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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36호
단기 4343. 4. 19 (음력 3. 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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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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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윤동주 시문학상 응모작 공모
민족시인 윤동주 동문의 조국사랑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제10회 윤동주시문학상 응모작을 다음과 같이 공모합니다.
■ 응모자격 : 전국 대학(교) 학부생 ■ 응모주제 : 자유주제 ■ 장르 및 작품수 : 운문 5편 ■ 응모형태 : A4 용지에 작성, 워드프로세서 사용 가능
※ 반드시 겉표지 양식을 다운받아 작성 후 함께 제출 (첨부파일 확인)
■ 응모기간 : 2010. 4. 24(월) ~ 5. 4(화) ■ 응모방법 : 방문 또는 우편접수(5월 1일 도착분까지) ■ 제 출 처 : 120-749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26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무실 ■ 수상작 발표 : 2010. 5. 28(금)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및 윤동주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상 금 : 당선자(1명) 300만원, 가 작(2명) 150만원 ■ 시 상 식 : 2010. 6. 10(목)
※시간 및 장소는 추후 공고 ■ 문 의 처 :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전화: (02)2123-2253 | Email:yoondongj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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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윤동주 시 암송대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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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소재 문학작품 공모
한국핸드볼발전재단은 핸드볼과 핸드볼 선수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현상 공모를 실시한다고 30일 밝혔다. 공모 분야는 장편소설과 논픽션이며 최우수작 1편에 대해 상금 5000만원을 준다. 재단은 최우수작이 없으면 가작에 대해 2000만원의 상금을 준다는 계획이다. 마감은 9월30일이며 자세한 공모 방법은 한국핸드볼발전재단 인터넷 홈페이지(www.hbkf.org)를 참고하거나 전화(02-716-0262)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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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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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모험에 만족해야 한다.(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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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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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만남(천재일우)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는 뜻의 ‘천년의 만남’(천재일우·천세일시·천재일시)이라는 말이 있다. 출전은 동진 사람 원굉(328~376)의 <삼국명신서찬>이다.
이 책은 ‘위·촉·오’의 세 나라를 세운 명신(이름난 신하) 스무 사람에 관해서 ‘찬’을 만들어 서문을 붙인 것이다. ‘찬’이라 함은 “사람의 공로나 덕을 기려 칭찬하는, 한 귀 넉 자로 된 운문의 한 글체다. 그 서문 가운데 “아직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곧, 천년에 한 천리마가 없다./ 그 만년의 한때는 삶의 길,/ 천년에 한 번 만남은 슬기의 모임이다”라는 글귀가 있다. ‘백락’이라 함은 주나라 사람으로, 이름있는 말의 감정가(가려내는 사람)였다. 그래서 뛰어난 인물을 보아 가려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백락’이라고 하게 되었다. ‘천리마’라는 것은 여기서는 뛰어난 인물을 말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백락 같은 감정가를 만나지 못하면 천년을 기다려도 뽑히지 못한다. 그와 같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있어도 그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임금을 만나지 못하면 천년이 지나도 한 사람의 충신도 있을 수 없다.
또 만년에 한 번의 기회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통칙이며, 천년에 한 번의 만남이란 것은 현명한 사람과 슬기 있는 사람의 경사스러운 만남이다.
그런 보기 드문 우연한 만남이 없으면 명신도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몰래 입국, 몰래 출국
‘몰래’는 동사 ‘모르다’에서 파생된 부사다. ‘모르다’의 어간 ‘모르’에 접미사 ‘-애’가 이어졌다. 다시 [ㄹ] 소리가 덧나는 설측음화 현상이 표기에 반영되어 ‘몰래’로 되었다. ‘몰래’가 부사 외에 다른 품사처럼 쓰이는 예는 없었다.
“국경 산악지대를 통한 사람과 물자의 몰래 입국, 몰래 출국의 길이 크게 열려 있다.” 이란의 지정학적 상황을 다룬 신문기사의 한 구절이다. 기사에서는 ‘몰래 입국’, ‘몰래 출국’이라고 해서 ‘몰래’가 관형사처럼 쓰이고 있다. 언뜻 ‘입국’ 또는 ‘출국’을 ‘입국하다’ 또는 ‘출국하다’라는 동사의 어근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몰래 출국의’라고 해서 조사 ‘의’까지 붙여 놓았으니 꼼짝없이 명사일 수밖에 없다.
‘몰래’가 관형사처럼 쓰인 것은 ‘몰래카메라’가 처음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몰래카메라’라는 말이 어법을 뛰어넘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고, 대중의 힘을 바탕으로 이제는 사전에까지 버젓이 올라 있다. 우리말 부사 ‘몰래’와 동작성도 없는 외래어 명사 ‘카메라’가 불륜을 저질렀으나, 아무런 비판이나 저항 없이 혼인신고까지 마친 셈이다. 차라리 ‘스파이 카메라’라고 했으면 말의 갈래를 정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단속을 위한 ‘감시카메라’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몰래 입국’, ‘몰래 출국’이라는 말을 신문에서 스스럼없이 쓰는 걸 보면 ‘몰래’를 관형사처럼 쓰는 예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재욱/시인
바치다,받치다,받히다
‘바치다’는 어디 혹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정중하게 내어 놓는다는 의미다.‘제물을 바치다.’‘목숨을 바치다.’ ‘받치다’는 어떤 물건의 밑이나 안에 다른 물체를 댄다는 뜻이다.‘책받침을 받치다.’‘내복을 받쳐 입다.’ 무엇이 넘어지지 않게 밑에서 괴는 것도 받친다고 한다.‘받히다’는 ‘받다’의 피동사다.‘승용차에 받혀 입원했다.’
늘리다와 늘이다
늘리다는 늘다의 사동사다. 물체의 길이나 넓이, 부피 등이 커지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는 수나 양이 많아지게 하는 것을 뜻한다.‘사무실을 늘리다.’ ‘학생 수를 늘리다.’ 늘이다는 물체를 당기는 힘을 가해 본디의 길이보다 길어지게 하는 것이다.‘고무줄을 늘이다.’ 아래로 길게 처지게 하는 것도 ‘늘이다’이다.‘주렴을 늘이다.’
복실, 복슬, 북슬, 북실
애견 이름 짓기도 유행이 있다. 요즘은 알콩이.달콩이 등 재미나거나 개성 있는 이름을 선호하지만 예전엔 색깔이 누렇다고 누렁이, 반점이 있다고 점박이 등 생김새에 따라 대충 불렀다. 이런 작명법에 따라 삽사리 종류는 대부분 복실이로 통했다.
털이 많아 탐스러운 개를 흔히 "고놈 참 복실복실하네"라고 묘사하는 것을 본다. 그 영향으로 동요도 "우리 집 강아지는 복실강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모두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온몸이 복슬복슬한 털로 덮여 있는 삽살개는 잡귀와 액운을 쫓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벤지'는 떠돌이 복슬강아지가 자신을 돌봐 준 오누이가 악당에게 납치되자 목숨을 걸고 이들을 구하는 이야기다"와 같이 '복슬복슬(하다)' '복슬강아지'라고 써야 한다. 의미가 더욱 강조된 말인 '북슬북슬(하다)' '북슬강아지'도 '북실북실(하다)' '북실강아지'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혀의 앞쪽에서 발음되는 전설자음(ㅅ, ㅈ, ㅊ)엔 같은 자리의 전설모음 'ㅣ'가 오는 게 편하기 때문에 '스'를 '시'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시시(→부스스), 으시시(→으스스)처럼 표준말로 인정하지 않는 예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좋으네요, 좋네요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서 "나는 왠지 당신이 좋으네요" "나이에 비해 피부가 참 고우네요"라는 표현을 자주 본다. 그러나 이들 예문은 표준어법에 어긋난다. "나는 왠지 당신이 좋네요" "나이에 비해 피부가 참 곱네요"라고 써야 옳다. 우리말에는 '-네'라는 어미는 있지만 '-으네'라는 어미는 없다. 이 말이 잘못 쓰이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네요'가 어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네'는 "네가 할 차례네/ 나 지금 가네/ 그러다 병나겠네// 우리 아이 노래도 잘 부르네/ 집이 참 깨끗하네"처럼 단순한 서술의 뜻을 나타내거나, 감탄의 뜻을 드러내면서 지금 깨달은 일을 서술하는 데 쓰이는 종결어미다.
'-네' 뒤에 붙은 '요'는 약간은 생소하겠지만 조사다. '요'는 "이것은 말이요, 저것은 소요, 그것은 닭이다"에서처럼 어떤 사물이나 사실 따위를 열거할 때 쓰이는 연결어미로 잘못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서는 청자에게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조사다. "잠이 안 오는걸요/ 늑장 부리다가는 차 시간을 놓치게요// 마음은요 더없이 좋아요/ 어서요 읽어 보세요"처럼 쓰인다.
우리말에 '-네요'라는 어미는 없다. '-네'라는 어미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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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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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독이다 - 윤홍조
긴 세월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사랑을 했네 첫울음 영롱히 배꼽 떨어져 그대 손에 안기며 나는 비로소 간지럼을 타고 태산 같은 젖무덤 속에서 사랑을 배웠네 고사리 같은 손 단 풍잎 되고 그 손 다시 질경이 될 때까지 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사랑을 했네
울렁거리는 가슴 피빛 초경을 넘어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길목을 따라갔네 허둥거리는 발길 사랑이라 이름하며 수줍은 옷자락 발갛게 물들였네 희미한 불빛 어지러운 사랑의 혼몽의 길고 긴 밤을 걸었네
냉소의 한 마디는 기름을 주입하듯 광막한 대지에 불길 되어 타올랐네 언 가슴 철철 사랑이 넘치도록 황홀한 빛의 융단을 깔았네 부석거리는 옷자락 월광처럼 화사한 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사랑을 했네
식음을 전폐하며 가위에 눌리며 허기진 눈 속의 타오르는 불꽃처럼 달디단 사랑의 화인을 새겼네 늪 속을 빠져드는 불륜의 탕아처럼 끓어오르는 태양의 원심력처럼 나는 마침내 눈먼 소경이 되었네
버리고 또 버리고 세상 빛 무너져도 끊임없는 갈증에 목이 타 숨길 죄는 완벽한 맹독성의 유전자 DNA,
사랑은 독이었네 빛 부신 독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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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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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꽃 - 이준섭
얼마나 헤매었나 내 여린 가슴 속 누나
이 산 속 잎새 앉아 부신 햇살 다 모았구나
저 푸른 하늘 우러르며 흰구름과 속삭이누나.
신록 우거질수록 눈물 뚝뚝 듣누나
깊이 서려둔 순정 하나 외로움에 타오르나
열려진 새하얀 꿈나라 향그러워 어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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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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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한용운의 `님의 침묵'
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공고히하기 위한 각종 조처를 착착 밟아나갔다. 총독부에서 헌병 및 경찰로 이어지는 행정적·무력적 기반 마련, 항일의병전쟁에 대한 강력한 토벌작전, 신문지법과 출판법, 조선교육령 등의 법제적 장치를 통한 언론 및 교육의 통제,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식민지적 농업구조의 형성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안정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무단정치'(武斷政治)로 규정할 만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러나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일찍이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 등을 통해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검질긴 투쟁의 전통을 쌓아온 조선인들은 1919년 1월21일 급서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흥분하고, 그해 2월8일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고무받아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시위에 나선다. 3·1만세운동이다. 그 만세운동의 한가운데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
만해는 3·1운동의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거사 당일에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의 앞에 서서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도했다. 거사 직전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한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 대해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한 옥에 갇힌 민족대표들 사이에 자신들이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들 중 일부가 불안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분뇨통을 그들에게 던지며 나약함에 대해 일갈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만해는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지닌 독립투사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불교사상가요 한국 현대시의 한 흐름을 열어젖힌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다. 혁명가와 사상가와 문인이라는 세가지 성격을 한 몸 안에 아우른 그의 전인적인 풍모는 한국사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경우를 찾기 힘들 정도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한 저술과 월간 불교잡지 <불교>의 운영, 청년불교단체의 설립과 지도 등을 통해서 그는 불교의 혁신과 대중에의 파급을 꾀했으며 그 궁극적 도달점은 그 자신 `불교사회주의'라 이름한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 사이에 한층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역시 <님의 침묵>이라는 걸출한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서의 만해 한용운이다. 3·1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인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 딸린 오세암에서 탈고해 다음해 책으로 묶어낸 <님의 침묵>은 3·1운동의 정신과 힘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명시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표제시를 비롯해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님'이라는 절대의 존재를 향한 구애와 귀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환희라는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묶여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상태에서 떠나간 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애정을 토로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연애시의 구도를 취한 이 시집은 만해의 님이 그가 귀의한 불교적 진리일 수도, 그의 조국인 독립 조선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넓고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에 도리질을 한 지가, 칠석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라는 시 `칠석'의한 구절은, 그가 <님의 침묵>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점을 감안한다면, 만해의 님의 자리에 무엇보다도 먼저 조국을 놓아두어야 함을 알게 한다.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화자의 세계인식과 문학적 형상화를 가능케 하는 기본 전제로 기능한다. <님의 침묵>의 모든 시들은 이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이별은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과의 합일의 가능성이 완전히 깨어지고 마는 부정의 원천이 아니라 사랑의 강도를 확인하고 장래의 합일을 희구하게 만드는 긍정적·생산적인 이별이다.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구절은 이별과 만남, 눈물과 웃음, 죽음과 생성의 변증법적 순환을 요령있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님의 침묵')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한학을 수학한 만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존망을 염려하며 일단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17살 때인 1896년이었다. 백담사와 오세암 등지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시베리아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1904년 초 잠시 향리에 들렀다가 그해 말 완전히 출가하게 된다. 외아들 보국이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의 일이었다. 행동하는 학승으로 변모한 그는 경성에서 불교개혁과 조선독립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사이사이 그가 처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과 <님의 침묵> 등을 저술했다. 그러나 지금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그의 자취를 찾기는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머물던 백담사의 요사채는 `만해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흔한 편액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다만 그 곁에 세워진 시비 `나룻배와 행인'만이 한가닥 씁쓸한 위안을 던져줄 뿐이다. 백담사를 찾는 관광객들 역시 만해의 자취보다는 지난 89년 표변한 세상인심에 쫓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방의 위치에만 관심을 보인다. 만해와 전두환씨는 60여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같은 건물 같은 방에 머물렀었다.
백담사에서 6㎞ 남짓 떨어져 있는 오세암 역시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해 시절의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다 불타 없어져 버렸고, 원래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천진관음보전'의 옆 벽에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만해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따름이다. 오세암의 주승인 경원 스님은 “오세암 경내에 만해의 시비를 건립하고 그가 머물던 방을 다시 꾸미는 한편, 백담사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산길에 그의 법명이나 싯구를 딴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관련 학자 및 문인들과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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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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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평균치
위대한 역사가이며 수학자 헤로도투스는 평균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다. 그 당시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었으며, 헤로도투스는 그것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소풍을 갔다가 건너야 할 작은 강을 만나게 되었다. 아내는 아이들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헤로도투스가 말했다.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내가 강의 평균 깊이와 아이들의 평균키를 잴 테니.5분이면 충분하오>
그는 자를 꺼내어 아이들의 키를 재어 평균치를 낸 다음 강으로 달려가 몇 군데의 지점을 돌면서 강의 깊이의 평균치를 계산했다. 그런 다음 드는 아내에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아이들의 평균 키가 강의 평균 깊이보다 크니 익사할 염려는 전혀 없소. 얘들아, 어서 강을 건너자!>
그러나 강의 어떤 지점은 얕은 반면에 어떤 지점은 매우 깊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키가 컸지만 어떤 아이는 작았다. 평균치라는 것은 실제 상황에선 맞지 않는 법이다. 오직 수학적인 계산에서만 알맞은 것이다. 헤로도투스의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되어 그녀 자신은 강을 건너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갑자기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앞서서 강을 건너고 있는 헤로도투스를 소리쳐 불렀다.
<저걸 좀 봐요! 애초부터 걱정이 되더니, 역시 당신의 수학이라는 건 믿을 게 못되요!>
그러나 놀랍게도 헤로도투스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에게로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야만 했다. 헤로도투스는 자신이 계산을 했던 모래밭으로 달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검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계산은 틀린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여, 존재계는 그대의 계산을 따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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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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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기묘한 인생 강요당하는 유명인
때때로 바의 스탠드 같은 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면 옆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 하는 얘기를 듣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런 얘기를 안 듣는 척하면서 듣는 것도 퍽 재미있다. 소문의 대상은 내가 아는 유명인인 경우도 있고, 상사나 동료, 친구인 경우도 있는데 두 경우 다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가장 재미없는 것은 누군가를 칭찬하는 얘기로, "저기, 아무개 말야, 그 사람 참 대단해. 재능이 있어"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쪽도 따분해져서 '빨리 험담이나 하지' 하고 바라게 된다. "그 자식 바보라니까, 진짜 멍청하다구. 완전히 구제 불능이야" 하고 나오게 되면, 어차피 남의 일이니까 이쪽은 유쾌하기 짝이 없다. 몇 년 전에, 요코하마에 있는 '스톡'이란 재즈 클럽의 스탠드에서 한잔 마시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은 샐러리맨은 듯한 젊은 두 사내가 줄곧 신교지 기미에(역주:여배우) 얘기를 하길래, 또 여느 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니, 느닷없이 "저기 말야,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 있잖아? 그 사람 말야" 하는 얘기로 바뀌어 그 다음은 듣지도 않고 허둥지둥 나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신교지 기미에 얘기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내 얘기로 옮겨 갈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그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그러면, 신교지 기미에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다른 것에 대해 얘기해 보세", "뭐가 좋을까?", "소설 얘기나 하지", "젊은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뭐 읽은 거 있나?", "그러고 보니까"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나도 일단 경계 태세를 취할 수 있어 괜찮지만, 목구멍 밑에서 바로 위가 시작되는 식으로 화제를 바꾸니, 그만 온더록 잔 가장자리에다 코를 부딪히는 일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아주 드물긴 하지만 안면이 없는 사람이 말을 걸어 오기도 한다. 나는 텔레비전에 출연을 하지 않으니 극히 드문 정도에 그치지만, 늘상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참 고역일 것이다. 잡지에 사진 정도가 실리는 거라면 실물을 만나도 의외로 알아보지 못하지만, 텔레비전이라는 것은 무척 생생하게 비추기 때문에 힘들 것 같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절대 텔레비전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가끔 텔레비전 출연 의뢰가 들어오지만, "인형 옷을 입고 출연해도 괜찮으시다면 나가겠습니다"라고 농담을 하면, "그래도 좋으니까 나와 주세요"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하기야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나와 친분이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도 한번 텔레비전에 나갔다가 그 뒤로 여러모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튿날 쉴새없이 전화가 걸려 오고,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서 "텔레비전에 나오셨지요" 하는 인사치레를 들었다고 한다. 텔레비전이라는 건 굉장히 무섭다. 뭐니뭐니 해도 문예지가 제일이다. 문예지에 소설을 쓴다고 해서 전화가 걸려 오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한번은 진구 구장 외야석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며 야쿠르트 대 주니치 전을 보고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무라카미 씨, 사인 좀 해주세요" 했다. 나는 진구 구장 외야 우익석에 오는 여자에게는 대체로 호감을 품고 있으므로 "좋아요" 하자, 그 여자는 "저기, 힘내라 야쿠르트 스왈로즈라고 써주시겠어요?"라고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을 비교적 좋아한다. 소부센 전철 안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을 걸어 온 적도 딱 한 번 있다. 그럴 때는 나는 그저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타입이라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대단히 미안할 따름이다. 게다가 전철 안에서 말을 걸어 오면 주위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보므로 무지하게 부끄럽다. 야쿠르트 대 주니치 전 때처럼 텅텅 비어 있으면 나도 마음이 편하겠지만.
아카사카에 있는 베르비라는 패션 빌딩의 대기실 의자에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을 때에(아내의 쇼핑 시간이 너무나 길어져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 온 적도 있다. 이때는 젊은 남자로, "무라카미 씨,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십시오"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프로 야구 뉴스>의 인터뷰 같다. 내친김에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롯폰기에서 젊은 커플이 말을 걸오 온 적도 있다. 오차노미즈의 메이지 대학 앞과 신주쿠에 있는 이세탄 백화점 2층, 후지사와의 세이부 백화점과 오타루의 길모퉁이에서도 한 번씩. 오타루에서 만난 사람의 말에 따르면, 홋카이도에서는 내 책이 비교적 많이 읽히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타루 역 앞의 상점가에서 나 같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정말 감탄하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해서 하나 둘 꼽아 보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6년 동안 거리에서 안면 없는 사람들이 말을 걸오 온 것은 전부 여덟 번이다. 대개 1년에 한 번 남짓한 비율인데, 이 '말을 걸어 온 빈도'가 나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수치인지 적은 수치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옛날에 모 가수가 살고 있는 맨션 옆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차에서 현관까지의 10여 미터 거리를 전력 질주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필시 팬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심야 한 시가 지난 주위에 사람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을 때조차도 그렇게 하는 거였다. 유명인이란 상당히 기묘한 인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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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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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8장
용
3. 호국과 호법의 용
우리나라에서 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용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은 장엄하고 신비로운 능력으로 인해 제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용-임금-하늘의 관계로 맺어져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수호하는 호국신, 호국룡의 자연스러운 탄생을 낳게 되었다. 임금은 하늘에 계시는 천제의 후손으로 받들어졌으므로, 이 천제와 임금의 밀접한 관련을 생각할 때 하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용의 존재가 호국의 상징성을 확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한 개인의 일에서부터 국가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보는 인간의 한계능력 속에서, 하늘과 인간세계를 왕래하며 무궁무진한 조화능력을 갖춘 ‘용’의 존재는 나라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상정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우리나라의 건국시조는 용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이 된 알영은 계룡의 왼쪽 갈비뼈에서 탄생되었다고 하고 혹은 용이 나타나 죽자 그 배를 갈라 얻은 동녀라고도 하였다. 또한 신라 탈해왕은 동해변에 떠내려온 큰 궤짝 속에서 칠보, 노비와 함께 발견되었다는데, 7일만에 일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나왔으나 나만이 알에서 태어났으므로 불길하다고 하여 궤짝에 넣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고려의 시조 왕건의 할머니도 용녀로서, 태조가 된 왕건이 그의 선조를 용궁에 결부시키고 그 용의 혈통을 합리화하기 위해 용비늘 하나를 조작하여 왕통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도 용을 매체로 천제와의 관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용의 능력과 신성성으로 인하여 국가와 왕권을 수호한다는 믿음과 상징성에서, 호국사상에 따라 호국용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통일신라를 전후하여 신라에 불교가 융성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불교는 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유사」 등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라의 용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사를 돕는 호법의 용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국정토를 이상으로 한 신라는 불교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호법룡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 호국의 용으로 발전시켜, 불법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나타냈다. 즉 불교를 통해 순화된 용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이상적인 경지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처럼 신라에서 융성한 불교사상은 숭불호국의 용신사상을 낳게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다. 따라서 앞으로 살펴볼 호국과 호법의 용은 신라시대가 그 중심이 될 것이며, 호국과 호법이 함께 어우러진 신라의 독특한 용신사상이 주가 될 것이다. 불교와 용의 관련은 고대 인도의 사신숭배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에는 원래 독사의 위험이 많아 일찍부터 뱀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 용의 모습에 인도 뱀을 신격화한 용의 관념이 혼합되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단순한 초능력적 존재나 악신이었던 용의 존재가 부처님의 설법 속에서 마침내 불교의 호교자로 그 위치를 굳히게 된다. 이에 따라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하나로 수용되었으며, 용은 불법을 옹호하고 선신으로 존경받는 팔대용왕으로 분류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때로 세간을 파괴하고 해를 주는 악신으로도 등장하여, 전체적으로 인간세계에 커다란 교훈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특히 신라시대의 호국과 호법의 용을 살펴보기 전에,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의 성격 및 역할 등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용의 모습이다. 불교경전을 보면 많은 용왕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불본행집경」등에 의하면, 석존의 성불한 뒤에 가장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삼귀 오계를 받고 세간에서 최초의 우바새가 된 것이 용왕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라발 용왕과 상거 용왕은 석가불의 출세를 기다리다가 녹야원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삼귀 오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부처님의 설법시에 용왕들이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와서 법문을 듣는다는 내용도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으며, 「인연승호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대해 용왕이 사람으로 변하여 부처님이 머무는 기원정사로 찾아가 비구니가 되어 수도생활을 하였다는 내용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인간세상에 정법을 펼쳐서 이로움을 베푸는 용의 모습이다.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용에는 정법대로 행하는 선룡과 법대로 행하지 않는 악룡이 있다. 이들 용은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선룡과 악룡으로 태어나는데 선룡, 즉 법행룡을 때를 맞추어 비를 내리고 세간의 오곡을 성숙시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불법승 삼보를 깊이 믿어 수순법행으로 불사리를 수호한다. 이에 비해 악룡은 열사의 비를 내려 세상을 태우고 두꺼비를 삼키고 사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바람을 들이마셔 뭇 생명이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악룡의 등장이 단순한 선과 악의 대치로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세상의 비리나 악행을 바로잡고자 한 인과응보의 교훈으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상사람들이 법행에 순응하는가 역행하는가에 따라서 선룡과 악룡이 각각 그 세력을 증대하게 된다. 세간의 사람들이 법에 순응하여 부모를 효도로 공양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양하며 정법을 수행하면 곧 법행룡인 선룡이 세력을 떨치게 되고, 반대로 중생이 법을 어기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사문과 바라밀을 불경하면 곧 악룡이 그 세력을 떨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경전을 봉안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용왕이 바닷 속의 용궁에 경전을 안치 봉장하고 있는 내용이 여러 경전에 전하며, 따라서 경전을 용장이라고도 한다. 「용수보살전」에 따르면,「화엄경」은 오랫동안 용궁에 감추어졌던 경이라 하며, 유명한 화엄사상의 대가 용수는 대룡보상에 의해 용궁으로 인도되고, 칠보로 장엄한 보장안의 경전들을 얻어 그것을 세상에 유포시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용왕은 대승경전의 수호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이 외에도 부처님 탄생시에 ‘난다’와 ‘우파난다’라는 용왕이 한 줄기는 따뜻하고 한 줄기는 시원한 청정수를 토하여 탄생불의 몸을 씻어 주었으나, 부처님이 나무 밑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이레 동안이나 큰 비가 계속되자 용왕이 나와 부처님 주위를 일곱 번 돌고 일곱 개의 머리로써 위를 덮어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는 등 부처님의 주위에서 부처님을 보호하고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의 용의, 불법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법을 수호하고 세간중생의 이익을 증대시키며 경전을 봉안 수호하고 부처님을 보호하는 등,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어떠한 불교국보다도 우리나라에는 용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불교설화를 기록한 각종 문헌에는 용이 불법을 수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초월자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사찰의 법당이나 탑 등에 무수히 장식된 용도 모두 호법신으로서의 역할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이러한 호법룡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용이 호법신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은 진흥왕 이후 신라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특히 사찰의 창건연기에서 호법룡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4년(553년) 2월에 궁전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땅에 황룡이 나타났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궁전을 불사로 고쳐 짓게 되었는데, 이 절이 바로 황룡사이다. 이 때의 황룡이 바로 호법룡이라는 사실은 이후 자장 법사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즉 636년(선덕여왕 5년) 당나라로 떠난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불사리를 얻은 후 중국 태화지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홀연히 용왕이 나타나 황룡사를 지키고 있음을 밝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항복을 받고 태평국가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자장은 귀국 후 호법룡이 지키고 있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호법신의 보호를 받아 창건된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은, 당시 불안한 대외관계 속에서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신념을 심어 주었다. 황룡사는 그 건립기간이나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신앙면에서도 당대는 물론 신라 일대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찰이었다. 이러한 황룡사를 세울 때 나타났던 황룡이 바로 호법룡으로서, 최초로 등장하는 호법호국의 용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은 주위 모든 나라가 신라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져 영원한 불국토를 이룩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기원하는 통일탑,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자장은 문수사리의 부촉을 받고 영축산 통도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신지에는 아홉 마리의 독룡이 살고 있었다. 자장은 이 악룡들을 위해 설법하고 수계하여 그들의 나쁜 마음을 조복시켰는데, 9룡 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으로 가고 오직 한 마리가 남아 그 절을 호지할 서원을 세우므로 작은 못을 만들어 그 용을 머물게 하였다. 이는 설법을 통해 용의 나쁜 마음을 항복받고 호법룡으로 그 역할을 바뀌게 하는 개과천선의 의미를 짙게 풍기고 있다.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사찰창건에는 이러한 유형의 설화가 많이 전해지게 되었다. 즉 악룡이 살고 있는 명당을 찾은 고승이 설법을 통하여 용을 감화시킨 뒤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그 용은 사찰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그를 사모하는 여인 선묘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의상의 인격과 도심에 감복되어 세세생생 의상이 불도를 성취할 때까지 학업에 필요한 물자를 대겠다는 대원을 세웠다. 그 뒤 의상이 선묘를 만나지 못한 채 귀국의 뱃길에 오르게 되자, 뒤늦게 선창가로 뛰어나간 선묘는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서원하였다. “원컨대 이 몸이 대룡으로 되어서 저 배를 무사히 갈 수 있게 하고 스님의 홍법을 도우리라.” 선묘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의 뱃길을 편안하게 인도하였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을 도우며 호법룡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의상이 부적사를 창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의상은 당시 도적의 무리가 들끓던 태백산에 화엄의 중심사찰을 만들려 하였으나 도적들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호법룡이 된 선묘가 스스로 부석이 되어, 공중에 뜬 큰 바위로 도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사찰을 창건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찰명을 ‘부석사’라 하였으며, 지금도 부석사에서는 석룡의 모습으로 사찰을 수호하고 있는 선묘호법룡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호법룡사상은 자장과 의상에 의해 널리 제창되어, 불국정토를 이상향으로 한 신라인들에게 더욱 깊은 불심과 통일에 대한 신념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항상 왜구를 염려하여 사후에는 용으로 화하여 왜침을 막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해를 다비하여 그 유골을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에 수장하였다. 현재 경주 동쪽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그 곳이다. 그 뒤 과연 문무왕은 용이 되어 나타났으며 이듬해(682년)에 신문왕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기슭에 감은사를 세우고 금당 섬돌 아래에다 동해 쪽으로 구멍을 뚫어 용으로 화현한 대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해 5월 초하루,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솟아났는데, 그 산 위에는 낮에는 둘로 되었다가 밤이면 하나로 되는 대나무가 나 있었다.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니 한 용이 나타나 “이 대나무를 피리로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문무왕께서 대룡이 되시고 김유신이 천신이 되어 이들 2성이 마음을 모아 호국의 큰 보물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맑아져서 국태민안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워 평온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이처럼 문무왕이 보여준 호국정신,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대원을 이룩한 호국사상은, 문무왕에 대한 흠모와 함께 이후 역대왕에게 동해호국룡 신앙으로 계승되었다. 효성왕과 선덕왕도 그 유명에 따라 동해에 유골이 수장되었으며, 혜공왕과 경문왕은 감은사로 행행하여 멀리 바다를 망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성왕 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원성왕 11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머물다 간 일이 있는데, 그 다음날 두 여인이 내정에 나타나 왕께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해룡과 천지룡의 처이온데, 당나라 사신이 데리고 온 하서국인 두 사람이 저희들 두 부룡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용을 주술로써 작은 고기로 만들어 통 안에 넣어갔습니다. 저하께서는 호국룡인 저희 남편들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사신이 뒤를 쫓아 그들을 만난 뒤 하서인에게 “너희들이 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가지고 가느냐?”하고 호통을 쳐서 고기를 돌려받아 모두 제 자리에 넣어주니 다시 용으로 화현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수십 가지의 용과 관련된 불교설화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 여러 문헌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설화는 단순한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상과 정신적인 내면세계가 깊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호법호국의 용은, 통일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불교와 국운의 성쇠에 ㄸ라 그 양상과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즉 진흥왕 때의 황룡은 황룡사 창건의 동기를 제공하였을 뿐 별다른 특색이 없었음에 반하여, 선덕왕 때 자장에 의하여 인식된 용은 호법룡으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호법룡이 지키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서 삼국을 통일하고 왜적의 침해를 막도록 하였으니, 호법룡에서 한걸은 더 나아간 호국룡으로서의 매우 적극적인 사상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따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해룡이 용궁에 비장된 「금강삼매경」의 산경을 신라에 주어 대안대사로 하여금 순서를 맞추게 하고 원효대사로 하여금 소를 지어 강설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때의 용신은 신라의 불교와 국가를 수호하는 용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적극적인 홍법활동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동해룡, 그의 불사를 도운 선묘룡에게서도 적극적인 활동성을 볼 수 있으며 문무왕의 대원으로 화현한 동해호국룡, 명랑을 용국으로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황금을 시주한 서해룡 등은 모두 활기찬 호법과 호국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성왕 때의 세 호국룡은 한낱 외국인의 주술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잡혀가는 허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진성왕때의 거타지 이야기에 나오는 서해룡은 사미로 변한 여우의 주술에 맥을 못추는 비참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고 보양을 따라왔던 용자 이목도 주벌을 피하여 법사의 의자 밑에 숨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가 크게 흥하고 국운이 창성하였던 진흥왕 이후로부터 통일을 완성한 경덕왕대에 이르기까지는 한결같이 활기차고 적극적이던 호법호국룡이, 불교가 침체되고 국정이 혼란해지기 시작한 원성왕 때부터는 무력하고 허약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정신력과 국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신라인들은 불국정토의 이상 아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오면서 독특한 호법호국룡 사상을 이룩하였다. 숭불호국의 용들이 동해와 서해에서 그리고 사찰과 연못 등에서 신통한 능력과 위엄으로 신라의 불법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켰다는 점에서 신라의 불교 국가적 위치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용들은 불법을 숭상하는 국토가 아니면 머물지도 않을 것이며 불법이 없는 세간에는 출현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있어서의 호법호국룡은 숭불호국의 신라 불교정신이 낳은 필연적인 소산이며 불국정토의 가장 믿음직한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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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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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영토를 버린 대왕 - 양왕
대왕 단보*가 빈에 살 때 적인이 침입하였다. 가죽과 비단을 보내 섬겨도 받지 않았고, 개와 말을 보내 섬겨도 받지 않았으며, 구슬과 옥을 보내 섬겨도 받지 않았다. 적인이 요구하는 것은 토지였다. 대왕 단보가 말했다.
"남의 형과 함께 살면서 그 아우를 죽이고, 남의 아비와 함께 살면서 그 아들을 죽이는 짓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모두 힘껏 살아라. 내 신하가 되는 것과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또 나는 '기르는 데 쓰는 것*으로 기르는 것을 해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는 채찍을 짚고 떠나갔다. 백성이 서로 이어서 쫓아가 드디어 기산 밑에 나라를 이루었다. 대왕 단보는 생명을 귀하게 여겼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비록 부귀를 누려도 그를 위해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비록 빈천해도 그 때문에 몸을 괴롭히지 않는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높은 벼슬과 높은 지위에 있게 되면 모두 잃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이를 보고 가볍게 그 몸을 망친다. 어째 잘못 된 것이 아니겠는가!
* 단보 : 주문왕의 조부. 고공단보라고도 한다. * 기르는 데 쓰는 것 : 원문은 소용양으로서, 즉 토지와 재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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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단보가 빈이란 땅에 머물러 살 때, 인접해 있는 적이란 이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단보는 털가죽과 비단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으나 적은 듣지 않았다. 대왕은 다시 개와 말 등 가축을 보냈으나 마찬가지였고, 귀한 보물들을 보내도 역시 응하려 하지 않았다. 적의 야심은 영토에 있었던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게 된 대왕은 신하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싸움터로 끌어냄으로써 사람들이 육친을 잃고 슬퍼하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다. 그대들은 모든 것을 견디고 이 땅에 머물러 살아라. 그대들로서는 내 신하가 되나 오랑캐의 신하가 되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나는 '땅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이나 그런 땅을 위해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에 따르려 한다."
말을 마친 대왕은 채찍을 짚고 표연히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러나 그의 덕을 사모하는 백성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대왕의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대왕이 새로 자리 잡은 기산 기슭에 새로운 나라가 생겨났다. 대왕 단보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은 비록 부와 귀를 누리는 지위에 있더라도 향락을 위해 몸을 해치는 일이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 놓여 있어도 이익이나 욕심으로 인해 육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여 명예와 이익을 위해 가볍게 몸을 망치는 일이 수없이 많다. 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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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파괴
유리는 고체가 아니다. 유리는 고체가 아니라 액체이다. 즉 유리는 고체가 갖고 있는 어떤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외에도 유리는 고체와 같이 어떤 명확한 형태를 가진 결정체도 아닐 뿐더러, 융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a black eye
'a black eye'는 독일어로 파란 눈을 의미한다. 그러나 프랑스어로는'찔린 눈'으로 해석된다.
검정색과 흰색
검정 물감 몇 방울만 떨어뜨려도, 흰색 물감은 더욱 하얗게 변한다. 따라서 흰색 물감이 가득 든 양동이에 네다섯 방울의 검정 물감을 떨어뜨리면, 이때 검정 물감은 마치 표백제처럼 흰색 물감을 더욱 하얗게 변하게 한다.
물 속에서는 타지만 등유 속에서는 타지 않는 금속
금속인 나트륨은 물 속에서는 발화된다. 그러나 등유 속에서는 타지 않고 그대로 원형을 유지한다. 이때, 나트륨이 물 속에서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탈 때 배출되는 수소가스로 인해 나트륨 수산화물이 형성된다.
동풍이 서풍보다 무겁다
시속 80km로 불어오는 서풍의 공기가 동일한 속력과 공기의 함량을 가진 동풍의 공기보다 가볍다고 한다. 그래서 무거운 동풍이 언제나 서풍보다 낮게 부는 것이다. 이런 무게의 차이는 중력의 변이를 일으키는 지구의 자전 현상, 즉 지축을 중심으로 지구가 하루 동안 돌 때 생기는 원심력 때문이라고 한다.
문맹 작가들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알려져 있는 호머와 소크라테스는 사실 글을 쓸 줄 모르는 문맹인들이었다. 전적으로 그들의 기억력에 의존하여 구술했다고 한다.
수도관
보통 가정집 내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관 중에 온수 파이프는 냉수 파이프보다 빨리 얼어붙는다.
사자의 심장
이 세상의 용맹스러운 동물들 중에서 사자는 가장 작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전제 군주들 중에서 가장 겁이 많다고 알려진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큰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검은색의 비
1849년 5월 14일, 검은 색깔의 비가 64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에 내렸다. 1880년 6월 14일, 러시아에서는 빨간색, 흰색, 그리고 파란색의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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