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82. 5천만 명이 희생된 최대의 비극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3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8년 국가총동원법 공포, 전시통제체제 시행 / 1939년 강제징용 / 1940년 창씨개명 강요, 중국 중경에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폴란드의 단치히 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순양함이 별안간 항구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군 정예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장갑사단, 기계화부대, 공격용 전차를 앞세운 53개 사단과 고성능 폭격기를 동원하여 독일군은 삽시간에 폴란드를 제압했다. 그러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21년 만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폴란드 침공 7개월 뒤인 1940년 4월, 독일군은 이번에는 북쪽으로 화살을 돌려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다. 그러더니 5월에는 돌연 서부로 진출, 네덜란드를 5일만에, 벨기에를 2주일 만에 항복시켰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 선을 돌파,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측에 가담했다. 14일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독일은 페탱을 내세워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대해 드골을 중심으로한 저항세력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항전결의를 표명했다.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를 2주 만에 정복하고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 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소련으로 진격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남방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전쟁으로 화했다. 지구상에 전화와 포염이 일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군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4월 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월 1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전날 자결하였고 독일은 5월 7일 항복,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여 만주로 진격하자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병력 1억 1천만, 인류의 5분의 4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총 5천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3배에달하는 숫자였다.
그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유태인 학살,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간 20만에 달하는 조선여성들, 그리고 가공할 신무기 원자폭탄 등...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린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83. '엄마 따라 갈 거야' -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194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3년 학병제 실시 /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 공포, 20여만 명이 정신대로 끌려감 / 1945년 8, 15해방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일본 히로시마의 하늘에 은빛 B29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8시 15분, 9천 6백미터 상공에서 비행기는 지름 71센치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약 4톤의 원자폭탄을 떨구었다. 50초 후 섬광이 번득이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히로시마의 60%가 파괴되고,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즉사했다. 34만 가량의 히로시마 인구 중 7만 8천 명이 죽고, 부상자와 행방불명이 5만 1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후 5년 동안 24만 명이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인순간에 엄청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 희생자 가운데는 한국인도 수만 명 포함되었다. 이들은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가난에 못 이겨 살 길을 찾아 일본에 건너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원폭 피해자라는 꼬리표였다. 그후 4만 3천 명이 후유증으로 앓다가 사망하고 현재 2만 명 정도가 살아 있다. 어둠의 그림자는 2세, 3세에까지 전해졌다. 원폭병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말과 달리 피폭 2세들은 기형적인 외모로 태어나거나 정상이더라도 갖가지 선천성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더욱이 이들은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이들 한국인 피폭자들과 그 2세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시대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삶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는지. 그 한 예를 보기로 하자.
이름:이정자 일본:이름:구니모토 사다코 당시 나이:15세 주소:히로시마 시 후쿠지마 마치 673 학교:후쿠지마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덴마치 국민학교로 옮겨 졸업. 천만 여자고등학교 2학년 중퇴 가족:앵친과 5남매. 그 중 장녀. 피폭지:집 앞 들판에서 맞은편에 있는 양피주머니 공장 여공들과 어울려 양털을 늘어놓다가 등에 불길을 느끼고 마차 밑으로 기어듦. 피폭상태:등 전체 화상. 1주일 후 뒷머리에 풍선처럼 커다란 혹이 부풀어 절개수술을 받았는데 한 동이에 가까운 피고름이 쏟아진 후 계속 부풀어 2, 3회 더 수술을 받았음. 까까중머리로 그해 10월 귀국. 피폭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섯째 동생 병준의 죽음.
7살이던 병준은 둑에서 피폭당했는데, 상처를 비집고 곧 창자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온몸에 주먹만한 물집이 생겨 가위로 잘랐는데 자꾸 생겨났다. 어머니가 쌀물이며 송장가루며 구해서 발라주고 필사적인 간호를 했지만 파리가 상처에 수없이 구더기를 슬었고 어린 동생은 아직도 살아있는데, 마치 시체에 달려들 듯이 파리떼와 구더기가 무섭게 온몸을 뒤덮으며 기승을 부렸던 그 참상. 동생은 결국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 정자 여인은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그러나 영하 20도의 엄동설한에도 차오르는 열기 때문에 알몸으로 냉방에서 지내야 했고 숨이 차서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1970년 보다 못한 고1짜리 큰 딸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갱지 열장에 이르는 긴 사연이었다. 두 달만에 온 회신은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가 있으니 그리로 가보라.'는 내용이었다. 보사부장관 명의로 온 답장이었다. 그러나 달려간 협회에서는 신입회원 명단에 이름을 써넣었을 뿐이었다. 가난한 피폭자들의 이름뿐인 모임이었던 것이다.
그후 이 여인은 울산의 바닷가로 이사를 했다. '큰딸애 직업요? 한동안 병원 청소부로 다녔는데 오래 못 가네요. 목과 눈이 튀어나오고 한동안 갑상선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다녔어요. 올해 서른 셋인데 날 닮았나 봐요. 큰아이뿐 아니라 모두 약해요. 성한 아이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 막내딸은 나 때문에 늘 밤잠을 잘 안 자요. 내가 혹시 숨이 막히지 않았나, 살아 있나, 흔들어보기 위해서지요. 그애의 제일 고약한 증세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겨드랑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증세예요. 온몸이 항상 습하고 냉한 그애는 엄동설한에도 그 땀 아닌 물 때문에 속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겨드랑이의 맨살이 꽁꽁 얼어붙고 만답니다. 난 그애가 조용해지면 겁이 덜컥 나요. 그러면 여지없이 '엄마 왜 날 낳았어요? '내가 제일 싫고 무서워하는 그 말을 하구 말지요. 아무 대답을 못하는 엄마에게 그앤 다짐하듯 말을 보탠답니다.
'엄마 따라 갈 거야'
8월 9일 또 한 개의 원자폭탄이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인구 27만 가운데 2만 4천이 죽고 부상 4만 1천, 행방불명 2천, 기타 피해자 17만 7천을 기록했다. 두 차례에 걸친 원자폭탄 세례와 소련군의 선전포고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일본은 8월 15이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전후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원폭투하를 감행한 것이다.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세계 최초로 실험에 성공한 지 한달도 채 못되어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