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7. 플로티노스
무아경, 속의 환상
그 자신도 출중한 철학자인 포르피리오스는 3세기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인 그의 스승 플로티노스의 전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시대의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육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몹시 부끄럽게 여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포르피리오스는 여기에 걸맞게 플로티노스가 육체의 실존을 혐오하는 몇 가지 예를 열거한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출생, 부모, 고향에 대해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영혼이 육체에 들어온 날인 출생일조차도 비밀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에게는 심히 유감스러운 사건, 즉 생일을 축하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절대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시의 가장 유명한 화가를 그의 강의실에 몰래 들여 보내서, 스승의 모습을 기억한 다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플로티노스의 육체에 대한 멸시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몹시 괴롭히는 위경련에 대한 처방인 위를 세척하려는 것까지 거절하였다. 병에 걸려도 그는 약 먹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원래 습관적으로 해왔던 매일 매일의 마사지마저 그만두자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먹는 것도 지나치게 줄였다. 그는 준비해 둔 빵 한 조각 먹는 것조차 자주 잊어 버렸고, 그 탓으로 결국은 불면증까지 얻게 되었다. 이러한 육체에 대한 멸시의 결과로 플로티노스는 앓아 누워 야위어 가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며, 손과 발이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제자들과 교제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플로티노스는 제자들과 서로 얼싸안고 인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피리오스는 플로티노스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도 점점 그를 멀리 했다고 전한다.
플로티노스는 철학자 암모니오스에게서 자극받아 28세에 철학을 시작하였다. 암모니오스는 소크라테스처럼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정원사 조수 일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짐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처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후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공개 강의를 하였다. 그의 강의는 아주 활기차게 진행되어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떠들썩하기도 했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강의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웠으며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는 플로티노스가 청강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고무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청강생이 모여들었다. 순수한 의미의 제자들만 모여든 것은 아니다. 상류 사회 사람들, 그 중에는 원로원의 지도적인 인물도 플로티노스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황제도 황후와 함께 친히 강의실을 방문하였다. 부녀자도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특별한 개방성을 입증해 준 것이라고 플로티노스의 전기 작가는 적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청강생들은 그들 스승의 가르침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첫번째 사람인 신분이 높은 어떤 원로원 의원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그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의 별장을 떠나 세상사를 등진 채 단지 이틀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면서 금욕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는 부수적인 결과로 관절염을 고칠 수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사람은 변호사로, 이 사람은 원로원 의원에 비하면 자제력이 없는 편이었다.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고리 대금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세번째 사람은 정치적 야망이 몹시 강한 사람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이 야망을 잠재워 보려 하였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사람은 스승을 시기해서 마법의 주문을 외워, 스승에게 해를 끼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법이 오히려 주문을 왼 자신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플로티노스는 진기한 신비의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마술이 미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사지는 마치 돈주머니가 닫힐 때처럼 오므라들었다 한다. 언젠가 한번은 이집트 승려가 플로티노스에게 악마가 붙었다며 주문을 외워 퇴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신이었고 이때부터 구경꾼들은 그를 숭배하게 된다. 플로티노스는 일상 생활에서도 기묘한 투시 능력이 있었다. 그는 도둑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사람의 내적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 사람들의 미래의 운명까지도 일순간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제자들은 플로티노스의 죽음을 육체에 대한 적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들은 플로티노스의 죽음을 불멸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 던지고 해방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제자들은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한 마리의 뱀이 담 틈바구니로 사라져 버린 사실을 제시한다. 이러한 의미로 플로티노스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제 나는 내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이 우주 안에 있는 신적인 것 안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려 한다."
궁극적으로 플라톤에서부터 유래하는 육체와 감각에 대한 경멸이, 플로티노스에게는 그의 철학함의 근원적인 경향으로 나타난다. 즉 세상에서 떠나려는 충동, 그것도 세상에 대한 권태에서 이 세상을 떠나려는 충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현존이란 "추방이며 저주"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등지려는 것은 이론적인 성찰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특별한 경험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포르피리오스는 그 자신이 플로티노스와 교제해 온 6년 동안에 플로티노스가 네번씩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을 한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즉 그러한 체험은 그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이 모든 세계를 뛰어넘어 도약하는 체험이다. "그때 그에게 신이 나타나는데, 그 신은 어떠한 형상도 형태도 갖추지 않은, 정신 위에 군림하며 전체 정신계를 지배하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러나 플로티노스가 그때 관조했던 것을 말하려고 할 경우 그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언어는 세계와의 만남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이 모든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표현을 고를 수 없는 것이다. 신성이란 "실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성이 존재한다는 것마저도 합당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성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개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한 신을 정신이라 지칭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정신이라는 개념도 인간이 유한한 자기 경험에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이러한 체험을 포기하지 않고 알리고자 한다. 그는 그것에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할지 그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곧 부정의 길이다. 우리는 신에 대해서 "그가 무엇이 아니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그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신적인 것 그 자체는 이러한 부정의 방법으로 부정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신적인 것이 아닌 것, 즉 세속적인 것, 유한한 것, 본래 시간적이고 무상한 것 등은 부정된다. 이러한 유한한 것들에 통용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면 이 모든 울창한 것을 훨씬 넘어서 있는 그것에 대해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식으로 플로티노스는 신의 체험에 대해서 조언한다.
"만일 그대가 신을 말로써 표현하거나 그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다른 것을 끊어 버려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신 그 자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신에게 어떤 것을 덧붙여 줄까 찾지 말고, 오히려 그대가 아직도 그대의 생각 속에서 떼어 버리지 않은 것이 있나를 찾아 보라!"
플로티노스는 이런 식으로 부정의 길을 걸으면서 신성에 대해 몇 가지 부정적인 술어를 쓸 수 있음을 밝혀냈다. 신성은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나뉘어지지도 않으며, 비공간적이고, 비시간적이며, 운동도 정지도 없고, 형태도 없고, 구체적인 것이 아니며, 크기도 성질도 없고, 사유도 의지도 없으며, 전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으로써 플로티노스가 본질적인 신의 개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한 현실-정신적이거나 감각적이거나 할 것 없이-은 항상 하나의 다양한 것임을 인간이 이해하게 될 때 신의 본질적 개념은 얻어 진다. 플로티노스에게 다수로 존재하는 것은 곧 유한한 현실의 근본특징이다. 플로티노스는 바로 이 다수를 일치시키는 것에서 본래적인 신성의 개념을 얻는다. 유한한 현실이 다수라면, 신성은 일자성이어야만 한다. 이렇듯 플로티노스는 신성을 "순수한 일자"로 파악한다. 신성은 그 자체로 모든 유한한 실재를 초월해 있으니, 존재와 정신까지도 초월해 있다. 이것이 이 사상가의 최고의 신개념이다. 물론 그는 개념으로써 결정적인 명칭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시만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자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에 근본적으로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자는 우리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크고 위대하다."
플로티노스는 여기서 거기에 놓여 있는 문제점을 극도로 어려운 사유의 과정을 거쳐 논의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특히 일자가 어떤 독립적인 존재자로서 유한한 다수를 마주하여 갖고 있는 한, 그 일자는 참된 일자일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따라서 일자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다수를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다수에 우선해서 일자가 있고, 일자 안에 다수가 있다." 그 까닭은 "거기에서부터 또는 그 안에서 다수로 존재하는 그 일자가 없다면 다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으로서의 일자는 공허한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하나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일자는 오히려 단일한 것으로서 특히 자신 안에 무한한 충일을 포함하고 있다. 철학하는 사람은 도약(황홀경) 속에서 일자를 "모든 것이, 그것도 전체로서의 모든 것이 동시에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근원 그 자체"인 것으로서 경험한다.
따라서 인간은 일자와의 무아적인 일치를 이루는 순간 다수의 세계를 능가하게 된다. 인간은 이 다수의 세계를 흡사 망각해 버린 듯하다. 그러나 인간이 여전히 육체에 머물고 있는 한, 그러한 경험에 영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이 현실로 되돌아 왔을 때, 그는 다시 분열되고 모순적인 현실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일자를 직관하고 난 후이기 때문에 현실을 일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모든 존재자는 일자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모순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일자가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면, 분명히 말해 다수의 세계는 전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에서 플로티노스는 어떻게 일자에서 다수가 가능한지, 따라서 어떻게 일자에서 다수가 전개되어 나오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일자를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시도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즉 일자를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서부터 자립적인 존재자를 독립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경우 일자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일자는 세계의 원인이어야 한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점에서 개념적인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일자에서 실재의 발생을 단지 그림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일자를 넘쳐흐르는 그러나 아무리 넘쳐흘러도 고갈되지 않는 샘이라 부르거나, 또는 빛을 발산하지만 아무리 방사해도 빛이 줄어들지 않는 태양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일자의 전개를, 어떤 대상이 자신의 실체를 조금도 잃어 버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는 데 비교했다. 이러한 비유에 플로티노스가 세계를 보는 시각이 표현되고 있다. 세계란 그노시스의 사상에서처럼 본래 독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교의 해석처럼 상대적인 자립성만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신성에서 직접 나오고, 동시에 신성 안에서 유지된다. 세계는 일자에서 흘러 나오지만, 동시에 세계는 일자 안에 포함되어 머물러 있다. 세계는 근원에서 분리됨이 없이 근원에서 흘러 나온다. 일자는 다수 안에 "동시에 현존하고 또한 동시에 그것과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신성이 자기 자신 안에 남아 있을 수 없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신성이 세계로 자신을 전개시켜야 한단 말인가? 그 이유는 분명 플로티노스가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그가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세계를 뛰어넘는 일자에 대한 경험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는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일자의 유출에 대한 사상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인 근거 제시만 갖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자에서 그 안에 머물면서 유출되어 나오는 세계의 유래는, 세계가 일자에서부터 생겨나오는 것으로 고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자가 그 자신에서 세계의 생성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계가 되고자 하는 어떤 욕구를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욕구는 결핍의 상징이다. 그러나 완전한 일자에게는 부족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기원이 신의 사랑일 수도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계 창조의 근거를 신의 사랑 안에서 탐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플로티노스가 동경(열망)으로 해석한 사랑에도 부족함, 즉 결여의 감정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신적인 충일에서 세계가 생겨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외에 다른 가능성이란 없다. 이때 일자는 "완전히 무르익어서-물론 일자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흡사 넘쳐흐르는 것 같으며, 이러한 일자의 충만함이 다른 것을 생겨나도록 한다."
플로티노스는 일자에서의 세계 생성에 대한 사상을 더 전개시켜 나가 일종의 비시간적이며 단지 역설적으로나 이해할 수 있는 영원한 과정으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은 단계별로 이루어지는데, 하위 단계로 갈수록 완전성이 줄어든다. 첫번째 단계는 일자 그 자체로서, 여기서 일자는 단순하게 그 자신 자체이다. 이 과정은 일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이로써 두번째 단계, 즉 정신과 그 속에 포함된 정신적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생성된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일자의 모사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자의 순수성을 잃어 버린다. 왜냐하면 정신적 세계는 이데아의 충일을 자신 안에 다 간직하고 있지 못하며, 정신은 모든 개별 정신의 총체로서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정신과 이데아의 세계의 분리에 이미 이자성이 놓여 있다. 세번째 단계는 정신이 아래를 내려다 봄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이로써 세계 영혼이 생성된다. 세계 영혼은 자체 안에 거대한 다양성을 포함하며, 그 부분 부분이 개별적인 영혼이다. 세계 영혼은 여전히 항상 영원의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이로써 우주가, 유한한 감각 세계가, 사물의 세계가 그 어마어마한 다양성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곧 네번째 단계이다. 세계는 세계 영혼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완전하다. 플로티노스는 이 점을 그리스도교의 세계 경멸에 맞서 특별히 강조한다. 그런데 물질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은 손상된다. 그렇다면 플로티노스에게 물질이란 무엇인가? 그 당시의 몇몇 그노시스 학파에서 주장하듯이, 물질은 어떤 신에 반대되는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이 주장하듯이 무에서 창조된 것도 아니다. 물질은 오히려 모든 내려다 봄의 가장 변두리 지평이며, 세계 영혼 자체가 설정한 가장 먼 경계선이다. 이것은 빛이 그 자신의 경계로서 어둠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전체 단계를 고찰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전 실재, 즉 정신, 영혼, 감각적 사물의 차원에서의 전 실재가 플로티노스에게는 일자의 유일한 유출이다. 전 실재는 오직 그것이 각기 나름대로의 완전함 속에서 일자의 모사인 한에서만 실재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세계가 완전히 신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일자의 세계 형성의 과정 가운데서 인간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그는 영혼이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하는 길을 묘사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답한다. 출발점은 영혼의 타락이라는 사실이다. 영혼은 원래 영원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세계 영혼이 아래를 내려다 보는 데 관여하게 된다. 영혼은 자유롭기 때문에 이 내려다 봄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육체 속에 몰입해 들어가 자신의 기원을 망각해 버릴 수 있다. 이것이 통상 평범한 일상적 인간의 현존재이다. 인간은 세속적인 일 속에 파묻혀 지낸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영혼에게는-모든 세계적인 것이 다 그러하듯이-일자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영혼은 신에서 유래하기에, 필연적으로 신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영혼은 세속적인 일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동기를 갖게 되고. "그가 육체로 내려 갔을 때 입었던 옷"을 벗어 버리고,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귀환의 길에 들어선다. 영혼은 처음에는 영원한 것으로서의 자신으로 향했다가 마침내는 신성 즉 일자에게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철학함의 길이다.
귀환의 길도 내려올 때처럼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번째 단계는 인간이 개인적인 향락 생활을 멀리하고 공동체 생활의 덕, 즉 용기, 정의, 사려깊음, 지혜로 돌아섬으로써 이루어진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감각 특히 욕망과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자신을 깨끗이 하여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 그가 본래 고향에 있었을 때와 같은 초감각의 차원에 이르게 된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자아의 단순한 영혼적인 것에서 자아의 정신적 본질로의 상승이 이루어진다. 이 단계에서 이데아의 관조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갖고 있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실존이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단계는 모든 인간이 모든 개별적인 것을-이데아까지도-떠나 보내고 세계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앎마저도 사라져, "영혼의 들어설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는 데에서 형성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과 신성이 실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네번째 단계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수반한다. 즉 우리는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우리의 순수한 자아로써 지나쳐 가면서 저 높은 곳을 순수하게 때묻지 않은 채로 관조한다"는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유한한 직관과 유한한 사유에서는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흡사 눈을 감고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시각을 소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단순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일자를 관조하면서 "일자가 나타날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는 영원함을 가지고 영원성과 영원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갑작스런 무아의 황홀의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으로 아주 깊이 완전하게 내려 앉았을 때, 사유를 넘어서서 우리 자신을 고양해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리고 무아의 경지에서 단순하게 되어 갑자기 신적인 빛으로 채워질 때, 신적인 원초 존재와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와 우리 사이의 모든 차이가 사라져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최고의 존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소리 없이 현존하는 바로 그 신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플로티노스의 철학적 가르침은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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