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2.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
나와 함께 좀더 가주시기 바란다. 문제가 한결 복잡하고 미묘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계속 구명해 보도록 해보자. 내가 당신에 관한 또는 어떤 것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 때, 나는 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보는 자가 있게 된다. 예컨대 내가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는데,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내가 그것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좋아함과 좋아하지 않음은 나의 문화, 훈련, 연상, 취향, 선천적 및 후천적인 개성들의 결과이다. 그것은 내가 보고 판단하는 그 중심으로부터 생긴 것이고, 따라서 보는 사람은 그가 보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관찰자는 하나 이상의 이미지를 알고 있다-즉 그는 수많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관찰자는 그 이미지들과 다른가? 그 역시 또 하나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자기에 대해 보태거나 빼고 있다. 그는 바깥과 안으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항상 저울질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한정(가감)하고, 변경하는 생물이다-그는 그 자신의 지식, 영향 및 무수한 계산인 의식의 범위 안에서 살고 있다. 동시에 당신이 관찰자-당신 자신-를 바라볼 때, 당신은 그가 기억, 체험, 사건, 영향, 전통, 고통의 무수한 변주 등 과거의 것들로 만들어져 있음을 안다. 따라서 관찰자는 과거이자 현재이며, 그리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건 역시 그의 일부이다. 그는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어 있으며 이 죽음과 삶을 가지고-죽은 잎과 산 잎을 가지고-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그것은 시간의 범위 안에 있는데-속에서 당신(관찰자)은 공포, 질투, 전쟁, 가족(가족이라고 불리는 그 추하게 폐쇄된 실재)을 보며, 그리고 도전이며 새로운 것인 그 관찰된 것의 문제를 풀려고 한다. 당신은 항상 새로운 것을 낡은 말로 번역하려 하며 그래서 당신은 영원히 갈등 속에 있다.
관찰자와 마찬가지로, 한 이미지는 그의 주위와 그의 속에 있는 다른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이 이미지를 좋아해, 나는 이걸 간직할 거야>라고 말하거나 <나는 그 이미지를 싫어하니까 그걸 버려야겠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관찰자 자신이 여러 가지 다른 이미지들에 대한 반응을 통해 생긴 여러 이미지들에 의해 짜맞취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른다-<관찰자 역시 이미지이며, 그는 다만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바라보고 있을 다름이다. 여러 가지 다른 이미지들을 통해 존재하게 된 이 관찰자는 그 자신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그 자신과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 사이에 그는 하나의 경계, 시간적 거리를 만들었다. 이것이 그 자신과 그가 그의 고민의 원인이라고 믿는 이미지들 사이에 갈 등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는 <이 갈 등을 없애야겠어>라고 말하지만, 그 갈등을 없애려는 욕망 바로 그것이 또 하나의 이미지를 낳는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앎-이것이 참된 명상인데-은 모든 다른 이미지들에 의해 짜맞춰진 중심 이미지가 있음을 드러냈으며, 이 중심 이미지, 즉 관찰자는 검열관이고, 경험자이고, 평가자이며, 다른 이미지들을 정복하거나 종속시키거나 혹은 완전히 파괴하고 싶어하는 심판자이다. 그 다른 이미지들은 관찰자에 의한 판단, 견해, 결론들의 결과이며, 그리고 관찰자는 모든 다른 이미지들의 결과이다-따라서 관찰자는 관찰되는 자이다. 그리하여 앎은 마음의 다른 상태들을 드러냈고, 여러 이미지와 그 이미지들 사이의 모순을 드러냈고, 그에 따른 갈등과 그것에 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과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여러 시도들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망설이는 앎을 통해 드러났고, 그러자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이것을 알게 된 자는 어떤 우월한 실재가 아니며, 어떤 높은 자아가 아니다(우월한 실재, 높은 자아 등은 만들어 낸 것이며 한술 더 뜬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것을 드러낸 것은 앎 자체이다.
당신은 자문할는지 모른다-그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실재는 그럼 누구인가? 그리고 알려고 하는 실재는 누구인가? 만일 그 실재가 의식의 일부, 생각의 일부라면, 해답을 찾는건 불가능하다. 그것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앎의 상태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 앎의 상태 속에 여전히 <나는 알아야 해, 나는 앎을 연습해야 해>라고, 말하는 실재가 있다면, 그건 다시 또 하나의 이미지이다.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이 인식은 관찰되는 것과의 동일화 과정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을 어떤 것과 동일화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어떤 것-우리의 가족, 남편이나 아내, 나라 등-과 동일시하며, 그것이 커다란 불행과 큰 전쟁을 낳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핵심, 우리 존재의 뿌리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옛 중국에서는 화가가 어떤 것-예컨대 나무-을 그리기 전에 그 앞에 앉아서, 며칠이든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가 그 나무일 때까지 않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는 자신을 나무와 동일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무였다. 이것은 그와 나무 사이에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며,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에 거리가 없었다는 것, 아름다움, 움직임, 그림자, 잎의 깊이, 색깔의 질 따위를 체험하는 체험자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완전히 그 나무였고, 그런 상태에서만 그는 그릴 수 있었다.
만일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걸 그가 깨닫지 못했다면, 관찰자 쪽의 어떠한 움직임도 단지 또 다른 일련의 이미지를 만들 뿐이며 그리고 그는 다시 그것들 속에 갇힐 따름이다. 그러나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사실을 관찰자가 알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천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관찰자는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 관찰자는 언제나 <나는 이 이미지들에 관해 뭔가를 해야 해, 나는 그것들을 억압하거나 그것들에 다른 모습을 주어야 해>라고 말해왔다. 다시 말해서 그는 관찰된 것에 대해 언제나 능동적이며, 정열적이며 혹은 무심코 활동하고 반응하며, 그리고 관찰자 편에서의 그 좋아하는 행동 및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불리었다-<나는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는 붙잡아야 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에 관해서 행동하는 그것이 다름 아닌 그 자신임을 관찰자가 깨달을 때, 그 자신과 이미지 사이에는 아무 갈등도 없다. 그가 그것이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가 떨어져 있을 때, 그는 그것에 관해 무엇인가 했거나 하려고 했지만, 그가 그것임을 관찰자가 깨달을 때, 거기엔 좋아함과 싫어함 및 갈등이 있지 않다.
무엇을 위해서 그는 해야 하는가? 만일 어떤 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것에 대항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다. 그것은 거기 있다. 그래서 좋음과 싫음에 대한 반응의 결과로서의 모든 행동은 끝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엄청나게 생동적이 된 앎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중심 문제나 이미지에도 묶여 있지않으며, 그리고 그 앎의 강렬함으로부터 아주 다른 질의 주의력이 나오고, 따라서 마음은-왜냐하면 마음이 이 앎이기 때문에-엄청나게 민감해지고 고도로 총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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