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삶의 보람 - 구상(시인)
참된 기쁨으로서의 '삶'
인간은 누구나 삶의 보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그리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고 또 그 실체도 단순치 않아 한마디로 쳐들어 보이기는 실상 어려운 것이다. 훌륭한 사회적 지위에 있고 또 원만한 가정을 지니고 있다는, 소위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이성으로서는 자신의 삶이 다행스럽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볼 때 삶의 보람에 대해 가장 정직한 것은 감정인 듯싶다. 가령 마음속으로부터 삶의 힘차고도 싱싱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보람의 가장 소박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기쁨은 어떤 때 예상치도 않던 경우에 일어나 그 자신마저 놀라게 되는 수가 있는데, 그때 자기 삶의 보람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실체를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인간 활동 속에서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학자들은 목적, 효용, 필요, 이유 등과 관계없이 '그것 자체를 위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어떤 이익이나 효과를 목표로 하는 활동보다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인간에게 싱싱한 기쁨을 주는 게 사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돈 때문이 아닌 일,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기를 더욱 즐겨한다. 실례를 들면, 가령 취미로 돌을 주우러 다니는 사람에게는 돌을 찾아 산천계곡을 헤매는 것이 즐거움이요, 그 피로도 하나의 흥겨움이지만, 똑같은 돌 줍기를 장사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고역이 되고 싫증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아주 어려서는 몰라도 어른이 되어서는 목적이나 효용이라는 것을 일체 떠난 활동과 그 순수한 기쁨을 맛본다는 것은 어렵고, 또 있다 해도 점점 줄어드는 게 실제의 인생살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어른에게 있어서도 삶의 순수하고 가장 깊은 기쁨을 선명하게 맛보는 것은 첫아기를 낳은 직후의 어머니들이다.
아가의 머리맡에 햇빛이 앉아 놉니다 햇빛은 아가의 손님입니다
아가가 세상에 온 후로는 비단결 같은 매일이었습니다 아직 눈도 아니 뵈는 죄그만 우리 아가
아가는 진종일 고이 잡니다 잠은 아가의 요람 아가는 잠에 안겨 자라납니다
아가는 평화의 동산 지줄 대는 기쁨의 시내입니다
아가는 엄마의 등불입니다 아가와 함께 있으면 훤히 밝아 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시는 김남조의 '아가에게'라는 시의 전반부로서, 참으로 이런 존재의 밑뿌리로부터 솟구치듯 하는 기쁨은 여성의 특권적 삶의 보람 중의 보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모성으로서의 기쁨은 보다 생물학적인 것이라 하겠지만, 이와는 달리 정신적 인식이나 정서적 감동으로서 맛보는 순수한 기쁨도 없지 않다.
나는 이제사 탕아가 아버지 품에 되돌아온 심회로 세상 만물을 바라본다
저 창 밖으로 보이는 6월의 젖빛 하늘도 싱그러운 신록 위에 튀는 햇살도
지절대며 나는 참새 떼들도 베란다 화분에 흐느러진 베츄니아도 새롭고 놀랍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한편 아파트 거실을 휘저으며 나불대며 씩씩거리는 손주놈도 돋보기를 쓰고 베갯모 수를 놓는 아내도 앞 행길을 제각기 모습으로 오가는 이웃도 새삼 사랑스럽고 미쁘고 소중하다
오오 곳간의 재물과는 비할 바 없는 신령하고 무한량한 소유! 정녕, 하늘에 계신 아버지 것이 모두 다 내 것이로구나.
이 시는 나의 '신령한 소유'라는 시로서, 좋게 말하면 신령한 것에 대한 눈뜸이랄까. 모든 만물 만상에서 창조주의 그 크신 혜여를 느낌으로써 거기에 따르는 감동과 기쁨을 서투르게나마 표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방황과 고뇌 끝에 도달하여 얻어진 기쁨의 세계로서, 요즘 발간한 '말씀의 실상'이라는 내 시집에 이 시와 함께 수록된 '하루'라는 작품을 보면,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암거 속에서 그 청렬한 수정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 갔다
진창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 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일월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조응한다
나의 현존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르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똑같은 여건 속에서 또한 같은 사람이 이렇듯 어둡고 괴로운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앞에서처럼 삶의 충만감 속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앞 시에서 보는 바처럼, 이러한 삶의 충만에의 도달은 어린이들의 기쁨이나 아기 엄마의 기쁨처럼 단순한 생물적인 것이 아니라 좀도 정신적인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나 감동은 심각한 사색의 추구나 핍진한 체험의 결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그의 유명한 '에밀'의 서두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수명이 길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장 풍부하게 산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을 가장 풍부하게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시간의 내용이 꽉차 있어 그것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저항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쉽사리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의 의식 속에 거의 자국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에는 삶의 흐름이 너무 순탄한 것보다 다소의 저항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살아가는 데 있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간, 살아가는 데 있어 고통스러운 시간 쪽이 쉬고 노는 시간보다 오히려 삶의 충실 감을 강화해 준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럴 때 그 시간은 미래를 향해서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닐 때만 그 노력이나 고통을 자기 목표에 대한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로 생활상의 필요에 몰려 있지 않더라도 자진해서 수고로운 일을 맡고 그 어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든다. 이러한 예로 정년으로 퇴직한 이들이 경제적인 면에서 그리 곤란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시간의 공허감을 무엇보다도 호소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항상 전도에다 목표를 두고 나아갈 때만이 삶의 최소한의 보람 속에 산다고 하겠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무목적, 무보상의 기쁨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별로 남에게 부탁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여러 가지 목표를 세우는데, 이것을 엄격히 객관적으로 따지면 그 목표가 아니라, 오직 인간은 모두가 그 스스로 형성한 이러한 삶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한 증거로는, 가령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칼붓세는 너무나도 유명한 '저 산 너머'에서,
저 산 너머 멀리 헤매어 가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아아 남들과 얼려 찾아갔다가 눈물만 남긴 눈으로 되돌아왔네 저 산 너머 멀리 저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
이라고 읊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무한한 저편, 저 산 너머의 목표를 좇는 존재라고나 하겠다. 한편 수고가 없고 괴로움이 없는 삶에서보다 고생 끝에, 고통 끝에 도달하거나 획득하는 삶이 큰 보람을 안겨 준다는 것은 하나의 공식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공부를 하여 대학에 합격한 여학생의 기쁨이나 그녀가 분망한 일과의 틈바구니에서 정진하는 학습의 즐거움은, 순탄한 가정에서 자라나 어쩌면 하기 싫은 공부를 마지못해 하는 학생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맛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보람은 시인 소포클레스가 그린 '안티고네'의 숭고한 모습을 비롯해 이러한 헌신적 사랑에다 삶의 보람을 찾아낸 문학 작품들은 동서고금 이루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으며, 특히 여성이 대부분 그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헌신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칫 잘못하면 그 고통 자체가 쾌감으로 여겨지는 줄 오해하기 쉬우나 그것은 마조히즘적인 착각으로서, 가령 자기 고유의 욕망이나 자유를 희생하며 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방의 안전이나 평화나 그 기쁨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거기서 구하는 것은 자기의 쾌락이 아닌 것이다.
이외에 미래에다 어떤 시간적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의 참고 살기도 한다. 이런 경우 현실적 나날은 미래에 연결되어 있다는 그 희망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하겠다. 가령 중병을 앓고 누워서 매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속에서 적극적 삶의 보람을 느낄 수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이거나 철학적 인생관으로, 세상을 버리고 금욕적인 수도를 하는 것은 소극적,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삶의 보람을 찾는 적극적 태도인 것이다.
사명감 속에서 찾는 행복
그러면 이제 여기서 잠시 삶의 보람이라는 것과 행복이라는 것, 또 쾌락이라는 것과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대체적으로 말하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은 행복감의 일종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양자 속에는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가 없지 않으니, 가령 현재의 생활이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즉 행복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밝은 희망이나 목표가 있을 때에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현재가 행복하다 해도 그 행복감 속에서 자신의 사명감 같은 것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는 자아의 본질적 부분에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수도 있는 것이다. 적십자사를 창설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도 젊었을 때는 오히려 상류 사회의 딸로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사명감을 찾고자 암중모색하는 그 불안감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어 넣고 있다.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은 여섯 살 때부터라고 기억한다. 어떤 하나의 직업이나 일, 또는 그것에 필요한 기술, 나의 전 능력을 다 쏟아서 나를 채워 주는 것, 그것만이 바로 나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또한 언제나 그것을 동경해 왔다. 그런데 나에게는 외국여행, 친절한 벗들, 훌륭한 배필감, 또 무엇무엇...... 다 쓸데 없다. 그런 것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담. 서른한 살이 된 지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을 바랄 게 없구나."
이상에서 보듯 행복보다 삶의 보람이 더욱 자아의 본질을 좌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실상 행복감에는 자아의 일부나 말초적인 것만으로 충족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에게 있어 가정 생활의 행복이 삶의 전면적 보람을 안겨 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남성들은 사회 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이것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랑스러운 느낌을 가질 때 삶의 보람을 전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삶의 보람에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가치의 인식이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한편 쾌락은 저 행복감 속에서도 극히 말초적인 것이다. 즉 쾌락은 육체적인 것이요, 관능적인 것이요, 일시적인 것으로, 그것은 한번 충족되면 곧 시들해지며 물리고 만다. 그래서 육체적 쾌락을 행복감으로 알거나 더구나 삶의 보람으로 알고 좇다가는 허망밖에 남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관능적 고취도 생명력이 한 발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과 정신적, 인격적 분리로는 찰나적일 뿐 아니라 삶의 보람과는 동떨어진 결과만을 낳게 된다. 그러면 이제 삶의 참된 보람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일까. 이상에서도 살펴본 대로 삶의 보람이란 소박한 모습으로는 생명의 기반, 그것에 밀착되어 있으므로 고작 삶의 기쁨이나 그 충실감으로 밖에는 의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누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당장 대답에 궁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흔히 젊었을 때는 삶의 보람을 맹렬히 찾아 헤매던 사람도 어른이 되어서는 아주 잊어버리고 태연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남성들은 대체로 웬만큼 괜찮은 직업을 얻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살면 자기 생활은 살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며, 여자들은 한층 더 소박하게 출가를 하여 어린애를 낳고 어느 정도 실림을 꾸려 나가기만 하면 자기의 존재의 보람을 십이분 느끼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최소한 인간 생존의 욕구나 그 역할이 이루어지면 삶의 안이한 자족감이 결코 계속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람은 이따금 스스로 의식해서 생각을 꺼내지 않더라도 '나의 삶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반문이 일어나고, '이것이 참으로 산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존재 내면에서부터 솟구쳐 나와서 가슴에 회오리가 일고 구멍이 뻥뻥 뚫리기도 한다. 이같은 근원적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삶의 보람이란 없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 내가 감히 그 해답을 시험해 본다면, 삶의 보람이란 결코 어떤 목표의 높고 낮음이나 그 성과의 많고 적음에서 얻어지지 않고, 또 주어진 삶의 행, 불행한 여건 속에 있지 않고, 그 삶 자체의 본질적 추구나 그 감응에 있다고 하겠다. 즉 철학에서 말하는 소유자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주부 시인의 시 하나를 소개하면,
햇살 고운 한낮 구부리고 앉아 나분대며 쏟아지는 수돗물의 수다를 듣는다
피곤이 모인 셔츠 언저리 아가의 내음이 남은 작은 저고리
한줌 한줌 물에 적시고 꺼내는 손놀림은 때론 눈먼 내 나태한 여자의 이름을 불러 일깨우고 여자의 가장 맑은 얼굴을 보는 자리, 아낙의 어진 정성이 뽀얗게 피는 시간
소담스러이 빠짐없이 나의 빨래를 건져내어 힘주어 짜며 햇살에 빛나며 날리는 내 일월을 보리.
정두리의 '빨래' 전문
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가령 소유의 세계, 즉 물질의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훨씬 수고도 덜고 능률도 오를 것이다. 또한 소유의 세계에서 가족에게 향한 애정의 농도도 이것보다 더 짙고 직접적인 것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그녀에게 있어 이러한 손빨래는 그 수고라든가 능률이라든가의 문제를 넘어 생활의 충족감을 주고 있고, 오히려 남편이나 어린것에게 향한 애정에 있어서도 그 밀도를 더하게 하고 승화시키고 있음을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그래서 삶의 보람이란 결코 소유에서나 그 소유가 지니는 기술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그 존재가 지니는 신비하고 무한한 감각 속에서 좌우되는 것이라 하겠다.
존재와 소유
20세기의 철학자 중 '존재와 소유' 문제로 가장 깊은 통찰을 보여준 가브리엘 마르셀 선생이 지난 1966 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마침 그곳에 체재 중이었는데, 그분이 일본 철학자들과 '악(여기서는 윤리악이 아니라 자연적인 물리악)은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토론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는 것을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일이 있었다.
"앞날이 유망한 젊은이 하나가 병원에서 돌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하자. 그럴 때 이 젊은이는 자기에게 부닥친 그 악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의사에게서 완전히 버림을 받았으니 소유의 세계에서는 억만의 돈을 쌓아도 그 악을 벗어날 수가 없고 또한 소유의 세계인 어떤 기술로도 이제는 도저히 이 악을 물리칠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 청년에게는 악에 대한 완전한 패배와 절망의 길밖에는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이 악을 극복하는 길은 소유와 기술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그 비의(신령함)에서 찾을 수가 있다. 가령 이 젊은이가 이 세상을 희생과 고통 속에서 떠난 이들의 죽음을 떠올려 그들의 인내와 용기를 본받아 자기 죽음에 대처할 수도 있고, 또한 신앙으로 존재가 지니는 그 신령한 세계 속에서 절대자와 만나 죽음을 영원한 새출발로 삼아 기쁨으로 맞을 수까지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인의 실존적 확신인 사랑으로써 이 죽음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자기 희생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
내가 마르셀 선생의 말씀을 잘 전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삶의 진정한 보람과 그 영속성을 찾는 길은 소유에게서가 아니라 존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 비유는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나는 여기서 결론 대신 유한한 인간의 삶속에서 영원한 삶의 보람을 찾아내는 그 본보기로, 미국 현대시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에밀리 디킨슨의 '내가 만일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이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만일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할 수 있다면 혹시 그 오뇌를 식힐 수가 있다면 또는 내가 숨져 가는 한 마리 물새를 그 보금자리에 다시 살게 한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