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66. 녹두 장군 전봉준 - 조선, 동학농민혁명 발발(1894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876년 조선은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했다. 이씨 왕조는 왕비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하에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다 친청파, 친일파로 갈리어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부패한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외세를 몰아내려는 민족혁명운동이 일어났으니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바로그것이다.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전라북도 고부군 궁동면에서 1855년 태어났다. 천안 전씨,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지녔다. 그의 쏘는 듯한 눈빛은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향교의 장의였으며 전봉준도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그의 생활은 몹시 가난해서 논 세마지기 농사에 여섯 식구가 의존, 아침엔 밥을 먹고 저녁엔 죽을 먹는 형편이었다. 그는 1890년 동학에 입도, 고부 접주가 되었다. 동학은 1860년 경주사람 최제우가 창시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천주고, 즉 서학에 맞서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의 근본 사상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요 평등하고 차별 없나니, 귀천을 가림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동학은 차별받는 이, 억눌린 사람들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동학에는 '삼불입'이라는 것이 있다. 곧 '양반, 부자, 서니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동학은 상놈, 노비, 백정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종교로 급성장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대단히 곤궁하고 비참했다. 왕 이하 귀족들의 권세다툼에 눈이 어두워 있고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탐관오리들이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농토를 버리고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외세가 물밀 듯 밀려들어와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일로를 걷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폭정 때문이었다. 1894년 갑오년 음력 정월 10일 새벽, 첫닭이 울자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1천여 명의 농민들이 괭이 혹은 죽창을 들고 모여들었다. 매서운 새벽 바람도 잊은 듯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군은 단숨에 고부관아를 들이쳤다. 그러나 조병갑은 미리 알아채고 부호 은씨 집에 숨었다가 전주로 달아나버렸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갇혀 있던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세금으로 거뒀던 쌀을 빼앗아 도로 나누어주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속속 가담해왔다.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오하영, 손여옥 등이 각각 농민군을 이끌고 집결했다.
백산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던 농민군은 3월 27일 '보국안민'의 깃발을 올리고 격문을 발표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전주성이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멸하라.' 이는 전봉준이 제창한 농민군의 4대 강령이다. 1만 3천 명의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파죽지세로 함락, 마침내 4월 27일 전주에 입성했다. 고종과 민씨 일파는 몹시 당황했다. 민영준은 비밀리에 청나라 군벌 원세개를 만나 청나라 군사를 원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을 완전히 수중에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은 이때 이미 출병준비를 시작한 뒤였다. 5월 2일 군함 2척을 이끌고 청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도 병력을 급파, 7일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가 420명의 병사와 대포 4문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날 섭지초가 이끄는 청군 1천 5백 명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일본군 6천여 명이 인천, 서울 일대를 장악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자국의 세력을 부식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판단, 더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강화를 제안했다. 마침내 5월 9일 전주화약이 맺어지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했다. 이후 농민군은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세우고 농민자치를 실천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청,일 양군은 저희끼리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일본이 승리를 거둬 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게 되고 말았다. 9월,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10만의 대군을 이루고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올린 혁명군은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21일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군에게 일본군은 무수한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쓰러진 농민군은 50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이 흘린 피는 냇물이 되어 골짜기에 흘러넘쳤다.
11월, 7일간에 걸쳐 벌어진 공주 공방전은 몹시도 치열했다. 마지막날, 우금치 전투에서 대포와 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맞아 농민군은 분투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논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재기를 계획했다. 서울로 잠입하여 내외정세를 살필 생각을 한 그는 순창 피로리의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전봉준을 주막으로 안내한 뒤 관가에 밀고하고 말았다. 포위당한 전봉준은 쌓아놓은 나뭇단을 밟고 한 발이나 되는 담장을 뛰어넘었다. 순간 잠복하고 있던 관군이 총개머리판으로 그의 발목을 후려갈겼다. 전봉준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12월 2일의 밤이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서울로 호송되어 일본 공사관 감방에 갇혔다. 전봉준은 두려워한 관군이 일본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그의 불굴의 투지와 기개에 감복한 일본인들은 그를 회유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전봉준은 '구구한 생명을 위해 살 길을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다섯 차례 법정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반봉건 반외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생각하며 노래를지어 대대손손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67. 인류평화를 위한 축제 - 제1회 국제 올림픽 개최(189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95년/을미사변으로 민비 피살, 단발령, 유길준 '서유견문' 간행, 1896년/전국에서 의병 일어남. 고종,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 독립협회창립, '독립신문' 발간
올림픽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올라간다. 고대 그리스는 수많은 폴리스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폴리스는 독립국가였고 폴리스끼리 전쟁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만, 폴리스인들은 언어와 종교, 문화에서 공통점을 지닌 동족이었다. 그리스인의 종교는 다신교이다. 신성한 산 올리포스에 사는 제우스를 비롯해 12신이 세상만물을 주관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폴리스들은 제각기 신전을 짓고 자기 폴리스를 수호하는 신을 모셨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폴리스 최대의 행사요 화려한 축제마당이었다. 그중 주신 제우스에게 드리는 제사가 4년에 한 번씩 올림피아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전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모두 모였다.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쪽 엘리스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성역이다. 기원전 776년, 제전 기념행사의 하나로 체육경기대회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 올림피아 제전경기가 바로 올림픽의 기원이다. 경기에는 각 폴리스 대표들이 모여 자기 폴리스의 명예를 걸고 승부를 겨루었다. 최후의 승리자에게는 젊음과 생명의 신 아폴로의 나무월계수로 만든 관이 주어졌으며, 그는 전 그리스의 영웅이 되었다. 올림피아 외에도 이스트미아, 네메아, 파티아 등지에서 제전경기가 열렸지만,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것이 올림피아 제전경기였다. 하지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노예, 여자, 외국인은 철저히 배제되고 오직 '순수한 그리스 인'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종목은 단거리경주를 비롯하여 5종경기, 레슬링, 권투, 전차경주, 경마, 판크라티온(레슬링과 권투를 합친 듯한 격렬한 격투기) 등이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서기 393년까지 무려 1100여 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열렸다. 그러나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부터 점차 퇴락하기 시작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함에 따라 이교도의 제전이라 하여 393년 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500여 년 후인 1896년, 제1회 국제 올림픽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회되었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이름을 따서 올림픽이라 명명한 이 국제대회를 탄생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쿠베르탱이다. 그는 1863년 프랑스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되려고 생시르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16살에 중퇴, 교육학을 공부했다. 영국유학 중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학교 교정에서 꽃피운 스포츠때문'이라고 공감하고, 청소년 교육의 중심은 스포츠여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 인들의 체육활동에 매료되었으며, 1892년 마침내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 그는참가국들을 설득하여 정기적인 올림픽을 열기로 합의를 보았다. 2년 뒤인 1896년 4월 6일,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올림픽이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육상, 체조, 펜싱, 사격, 테니스 등 10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고, 메달 수에 따라 순위를 결정, 1위는 그리스, 2위는 미국, 3위는 독일이 차지했다. 그후 올림픽은 1,2차 세계대전으로 세 번 중단된 것 외에는 4년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올림픽 마크는 쿠베르탱이 직접 고안하여 1914년 IOC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첫선을 보였으며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에서 최초로 나부꼈다. 성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였다. 경기장의 탑 위에 커다란 돌로 만든 접시를 얹고 불을 피워 대회기간 중 계속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후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때부터는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점화하여 개회식장까지 가져오는 성화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한편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8회 올림픽은 백인종 국가가 아닌 곳에서 개회된 최초의 대회였고, 1980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올림픽은 공산주의 국가가 개최한 최초의 대회였다. 동계 올림픽이 시작된 것은 1924년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겨울철 경기를 독립시켜 프랑스 남부 샤모니에서 열렸다. 우리 나라가 올림픽에 처음 나간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였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는 김은배, 권태하, 황을수 세 사람이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일본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 김은배와 권태하가 마라톤에서 각각 6위, 9위를 차지했다. 이어 36년 베를린 대회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자가 되자 유명한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계 올림픽에 첫 출전한 것은 1948년 스위스 생 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대회였다. 1988년, 제24회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쿠베르탱의 염원은 건전한 스포츠 정신을 통한 세계평화와 인간존엄성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처럼 올림픽이 진정으로 '이념과 인종,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까지만 하더라도 흑인이나 기타 유색인종은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후 1921년 제정된 올림픽 헌장은 '...모든 나라의 아마추어를 공정평등하게 참가시킨다. 어느 국가나 개인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 차별대우해선 안된다.'고 천명했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성공 여부는 그가 승리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노력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다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올림픽은 자국의 이념을 선전하고 경제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또하나의 국제정치 무대가 된 감이 없지 않으며, 선진국의 독점화 현상이 두드러져 '스포츠는 곧 국력'이란 말을 실감케하고 있다.
68. 노벨 상을 탄 최초의 여성, 퀴리 부인 - 퀴리 부부, 라듐 발견(189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97년/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침, 1898년/서울, 전차 개통,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처형, 1899년/경인선 개통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부인의 처녀 시절 이름이다. 그녀는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사택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마리아가 10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공직은 모두 러시아 인이 차지하고, 학교에서는 러시아 말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는 1남 4녀 중 막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가정교사생활을 하며 수입의 대부분을 언니 브로냐의 학비로 부쳐주었다. 브로냐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틈틈이 젊은이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 몰래 갖는 모임에 참석, 철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했다. 1891년 마리아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프랑스 유학의 길에 올랐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이학부에 들어간 마리아의 생활은 몹시 고달팠다. 프랑스어에 자신있었던 그녀였지만, 빠른 말씨로 진행되는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기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독학으로 공부한 수학과 물리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다른 학생들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렸다. 다락방에 세든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웬만한 추위에는 불을 때지 않고 견뎌냈다. 몹시 추운 날이면 세면기의 물이 꽁공 얼어붙었다. 몇 주일 동안 빵과 물만 먹기도 했으며, 차만 마시면서 몇 끼를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1893년 물리학 학사시험에 1등, 이듬해 수학 학사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 무렵 마리아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피에르는 그녀보다 8살 위로, 이미 명성을 얻은 물리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마리아는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했다. 그러나 방사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마리아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 테마로 삼았다. 마리아는 우라늄보다 훨신 활성적인 다른 물질이 있어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했다. 피에르와 마리아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 1898년 6월 말, 두 사람은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새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아는 여기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폴로늄을 제거했는데도 여전히 강한 방사능이 남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또다른 미지의 원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실험을 거듭, 마침내 우라늄의 9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을 함유한 원소의결정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 우리는 방사능을 지닌 물질에는 새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새 원소에 라듐이란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퀴리 부부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학회는 발칵 뒤집혔다. 두 사람은 라듐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피에르가 근무하는 공업물리화학 학교의 바라크 건물을 빌려 실험실로 꾸몄다. 그후 4년간 마리아는 그곳에서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우라늄 광석을 20kg씩 꺼내어 체로 걸러서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분쇄하여 진한 황산으로 조려서 침전시켜 결정을 만든느 일을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너무나도 고된중노동이었다. 마침내 1902년 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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