를 정신적인 통일 활동으로 파악한다. 피히테에 의하면 자아는 범주들과 아울러 모든 인식 내용의 전체성을 산출한다. 피히테는 칸트처럼 인식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지 않고 인식의 형식 및 내용이 자아를 통해서 성립한다고 본다. 피히테는 세계의 전체 내용이 자아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보기 때문에 인식의 근거는 자아이다. 자아는 먼저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 다음으로 자신이 아닌 것, 곧 비아(das Nicht-Ich)를 정립하기 때문에 자아와 비아는 서로 제한하고 그 결과 현상으로서의 세계가 생긴다. 좀더 상세하게 말하면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는 것이 피히테의 제1원리인데 이때의 자아는 이성이나 신 또는 절대 자아이다. 이 자아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자아로서 그것은 A = A라고 하는 동일화에 해당한다. 자아는 절대적이며 무한한 활동성이다. 절대 자아는 자기 자신이 활동할 영역 또한 정립하는데 이 영역이 바로 비아이다. 절대 자아가 활동 영역을 정립할 경우 절대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제한하며 동시에 비아를 제한한다. 결국 제한된 자아와 비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현상이 생긴다. 대상을 아는 자는 제한된 자아이고 대상은 알려지는 것이며 이 양자는 절대 자아의 자기 정립 과정에서 발생한다. 피히테의 관념론 체계는 이들 세 가지 원리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칸트가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단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요청했음에 비해 피히테는 인식이나 존재의 근거를 물 자체(절대 자아)의 활동성에서 찾음으로써 칸트의 현상과 물 자체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다.
실천 철학 피히테의 실천 철학은 한마디로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아는 순수한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 자아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순수한 충동에 의해 움직임으로써 자발적이며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한다. 이와 같은 피히테의 생각은 헤겔에 이르러 그의 정신철학이나 역사철학의 이념이 자유에서 실현되는 결과를 낳는다. 피히테의 실천 철학은 크게 법 이론과 도덕론 두 가지로 구분된다. 피히테는 모든 사람들이 근원적 권리로서 개인의 자유와 일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자아가 자발성과 자율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순수한 활동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느 누구나 개인은 자신이 일할 장소와 자유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각자의 자아 내지 활동을 완전히 전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개인을 제한하게 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법이 성립한다. 법은 각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다. 그렇지만 법은 개인들의 인격의 전개가 균등하게 보장되도록 권리와 의무를 절도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회의 진전을 방해하는 임의적인 규정은 법을 침해하는 것으로 저지 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피히테의 법이론은 사회의 윤리 내지 도덕에 관한 이론으로서 개인들의 자유 충동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그의 도덕론은 자아가 소유한 다양한 충동들이 각각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자아는 본성에 따라 자발적이며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지만, 순수한 충동이 아닌 경험적, 자연적 충동에 의해 순수한 노력이 방해받고 감각 사물로 행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서 피히테는 인간이 감각적 본성이나 자연 충동에 의해서 지배당하거나 구속당함 없이 그것들을 극복함으로써 자아의 독립을 실현할 것을 요청한다. 피히테는 "항상 너의 규정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주장하는데 '너의 규정'이란 절대적이며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순수 활동으로서의 자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피히테의 관념론을 일컬어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관념론 철학은 셸링의 동일 철학과 헤겔의 변증법 철학이 나올 수 있는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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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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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4 - 김병총
55. 조선열전(朝鮮列傳)
연(燕)의 태자 단(丹)의 군사가 진군(秦軍)에게 쫓겨 요하(遼河)근처에서 어지럽게 흩어진 뒤에 위만(衛滿)은 이들 망명한 백성들을 거두어 해동(海東:渤海의 동쪽, 즉 조선)에 집결시켰다. 진번(眞番)을 병합하고 국경을 확보하면서 한(漢)의 외신국(外臣國)이 되었다. 그래서 제55에 <조선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조선왕 위만(衛滿:衛는 姓)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일찍이 진번, 조선을 공략해 복속시키고 요새를 쌓아 관리(官吏)를 두었다. 진이 연을 멸망시킨 뒤로는 조선을 요동 국경 밖의 땅으로 간주했다. 한나라가 일어난 뒤에도 조선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요동에 있던 요새를 새로 쌓고 패수(浿水:大同江의 옛 이름)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해 들어가자, 위만도 연에서 망명해 1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만이(蠻夷) 복장에다 상투를 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런 후 요새 밖으로 나가 패수를 건너서 본래 진나라 때의 공터였던 땅을 근거로 한의 요새 부근을 왕래하면서 점차로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그 전의 연, 제(齊)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모아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왕검(王儉:平壤, 原文에는 王險)에 도읍했다. 효혜제, 여후시대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요동군 태수 위만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선 밖 만이를 막고 변경지대에서 약탈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여러 만이를 군장(君長)들이 한으로 들어가 천자롤 뵙고자 하는 경우에도 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태수 위만이 이런 뜻을 상주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이래서 위만은 점차 무력과 재력을 갖게 되어 근방의 소읍들을 침략 병합했다. 진번, 임둔(臨屯)도 자진하여 복속해 왔으므로 위만의 영역은 사방 수천 리에 달했다. 그 후 왕위는 아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권유를 받고 조선으로 망명해 오는 한나라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일찍이 입조해 천자를 뵈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진번 인근 사람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 싶다고 했지만 한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원봉 2년이었다. 한에서는 섭하(涉何)를 파견해 우거에게 귀순하라고 타일렀지만 우거는 듣지 않았다. 섭하가 조선을 떠나 경계인 패수에 임했을 때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裨王長:人名)을 부하를 시켜 찔러 죽였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섭하는 급히 패수를 건너 수레를 몰아 요새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귀국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말을 듣지 않길래 조선의 장(將)을 죽이고 왔습니다." 황제는 섭하의 행위를 가상히 여겨 책망하는 대신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를 동원해 습격해 가서 그를 죽였다. 그러자 한에서도 죄수들로 병사를 모집해 조선을 치게 했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에게 병력 5만을 주어 제(齊)에서 발해로 배를 띄웠다.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으로 출격하여 우거를 공격케 했다. 우거도 병사를 동원해 나와 험준한 지점에서 방비를 튼튼히 했다. 드디어 좌장군의 졸정(卒正:卒의 長) 다(多)가 우거를 공격했으나 철저히 깨어지고서 도망했다. 다는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졌다. 누선장군 양복이 제나라 군사 7천을 이끌고 왕검으로 육박했다. 우거는 우선 왕검성을 굳게 지켰다. 그런데 우거는 양복의 군사가 소수임을 알아차리고 성에서 나와 양복의 군사를 들이쳤다. 양복의 군사는 대패하고 양복은 산중으로 도망쳤다. 십여일 동안 숨어 있다가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일단 군대를 재편성했다. 한편 좌장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한 뒤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거기서 머뭇거렸다. 양복과 순체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조선군은 의외로 강하오.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우리는 병력의 숫자로 과시 위협하는 한편 위산(衛山)을 시켜 항복을 권고해 보는 게 어떻겠소." "지금 처지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겠소이다." 그래서 위산이 우거에게 파견되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우거는 위산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상은 항복할 작정이었는데 두 장군이 나를 속이고 죽일까 두려워 염려했소이다. 이제는 신절(信節:天子의 使者라는 증거물)을 보았으니 안심하고 항복하겠소." 그러면서 우거는 태자를 한에 입조시켜 사과케 하고 말 5천 필과 군량미를 보내기로 했다. 태자가 군사 1만여를 데리고 패수를 마악 건너려는 순간 좌장군 순체는 번쩍 의심이 들었다. "태자는 이미 항복했지 않았소. 군사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도록 명하시오." 태자 역시 순체의 완강한 요구를 듣는 순간 번쩍 의심이 들었다. "그것은 싫소. 좌장군께서 나를 해치기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믿겠소." 그래서 태자는 패수를 건너지도 않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먼저 귀국해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노해서 위산을 주살해 버렸다. 일이 다시 어긋난 순체는 군사를 몰아 패수를 건너 왕검성 밑으로 박두했다. 양복 또한 군사를 몰아 성의 남쪽에다 포진했다. 그러나 우거의 왕검성 수비가 매우 견고했으므로 두 장수는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순체는 본래 궁중에서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며 총애받던 신하였다. 연과 대(代)의 사나운 용사들을 이끌고 온 승세 타던 군사들이었으므로 그들 모두가 매우 교만했다. 또 양복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자주 패전하여 이미 많은 병사를 잃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미 우거를 겁먹고 있었고 양복은 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거를 포위하고서는 싸우는 대신 언제나 화친을 맺자며 회유했다. 양복은 화친을 원하고 순체는 왕검성을 자주 급습해 왔으므로 우거는 두 장군의 군략이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간첩을 놓아 한군의 사정을 탐색하도록 했다. 결국 우거는 양복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한다는 밀약을 통보하면서도 계속 미적거리며 시일을 끌고 있었다. 순체는 부하를 양복에게 보내 공동작전을 펴자고 했으나 양복은 일부러 순체의 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서둘러 조선의 항복문서를 받아 그 공로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순체는 양복의 그런 기미를 알아채고 조선의 허술한 틈을 찾아 협박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았다. 차라리 조선은 양복 쪽에게 마음이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두 장군은 서로 화합할 수가 없었다. 순체는 불평했다. "누선장군은 많은 군사를 희생시킨 죄가 있지. 그런데 이제는 조선과 몰래 친하며 우호하고 있지 않은가. 양복은 모반을 꿈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마음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순체는 아직 입밖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본국의 황제는 황제대로 화가 났다. "두 장군은 진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산을 보내 우거에게 항복을 타일렀던 게 아닌가. 그때 우거는 위산에게 분명히 권유를 받아들여 태자를 한나라로 보내겠다고 했다. 위산은 누군인가. 일개 사자 아닌가. 위산이 혼자서 결정을 못내리고 순체와 의논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쳐 항복 약속을 망친 것이 아닌가. 이제 두 장군이 왕검성을 포위하고는 있지만 의견이 다르고 화합하지 못하니 함락은 글렀다. 어느 세월에 해결을 보겠는가." 그래서 황제는 제남군(濟南郡) 태수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했다. "서둘러 가서 사태를 바로잡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적절히 처리할 것을 허락한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가 먼저 만났다. "조선은 마땅히 오래 전에 항복했어야 했소. 또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었소." "그런데도 지금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뭐요?" "이유가 있지요. 누선장군 때문이오. 함께 계략을 짜자며 아무리 타일러도 날 만나주지 않소." "그건 왜 그렇소?" "그는 군사의 대부분을 잃었소. 귀국하면 죄 받을까 그것이 두려워 조선과 모의해 반역을 꾀하고 있는 듯하오. 그래서 우거는 항복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틀림없소?" "사태를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가 큰 해를 입을 것이오. 누선장군이 조선군과 힘을 합치면 우리 군사는 전멸할 것이오." "그렇다면 적절한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지!" 공손수는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양복을 순체의 진영으로 불렀다. 공손수는 양복이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시켜 체포해 버렸다. 그런 후 양복의 군사들을 순체에게 병합시켰다. 공손수는 귀국해 그 일을 황제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무어라고! 적절한 조치라는 게 겨우 그것이더냐. 양복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순체의 말만 들어 그를 체포한 것이 감히 그대가 할 짓인가!" 황제는 노하여 공손수를 주살해버렸다.
한편 순체는 기왕에 양군을 통합하자마자 즉시 조선을 급습했다. 이때 조선의 재상 로인(路人:河北省 密雲縣의 蘇縣 出身)과 한음(韓陰), 그리고 이계(尼谿:일찍이 齊의 景公이 孔子를 封하려던 곳)의 재상 삼(參), 또 장군 왕겹 등이 모여 의논했다. "애초에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는데 그는 지금 체포되어 버렸소. 사나운 좌장군이 양군을 병합했으니 이제 전투는 더욱 치열하고 급박해질 거요. 무엇보다 저들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점이오. 그런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을 터이고......"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죽게 되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되자 한음, 왕겹, 로인은 모두 한나라로 도망했다. 로인은 투항 도중에 우거군에게 피살되었다. 원봉 3년 여름이었다. 이계의 재상 삼이 드디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투항해 왔다. 그러면서도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았다.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우거를 대신하여 굳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순체는 우거의 아들 장(長)과 재상 로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서 성이를 주살하도록 백성들에게 권고케 했다. 그래서 성이는 성안에서 피살되고 조선은 평정되었다. 한나라는 그곳에다 사군(四郡:진번, 임둔, 樂浪, 현도)을 설치했다. 삼을 봉하여 획청후로 삼고 한음을 추저후, 왕겹을 평주후(平州侯), 장을 기후(幾侯)로 삼고 최는 아버지가 피살된 데다 공로 역시 컸으므로 온양후(溫陽侯)로 봉해졌다. 좌장군 순체는 황제에게 불려가 공로를 다투고 질투해 전략을 배반한 죄로 기시(棄市:처형 후 시체를 저자에 버리는 형벌)에 처해졌다. 누선장군 양복은 열구(列口:大同江口)에 이르러 좌장군의 군사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전진해 많은 군사를 잃은 죄로 주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거는 요새의 견고함만 믿다가 나라를 망치고 조상의 제사를 끊어지게 했다. 섭하는 공로를 속임으로써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양복은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고생하다가 죄를 입었다. 파우(廣東省)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다가 도리어 의심을 산 것이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누선, 좌 두 장군 모두 치욕을 당했으므로 그 부하 장수들 역시 아무도 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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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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巢毁卵破(소훼란파) 巢(새집 소) 毁(헐 훼) 卵(알 란) 破(깨질 파)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 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 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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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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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4. 남편노릇
내가 결혼할 무렵, 부부애. 절약. 조혼 그런 따위의 문제를 다룬, 값이 1파이스 또는 1파이(정확한 값은 잊었다.)짜리의 조그만 팜플렛이 흔히 간행되었다. 이런 책이 눈에 띄는 대로 나는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통독했고, 그러고는 싫은 것은 잊어버리고 좋다고 느낀 것은 실천에 옮기는 것이 버릇이었다. 아내에게 한평생 신의를 지키는 것이 남편의 의무란 것을 나는 그런 책자에서 배우게 됐고, 그 감명은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게다가 진리를 향한 열성은 나의 타고난 바탕임을, 아내에 대해 거짓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또 그 어린 시절에는 배신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신의의 교훈이 아주 곤란한 결과를 가져온 일도 있다. 나는 내가 만일 아내에게 성실을 맹세해야 한다면, 아내도 또한 내게 대해 성실을 맹세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나를 질투하는 남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내의 의무는, 아내에게 성실을 요구하는 내 권리로 쉽게 바뀌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강요되어야 할 것이라면 나는 쉴새 없이 그 권리를 지켜야 한다. 내가 아내의 정절을 의심할 이유는 터럭끝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질투심은 이유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의 거동을 살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내는 내 허락 없이는 어디도 가서는 안되었다. 이것이 우리 둘 사이에 쓰라린 싸움의 씨를 뿌렸다. 간섭이란 실상 일종의 감금이다. 그런데 카스투르바이는 그런 것을 참고 있을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제가 가고 싶기만 하면 가고야 말았다. 내편에서 제재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녀는 점점 더 제멋대로 행동했고, 나는 갈수록 점점 더 곤란하게 됐다. 그리하여 서로 말을 안하는 일이 우리 어린 두 부부의 다반사가 돼 버렸다. 나는 나의 구속에 대하여 카스투르바이가 그러한 자유를 취한 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아무 속임도 없는 소녀가 절에 가고 친구 집에 가는 것까지 구속받고도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녀를 구속할 권리가 있다면 그녀도 또한 내게 그렇게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내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우리 생활이 돌이킬 수 없이 비참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의 엄격은 모두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내 아내를 이상적 아내로 만들려고 했다. 내 욕심은 그녀가 순결한 생활을 하며 내가 배운 것을 그녀도 배우고, 그녀의 생활과 사상을 내것과 일치하게 만들려 는 것이었다. 카스투르바이가 그러한 욕심을 가졌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녀는 무식했다. 그녀는 천성이 단순했고, 독립적이고, 끈기 있으며, 적어도 내게 대해서는 말이 적었다. 그녀는 자기의 무식을 걱정하지도 않았고, 나의 공부가 한번이라도 그녀의 내부에서 자기도 나처럼 공부를 해보자는 자극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는 기억도 없다. 그러므로 내 욕심은 전혀 일방적인 것이었던 듯싶다. 내 열정은 온전히 한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열정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비록 주고받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쪽에는 아주 적극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주 견딜 수 없이 비참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고, 밤이 오면 우리는 또다시 만난다는 생각이 항상 내게 붙어 있었다. 떨어져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잡담을 해가며 밤이 늦도록 그녀를 자지 못하게 붙들고 있기가 일쑤였다. 만일 이 열렬한 열정에다가, 의무에 대한 불타는 집념이 내게 없었더라면, 나는 질병과 조사의 밥이 됐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짐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마다 주어진 일과를 마쳐야 했고,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이 나중 것이 나를 많은 함정에서 건져내 주었다.
카스투르바이가 글을 모른다는 말은 이미 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정욕적인 사랑이 내게 시간을 남겨주지 않았다. 첫째 그녀를 가르치려면 그녀의 뜻을 거슬려 가며 해야 했고, 그나마 밤에 해야 했다. 나는 어른들 앞에서는 감히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말을 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안될 말이었다. 카디아와드에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그곳 특유의 쓸데없이 야만적인 푸르다(Purdah ; 가리는 휘장)가 있었다. 사정이 그와 같이 불리하였으므로 어린 시절에 내가 카스투르바이를 가르치려던 노력은 거의 성취되지 못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정욕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나는 벌써 공적 생활에 출범한 후였으므로 내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가정교사를 두어 그녀를 가르치려던 것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카스투르바이는 지금 간단한 편지를 겨우 쓰고 쉬운 구자라트어를 겨우 이해할 뿐이다.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만일 절대로 정욕에 물든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오늘날 학식있는 숙녀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녀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정욕적인 사랑의 불행에서 얼마쯤 나를 건져 주었던 한 사실에 대해 말을 했다. 그밖에 또 하나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수많은 실례에 의하여 나는 동기가 순수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마침내는 구원해 주시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혼이라는 잔인한 풍습과 함께 힌두 사회는 그 해독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또 다른 하나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 부모들은 어린 부부가 오래 같이 있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어린 아내는 세월의 반 이상을 친정에서 보낸다. 우리들의 경우도 그러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결혼 생활의 처음 다섯해 동안에(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함께 지낸 것은 모두 합해서 3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있은 지 여섯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내 아내에게는 친정에서 오라는 소식이 오곤 했다. 그녀를 데리고 오는 것이 그때에는 몹시 못마땅히 생각됐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살아났다. 열여덟에 나는 영국으로 갔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건강한 별거 생활을 했고,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우리는 여섯 달 이상을 같이 있어 보지 못했다. 나는 라지코트와 봄베이 사이를 늘 바삐 왕래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아프리카에서 초청이 왔는데 그때 나는 이미 정욕에서 상당히 벗어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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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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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3장 그리스의 태초 신들
3. 헤라 매우 오래된 옛 여신이며 그리스 이름은 존칭인 헤라(Hera, Juno)로만 통하고 원 이름은 모른다. 유사 전부터 있었던 종교를 그리스인이 내도하여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제우스의 누이이자 배우자이며, 자식으로는 아레스, 헤베, 헤파이스토스 및 에일레이튜이아가 있다. 올림포스 신 중 신성결혼의 수호신으로서 혼인한 여자의 생활을 각별히 보호하였다. 출생지는 아르고스 도는 사모스라고 전한다. 계절의 세 여신 호라이에게 위탁 양육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오케아노스와 테튜스가 키웠다고도 한다. 아르골리스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강의 신인 아스테리온의 세딸들이 길렀다고 하며, 아르카디아의 스튬팔로스 사람들은 바다의 신인 펠라스고스의 아들 테메노스가 보살피며 교육시켰다고 주장한다. 신화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헤라는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삼켜 버렸는데 메티스가 마력을 가진 약을 주어, 제우스인 줄 알고 돌을 삼킨 크로노스를 토하게 할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헤라 여신은 새 중에서 매와 거위, 특히 공작을 좋아하였고 꽃으로는 박하, 앵속 및 백합을 좋아하였다. 특히 백합은 원래 사프란색이었으나 제우스가 자고 있는 헤라의 젖꼭지를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물려 빨게 하다 지상으로 떨어진 젖방물로 인해 지금처럼 순백색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공으로 흐른 젖은 은하(Milky Way)로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한편 신화상에 등장하는 헤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도 애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배우자도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데다가 부부싸움이 끊임없고 특히 외도가 심한 남편 제우스에 대한 격분과 질투가 심하여 상대여자는 물론 거기서 낳은 자식도 미원하고 원한을 품어 가혹하게 대하였다.
유사시대에도 사모스 섬과 아르고스 지방에서는 헤라 숭배가 성행하였다. 그녀의 출생지 중 하나로 꼽히는 사모스는 크로노스가 지배할 당시 헤라와 제우스가 비밀리에 처음 사랑을 나눈 곳이기도 해서 헤라 여신과는 관계가 깊다. 이는 아르고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아르고스 시에서 10km 북쪽에 위치한 옛 신전 헤라이움에서 제우스가 헤라를 유혹하였다 한다. 즉 어느 날 제우스는 눈부시게 화려한 헤라가 늘 산책하는 아르고스 뒷산에 가서 뻐꾹새로 변신하여 기다리다가 소나기에 흠뻑 젖었다. 소나기가 지나가지 때맞추어 헤라가 나타났고(후에 여기에 헤라 신전이 섰다) 비에 젖은 초라한 모습의 뻐꾹새는 헤라의 무릎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몸을 녹였다. 헤라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제우스와 엉키게 된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이는 제우스가 상습적으로 쓰는 유혹 방법으로, 헤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설득하였다. '일리아드' 속에서 헤라와 제우스는 항상 말다툼을 하고 서로 반대 입장에 서 있다. 헤라는 확고하게 아카이아(그리스) 편을 들었는데, 파리스와 헬레나가 신성한 결혼의 율법을 위배하여 자신을 성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중립을 지키느라 애를 쓰면서도 과거 올림포스의 신들이 모두 자기에게 등을 돌릴 때 도와주었던 테티스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을 헤라는 제우스가 자신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헤라는 때로 여신 아프로디테로부터 빌린 허리띠를 무기로 남편을 매혹시켜 세력을 약화시키고 고집을 꺾기도 하였다.
아르고스에서 열리는 헤라 축제의 경우는 운동경기도 겸하였다. 일반적으로 헤라는 여라 나라의 여신과도 동일시되는데 특히 로마의 유노는 같은 여신으로 간주된다. 원래 유노는 에트루리아의 여신 우니에 기원하는데 로마인은 그녀를 '충고하는 자'라는 뜻의 모네타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오늘날 돈을 뜻하는 money는 이 모네타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옛날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노 모네타 신전에 로마의 조폐소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헤라는 옛 조각상에서 홀을 쥐고 왕관을 쓴 여왕으로서 혼자 혹은 남편 제우스와 같이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헤라]
4. 포세이돈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해신인 포세이돈(Poseidon, Neptune)은 형제간인 제우스 다음 가는 올림포스의 주신이다. 로마인은 물의 신 넵투누스에 포세이돈의 신성을 결부시켜 마찬가지로 해신으로 하였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제우스보다 먼저 태어난 그를 삼켜 버렸으나 후에 제우스가 성장하여 세력을 잡았을 때 크로노스가 다시 토해 내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다른 설에는 크로노스가 포세이돈 대신 새끼 말을 삼켰다고도 하며 혹은 크로노스가 아들을 바다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포세이돈은 텔키네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이 키웠다고 한다. 성장한 후에는 텔키네스의 여동생 할리아와 사랑하게 되어 7남 1녀를 두었는데 딸 이름은 로도스라 하며 여기에서 섬 이름 로도스가 연유하였다. 일리아드 시대부터 포세이돈은 바다를 지배하였고, 그 형제인 하데스는 지하계, 제우스는 천공과 지상을 차지하였다. 해신인 포세이돈은 파도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폭풍우를 유발시키고 삼지창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둘러 지진을 일으켰으며, 해안에 사태를 나게 하고 샘물을 솟게도 하였다. 세력이 바다뿐아니라 샘, 호수까지 뻗쳤던 것이다. 그러나 하천만은 자체의 신들이 지배하였다.
형제이자 최고의 신 제우스와의 관계는 항상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헤라, 아테나 여신과 함께 신들의 공모에 가담하여 제우스를 쇠사슬로 묶고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나 브리아레오스의 위협으로 실패하였다. 포세이돈은 트로이 전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찍이 그는 아폴론 및 인간 아이아코스(제우스와 아이기나의 아들)와 더불어 1년간 귀양가서 트로이 성을 구축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이 보수의 지불을 거부하자 포세이돈은 그 앙갚음으로 트로이를 황폐화시키는 바다괴물을 불렀다. 이것이 트로이 사람에 대한 그의 첫 분노이며 트로이 전쟁중에 포세이돈은 아카이아(그리스) 쪽에 서서 중재한 이유였다. 그러나 일리아드 전쟁 초에 아카이아 군이 네스토르의 진언을 좇아 원정선 주위에 성을 쌓아 군막을 견고히 하자 신들의 회의에서 그 결정에 항의하였는데, 트로이 성의 건설로 쌓아올린 자신의 명성을 깎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포세이돈은 제우스의 위무적 발언으로 일단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아카이아 군이 구축한 성을 무너지게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얼마간 트로이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트로이 군이 우세를 보이자, 아카이아 군을 도우러 와서 칼카스 모양으로 분장하고 아옉스 등을 부추겨 테우케르와 이도메네우스를 몰아내게 하였다. 제우스는 포세이돈에게 곧 전쟁에서 손을 뗄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아킬레스가 막 트로이의 아이네아스를 죽이려 하는 참에 아킬레스의 눈 앞을 안개로 덮어 그 위치를 뒤쪽 멀리 이동케 함으로써 아이네아스를 구하였다. 포세이돈이 트로이인을 살려준 동기는 첫째, 운명이 아이네아스의 죽음을 원치 않았고, 둘째 아이네아스가 라오메돈의 직계 후손이 아니고 안키세스, 카퓨스 및 아사라코스를 거친 트로이 가계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포세이돈은 특히 프리아모스의 후손을 가장 싫어하여 멸망시키고 안키세스의 후손은 보호하여 살아 남게 해주었다.
영생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무리를 형성하고 도시를 구성하면 신들은 각기 한 마을 혹은 수개의 마을을 선택하여 수호신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때로 한 도시를 두세 신이 서로 선택하는 일이 생기면서 신들 상호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동료신이나 인간들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 경우에 한해 포세이돈은 대체로 운이 없었다. 예컨대 코린트 지방에서는 그 관할권을 둘러싸고 아폴론과 갈등을 일으켰다. 이 때 심판을 맡은 거인 브리아레오스는 아폴론에게 호의적인 결정을 내렸다. 또한 포세이돈은 아이기나 섬을 지배하기 원하였으나 제우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낙소스 섬에서는 디오뉴소스가, 델포이에서는 아폴론이, 트로이젠에서는 아테나가 포세이돈보다도 우월하였다. 특히 아테네와 아르고스를 원하여 포세이돈은 큰 문제를 일으켰다. 포세이돈은 아티카에 말을 가져와 인간에게 말타는 기술을 알려주었으며 경마의 수호신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진심으로 아테네를 자기 영역으로 삼고자 하여 급기야는 삼지창으로 땅을 찔러 아크로폴리스에 바닷물이 솟아나게 하려 하였다.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이 바닷물을 에렉테움 경내의 소금물 샘이라 한다. 어쨌든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뒤쫓아온 아테나 여신은 케크로프스를 증인으로 불러 자신이 처음으로 이 고장에 올리브 나무를 심었음을 입증케하고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의 조정을 맡은 제우스는 아테나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최초로 올리브 나무를 심었다고 한 케크로프스의 증언을 인정하여 아테나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포세이돈은 엘레우시스 들판에 홍수를 일으켜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아르고스를 놓고는 헤라와 다투었는데, 이번에도 사건을 맡은 조정관 포로네오스가 포세이돈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결과에 화가 난 포세이돈은 아르고스 주민을 저주하며 그 나라의 모든 개울물을 말려 버렸다. 얼마 후 다나오스와 50명의 딸들이 아르골리드로 왔는데 마실 물조차 없었다. 다행히 포세이돈이 다나이데스(다나오스의 딸들)의 한 명인 아뮤모네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저주가 풀려 개울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다. 다른설에 의하면 포세이돈이 포로네오스와 이나코스를 괴롭히기 위해 아르골리드를 짠물로 넘치게 하였는데 헤라가 포세이돈에게 재난을 거둘 것을 종용하여 바다를 다시 해안으로 복귀시키게 했고 그 대신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라는 훌륭한 섬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어 만족하였다 한다.
포세이돈의 연애 건수는 대단히 많고 그 소생 또한 많았다. 그러나 제우스에게서 난 많은 아이들이 인정 많은 영웅이 된 것에 비하면 포세이돈의 아이들은 아레스와 마찬가지로 대개는 포악하였으며 일부는 괴물이나 말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컨대 토오사와 교합하여 낳은 괴물 폴류페모스, 신화에서 흥미로 가득찬 고르곤족 메두사와 관계하여 낳은 거인 크류사오르와 날개달린 천마 페가소스 등이 그들이다. 또한 아뮤모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나우플리오스는 그리스인, 특히 오유세우스의 술책으로 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에 보복하기 위하여 트로이에서 귀환중인 아카이아 군 오유세우스 일행을 잔인하게 해쳤다. 이피메데이아와의 사이에서는 거인 알로아다이를 두었다. 그밖에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악당 케르큐온과 스키론, 라모스 및 오리온 등이 있다. 또한 할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도 갖은 악독한 짓을 저지른 뒤 희생자 모두를 땅 속에 매장하여 범죄를 음폐하고 법망을 피한 악인들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자식을 가졌던 만큼 포세이돈은 엄청나게 많은 가계의 선조이기도 하다.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연애사건은 가히 특종감이라 할 만한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특히 금기였다. 그 딸이 바로 공포의 여신 데스포이나이며, 그밖에 신마 아레이온도 그 소생이었다. 후에 7명의 명장을 거느리고 테베를 공격하였다가 크게 패하여 몇 명의 생존자와 함께 아테네로 도망친 아드라스토스 왕이 탄 말이 바로 이 아레이온이며, 후에 아드라스토스는 테세우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포세이돈의 본부인은 요정 암피트리테인데,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고도 하고 트리톤과 로도스 형제를 낳았다고도 한다.
포세이돈의 초기 상은 나신, 후기에는 옷을 입은 상에 턱수염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얼굴만으로는 제우스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를 제우스와 구분해 주는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바로 손에 든 삼지창인데 이는 참치잡이 어부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또한 그는 황금 이륜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마차는 상반신은 말이고 하반신은 뱀으로 된 괴물이 끌고, 주위에는 트리톤이 배석하였다. 그밖에 어류와 돌고래 및 바다동물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으며 네레이데스, 프로메테우스, 글라우코스 같은 잡신들도 동반하였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국가나 에게해의 많은 섬나라에서는 이 포세이돈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따라서 항해, 바다의 폭력과 음모, 유괴와 해적행위의 견제, 때로는 지진의 신으로 외경 숭배되었으며, 만물, 식물성장에도 관여하고 테살리아에서는 말을 타루는 신으로 존숭을 받기도 하였다.
암피트리테 암피트리테(Amphitrite)는 원래 그리스가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에 모시던 삼상일체의 여신이다. 그리스 시대 작가는 바다의 요정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신화상에서 암피트리테는 포세이돈의 정실로 되어 있다. 원래 포세이돈은 그녀의 동생인 테티스를 사랑하였으나 테티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생길 경우 그 아들에게 쫓겨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암피트리테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암피트리테는 포세이돈의 평소 품행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숨어 버렸다. 이에 포세이돈은 돌핀을 파견하여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국은 아내로 맞이하는데 성공하였다. 돌핀은 이 공으로 별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내 암피트리테는 포세이돈이 그의 형제 제우스와 마찬가지로 결혼생활에 성실성이 없자 늘 분노를 터뜨리며 노호를 그치지 않았다. 암피트리테의 의미가 '아우성치다'임은 여기에 기인한다.
[포세이돈과 암피트리테]
트리톤 트리톤(Triton)은 포세이돈과 암피트리테의 아들이다. 소라고동을 불고 파도를 조절하며 파도를 치게 하는 능력을 가진 반인반어의 바다 소신으로 후기에는 포세이돈의 시중을 들었다. 팔라스와 트리테이아가 그의 딸이라고 전한다. 천문학에서는 해왕성 2개의 위성 중 하나를 트리톤이라 한다.
[포세이돈과 트리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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