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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43 호
단기 4341. 12. 6 (음력 11. 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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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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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최대의 적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유혹이다.(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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뽐뿌와 지르다
외래어
인터넷이 우리의 생활과 언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데, 실생활에 밀접한 것으로는 소비자들의 구매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고자 하는 물건이 있으면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손쉽게 시중의 최저가를 알아볼 수 있기에 소비자로서는 무척 편리한 여건이 된 셈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반드시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구매를 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충동구매도 만만찮아 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전 시대와 달리 지금은 남들이 무엇을 샀다고 소개·자랑하는 글에 끌려 구매하는 때가 있다. 유행하는 말로 큰맘 먹고 어떤 물건을 사는 것을 ‘지르다’라고 표현하며, 남한테서 구매를 권유받거나 내가 남의 구매 글을 읽고 충동을 느끼는 것을 ‘뽐뿌(질)를 당하다’라고 표현한다.
이때의 ‘뽐뿌’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듯이 영어 ‘펌프’(pump)가 어원이다. 이 말이 근래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져 이제 입말로도 쓰이는 때가 꽤 있는데, 사실은 강원·경상·전라·충청 지역 등에서 ‘펌프’ 대신 써 왔으므로 외래어의 사투리라 할 수 있다. 영어가 어원이지만 일본 외래어 ‘폰푸’(ポンプ)가 들어와 꼴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폰푸’가 ‘뽐뿌’로 변한 것은 일본어의 무성음이 때때로 우리에게 된소리로 들리며, 또 받침소리 ‘ン’이 뒤 자음의 소리 나는 위치를 닮는 현상에 말미암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그러모으다, 긁어모으다
요즘 신문 보기가 겁난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사건·사고 소식에 피로감이 가중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의 '돈'과 관련한 추문이 국민의 가슴에 상실감을 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워는 '인간이 탐하는 재물이나 명성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하는 바닷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는 방법을 깨우쳐 주는 짤막하고 쉬운 말에 '그러모으다'와 '긁어모으다'가 있습니다. 둘의 미묘한 어감 차이가 새롭게 와 닿습니다. '고철을 그러모아 철강왕이 된 카네기' '정치 무관심이 심해 유세장에 사람을 그러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러모으다'는 '흩어져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거두어 한곳에 모은다'는 뜻으로 일반적인 표현 '끌어 모으다'와 쓰임새가 비슷합니다.
이와 달리 '긁어모으다'는 어감이 좀 더 센 표현입니다. '백성의 등을 쳐서 재물을 긁어모았다' '중소기업의 상품을 긁어모아 종합상사의 실적을 올렸으나 가격이 형편없다'등에서처럼 사물을 취하되 방법이 옳지 못하고 폭력성을 띨 때 더 잘 어울려 쓸 수 있습니다. '모으다'와 합성된 '긁다'란 단어에 손톱·갈퀴로 파헤치다, 남을 헐뜯다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염치나 체면을 차리지 않고 재물 따위를 마구 긁어대는 것을 '걸태질'이라고 하는데 그 뒷모습이 아름답게 비치지 않다 보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견을 좁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의견이나 생각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른 견해들을 잘 조정·조율해 이해 당사자들이 상생(相生)하는 방향으로 수렴해 가는 것이 협상이나 토론을 하는 중요한 이유이자 목표일 것이다.
'어떠한 의견에 대한 다른 의견, 또는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는 이견을 달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원전(原典)에 나오는 이 문장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처럼 쓰인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문맥에 사용된 '이견'은, 많이 쓰여 무심코 넘어가기 쉬우나 왠지 좀 어색하다.
'양측이 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해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다음달에 열리는 6자회담의 최대 관심사는 참가국들이 북핵 해법안에 대한 이견을 좁혀 공동 합의문을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협상이나 토론 등의 참가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양한 견해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들이다. 이 차이점들의 '격차나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이 토론·협상의 과정일 것이다. 이처럼 '좁히다'는 거리나 포위망 등을 좁게 만들거나, 벌어진 간격·차이 등을 가깝게 한다는 뜻인데 '서로 다른 견해' 자체를 좁힌다고 하니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견해차(이)'나 '의견차(이)'로 써야 옳다.
'정치권은 지난달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을 통해 지역구 의원 수를 현행 227명보다 15명 늘어난 242명으로 결정했으나 비례대표 의원 수에 대해선 여전히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고바위, 만땅, 후까시, 엥꼬, 빠꾸, 오라이, 기스
기상관측 이래 3월 들어서는 최대의 폭설이 내려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눈 쌓인 도로를 주행하는 경우 언덕이 특히 문제다. 멈춰 서면 출발하기 어렵다. 이땐 가속페달을 살살 밟으면서 출발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세게 밟으면 헛바퀴만 돌면서 미끄러진다. 이럴 때 답답하니까 옆에서 '고바위에서 후까시 이빠이 하면 안 돼!'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언덕에서 출발할 때 가속페달을 세게 밟지 말라는 얘기로, 모두 일본말이다.
'고바위'는 '높은 바위'를 연상해 우리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언덕'을 뜻하는 일본어 '고바이(こうばい·勾配)'에서 온 것이다. '후까시(ふかし)'는 '엔진을 회전시키다'는 뜻을 가진 일본어이고, '이빠이(いっぱい)'는 '많이' '가득'을 뜻하는 일본어다. 이 밖에도 차와 관련해 쓰는 일본어가 많다. 기름이 떨어지면 '엥꼬(えんこ)'가 났다고 한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 달라고 할 때는 '만땅(滿タン·영 -tank)이란 말을 쓴다. 주차를 도와줄 때 흔히 소리치는 말이 '그 조시로 빠꾸 오라이'다. '조시(ちょうし·調子)'는 '상태'를 뜻하는 일본어이며, '빠꾸(バック)'와 '오라이(オ-ライ)'는 영어 'back'과 'all right'의 일본식 발음이다. 차에 흠집이 생기는 경우 '기스'가 났다고 한다. '기스(きず·傷)' 역시 상처·흠집 등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면 우리말에 파고든 일본어의 사용을 피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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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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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詩 - 김은우
후박나무의 넓은 잎사귀 사이로 저녁이면 집집마다의 지붕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먼 하늘가로 새들이 몰려가고 보이는 것들 너머 마음으로 더듬는 길들 헛발 짚는 내 욕망이 절뚝이며 간다
모멸의 시간들 고통 쪽으로만 기울어지는 일상 눈물빛으로 반짝이는 예감들 앞에서 누가 감히 예지를 말할 수 있는가
원하는 것을 다 잡을 수 없다 해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다
밀려왔다 가버린 크고 작은 기회들 멈칫멈칫 머뭇거리다 하나 둘 흘러 보내고 새삼 작은 것들 앞에서 겸허해지는 외로움도 넉넉해져 굳이 시가 되는
고단한 발걸음들 집으로 향하는 인사치레로 묻는 안부처럼 무심히 가슴을 치며 맨살로 오는 저녁 무렵 멀리 사라져가는 것들의 기억으로 서서히 어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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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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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 이복순
얼룩진 그리움도 삶의 의미 되는 거지 눈물꽃도 진창이면 별이 되어 반짝일까 강가에 물안개 피듯 자오록이 품으면
순서 없이 보낸 이름 매듭으로 틀고 앉아 얼음 박힌 맵찬 하늘 광풍으로 몰아칠 때 인간은 한 낱 좁쌀알 바닷물에 던져진
허공에 무늬 놓던 그 구름 사라져도 태양은 다시 뜨고 계절은 바뀌는 걸 어쩌랴 인력으로 못하는 우주법계 섭리를
마침은 또 다른 시작 그 고리 풀지 못해 산속 깊은 불이문에 매달린 거미 같이 놓을 수 없는 인연의 끈 칭칭 감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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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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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아래 그림자 지니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지은이> 정 철
<감상> 다리 밑의 물에 그림자가 지기에 다리 위를 쳐다보았더니 한 사람의 스님이 지나간다. 스님,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어디로 가는 길이오? 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석장을 들어 하늘에 뜬 흰구름만 가리키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더라.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흰구름과도 같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래서 선사(禪師)를 가리켜'운수(雲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다리 위의 중'이 어쩌면 '관농 풍경을 잘 아는 선사'일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더욱 좋겠다. '무애가'를 부르면서 매인 데 없이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다는 원효대사의 모습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처님의 길을 바로 깨달은 원효대사가 스스로를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일컬으면서 자유인의 극치를 살았던 것과 운수 행각(雲水行脚)에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우주의 진리가 자연 속에 있다면, 자연 속을 헤맨 그 생활은 진여(眞如)의 세계를 편답한 것이 아닐까? 자연 중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에는 진여가 더 많이 차 있을 것만 같다.
<말뜻> 물 아래 : 다음의 "다리 위"와 댓구를 이루는 것인데, 다리 아래에 흐르고 있는 물이라는 뜻이다. 막대로 : 막대기로. 지팡이로. 스님이 짚고 다니느 긴 지팡이를 석장(錫杖)이라 부른다. 일종의 무기로도 썼다. 가노메라 : 가는구나! '~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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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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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4장 인류의 미래는 발전 가능한가
문명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을 과학과 비과학 또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양분하는 오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의 마음을 일구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최종덕(독일 기센 대학 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상지대 교수)
고도의 산업문명 속에 사는 우리들은 오늘날 지나친 기계문명과 도덕의 실종에 따른 문명위기 또는 인간의 위기를 커다란 문제로 인식하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이 논의의 내용은 이러한 문명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을 포함한다. 그 원인중의 하나를 들 때, 서양과학을 자주 들먹이게 된다. 그런데 과학 자체에 그러한 책임을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진지하게 던져야 한다.
서양의 과학관
과학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한마디로 세계의 운동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적 연구가 지닌 특징은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계를 고정시켜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않는 죽어 있는 세계로 환원시켜야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체조직을 검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살아 있는 피부조직을 떼어서 물감을 들이고 현미경의 대물 렌즈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피부조직은 떼는 순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가 되고, 염색을 하면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다. 이렇듯 서양과학의 작업은 관찰하기 위해 더 이상 숨쉴 수 없는 유리병 안에 관찰 대상을 가두어 버린 꼴이다. 이를 두고 과학에서는 고립화 작업, 이상화(idealization) 작업이라고 말한다. 철학에서는 이를 추상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나 자연 자체는 실상 어떠한가. 항상 변화하고 항상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은 자연을 고립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결국 자연을 추상적 대상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
과학적 연구과정인 고립화, 이상화 작업의 다른 실례를 들어 보자.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을 다룬 것이다.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을 관찰하는 경우, 지구와 달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지구와 달 이외의 천체 역시 이 두 물체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관찰대상을 지구와 달로 한정시키고 나면 다른 물체는 이 두 물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전제해야만 관찰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이런 가정 속에서만 의미 있는 이론인 것이다. 이러한 추상화 작업은 근대 자연과학 혁명의 정신적 뿌리라고 볼 수 있으며, 사실 이로부터 서양의 자연과학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현상이나 자연체 모두는 이상화시켜 연구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서양과학은 이렇게 이상화, 고립화시킬 수 없는 자연현상들을 우연 또는 무질서라고 지칭하며 과학의 탐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말하는 '노이즈'(noise)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노이즈는 실험관찰 결과를 방해하거나 정확한 실험치를 저해하는 소음의 요소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그 노이즈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고 노이즈를 발생시키는 물리적 조건들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노이즈를 무시하지 않고 노이즈의 이유를 알고자 했다면 과학의 발전은 아마도 매우 더디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의 노이즈를 무시하면서 근대인은 과학혁명을 완성시켰다.
서양과학이 낳은 문명 위기
오늘날 첨단 과학문명과 고도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비롯된 사회의 병리현상들이 많이 지적되고 있으며, 오늘의 문명위기의 책임을 과학에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이 문명위기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오늘의 문명위기의 원인은 과학적 환원주의 등이 문제라기보다는 돌, 바람 등과 같이 죽어있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환원주의가 기세등등하게도 살아 있는 자연물까지 설명하는 데 있다.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생물학적 자연을 죽어 있는 물리학적 사유로 재단하는 것이 오늘의 인간위기를 자초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의 인간위기란 도덕의 위기를 말한다. 과학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이 산업과 만나고, 그 산업을 상업화시켜 줄 수 있는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과학에 의한 문명위기는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도덕패배주의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도덕패배주의는 환원주의와 원자론이 내포하는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주의는 인간의 고립을 낳았고 무서울 정도로 처절해진 경쟁사회에서 인간의 고립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 놓았다. 결국 오늘의 인간위기는 과학 그 자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과학이 사회화되면서 생긴 개인고립주의에 있다고 보인다. 동시에 이러한 개인주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고립을 자초한 물질적 자연관에 기인한다.
동서양의 생명에 대한 시각 차이
그러면 이러한 인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아 있는 자연과 내가 한 몸이라는 이해가 해결되지 않은 오늘의 인간위기에 대하여 우리는 당연히 생물학적 자연의 이해방식이 무엇인지,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그런 자연관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이해방식은 다양하다. 현대생물학의 발전을 통해서 과거 기계론에 의존한 물리주의 생물학의 오류를 알게되었다. 기존의 실체주의 철학의 반성을 제시한 '삶의 철학'을 통하여 생물학주의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도 있다. 자연을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방식의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동양적 자연관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 중에서 동양적 자연관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특히 우리 동양인에게는 주요한 접근방식이라고 여겨진다. 왜냐 하면 최근 서양에서 먼저 동양적 자연관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고, 불행하게도 우리는 서양인이 이해하는 동양적 자연관을 중역하여 읽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생물학적 자연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일개미들의 특징을 살펴보자.
일개미 무리에서는 일개미 모두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은 일개미의 60퍼센트만 하고 나머지 40퍼센트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있다. 그래서 한 무리의 일개미 가운데 60퍼센트의 일하는 개미와 40퍼센트의 일하지 않는 개미들을 다시 두 집단으로 분리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일을 열심히 하던 일개미만 모여 있는 집단에서 60 대 40으로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가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는 일개미만 모아 놓은 집단에서도 60대 40으로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가 생긴다. 그들 각각의 무리에서 무슨 이유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동시에 나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 어떤 화학물질의 교환이 이루어져 역할분담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다. 이런 개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미시적인 자연의 생태계를 보여 주는 한 실례라면, 거시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자연은 온통 하나로 묶여 있는 생태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자연에 대한 해석이다.
자연과 생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자연 이해는 자연을 분석하여 나와 멀리 떨어진 물질로서의 자연을 대상화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은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시키듯 그렇게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경이 아름다운 설악산에 올랐다고 하자. 회색빛 하늘과 더불어 펼쳐진 설풍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설악산과 산중턱 어딘가 걷고 있는 사람들과 나무들 모두는 그저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고, 이를 바라보는 나 역시 그 풍경 속의 하나로 서 있을 뿐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자연이고 어떤 것이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듯이, 인간도 자연인 그런 하나의 모습,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구분도 사라진 그 모습 자체가 자연인 것이다. 이는 동양의 자연미학의 중요한 지점이다.
동양의 자연관
유가의 인물성동이론이 있다. 인간과 사물이 하나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개인가 하는 논쟁이다. 인물성동이론의 논쟁핵심에 접근하기 위하여 유가의 '물'에 대한 해석을 보자. 물은 '격물치지'의 만남이다. 격물에는 세포를 대상화하여 대물 렌즈에 놓인 관찰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포와 사람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만남을 '사물'이라고도 한다. 가령 학생과 선생의 관계를 보자. 학생은 배우는 자요, 선생은 가르치는 자이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 오로지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만 남고, 선생은 어떤 학생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과 꿈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학생은 선생에 대해 이런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남이란 바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이상으로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물 렌즈에 놓인 세포는 관찰대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 렌즈를 통해 이를 관찰하는 사람은 관찰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서양이 세포와 인간의 관계를 관찰대상과 관찰자로만 놓는다면, 동양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세포와 인간의 만남까지 생각한 것이다. 이럴 때 세포는 죽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찰자인 나와 동격의 자연인 것이다. 결국 유가의 기본적인 생각은 서양처럼 사람과 사물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격리된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은 서로 만나는 (이를 인물화해의 차원이라고 하는데)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만남이란 말에는 또 이런 의미도 새겨 볼 수 있다. 만남은 동격에서 이루어진다. 즉 상하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너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만나는 것이다. 마음과 신체가 따로라는 것, 즉 심과 물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나 물과는 다른 차원의 영원적 존재인 신이나 부동의 존재(unmover mover)는 동양사상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맺음말
우리는 서양과 동양을 과학과 비과학 또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곧장 등치시켜 버리는 문명적 오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죽어 있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합리성이 강하게 요청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을 다루기 위하여 과학적 합리성의 잣대만을 들이대면 인간의 본직은 결국 파괴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동양이냐 아니면 서양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서양과학은 물질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혜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져다 준 과학의 병리현상들 때문에 과학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동양의 환상을 현실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양의 자연관은 분명히 기계에 매몰되어가는 인간의 물질 예속화 현상을 중화시킬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치료효과를 지니고 있다.
서양과학의 수학적 합리성은 그 자체로 자연에 접근하는 도구로서는 훌륭하지만, 그 도구를 마치 인간의 본질로서 설명하는 일은 본질과 수단을 거꾸로 하는 일과 같다. 이 점 때문에 서양과학은 그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심각해진 문명위기의 주범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과학 자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과학의 탐구방법론을 갖고 인간을 해부하려는 무모한 모험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곧 동양철학을 반성없이 수용하고 치장하고 신비화시키는 비뚤어진 동양환상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동서양을 흑백논리로 구획하는 이분법적인 마음에서 과감히 벗어나 동양을 제대로 소화하려는 다양성의 마음을 계속 일궈 내야 한다.
참고 문헌
김교빈 외,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소나무. 장회익, "삶과 온생명", 솔. 박동환,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려원. 정재서, "동양적인 것의 슬픔",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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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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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쾌락의 끝은 어디인가
“제가 합승을 해도 조금 양해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합승을 하시지요.” 이렇게 말을 시작한 그 기사분, 옆차선으로 끼어들더니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한 사람을 태우게 됐다. “손님,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합승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려우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 못 가서 그 손님이 내리자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쳐다보더니, “어디선가 뵈었던 스님 같은데....” 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모른 척 다른 얘기를 꺼냈다. “날씨도 무더운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열심히 벌어야지요! 제가 이렇게 합승이라도 하지 않으면 힘들지요. 고작 5십만 원밖에 안 되는 월급만 가지곤 먹고살기 어렵습니다, 스님.” “한 달에 얼마나 버십니까?” “전 한 달에 2백5십만 원 정도 벌고 있습니다. 다른 회사택시 기사들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요.” 보통 회사택시치고는 수입이 꽤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몸은 또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겠는가. 안쓰러운 마음에 나는 그를 나무랐다. “당신, 미쳤소?” “네, 전 미쳤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많은 액수를 번단 말입니까?” 젊은 기사분을 다시 보니 복장은 여느 회사택시 기사였지만 스마트하게 생긴 외모에다 눈빛이 영리한 폼이 보통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실은..., 빚이 5천만 원이나 됩니다. 그것을 갚기 위해선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뛰어도 모자랍니다.” “5천만 원이라면 보통 큰 돈이 아닌데, 왜 그처럼 엄청난 빚을 지시기 되었소?” “제가 미친 탓이지요. 경마에 빠져 도박을 했는데..., 그만 실수로 엄청난 돈을 잃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다니던 대기업에도 사표를 내야 했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택시를 몰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내와 뱃속에 든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그 기사분의 말이 나는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다행히 제 아내는 참 착한 여자이지요. 불평 한미다 없이 저를 믿어 주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내의 고마운 마음 때문에 전 다시 마음을 잡았습니다. 제 아내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하고 사는 셈이니까요.” “정말 그렇겠군요. 불평 한마디 없이 살아 주는 게 보통 일은 아닌 거지요. 이제는 도박 안 하시는 겁니까?” “죽어도 다시는 안 합니다!” “열심히 사시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퍽 좋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나중에 언젠가는 꼭 성공하실 게요. 그래서 손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서 옛날 이야기를 하실 날이 반드시 오겠지요. 그때 ‘나는 참 열심히 살았다.’라고 손주에게 얘기를 들려 주시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나는 믿습니다.” “스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니오, 고마운 건 오히려 내 쪽이오. 열심히 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열심히 사는 그 젊은 기사분이 참으로 대견하게 생각됐다. 누구나 한 순간의 실수는 있는 법이다. 비록 도박빚을 쳐서 지금 현재는 힘들게 살고 있지만 실의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택시를 자주 이용하다 보니 많은 기사분들을 만나게 된다. 대부분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지만 그들 중에는 사업이 망해서, 혹은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선 탓에 가진 재산을 모두 잃고 택시 기사로 나선 이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는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생각으로 임시 방편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또 이 기사분처럼 도박으로 돈을 모두 잃고 빚을 갚고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핸들을 잡는 경우도 있다. 도박을 왜 하는 것일까. 기사분들 중에도 이처럼 뻔히 알면서도 도박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선 손쉽게 돈을 벌어 재미가 있으니 하게 되겠고, 또 처음 재미삼아 하던 것이 나중에 습관이 된 탓이다. 애써 하루 벌이를 해야 벌 수 있는 목돈이 손쉽게 굴러오니 솔솔 재미가 붙어서 하게 되고, 또 하다보니 돈을 잃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손을 대게 되고..., 안 봐도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쾌락에서 근심이 생기고 쾌락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쾌락에서 벗어난 이는 근심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법구경’에서 말씀하셨다. 한번 잘못 발을 들이면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 도박의 속성이다. 잘못됐을 경우 재산을 탕진하는 것은 물론, 나중에 이자율이 엄청난 사채까지 끌어다 쓰고 뒷돈을 대야 하는 것이 도박이다. 도박으로 인해 평온한 가정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나고 철창 신세를 지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또 기사분의 경우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무리하게 운전을 하다보니 과로로 몸을 버려서 쓰러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조금 더 벌려고 하는 조급한 마음에서이다. 이 모두 일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쾌락에 탐닉하게 됨으로써 빚어지는 비극인 것이다. ‘좋은 밤을 찾다가 좋은 낮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네덜란드 격언이 있다. 지나친 향락의 추구에 탐닉하다 보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의미이다.
옛날 보안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 네 명의 왕과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이 네 명의 왕을 청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오랜만에 모처럼 만난지라 좋은 음식과 즐거운 풍악 속에서 연회는 밤낮없이 한 달 간이나 계속되었다. 잔치가 다 끝나갈 무렵 보안왕은 그들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 것입니까?” 그러자 한 왕은, “이처럼 유희를 즐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두번째 왕은, “친척들이 모여 음악을 즐기는 것입니다.” 세번째 왕은, “재물이 많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물이 많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왕은, “애욕을 마음대로 즐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네 왕의 말을 다 듣고 난 보안왕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고뇌의 근본이요, 근심, 걱정의 주역들입니다. 지금은 즐겁지만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고요해서 구하는 것이 없고 마음을 깨끗이 해서 도를 얻는 것이 최상의 즐거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은 누구든 생노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살아가면서 고민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이기 때문이요, 이는 참고 사는 영토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괴로움을 참기보다는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위안거리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술을 지나치게 탐닉하거나 애욕이나 도박, 혹은 위험한 마약에 빠지게 된다. 이 모두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또는 단지 즐거움 때문에 이를 찾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감각적인 쾌락이란 일시적인 위안일 분 그 해결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종국에는 이 즐거움으로 인해 고민과 괴로움과 불화를 자초하게 되는 경우를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결국 죄를 짓게 되고 자신을 망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무서운 줄 모르고 향락에 자신을 던지는 이들이 결국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향락은 피안을 추구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를 멸망시킨다. 어리석은 자는 향락의 욕망으로 남과 함께 스스로를 망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개 우리들이 느끼는 괴로움이나 고통은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만족의 연속이 결여되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족이란 끝이 없는 법이다. 어떤 욕망이든 채우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이 풍선처럼 부풀려지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진정한 즐거움이란 보안왕의 말처럼 마음을 비우고 개끗이 하는 것, 지나친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고 최상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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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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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1. 정여립의 불발 혁명 : 군주체제를 부정한 반체제 지식인
임꺽정의 반란이 진압된 지 3년 후인 1565년에 윤원형의 외척 세력이 숙청당함에 따라 중앙은 사림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임꺽정의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윤원형의 외척 세력과 훈구파가 몰락할 정도로 정치권 변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해서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이용하여 토지와 노비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결국 지배계급의 핵심 세력만이 교체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 개혁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정여립의 미완성혁명은 이러한 당대 정치 동향과 함수 관계를 갖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정여립의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어 동인에 속한 인물을 중심으로 천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즉, 흔히 '기축옥사'라고 부르는 정여립 사건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숙청 대상이 된 것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당시 정치 현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여립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동서 분당이 일어났는지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동서 분당 : 붕당정치의 시작
동서 분당에 대해서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상세히 나와 있다. 조금 길더라도 우선 이중환의 말을 들어보자.
선조 때에 김효원이 훌륭한 명망이 있어서 전랑에 추천되었다. 그때에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조참의 심의겸이 거부하여 효원의 전랑 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효원은 명망있는 집 자제로서 학행과 문장이 있고, 또 어진 사람을 추대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하기를 즐겨하여 소년 선비들의 환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 이에 선비들이 시끄럽게 일어나 의겸을 가르켜, 어진 사람을 거부하여 권세를 농간한다고 공박하였다. 의겸은 비록 왕실의 외척이나, 일찍이 권력을 잡은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선비를 보호한 공이 있었다. 이리하여 나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이 의겸을 옹호하였다. 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논의가 갈라졌는데, 처음은 하찮은 일에서 점차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미, 갑신년 사이에 동과 서라는 명호가 비로소 나누어졌다. 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인이라 하고, 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은 김효원, 유성룡, 김우옹, 이산해, 정지연, 정유길, 허봉, 이발 등을 추대하였고, 서인은 심의겸, 박순, 정철, 윤두수, 윤근수, 구사맹 등을 추대하였는데 이것이 붕당의 시초였다.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한 일로 인해 파가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숭상했던 당시 사림들의 이념이 반영되어 있다. 이중환의 말에 따르면, 동서 분당은 결국 원로 대신과 소장 관료 사이의 분쟁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명분을 내세웠으며 무엇을 중시한 의리였는지 알아보자.
위에서 본 것처럼 동서 분당은 전랑직 임명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당시 김효원은 장원급제로 정계에 진출, 명망이 높아져 주로 젊은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심의겸이 시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김효원이 아니라 그를 추천한 김계휘였다. 심의겸은 김계휘가 윤원형에게 아부하는 등 식객 노릇을 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그의 추천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효원이 전랑직을 사퇴하자 그 자리에 심의겸의 아우인 충겸이 임명된 데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의 외척(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다.)에게 전랑의 직책을 맡길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중환의 말에 따르면, 전랑은 이조의 정랑과 좌랑의 총칭인데, 그 권한이 매우 커서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 이를 추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전랑을 외척에게 맡길 수 없다는 김효원의 논리는 타당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전랑은 판서보다는 낮은 직위였지만 상당한 실세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관료들은 전랑직에 누가 앉는가에 대해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으며, 전랑이 관원을 추천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만큼 자신들의 세력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주요 요직을 둘러싸고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에 심한 알력이 생겨났으며 이에 따라 관료들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도성 동쪽 낙산 건천동에 집이 있던 김효원 일파를 동인이라고 부르고, 도성 서쪽 정동에 살고 있던 심의겸 일파를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두 파로 갈라진 다른 관료들이나 사림들은 어떤 명분으로 뜻을 달리했을까. 여기에는 주로 학연이 크게 작용하였다. 동인의 경우 몇몇을 빼고는 대부분 이황, 조식의 문하 출신이었으며 사상적으로는 주리철학적 도학을 존중한 영남학파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와 반면 서인들은 주로 이이, 성혼을 중심으로한 주기철학적 학풍을 중시하는 기호학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이이는 후에 당파 싸움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왜란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도 역시 초기에는 김효원 일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렇게 봤을 때 동서 분당은 정치적, 사상적 대립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로 그 이면에는 세력 판도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당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일 뿐이다. 동서 분당은 후에 북인과 남인,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는 뿌리가 되었으며 조선 특유의 붕당정치를 개막하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조선 건국 이래 정치는 훈신, 척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와 혁신 세력인 사림파 사이의 대립에서 같은 사림들 사이의 사상적, 이념적 대립으로 그 양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서 분당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정여립 사건이었다.
사전에 발각된 혁명(기축옥사)
'정여립의 모반 사건'은 정여립 개인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의 신상부터 알아보면서 사건 전모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정여립(1546-1589)의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인백으로서 전주 출신이다. 그의 선조들은 대를 이어 전주 남문 근처에 살았다. 그는 15세 때 익산군수였던 아버지를 따라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때 아전들은 군수보다도 정여립을 더 어려워했다고 한다. 이미 십대에 온갖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1567년(명종 22년) 진사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2년) 식년문과 을과에 두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년배 청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성혼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있었다. 또한 대신인 박순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늘 이해하고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583년 예조좌랑이 되었고 낙향하였다가 2년 뒤엔 다시 수찬의 자리에 올랐다.
정여립은 언관 낭관에 있을 때에는 임금인 선조에게 곧은 말을 자주하였고 공정한 인사를 펴 주위 사람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선조에게는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선조를 무시하였는지 건의할 때는 눈을 똑바로 뜨고 왕을 바라보았다. 당시로서는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선조가 건의를 거절하면 문을 나서며 눈을 부라리듯이 뜨고 뒤돌아보기 일쑤였다고 하니, 선조가 이러한 정여립의 불손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본래 서인 사람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들과 가까워지면서, 이이에게 "자기 편만 지나치게 옹호한다"는 등 불만을 토로하여 결국 이이와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이의 제자들이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그는 박순, 스승이었던 성혼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나중에는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제지하고 나서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정여립의 독불장군같은 행위는 서인들의 미움을 사 역모 사건이 터졌을 때 서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탄핵했던 것이다.
정여립이 서인들과 멀어진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추측하건대 이이와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했다는 데 있다. 당시 붕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고, 선조 역시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동인의 적극적인 추천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관직 생활을 할 수 없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낙향한 정여립은 만나는 사람마다 선조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선조를 바보로 취급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대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누구를 임금으로 섬기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말은 '임금 한 분만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는 당시의 성리학적 이념에 크게 배치되는 것으로서 군주체제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전주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와 인사하였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그는 점점 유명 인사로 부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낙향하여 한 일중에 주목해야 할 것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를 여는 등 자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는 점이다. 그는 전주, 태인, 금구(훗날 전봉준 등 갑오농민정쟁의 주역들이 활동 했던 곳이기도 하다.) 등의 무사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천민, 승려, 반정부적인 선비들과 사귀면서 모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대동계이다. 그들은 매달 15일에 모여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베풀어 동지적인 연대감을 다졌다. 특히 노비를 훈련시켜 군졸로 양성하는 등 군사적 결합체를 만들어나갔다. 1587년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하였을 때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왜구 토벌을 부탁하자 대동계 군사들을 동원, 토벌할 정도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뒤 대동계의 조직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천민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과 연계해 나가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이때 만난 주요 인물들을 보면, 화적 두목인 길삼봉, 절친한 친구가 된 정개청 등이 있다. 길삼봉은 원래 천안에서 종살이를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 화적의 두목이 되었는데 신출귀몰하여 관가에서 잡지 못할 정도였다. 정개청은 박순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지만 이전에는 주역과 풍수지리를 공부하면서 처사로 지내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여립의 집터를 골라주는 등 정여립과 매우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이밖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승려인 의연이다. 그는 스스로 요동에서 온 중이라고 하면서 "요동에서 보니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와보니 전라도 땅 전주 남문 밖에서 뻗어나왔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렇게 봤을 때 정여립은 황해도의 반체체적인 인물들과 연계하여 모반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황해도와 관련을 맺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여립은 1559년에 시작하여 1562년까지 지속된 임꺽정의 반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임꺽정의 본산지였던 황해도, 특히 구월산을 중심으로(승려 의연은 구월산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연계 조직을 만들어나갔다는 것은 임꺽정의 반란을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그는 지함두와 만났을 때 "해서의 풍속이 좋지 않아 일찍이 임꺽정의 난이 있었다......몰래 서로 결합하자"고 말했다. 여기서 지함두의 신분이 천민이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자. 즉, 정여립이 천민에게 '결합'하자고 한 것은 민중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비록 자신은 토지도 갖고 있는 양반 신분이지만 민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정여립의 반체제적 성향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정여립은 임꺽정의 반란을 조선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변혁시키려 했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혁명을 준비하였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 거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여립의 수하 인물 가운데 조구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정여립이 엄청난 모반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겁을 먹고는 1589년 10월, 황해도 감사 한준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밀고하였다. 조구의 말을 듣고 놀란 한준은 즉시 비밀 장계(이것은 임금만이 볼 수 있게 꾸며 올리는 보고서이다.)를 작성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내용인즉, 정여립 등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한 뒤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장계에는 한준을 비롯하여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이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의 연명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 역시 크게 놀라 한밤중에 주요 대신들에게 입궐을 명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평소 그를 미워하고 있던 선조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즉시 의금부에게 명령하여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금부 군졸들이 정여립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정여립은 도망간 뒤였다. 조구의 행동에 의심을 갖고 있던 정여립의 심복 변숭복이 고변 사실을 먼저 그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는 머물고 있던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옥남과 동조자인 박연령의 아들 춘룡, 그리고 변숭복과 함께 진안 죽도로 피신하였다. 갑작스러운 피신이라 아무런 준비도 못한 상태여서 정여립 등은 식량 문제조차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산 속에 은거지를 마련해놓고 마을로 내려가 동냥으로 밥을 빌어먹었다. 그러자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들이 관가에 신고하여 진안현감 민인백이 군졸을 이끌고 출동, 산을 포위하였다. 민인백은 왕명에 따라 그를 사로잡으려 했지만 정여립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하고선 자기 아들 등 일행을 칼로 쳐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정여립은 모반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사건은 정여립의 자살로 끝나지 않았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인 소속의 정철이 고향에 있다가 급히 상경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사태의 위급함을 상기시키고 모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당시 정계는 대체로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었던 정철은 정여립 사건을 빌미로 동인들을 대거 숙청할 뜻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정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위관으로 임명, 사후 처리를 맡겼다. 이때부터 정여립과 관련된 자들이 속속 잡혀들어갔다. 당시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이 그런 일을 꾸밀 리 없다고 선조에게 말했다가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문초를 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피해를 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수가 무려 천여 명을 넘었다고 하니 한국 역사상 모반과 관련되어 처벌된 양반들의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었다. 우선 선조는 관련자를 알리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으며, 사태가 파악되면서 동인들이 연루되어 있다고 심증을 굳힌 정철 등 서인들이 이 기회에 동인들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청(죄인을 심문하는 기관)에는 연일 잡혀와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한마디로 피비린내 나는 엄청난 숙청이 벌어졌던 것이다.
역사적 의의
정여립 사건이 조작되어 일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1)정여립이 낙향하여 활동한 내용을 보거나 2)조작이었을 경우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을 볼 때 조작설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물론 피해자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이 모함에 걸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쨌든 정여립 사건 이후 정계는 다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 사건이 민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파악한 이이 같은 올바른 지식인들은 현실 개혁만이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란을 예방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위로부터의 변혁을 꾀했지만 무위로 끝나, 사건이 있은 지 3년 뒤인 1592년에 이르러 민족 대환란인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임꺽정의 반란, 정여립의 불발 혁명 등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일반 백성들은 현 정부나 체제가 얼마나 모순 투성이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나아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봉건적 질서의 병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양난 이후 17세기에 봉건적 질서 해체의 조짐이 보이게 된 것은 이러한 내재적 발전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임꺽정과 정여립의 반란은 조선 지배체제의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 위기 의식을 가진 지배계층은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대동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후 호남 인사들의 등용이 매우 어려워져 지역 감정을 야기시켰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의 탐학이 다른 지방에 비해 심해져 뒷날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여립 사건은 군주체제를 부정한 혁명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로 끝났지만 지배계급의 위기성을 반영함과 동시에 현실 개혁의 필연성을 상기시켜준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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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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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셋째 묶음 : 작지만 좋은 몫을
몽당빗자루처럼
-아무리 예쁜 것이라도 마침내 쓰레기가 되느니라 -고운 것이라도 마침내 쓰레기가 되느니라 그런 말 하면서 빗자루, 마당을 쓴다
남들 싫어하는 것 대신 몸으로 미어 쓰레기통에 담고 모아서 냄새까지 태운다 땅에 묻으면 흙이 되는 쓰레기 태우면 재가 되어 꽃을 가꾸는 쓰레기 마루에서 마당 끝까지 한 집씩 쓸어 한 마을이 깨끗 한 마을씩 지구마을이 깨끗해진다 지구를 쓰는 빗자루!
-먼저 내 터전을 깨끗이 하라 -먼저 내 자리를 다독거려라 그런 말 하며서 빗자루 몽당이가 된다 -진정한 세상 일꾼은 쓰레기 주무르는 사람이니라 -진정 배우는 사람은 빗자루서도 배우느니라 그런 말 하면서 몽당빗자루가 된다.
-신혁득님의 동시 <몽당빗자루>전문
왠지 잠이 오지 않는 오늘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던 나는 평소에도 즐겨 읽는 신현득님의 동시 한편을 발견하고 거듭 읽어본다.
오늘 오후 우리가 산에 묻고 내려온 한 노인 수녀님의 퍽도 헌신적이고 겸허했던 한 생애가 꼭 몽당빗자루처럼 느껴져서일까. 특히 오늘 이 시는 나를 작고 놓지않는다.
1932년, 황해도 곡산의 산골 처녀로 연길 수녀원에 입회하여 60년의 수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승을 하직하신 분.
'사람은 아마 나무 같은가 봐요. 내 손도 꼭 나무껍질 같잖아요?'하시며 전쟁 때 감옥에서도 그 나무껍질 같은 손 때문에 공산당원들로부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매를 덜 맞았다며 수줍게 웃으시던 요세파 수녀님, 8년 전 병석에 눕게 될 때까지 줄곧 부엌일, 빨랫방일, 농장일, 그 밖의 온갖 허드렛일들을 도맡아하셨고, 유난히 동물들을 사랑하셔서 '돼지하고도 뽀뽀하는 할머니' '감기든 닭 낫게 하려고 밤새 품에 안고 잔 할머니'로도 기억되고 있다. 무거운 돼지밥통을 들고 다니시면서도 얼굴엔 따뜻한 웃음이 가득하던 분, 까마득히 어린 후배들에게까지 존칭어를 쓰시며 늘 먼저 인사하시던 그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공동체의 뿌리가 된 첫 수녀로서의 길고 긴 인고의 여정을 끝내신 수녀님은 흰 수도복과 고운 꽃들에 싸여 우리의 기도를 받으셨다. 시신이 관속으로 옮겨지고 쾅쾅 못이 쳐질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 없었다. 유품 한 점 남기지 않을 만큼 청빈하셨고, 그 누구를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말은 일체 입에 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좋은 말도 드물게 할만큼 철저한 침묵과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수녀님의 삶이 비로소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계절 중에는 봄이 좋다고 하시더니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에 환한 꽃길을 걸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언젠가 꼭 한번 내가 졸라 꽃이 만발한 봄의 정원에서 수녀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돌아가신 후 액틀에 끼워 넣은 사진 속에서도 수녀님은 그 꽃밭에서 처럼 밝고 순하게 웃고 계신다.
-수녀님, 안녕히 가세요
제가 말을 함부로 하고 싶을 때는 좋은 말도 아끼시던 당시의 그 깊은 침묵을 기억할게요. 조그만 성취에도 교만하고, 우쭐대는 마음일 때는 당신의 숨은 힘과 겸손을 기억할게요. 늘 복잡하게 궁리가 많은 이기심과 세속적 허영심이 고개를 들 때는 참으로 '몽당빗자루'처럼 닳고 닳으며 살아오신 수녀님의 그 희생정신과 단순하고도 깊이 있는 신앙심을 기억할게요. 뒤에 남아 있으나 언젠가 떠날 우리도 몽당빗자루 같은 겸손과 사람의 삶을 살 수 잇도록 도와주세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제 곧 상록수의 숲에 뻐국새 소리도 들으시고, 찔레꽃 향기도 맡으시겠지요?
안녕히 가세요, 수녀님.
<1993>
봄이 오면 나는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조금 답답하겠지 그렇지만 꾹 참아야 해 땅은 엄마니까 꼬옥 품어줄거야 한잠 푹 자고 나면 우리 또 만나게 될거야'
언제 읽어도 정겨운 김교현 시인의 동시를 외우며 흙을 덮어주면 꽃씨들은 조금쯤 엄살을 부리다가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알았어요'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꿉동무를 불러내어, 나란히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단비' '봄비'라고 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풀 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오던 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우표를 사고, 문방구에 가서 색연필, 크레용, 파스텔. 그리고 마음에 드는 편지지와 그림엽서를 사고 싶다. 답장을 미루어둔 친지에게 다만 몇줄이라도 진달랫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동시를 잘 쓰는 어느 시인으로부터 맑고 고운 우리말을 다시 배워서 아름다운 동심의 시를 쓰고 싶다. 시를 외우다가 잠이 들고 , 꿈에서도 시의 말을 찾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바느질거리, 읽다가 만 책, 우편물 등을 크고 작은 바구니에 분류해 좋고 오며가며 보노라면 내 마음도 바구니가 되는 듯 무엇인가를 오밀조밀 채우고 싶어진다.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봄을 맞고 싶다.
사계절이 다 좋지만 가을엔 '달맞이 마음', 봄에는 '해맞이 마음'이 된다고 할까?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많이 먹고서도 첫사랑에 눈 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레인다.
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 무늬의 앞치마를 입고 싶다.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먼지를 털어낸 나의 방 하얀 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사제가 그려준 십자가와 클로드 모네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 개 걸어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1994>
여름이 오면
'나는 대도시에서 친구들과 악수를 나누면서도 우리들 사이에 황야가 가로놓여 있음을 느껴왔다. 우리는 우리의 목을 축여주던 샘을 잃은 채, 아니면 그 샘들이 말라버렸음을 알고 메마른 사막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자기 자신의 핵심과 연결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서는 그 핵심, 즉 마음의 샘은 고독을 통해서 가장 잘 발견될 수 있다. 우리는 고독에다 꿈을 꽃을 심는 대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음악, 떠벌려대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지도 않는 이와의 교제로 공간을 꽉 메워버린다. 소음이 그치면 그것을 대신할 음악이 없다. 우리는 고독하기를 다시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일년 중 얼마 동안, 매주, 그리고 매일 한때를 혼자서 보내야 한다.' -A.린드버그
해마다 여름이 오면 다시 펼쳐 읽게 되는 린드버그 여사의 <바다의 선물>은 특히 휴가를 앞둔 모든 이들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휴가는 '직장이나 학교, 군대, 단체에서 일정한 기간 쉬는 일, 또는 그 겨를'이라고 되어 있다. 바캉스의 본뜻이 '빈터' '빈방' '빈틈'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휴가는 우리가 바쁘고 피곤했던 일상을 떠나 잘 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텅 빈 고독 속에서의 자기 발견, '쉼'으로써의 충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름이란 계절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기 때문인가. 조용하고 고독한 분위기에서보다는 시끄럽고 산만한 분위기에서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고 나서 우리는 오히려 휴가 전보다 더욱 피곤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바다에 가면 바다처럼 넓게 트인 마음을 배워오고, 산에 가면 산처럼 깊고 그윽한 마음을 배워오기도 할 테지만 꼭 밖으로 나가야만 휴가가 되는 것일까? 이 여름도 너무 많은 사람들의 등쌀로 바다는 얼마나 몸살을 하고, 산은 얼마나 피곤해 할까? 여기저기서 산과 바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평소의 일에서 잠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욕심을 덜어낸 빈자리에 좋은 생각들을 풀어내고 용서하는 자유를 맛볼 수 있다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새로운 경탄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고 감사하기를 배운다면, 그래서 다시 기쁘게 일상의 소임으로 돌아갈 새 힘을 얻는다면 이는 곧 참된 휴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멀리 나가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에 바다가 넘실대고, 산그늘이 드리워지는 자기 나름대로의 '휴가법'을 너도나도 만들어가면 좋을 듯하다.
이제 곧 휴가철이 되면 내가 사는 부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휴가를 오는 일가, 친척들의 방문에 여름엔 하루 종일 고달프다는 어느 주부의 말도 새삼스럽다. 우리 수녀원도 여름엔 손님맞이로 바쁜 편이다. 나는 밖으로 여름휴가를 떠나진 못하지만 그동안 소식이 뜸했던 벗들에게 나의 작은 시 한편을 적어 초록빛 엽서를 띄어보내고 싶다.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한 그루 나무가 되자고 했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파도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우리도 탁 트인 희망과 용서로/ 매일을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 했지? 여름을 좋아해서 여름을 닮아가는/ 나의 초록빛 친구야/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너는 알고 있구나/ 너의 싱싱한 기쁨으로/ 나를 더욱 살고 싶게 만드는/그윽한 눈빛의 고마운 친구야.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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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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