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90가지 - 자크린느 클랭 옮긴이 : 최복현
2. 자유롭게 존재하는 기술 (2/3)
국경없는 관계
우정은 사랑의 감정에서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게 합니다. 즉 나이 차이, 상냥스럽게 생기지 않은 외모, 또는 병약함 같은 장애들을 말입니다. 또 사회환경, 가문, 종교, 정당, 국적등을 고려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영화속의 E.T에 대해 다정하고 따뜻한 우정을 느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이하게 생긴 생물체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정은 모든 벽과 경계를 무너뜨리며, 구멍난 곳을 메우며,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에도 싹틀수 있습니다. 1937년이라고 날짜가 적힌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그 위대한 환상]만큼 우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국경'과 '적'이라는 개념을 의식하는 프랑스 공무원과 독일 장교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이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이면서도 상호간의 존중과 지적인 공유를 할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를 만든 장 르누아르 감독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일인 칼 코치와의 우정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그의 독일인 친구는 그 영화에서 독일에 관한 부분을 확실하게 수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적대 관계인 두 진영에서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맺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적인 관계에서 싹튼 우정이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평화주의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제도도 같은 인간 존재들간의 평등을 제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원래 귀족적인 우정은 민주적입니다. 반대로 두 존재간의 우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수상하고 몰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우정은 타인과의 구별을 분명하게 합니다. 반면에 사랑의 관계는 동의를 얻게 되거나 항복을 받게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나는 아주 중요한 방식에 관해 이야기 할수 있어요. 그들이 나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해도, 나는 그것 때문에 화를 내지는 않아요. 정말로 친구들을 신뢰하고 있거든요. 또 내가 실수할 수도 있는 일이고요. 우정에는 판단도 선입관도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관대하다거나 의견 충돌이 전혀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요"라고 두 아이의 아버지인 로랑은 말합니다. 우정은 세대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노화에 대한 가장 확실한 치료약으로 여결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내 프랑스 문학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들을 친구로 삼고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물론 더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내가 딸일수도 있지요. 우정의 관계에서는 나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몇 년간 나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잔느와 펜팔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잔느는 내 저서 중 한권을 좋아했는데, 우리는 정신적으로 오가는 어떤 일치감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녀의 글은 너무도 젊고 쾌활해서, 나는 그녀를 내 또래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그녀의 오두막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녀가 나에게 자기 집의 사진을 보내왔거든요. 그때 한 편지에서, 그녀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곧 80세가 될거라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역의 플랫폼에서 나는 그녀를 쉽게 알아보았지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 키 작은 두 노인보다 더 개방적이고 발랄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원망하는 일이 없었고, 현 세계의 인간에게 열정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또자신들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호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나를 위해 그들이 절대적으로 조부모의 역할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친구였으니까요. 그들의 삶의 경험은 나보다 훨씬 길지만, 아주 솔직하게 자신들과 타인들의 경험을 공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보통의 우리조부모들은 어떤가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자신들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만 나눕니다. 또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일과 가족관계, 재산 문제 등에 관심이 많지요.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조부모로소만 존재할 뿐입니다. 가족 관계는 가끔 세대간의 단절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세대간의 연속성을 보장해 줍니다. 동등성의 공유는 친구 사이에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지나가는 시간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해가 지나면 솔직하게 두 사람중 누가 그 관계를 시작했고, 누가 그 관계의 첫발을 내디뎠는지를 생각할 수없습니다.
만일 사랑을 이루려는 욕망이 죽음과 맞바꿈할 만큼 강렬하다면, 우정은 불가사의한 그 욕망을 분리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르노는 수년 전에 그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일은 아직도 그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르노는 그때 30세의 나이였고, 독신이었으며, 친구도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느 가족 관계와는 달리 아주 나이 많은 여인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어느날 병이 들었고, 꽤 심해져서 양로원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르노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그녀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그녀는 아주 기뻐했지요. 병세도 호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르노는 며칠 후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휴가를 떠났지요.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표도 주소도 없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늘게 떨리는 글씨로 쓴 간단한 내용의 편지였지요. 그가 병원에 방문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 이야기를 되풀이한 그녀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아르노는 부모들로부터 그녀가 방금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편지가 우표도 주소도 없이 그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거룩한 사랑과도 같은 우정은, 이처럼 이성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울타리를 뛰어넘게 합니다.
피그말리온의 아름다운 여인
사랑과 관련된 모습들은 어떤 것인가를 대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유혹, 권력, 독점, 질투 등을 얘기합니다. 여러 나라의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있는 에스텔을 이렇게 요약하더군요. "유혹하는 감정과 유혹받은 감정, 상대와 어울린다는 감정과 상대에 속한다는 감정, 소유욕과 독점욕.... 이것은 사랑의 문제에서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우정은 유혹하는 감정과 소유욕 등의 요소가 없어요. 우정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유롭게, 너그러우면서도 고통 없이 표현되지요. 사랑의 감정이 열정이라면 우정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괴할 수도 있어요." 우정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주체가 되기도 하지요. 사랑의 열정은 서사시와도 같습니다. 그 열정은 믿어지지 않는 것, 경이로운 것, 사실을 확장시킨 아름다움에 관해서 서사시를 쓰게 하지요. 이러한 서사시의 두 주인공은 자신들과 함께 지구가 태어났으며, 자신들이 없다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도 있을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열정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그들이 없다면, 그들 이후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우상숭배와도 같지만, 우정은 명철함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전율, 두려움, 공포를 동반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신뢰, 평온과 함께 찾아옵니다.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라는 개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를 돕고 후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는 잘못된 길에서 상대를 구원해낼 수도 있지요. 여기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인은 어떤 도움도 줄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상대를 아름답게 미화하기 때문에 많은 매력과 장점으로 상대를 장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미화시키는 감정은 가슴속에 일종의 환희를 품게 해줍니다. 이러한 환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사랑의 대상인 단 한 사람뿐이지요. 그리고 환희의 그 대가를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일이어서, 그러한 순간에 머물러 있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화된 그 대상에 대한 질투로 빨리 그를 차지하고 싶어지며, 그를 가두어 놓고 혼자 즐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은 자세히 보면 자기 도취적인 면이 강합니다. 우정은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깁니다. 질투나 배척이라는게 없지요. 그래서 상대와 기쁨을 공유하게 해줍니다. 물론 우정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도 말입니다. 솔랑주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우정은 나는 상호간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을 나타낼 수 있게 해주는 객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이야기에서 나는 자유의 상실, 즉 내가 지니고 있는 애정에 비례하는 만큼의 상실이 두렵다."
사랑의 열정은 왜 이토록 두려운 걸까요? 그런데도 남성과 여성들은 왜 머리를 숙이고 왜 열정에 깊이 빠지려 하는 걸까요? 사랑의 열정은 그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게다가 열정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보려고 하니까요. 우정의 세계에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왕과 그가 사랑한 여인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그말리온이 상아로 조각된 여인상을 사랑하여 그와 똑같은 여인을 자신에게 달라고 빌자, 조각된 여인이 살아 있는 여인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 처럼 말입니다. 우정의 세계에선 오로지 자유를 향한 줄다리기가 있을 뿐입니다.
사랑의 열정과 그 환상
모리스는 자연과학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많은 독서와 성찰을 했습니다. 지금 노인이 된 그는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한 채 은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의 미화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상대방에게서 발견할수 없는 완성미를 계속 추구하므로 애초의 환상이 점차 흐려지게 되며, 결국은 그것이 훼손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우정으로 변하기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더욱더 증오와 무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는 자연스럽지 않게 시작되지만, 상대적으로 빨리 진해됩니다. 반면에 우정은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할 뿐이니까요. 그러면서도 다양한 감정에서 일어나는 특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게 됩니다. 그 다양한 검정이란 감탄, 연민, 보호의 욕구 등이지요...사랑은 에로틱한 감성과 심리적인 감성이 결합되어 유례없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불명예와 거짓말, 무기력과 배신이 내 사랑을 종종 더렵혔노라고 나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열정에 싸여 우리는 불가능한 것, 비현실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정에서는 진실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광기에서부터 지혜까지의 거리라고나 할까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열광적이고 자극적인 어떠한 사실도 없지만 종속적인 속박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생겨나고 그것이 우리를 권태롭게 할 때, 거기에 우정이 머물게 됩니다. 낭만적인 사랑에서 우리는 흔히 상대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곧 상대가 되거나, 상대를 흡수하고 싶어집니다. 그와 함께 융화되어 하나로 합쳐지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우정에선 상대와 나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견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종교를 바꾸고, 의복이나 기타 취향을 상대에게 맞추려 합니다. 정치적 견해도 상대를 따라가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려는 이유로 자신의 고유한 것들을 바꾸고, 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는 구실로 기본적인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고 굴복해 버립니다.
이처럼 환상은 많은 것을 파괴시킵니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상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그를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관계는 재빨리지배와 의존의 관계로 전환됩니다. 지배하는 입장에선 어느 순간에 이르면 상대를 교체하고 싶어지고, 의존하려는 입장에선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 합니다. 우정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일뿐입니다.
"나는 사랑의 감정보다 더 안정된, 더 확고한 우정을 알고 있어요. 우정은 사랑에서처럼 소유하려고 애쓰지 않지요. 그러면서 상호간에 확립되는 일종의 신뢰가 있어요. 친구간에는 뭔가 숨긴 채 진행되는 사랑의 관계에서보다 더 깊은 대화와 신뢰감을 나눌수 있거든요. 연인과 함께 있을 때보다는 친구와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자신을 드러내게 되지요.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친구가 더 나를 전진하도록 돕거든요"라고 32세의 독신남 베아트리스는 말합니다. 신뢰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록 내버려둡니다. 또 부부관계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존재하게끔 해줍니다. 신뢰는 상대를 믿으면서 서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를 돕지 않고 위로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과의 감상적인 관계를 나누는 많은 여성들이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 다른 여성 또는 남자 친구들로부터 정성과 애정으로 도움을 받고 보살핌을 받지만, 애인으로부터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애인은 돕거나 위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슬픔, 아픔, 추함, 병약함 등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정확히 말해 그 순간에는 애인이 거기에 없다고 말해야겠지요.
나는 2년동안 한 남성과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했던 40세 가량의 한 여성을 생각해 봅니다. 그녀의 상대 남성은 아주 자주적인 삶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멀어져서 결국은 결혼하기를 거부했다는군요. 얼마 후 그들은 헤어졌고, 그 남자는 큰 사고를 당해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에게 닥쳐온 불행이 당연한 형벌처럼 보여서 그러한 운명의 장난이 기뻤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불행을 오히려 즐겼으므로, 그가 있는 병원을 알면서도 방문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식자 그것은 증오, 무관심, 또는 후회로 남게 되었지요. 여기에 동정이 신뢰, 사랑이 있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