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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4 호
단기 4341. 11. 20 (음력 10. 2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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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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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조아 이야기 글짓기' 공모
대구시와 인구보건복지협회 대구.경북지회는 저출산 극복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결혼 출산 가족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출산 친화적인 사회분위기 조성을 위해 오는 28일까지 "아이조아 이야기 글짓기" 를 공모한다.
대구시민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하고 행복한 이야기, 다자녀 가정이라 더 행복한 이야기, 저출산 문제에 대한 시민 공감대 형성과 극복을 위한 내용 등으로 하면 된다.
작품은 산문 형식(기행문, 수필가능)으로 작성해 공모기간 내에 인구보건복지협회 대구.경북지회에 방문 또는 e-mail(pp053@chol.com)이나 우편으로 접수하면 된다. 공모된 작품은 초등부, 중.고등부, 대학.일반부로 나눠 심사를 거쳐 최우수, 우수, 장려 등 18편을 선정해 12월 중순경에 시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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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9 동아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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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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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이 빗나간 사람일수록 맨 먼저 남을 모략한다.(몰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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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기라미 떡이라미
고장말
표준어 ‘-이랑/랑’과 대응하는 제주와 평안말이 ‘-이영/영’, ‘-이당/이땅’이라면, 함경말은 ‘-이라미/라미’고, 전라·충청말은 ‘-이여/여’다. “나라미 같이 가자.”(함경), “괴기라미 떡이라미 많이 먹습둥.”(함경) 함경말에서는 ‘-이라메/라메’도 쓴다. “큰집 성이라메 함께 갔습둥.” “나라메 같이 감세.” 같은 함경도에서도 함북 지역에서는 ‘-이라미/라미, -이라메/라메’와 함께 ‘-이궁/궁’이 쓰인다는 점이 함남 지역과 다르다. “이 집 아배궁 어매궁 어디 갓슴메?”
‘-이랑/랑’에 해당하는 전라·충청말은 ‘-이여/여’다. ‘-이랑’이 행동을 함께함(나랑 같이 가자), 견줌(형은 나랑 다른다), 사물을 잇기(빵이랑 과자랑 먹다) 구실을 하는데, ‘-이여/여’는 사물을 이어주는 기능만 한다는 점에서 표준어의 ‘-이랑/랑’과는 다르다. 함북말의 ‘-이궁/궁’도 그렇다. “광이여 방이여 어디 서렁이여 뭣이여 다 잡아 뒤어도 …”(<한국구비문학대계> 전남편) “형이 워디를 나갔다가서 들어 오믄 돈이여 쌀이여 뭐 연일 이렇게 많이 가져 온단 말여.”(위 책 충북편)
‘-이여/여’는 ‘-이야/야’로도 쓰인다. “대처나 인자 음식이야 술이야 푸짐하게 갖다 놓으면서 …”(위 책 전남편) “그 콩재기에다 떡이야 꽃갬이야 뱀(밤)이야 다 받아 여코(넣고) …”(위 책 전북편)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젠 스타일
친북·반미 흐름을 우려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을 놓고 인터넷에서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최고 원로급 인사의 말조차 고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대립은 심각하다. 미국과 관련된 발언을 하려면 괜히 눈치가 보일 정도다. 그런데 언어 생활에 있어서는 이런 논란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고위 인사들의 발언은 물론이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신문, 방송, 잡지에 이르기까지 넘쳐나는 것이 영어다. 잡지에서 잘라온 다음 글을 보자.
'이 스타일의 침실은 장식을 배제해 심플하지만 젠 스타일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뉴요커의 침실을 연상케 하는 모던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공간이다. 침대 헤드는 볼륨감 있는 레더 소재를 쓰면 호텔 분위기가 난다. 패브릭은 그레이 계통을 사용하고, 쿠션은 브라운 컬러로 스트라이프를 믹스 매치하면 세련돼 보인다.'
어느 나라 글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젠(zen)이란 것은 선(禪)의 일본어 발음이 영어에 흡수된 것이다. 젠 스타일 대신 선풍(禪風)이라고 해도 훌륭하게 뜻을 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유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밀리터리 룩·댄디 룩·레이어드 룩 등 또한 군대풍·멋쟁이풍·겹쳐 입기 등으로 바꿔 써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이렇게 우리말을 망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자주(自主)를 원한다면 먼저 맞서야 할 상대는 이런 것이 아닐까.
오랫만, 오랜만
'정말 오랫만에 그리던 고향 집에 돌아오니 너무나 편안해 눈이 저절로 스르르 감겼다.'
'오랫만'과 '오랜만'은 발음이 똑같아 어느 것이 맞는 표기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앞 문장의 '오랫만에'는 '오랜만에'의 잘못이다. '만'이 의존명사라면 띄어 써야 하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넣을 필요가 없다. 조사라 하더라도 부사와 조사가 결합한 단어를 합성어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쓸 이유가 없다. '오랜만'은 '어떤 일이 있은 때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뒤'를 의미하는 명사다. '오랜만'은 '오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간만'의 준말로, '오래간만'의 '가'가 생략되고 줄어든 형태다.
'나는 오랜동안 고민한 끝에 드디어 가족과 함께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이 문장의 '오랜동안'은 '오랫동안'의 잘못이다. '오랜'은 '오래다'(형용사)에서 온 말로서 '이미 지난 동안이 긴'이란 뜻의 관형사다. '오랜'이 '오랜 역사' '오랜 세월' '오랜 옛날'처럼 쓰이다 보니 '오랜 동안'도 맞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은 '오랜+동안'의 형태가 아니라 '오래'(부사)와 '동안'(명사)이 결합해 한 낱말로 굳어진 합성어다. 그래서'오랜동안'으로 쓰지 않는다. 이때 '동안'의 'ㄷ'이 된소리로 발음나기 때문에 표기할 때 사이시옷을 넣는다. 물론 '오랫동안' 대신에 '오랜 시간'이나 '오래'처럼 다른 말을 써도 된다.
고개를 떨구다
'바람이 산줄기를 타고 내리며 나뭇잎들을 떨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최주사는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되돌아섰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아주 작게 말했다.' '트럭 한 대가 속력을 떨구고 잠시 서행한다.' '이 아이가 바로 내 아들이 떨구고 간 내 손자로구나.'
이렇듯 '떨구다'는 '아래로 떨어뜨리다, 힘없이 아래를 향하여 숙이다, 시선이 아래로 향하다, 값이나 속력을 낮추다, 뒤에 남겨 두다' 등의 뜻으로 문학작품이나 실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떨구다'는 표준말이 아니다. '떨어뜨리다'나 '떨어트리다'로 써야 맞다('-뜨리다'와 '-트리다'는 복수 표준어).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떨구다'를 '떨어뜨리다'의 잘못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많은 사전도 방언이나 속어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고개를 떨구다, 눈물을 떨구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다'처럼 '고개·눈물·시선' 등과 어울릴 때는 일반 사람들이 '떨어뜨리다'에 못지 않게 '떨구다'를 널리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떨구다'를 방언이나 속어에 묶어 두지 말고 표준말로 인정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표준말을 정하는 원칙이 '우리나라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할 때 '떨구다'는 표준말로 정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은 '떨구다'가 표준어가 아니라는 점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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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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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그리움 - 김미경
그대 흰빛 나래 물살 헤치고 그리움으로 오는 물새라면
내 너를 기다린 다면 터질듯 여문 갈대 한 웅큼 꺾어들고 출렁이는 갈대밭 끄트머리에 이렇듯 가만히 서 있으려마.
그대 마른 목소리 불러보고 하나 둘 닫혀진 눈거풀에 사랑한 줌 행복한 줌 입맞추고
일곱 빛깔 꿈을 따 설익은 우리 사랑 깊어가는 가을빛으로 익어가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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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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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돌 - 김우연
한 겹씩 곱게 벗기면 원석은 꽃밭이다
황국화 해바라기 매화 송이 모란꽃
공작이 날개를 펴며 꽃밭 길을 거닌다.
지난날 돌아보면 우리도 한 개 꽃 돌
갈고 닦아 빛은 내면 칠보석 꽃이 피어
번잡던 세상일들은 꽃밭 속에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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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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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저마다 하면 - 김창업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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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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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2장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영혼의 문제는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영혼이나 귀신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이나 방송에서도 전생, 귀신 등은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그럼, 철학에서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생각되는가.
이현구(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세계 '안'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자 할 때, 세계 '밖'의 것이 문제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죽음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죽음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아 온 현상이다. 그러나 죽음을 알려고 하다 보면 '죽음 뒤엔 어떤 세계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죽음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조사하자면 곧잘 죽음 뒤의 세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가 아닌 세계를 문제삼게 된다는 말이다. 과연 사람은 죽음 이후를 알 수 있을까? 죽은 뒤에도 어떤 세계가 있을까?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될까? 이런 물음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개념은 '영혼' 또는 '정신'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몸이 죽으면 영혼이나 정신도 같이 없어지는 것인가?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는가 아니면 얼마 동안만 존재하다가 결국 사라지는가? 영혼들만이 사는 세계가 어느 곳에 따로 있는가?
영화 '유혹의 선'(Flatliners)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려고 하는 의과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주인공들은 지금까지 종교, 철학,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를 자기들이 직접 사후세계를 찾아가서 알아 내 보자고 나선다. 비밀스런 장소에 실험장치를 하고 전기충격으로 죽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정지한 상태, 곧 죽음으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1분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긴 시간 동안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전기충격을 이용한 심폐소생술에 의하여 되돌아온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제각기 다른 세계를 보고 오는데, 대개 각 개인의 과거경험과 연관된 체험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의학의 기준으로 죽었다고 판정된 뒤 몇 시간에서 며칠씩 죽음 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자료가 이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꾸며 본 것일 뿐이고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해답을 준 것은 아니다. '사랑과 영혼'(Ghost)이라는 영화에는 영혼의 존재가 더욱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영혼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도 있고 연습을 통하여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도 있다. 이런 상상력을 계속 확대하면 잡담으로 하는 귀신 이야기들도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들이 아니다. 영혼에 대한 갖가지 잡다한 상상들이고 이야기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혼이나 귀신이란 주제는 사람들에게 계속 관심의 대상이 되어 '전생 이야기'나 미스터리 극장'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책을 통하여 또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퍼지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의 역사에서 이 문제들은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영혼 관념의 유래
20세기 말에 세계는 '지구촌'이라 불리듯이 하나의 마을처럼 가까워졌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하여 신속하게 알려지고, 인터넷을 통하여 온갖 정보들이 교환되고 있다. 지구의 어디에도 문명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관념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어서 현대의 원시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오지도 있다. 도시인들이 이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서 겪은 일화가 보고되어 있다. 사냥터를 향해 한참을 달리던 원주민들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직 더 달릴 수 있는데 쉬는 것이 이상하여 까닭을 물으니,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에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이 저 뒤에 처져 있어서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마음과 몸에 관한 하나의 관점이 들어 있는 이야기이다. 마음과 몸은 서로 떨어질 수 있고, 떨어져 있는 상태가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 말기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사진기가 사용되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이 기계를 두려워하였다. 자기의 모습을 신기하게 그대로 찍어내는 이 기계에는 자기의 혼을 뽑아가는 요사스런 귀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도 몸과 마음에 관한 하나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몸의 형상을 담은 사진 속에 그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의 일부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함부로 구기거나 밟거나 하면 그 사진의 주인공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남을 해치려는 주술적 방법으로 어떤 사람의 형상을 인형으로 만들어서 바늘로 찌르거나 함으로써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이런 이야기들 속에는 우리의 몸과는 다른 어떤 요소가 우리 안에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것은 마음, 정신, 영혼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존재들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원시적 관념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원시인들은 보통 애니미즘이라고 불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생물들 속에는 각 개체에 정령(아니마)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몸과 다른 요소를 인식하는 데에 기여한 여러 가지 경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꿈의 현상 같은 것이다. 나는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 속에서는 산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하거나 무서운 짐승에게 쫓기거나 한다. 이처럼 꿈을 우리 마음이 몸을 벗어나 다른 곳에 가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몸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던 무엇이 몸을 빠져나간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피와 살로 된 내 몸과 다른 정신적인 '나'를 가정하고 그것의 모양이 내 몸과 닮은 것이면서 물리적인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벽을 통과한다든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도교수련에 대한 책 속에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간 사람의 머리 위에 같은 모양의 작은 사람이 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이러한 것도 내 몸 속의 정신적 존재를 형상화한 것인데 수련가들은 이 정신적인 존재가 진짜 자기라고 보는 것이다.
영혼이나 정신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바꿔 말하면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속에서 발견되는 미라나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게 했다는 기록 등은 계속 살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다. 중국의 연단술은 불로초와 같이 사람을 늙지 않고 병들지 않게 하는 물질을 찾는 노력이 실패하자 그런 물질을 인공으로 만들어 내자는 생각으로 옮겨가면서 나온 기술이다. 연단술사들은 주사와 같은 광물질을 특수하게 정련시키면 그런 물질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 그런데 주사의 주성분은 황화 수은으로, 정련하면 마지막에는 치명적인 독극물인 수은이 남게 된다. 결국 사람들이 수은중독으로 생명을 잃게 되자 이 방법은 차츰 내단수련법으로 바뀌어 갔다. 내단수련법은 우리 몸 속에 있는 생명력을 특별한 수련을 통하여 강화시킴으로써 초능력을 가진 신선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죽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죽은 뒤에 사람의 몸은 분해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일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존재의 영속성에 희망을 걸어 보는 것이 마지막 방법이었다. 이처럼 개체의 영속성을 정신이나 영혼의 불멸로 연결시킨 생각이 '영혼불멸론'이다. 영혼불멸론을 믿는 입장에서는 개체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죽은 뒤에도 영속성이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불멸론과 소멸론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고 위진남북조 시기의 혼란기에 불교, 도교와 같은 신비적 성격의 종교가 현실적인 유교보다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의 영혼불멸론에 대한 비판과 이 비판에 대한 반론이 시끄러웠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범진(대략 445~515)의 '신멸론'과 같은 글들이 나왔다. '신멸론'은 정신은 사후에 반드시 소멸한다는 관점에서 영혼불멸의 이론을 문답형식으로 비판한 글이다. 물론 불교이론은 매우 복잡하고 여러 유파가 있어 영혼불멸론이 불교의 핵심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혼불멸을 믿는 힌두교를 배경으로 불교이론이 탄생하였고, 종교 전파의 과정에서 대중을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으로 영혼불멸이나 인과응보와 같은, 좀더 피부에 와 닿는 설명방식이 개발될 여지는 많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나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이나 극락의 즐거움을 대비시켜 착한 행동을 많이 하면 죽은 뒤에 극락에 다시 태어나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독사가 우글거리는 지옥에 간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설득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영혼불멸의 이론은 초기 기독교에서 성립하지 않았고, 중세 기독교에서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교리를 체계화하면서 자리잡았다.
유교이론은 영혼불멸인지 영혼소멸론인지를 확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대체로 영혼소멸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와 귀신의 문제에 대한 토론하는 것을 금기시한 공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자 자로가 죽음과 귀신 섬기는 법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삶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는가?"라고 답변하였다. 그런데 유교의 제사풍습을 보면 귀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유교의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에는 조상을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다. 제사의 절차를 보면 조상의 신을 모셔와서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드시게 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배웅하고 나서 상을 치우고 후손들이 음복을 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사는 조상의 신이 정말 찾아온다고 믿기 때문에 지내는 것일까? 유교의 죽음 이후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나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한다. 혼백은 4세대간 유지되다가 소멸하기 때문에 4대를 제사지낸다고 한다. 그러나 "논어"에서 공자는 죽은 뒤에 사람의 영혼이 있다든가 어떤 세계를 만난다는 말을 남긴 적이 없다. 제사의 풍습은 조상신을 모시는 고대의 풍습을 유교가 흡수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귀신이나 영혼 이론으로 제사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았던 것이 공자학파의 입장이다. 3년 상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사람이 태어나서 3년간은 부모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기간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삼았다. 유교의 제사도 인간의 존엄성과 농업 공동체 사회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에 중점이 있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길이 살아남는다. 가족이나 씨족의 단결과 협동의 매개로서 조상의 신은 작용한다.
유교사상가 가운데는 이 영혼의 문제를 화롯불과 온기의 관계로 설명한 경우가 있다. 곧 불이 우리의 육체라면 혼은 온기에 비길 수 있다는 뜻이다. 화롯불이 꺼지더라도 얼마 동안 방 안에 온기가 남아 있듯이 영혼은 죽음 뒤에 얼마 동안 존재하다가 서서히 사라진다는 비유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영혼불멸론은 아니지만 영혼불멸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영혼불멸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세계, 저승이나 천국과 같은 세계가 있다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기 때문에 영혼소멸론자들의 공격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다. 환담은 육체를 떠나 정신이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초와 촛불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촛불은 초가 다 타 버리면 꺼지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도 육체가 죽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충은 불과 불빛의 관계로 정신과 육체를 비유하였다. 불이 꺼지면 빛도 사라지듯이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소멸한다는 설명이다. 왕충은 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귀신의 모습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귀신을 사람이 죽은 뒤에 남은 '정신'이라고 본다면,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정신이 없는 것이므로 당연히 귀신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고 하였다. 범진은 '신멸론'에서 실체와 기능의 관계로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육체는 실체이고 정신은 육체의 기능이기 때문에 정신은 육체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를 범진은 '칼'과 '날카로움'의 관계로 비유하였다. 칼날의 예리함을 이용하여 물건을 벨 수 있지만 그 예리함은 칼이 있고 나서야 존재할 수 있다. 칼이 없이는 칼의 베는 작용이 있을 수 없듯이 육체가 없으면 정신의 작용도 존재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영혼불멸론을 비판하는 이런 논증이나 비유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이지만 끝내 이 문제는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영혼불멸론을 믿는 사람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영혼론에 연관된 문제들
죽은 뒤의 영혼에 관한 견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인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나 가치판단에 영향을 준다. 소설 "혼불"의 한 대사를 보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두 아들이 죽음에 대하여 서로 다른 관점을 표현한 대목이 있다.
(동생의 말) "살아 있을 때 온 정신을 다 쏟아 놓은 일이 결국은 그 사람의 죽음 다음을 비춰 주는 게지요.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어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지, 죽어 버리면 인간은 한낱 물질로 돌아가 썩어서 흙이 되고 물이 되는 것. 그 죽은 시체를 위해 온갖 절차를 갖추고 성대히 상례를 치르는 것은 아마 허위에 불과한 일일 게요. 아니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저 자신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한 놀이든지." (형의 말) "지나치게 재물 공력을 많이 들여 가산이 피폐해질 정도로 장사를 지낸다 하면 그것은 폐습이겠지만, 가령 죽은 개 한 마리 묻는 것이나 한가지로 사람 죽은 몸뚱이를 함부로 내다 버린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산 사람도 그처럼 하찮게 대해 버리고, 거기다가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네. 시신을 지극히 공경해서 존엄하게 모시는 것은, 죽음을 헛되이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일 것이야."
두 사람은 모두 유학자들이어서 사후에 영혼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장례식의 형식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토론하고 있다. 사후에 영혼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동생은 많은 비용을 들여서 장례식에 공력을 쏟는 일이 의미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형은 이러한 장례식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연관된 문제라고 신중론을 펴고 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집단자살하는 사건 보도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들어왔을 때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서양의 종교가 부자의 천륜을 끊고 삶보다 죽음을 좋아하는 이단사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대결의식과 불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논쟁의 초점을 천당과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 문제에 맞춘 것이다.
장자는 '해골과의 대화'라는 우화를 통하여 사람들이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죽은 뒤에 얼마나 즐거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면서 왜 사람들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삶이 절대적으로 좋고 죽음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되돌아보기 위한 우화였다. '살기 위하여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하는 삶의 태도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장자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싫은 것이라는 고정된 관념을 깨고자 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후세계, 저승이나 피안을 말하게 되었다. 실제로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후세계에 대하여는 우리가 모른다고 해야 가장 옳은 태도라고 보고 사후세계가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모두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장자의 이러한 불가지론적 태도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영혼불멸을 믿거나 그것에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은 모두 이 세계 밖의 가공의 세계, 거짓 세계, 허무의 세계를 가지고 우둔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비판이다.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분리된 두 실체로 보고 이론을 세웠던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이 통일되어 있는 구체적 인간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세계에는 생각하는 '정신'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이 있고,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통합될 수 없다. 만약 술에 만취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하는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육체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하여 감옥에 가둔다면 육체만 가둘 수 있을 것인가. 정신에 책임이 있다고 하여 육체를 가둔다면 아무 관계도 없는 놈을 가둬 두는 꼴이 된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구분하고 정신적인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러한 생각의 계열을 철학사에서는 관념론이라고 분류한다. 중세 기독교의 영혼론 가운데 존재하는 것들을 세 종류로 분류한 방식이 있다. 물질적인 것들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영혼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모든 것은 신이 창조한 것이고 신의 창조물 가운데 영혼은 신을 닮은 존재로서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는 영속성을 갖는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영혼에 관한 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연관된 하나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가노우 요시미쓰, "중국의학과 철학", 여강, 1991. 이현구, 김범춘, 우기동, "박물관에서 꺼내 온 철학이야기", 우리교육, 1995. 장대년, "중국 유물사상사", 이론과 실천, 1989. S. 토카레프, "세계와 종교", 사상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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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요즘 며느리들이 좋아하는 시아버지 직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님?"
나이 지긋한 기사분이 택시 안에서 내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며느리들이 좋아하는 직업이라...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어느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요즘 며느리들은 시아버지가 개인택시 영업하는 것을 선호한다는군요.” “아, 그렇습니까. 하긴 맞는 말 같군요. 개인택시 기사는 조기퇴직이다 명예퇴직이다 해서 쫓겨날 염려가 없으니까요.” “암요! 그래서 저는 아들 녀석 장가 보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늙으면 용돈 때문에 며느리 눈치 보지 않아서 좋고.... 게다가 손주 용돈도 듬뿍 줄 수 있으니 말년 걱정은 덜한 편이지요.” “제가 생각해 봐도 지금 택시 운전하시는 분들처럼 마음 편한 직업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 기사분의 말을 듣고 보니 나 역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말이지, 예전만 해도 택시 기사라고 하면 누가 제대로 대접이나 했습니까? 자식들도 지들 애비가 택시 운전한다고 부끄러워하는 게 보통이었지요. 하지만 이젠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요. 제 자식들은 아버지가 이렇게 택시 운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답니다. 지금이야 자식 공부 뒷바라지 하려면 잠자는 시간도 줄이면서 열심히 벌어야하지요. 하지만 10년, 20년 후를 바라보면 마음 편안합니다. 노후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요!”
그 기사분은 썩 기분좋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렇다. 기사분의 얘기를 듣고보니 정말 우리 사회에 달라지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나 박사, 의사, 변호사, 약사... 등 소위 ‘사’자 붙는 직업이 여전히 대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전과 달리 최상의 직업이라고는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누가 뭐라든 자신의 적성과 개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발전하는 만큼 직업들도 많이 다양해졌고 기술직만 해도 ‘1인1기 교육’이라 하여 각광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전만 해도 ‘광대’라 하여 천시하던 연예인들이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또 스포츠인들도 연예인 못지 않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택시 안에서도 느낄 수 있다. 내가 만나는 기사분들 중에는 최고학부를 나온 이들도 있고 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직업에 대한 귀천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언젠가 김포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우연히 앞에 놓인 면허증을 보니 ‘호주’국적이었다.
“기사님,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취득한 면허증이 아니군요?”
그러자 나이 지긋한 그 기사분은 미소를 때며,
“호주에서 영사 생활을 20년간 하다가 우리나라에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 취직하기보다는 이렇게 운전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그 기사분의 사고방식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체면을 무엇보다도 앞세우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무척 당당해 보이는 그 기사분의 표정을 보니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 기사분이 말을 이었다.
“스님, 외국의 경우에는 은행장으로 정년퇴임한 뒤 은행의 수위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역장으로 퇴임한 후 구두 닦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도 들은 적이 있소만, 잘 사는 나라일수록 직업에 있어 귀천이 없는게 사실인가 봅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선 하나의 직업을 대대로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디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서 대기업에 취직하는 대신, 선조가 대대로 해오던 자그마한 소바(국수)가게를 영영하며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는 얘길 들었지요.” “우리나라 같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아닙니까. 애써 힘들게 공부를 해서 고작 국수나 만들어 판다는 일이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아버지의 직업을 창피하게 여기기는커녕 자식이 오히려 그 직업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지요? 바로 그 점이 우리와 다른 그네들 사고방식이고 차이점이기도 하지요. 이런 좋은 점은 우리도 좀 그들에게 배웠으면 하는 부분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이젠 많이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맞장구를 치던 그 기사분은,
“스님, 저는 이따금 ‘나야말로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제게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일전에 제가 아는 사람이 와서 자문을 구하더라고요.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했는데 막상 일없이 놀기만 하자니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택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절더러 좀 도와달라는 거였지요. 그 사람, 늘 골프만 치고 살 수 있는 여유 있는 형편인데도 말입니다.”라고 했다. “저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고생 그만하고 편히 쉬시지요.라는 말처럼 듣기 싫은 말은 없지요. 스님, 제발 좀더 열심히 다니세요, 열심히 다니셔서 일을 더 많이 하셔야지요,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저로선 제일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렇다. 사람에게 있어 일이란 활력을 주는 것이다. 또 인생의 젊음을 유지하게 만드는 필수 비타민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난 사람을 얼마 후에 보면 몰라보게 늙어 있거나 거의 폐인처럼 변해 있는 모습을 마주치고 놀라는 때가 있다. 그 사람에게 일이 없다는 것이 쉬 늙게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일이란 것이 사람에게 새로운 힘과 살아나가는 활력을 주는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에게 직업이 있다는 사실은 우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선택한 사람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이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공의 대열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성공하는 사람은 한 길만을 선택하고 거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사업과는 인연이 먼 사업에 투자를 하는데, 참된 금광맥은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자기 자신의 공장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카네기의 말처럼 바로 자신의 눈앞에 금광맥이 있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서 성공하려면 우선 자신의 일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과 직업에 대해 긍지와 사랑을 갖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그에게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첫째는 말을 적게 하며, 둘째는 일을 즐길 것이며, 셋째는 한가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세 가지를 다 실천하기는 너무 많으니 그 중에 한 가지를 빼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그렇다면 한가한 시간을 갖는 것을 버리게.”라고 했다고 한다.
일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는,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론이었다. 약은 여우보다는 미련한 곰이 먼저 강을 건너게 된다고 한다. 얕은 꾀보다는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에 달라붙는 길만이 성공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미치면 미치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일을 좋아해서 미치도록 열심히 몰두하다 보면 성공에 이르게(미치게)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공의 열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을 좋아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다. 자부심을 지니고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할 때 성공이란 스스로 다가오는 것이니, 우리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자. 먼저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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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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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3. 정중부의 반란 : 실제로는 하급 장교들의 군사 쿠데타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까지 : 타락의 극치를 이룬 문벌귀족
이자겸과 묘청의 반란을 겪으면서 고려의 왕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특히 묘청난 이후 세력을 거머쥔 개경 중심의 문벌귀족들은 왕실을 좌우하면서 지배 계급으로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럴수록 사회의 모순은 심화되어 갔다. 당시 정치적 성향은 마치 19세기 세도정치 때 노론의 일당독재가 횡행했던 것처럼 서경 세력의 몰락으로 개경 세력이 일당독재적인 방식으로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치는 대부분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마련이다. 원래 태조 때부터 고려의 국왕들은 개경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경 세력을 양성하였다. 태조의 북진정책이나 광종이 서경을 서도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이다. 또한 인종 이전까지도 서경천도론을 계속 거론하여 개경 세력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립적인 세력이 존재함으로써 고려 건국 때부터 온갖 특혜를 누려온 귀족들은 문치주의에 입각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청난 이후 그 균형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동기에 대해 1)왕과 문신들의 타락 2)무신들의 지위 격하와 이에 따른 불만 등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종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18대 왕 의종(1146-1170)이 방탕을 일삼아 문벌귀족들의 타락 역시 극에 달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종이 처음부터 방탕한 왕이었는가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146년 인종이 죽고 나자 대관전에서 왕위에 오른 의종의 나이는 불과 19세의 청년이었다.(의종은 1127년생이다.) 선왕을 통해 정치적 경륜을 배울 틈도 없이 바로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개경 문벌귀족들의 견제를 견뎌낼 수 없었다. 오히려 왕권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으니 의종으로서는 항상 신변의 위험마저 느껴야 했다. 물론 의종이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 왕권을 회복했다면 그러한 위치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묘청난 이후 유일한 왕실의 세력 기반이었던 서경 세력의 몰락으로 개경 세력의 정치적 독점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의종의 개인적 성품이 나약하고 섬세해서 왕권 회복이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역으로 말해서 왕이 스스로 위협을 느낄 정도로 이미 왕권은 극히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인종 때보다 더 강성해진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고려는 열세에 놓여 있어 안팎으로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의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의종은 궁궐 내에 있기가 싫어 자주 궁 밖으로 나갔다. 일종의 도피 행각이었다. 그러나 의종이 처음부터 이러한 도피 행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의종은 몰락한 서경 세력의 회복을 바라는 여망에서 1454년(의종 8년) 서경에 중흥사라는 절을 창건하였고 4년 후인 1158년에는 백주에 별궁을 지어놓았다. 그런데 이때 별궁의 이름 역시'중흥'이었다. <고려사>에 보면 이 절을 짓게 된 동기가 태사감후의 자리에 있던 유원도의 상소에 따른 것이라고 나와 있다. 유원도는 상소에서 백주 토산이 중흥의 땅이니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의종은 그곳 풍수를 알아보게 하였고 궁궐을 지을 만하다는 결과 보고가 나오자 즉시 별궁을 지었던 것이다. 또한 1470년에도 서경을 방문하여 거기서 왕권 강화와 개혁을 바라는 뜻에서 신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개경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밖에 의종은 항상 "민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역설하면서 문벌 귀족들의 착취 행각을 은근히 비판, 선정을 베풀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그런데 여기서 의종이 펼친 왕권 복원사업을 자세히 보면 불교나 풍수지리 등 유교와 상반되는 이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의종은 유교적 문치주의를 정권 장악에 이용한 개경의 문벌귀족들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의종이 절의 이름이나 별궁의 이름을 '중흥'이라고 지었다는 데에서 그의 왕권 회복을 위한 힘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왕권 회복 노력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으니 의종으로서 할 일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부처에게 빌거나 향락을 일삼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의 성품이나 시대적 한계상 의종은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의종이 말년에 가까울수록 방탕과 사치 향락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종을 무조건 폭군이나 악군으로 몰아부친다면 올바른 이해가 아닐 것이다. 의종의 방종은 정치적 실의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책임은 당시 문벌귀족들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의종의 모든 정책에 제동을 걸어 왕권을 완전히 실추시켰으며 이에 따른 왕의 타락을 방조하면서 정권 유지에 이용했던 것이다. 의종의 주변에 측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힘은 매욱 허약해서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봤을 때 정중부의 반란 대상이었던 왕과 문벌귀족을 같은 범주에 묶어 버린다면 의종은 완전히 타락한 왕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 될 것이다. 이렇듯 왕권이 실추된 상태에서는 그 위치를 대신하려는 세력들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정권의 공동화 현상이 두드러지자 문벌귀족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어 정치는 구심점을 잃은 채 표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군사력을 지닌 무신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종은 축출 대상이 아니었다. 무신들은 왕이 문벌귀족들에 의해 희롱을 당하고 심지어는 암살의 위협까지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의 방탕은 무기력에서 비롯된 자위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의종 역시 무신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문벌들의 타락이 극에 달한 지경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집단은 무신들 뿐이었다. 주관적인 판단일지는 모르지만 의종은 내심 정중부 등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면 하는 뜻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의종은 막다른 길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반란의 배경 : 정치의 부재와 사회 모순의 극대화
이제는 무신난의 두번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무신들의 지위 격하와 이에 따른 불만'에 대해 검토해볼 차례이다. 사실 고대로부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집단은 '문'을 중시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은 국가를 운영할 이념과 정책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대체로 무신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려에 접어들어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직접적인 공을 세운 것은 무신들이지만 그 공을 가로챈 것은 문신들이었다. 또한 전쟁이 벌어지면 최고 책임자는 언제나 문신이었다. 거란족과 담판을 지은 서희나 구주대첩을 지휘한 강감찬, 여진을 정벌한 윤관, 묘청난 때 출정한 김부식 등은 모두 문신이었다. 물론 이들이 각 전투의 최고 책임자였지만 그 이면에는 무신들의 활약이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공은 문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의 난과 묘청난 등으로 전에 비하여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문벌귀족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져 의종 때에도 문존무비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아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일상적인 일로 되어 있었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물론이고 군사 작전시에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그 아래에서 지휘를 받는 일이 관례가 되어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등 문신들은 무신들의 존재를 무시하다시피 하였다. 이러다보니 하급 장교들이나 군사들은 더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정중부의 반란 때 활동한 중심 인물들이 하급 장교라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여기까지 보면 무신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신들에 대한 차별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무신은 언제나 문신들의 손발 역할을 해야 했고 지휘 체제에서도 하위 개념에 속해 있었다. 또한 다른 시대에도 의종 때보다도 더 무신들의 차별 대우가 극심한 적이 많았다. 따라서 무신들의 반란 원인을 단순히 신분적인 불만에서만 찾는다면 반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큰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왕권의 실추에 따른 올바른 정치 부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종 이래로 왕권이 극히 쇠약해짐에 따라 권력 장악을 놓고 문무간의 또는 왕과 문신, 그리고 귀족들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정치적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반란이 쉽게 성공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무신들의 반란은 단순히 우발적이거나 개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지배층의 모순이 낳은 정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신들이나 군사들이 고역과 빈궁에 시달렸던 점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실의에 빠진 의종은 그 대가로 궁궐이나 사찰 창건에 주력하여 농민이나 군사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다. 의종은 이같은 일을 통해 그나마 왕권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로 인해 일반 군사들은 굶주림과 노역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들의 정변이 일어날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사정도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태조가 건국하여 농민 등 민중들의 복지 문제를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귀족들의 토지 겸병이 심화되어 사회 모순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은 높아지고 개간 등을 통해 수확물이 증대되었지만 결국 귀족들의 착취에 의해 민중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점점 감소되었다. 12세기에 들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자 귀족들은 자연히 토지 확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농민들이 이루어놓은 생산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강제로 토지를 빼앗아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반대로 농민들은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문벌귀족들이나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로 인해 농촌경제는 큰 위기에 빠져 심지어는 토지를 잃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속출하였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저항도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의종 때에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문신 귀족정치의 모순이 극에 달하였다. 12세기의 생산력 발전에 따른 토지 수탈은 심지어는 권력을 장악한 귀족들에 의해 양반 계층에게도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배체제는 대립의 양상으로 치달아 갈등을 낳게 되어 사회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자겸, 묘청 등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 모순은 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반기를 든 정중부 : 실제로는 하급 장교들이 주역이었다
우선 정중부의 반란이 우발적인 것도, 그렇다고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설명하려 한다. 문벌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의종은 일부러 별궁을 짓거나 사찰을 창건하여 자기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문신들과 모여 자주 연회를 가졌고 장소도 여기저기로 옮겨다녔다. 그만큼 무신들이나 군졸들은 과도한 근무에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왕의 행차 때 신변 보호를 위해 무신들이나 군졸들이 동원되는 것은 당시 법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연회 장소에서 무신들은 대부분 소외되어 왕과 문신들이 즐기는 동안에 무신들이나 군졸들은 계속 보초를 서고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뜩이나 평소 차별에 시달려왔던 무신들은 왕과 문신들의 방탕을 증오하면서 마음 속 깊이 불만을 품었다. 그 가운데는 반역의 뜻을 품은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던중 1170년, 의종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문신들과 함께 화평재에서 술잔을 나누고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놀이에 빠져 돌아갈 줄을 몰랐다. <고려사> [정중부전]에 따르면 이때 무신들은 심히 굶주려 있었다고 한다.(대체로 이 부분에 대해 별로 의심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아무리 무신들이나 군졸들이 문신들을 호위하고 다녔지만 전시도 아닌데 난을 일으킬 정도로 굶주렸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곳에서도 지적을 하겠지만, 고려 역사의 주요 사료가 조선 때 편찬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라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길이 막연하다. 다만 여기서 행간의 의미를 읽자면, 굶주림에 시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신들이나 군졸들이 호위 근무에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때 정중부가 소변을 보러 나가자 이의방과 이고가 뒤쫓아가 그에게 귓속말로 말하였다.
"문관들은 의기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관들은 굶주려 피로해졌으니 어찌 참을 수가 있습니까?"
전에 김부식의 아들인 내시 김돈중이 인종 앞에서 무예를 선보이고 있던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린 적이 있었다. 무신들이 얼마나 문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정중부는 화가 나 그 자리에서 김돈중의 멱살을 잡고 혼을 내주었다. 이 사실이 김부식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인종에게 정중부를 매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인종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김부식의 뜻이 너무 완강해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이 사실을 미리 정중부에게 알려 화를 면하게 하였다. 젊었을 때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있던 정중부는 계속된 문신들의 차별에 깊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의방 등이 역모를 권해오자 그도 역시 동의하고 나섰다.
"지금이 거사할 때다. 그러나 왕이 만약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만 두기로 하고 만일 또 보현원으로 옮겨 가거든 그때 거사를 하자."
그런데 다음날 의종은 마침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호종하는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 보현원으로 향하던중 오문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왕과 문신들의 술잔치는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술잔이 돌고 여흥이 감돌자 의종은 좌우 풍경을 살펴보더니, "장하도다! 여기가 바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로구나" 하면서 갑자기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일종의 무술 시범. 또는 그와 유사한 공연)를 시켰다. 무신들은 왕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기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의종은 계속되는 연회 속에서 고생하는 무신들을 위로하고 공연을 빌미로 상을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문신들 때문에 연회장에 얼씬거리지도 못하는 무신들을 의종은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의도를 눈치챈 문신이 있었다. 바로 한뢰였다.
마침내 박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장군 이소응은 얼굴이 수척하고 힘이 없어 한 사람과 박희를 하다가 그만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자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뢰가 나서서 이소응의 뺨을 후려쳤다. 이에 다른 문신들인 이복기, 임종식이 이소응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왕 앞에서 당돌하게 시범을 중단하느냐는 질책이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연회장은 문신들의 욕설과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박희를 하던 다른 무신들은 참혹한 심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정중부, 김광미, 양숙, 진준 등 무신들의 낯빛이 변하더니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반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중부는 한뢰를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이소응은 무관이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째서 이처럼 심한 모욕을 하는가!"의종이 보니 무신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의종은 사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 정중부의 손을 잡으며 제지하였다. 이때 이고가 칼을 뽑으려 정중부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이고를 말렸다. 이렇게 해서 일단 한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그러나 유혈 사태는 얼마 가지 않아 벌어지고 말았다.
해가 저물어 왕과 일행은 보현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의방과 이고는 왕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순검 군사(왕의 호위군대)를 조용히 한 곳에 불러모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까 낮에 이소응을 힐난하던 임종식과 이복기를 살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무신들의 반란은 시작된 것이다. 한뢰는 사태가 급하자 왕의 침실로 숨어들어가 왕의 옷자락에 매달렸지만 결국 이고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러한 살육으로 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대부분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수도 성내에도 정예군을 급히 보내어 왕실이나 문신들이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분쇄하였다. 그러나 무신들의 살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처음 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중부 등이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를 벗자. 그렇지 않은 자는 모조리 죽여라" 하여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반란군은 그날 밤으로 왕을 데리고 개경으로 들어와서 중요 문신 50여 명을 또 학살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반 군졸들이 반란에 가세하여 개경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가 된 상태였다. 이들은 외쳐대기를,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씨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신들을 모두 죽이지는 못하였다. 고려 문종 때 중앙 문관의 정원이 532인이고 그 이속의 정원은 1,165인이었다. 그런데 반란 세력에 의하여 학살된 문신의 수는 모두 합쳐야 100여 명 정도로 보인다. 씨도 남기지 말라고 외치며 개경 거리를 활보했다는 것은 평소 문신들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대목이다.
이때 의종은 정중부를 불러 정변을 중지하라고 회유하였으나 그는 "예"라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미 사태는 정중부의 손에서도 떠나 그동안 쌓인 무관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중부는 의종에게 해롭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정중부는 의종의 곽정동택, 관북택, 천동택 등 사저와 거기에 축적한 많은 재물을 이의민, 이고 등과 나누어 차지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의종을 제거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환관 왕광취 등이 반격을 하자 정중부는 왕을 수행하던 내시 등 20여 명을 죽이고 말았다. 이 일을 통하여 왕이 궁궐 내에 있으면 계속적인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의방 등은 의종을 처음부터 죽이려 하였으나 정중부가 말린 적이 있었다. 또한 문신들을 진짜 모두 죽이자고 했을 때로 정중부는 제지하였다. 비록 무신이지만 고위직에 있던 정중부는 문신 몇 사람에 대해서만 개인적인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군졸들이 봉기했다'고 할 정도로 수습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의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반란군 중심 인물들을 주요 요직에 임명하였지만 결국 3일이 지난 날 군기감에서 영은관으로, 그리고 다시 거제도로 쫓겨나야 했고, 태자는 진도로 가게 되어 무신들의 천하가 열리게 되었다. 무신들은 의종의 아우인 익양후 호를 허수아비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명종(1170-1197)이다. 왕위에 오른 명종은 곧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을 벽상공신에 봉하고 대사령을 내리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그는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할 뿐, 정치적인 실권은 반란 세력이 장악하여 마침내 무신정권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정중부의 반란'이라고 부르는 이 무신들의 반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반란 주도 세력간의 입장 차이이다. 사실 정중부는 주요 문신들을 모두 제거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장군이라는 무관 고위직에 있었던 그는 나름대로 계급적인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문신들에게 불만을 품은 것은 김돈중 사건처럼 개인적인 원한이나 문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있는 자신의 위치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중부는 당시 60이 넘은 노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중부처럼 온건적인 입장에 선 인물들이 분명 있었다. 이러한 점은 반란에 동참한 대장군 진준이 "우리들이 미워하는 것은 문신 4, 5명인데 지금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면서 더이상의 학살을 적극 만류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설득력이 없어 오히려 군졸들은 문신들의 집을 부숴버릴 정도로 사태는 악화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감정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란이 전개될수록 사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 일반 군졸들까지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 집단 살육이 벌어져 정중부로서도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주도해나갔다. 그렇다면 사태를 이토록 확대한 인물들은 누구인가. 바로 정중부에게 반란을 꾀하자고 말한 이의방과 이고 등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정중부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먼저 대장군 우학유를 찾아갔다. 우학유는 전통적인 무반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신들을 대표할 만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유학유는 현실에 안주하기 위하여 이의방 등의 요청을 거절했다. 우학유에 대한 포섭이 실패로 끝나자 정중부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무신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할 만큼 아직 높은 지위에 올라 있지 않았다는 것을 역으로 추리할 수 있다. 실제로 이의방과 이고는 정8품에 해당되는 산원의 위치에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중급 또는 하급 장교에 불과했다. 그밖에 반란에 참여한 조원정, 석린, 이영진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수공업자였고 할머니나 어머니가 모두 기생 출신이었다는 조원정은 무신란 이후 그 공로로 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 지위 역시 하급에 속한다. 이영진은 나졸 출신으로 창고 곁에서 쌀을 주워먹고 살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 살았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가세하여 출세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원래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영진 역시 반란 후 낭장에 임명되었다. 낭장이라는 관직은 중앙군 조직에서 중량장 바로 아래에 해당되며 다섯번째 계급에 해당된다. 품관으로는 정6품이다. 각 영에 5인씩 배치하였는데 통솔 군졸 수는 약 200명에 해당된다. 공을 인정받아 낭장이 되었다면 그들은 모두 하급 장교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제로 하급 이하 장교들이나 일반 군졸들이 문신들의 횡포에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란이 있기 전부터 이의방 등은 왕마저 교체시키고 정권을 장악할 심산이었다. 지배체제의 동요와 정치적 구심점이 상실된 시점에서 하급 장교들이 하극상을 할 정도로 당시 고려사회는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변이 수습된 후 세력을 잡은 사람은 이의방이었다. 그는 천성이 악한 탓인지 자기의 동지였던 이고와 세력 다툼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이미 나이가 든 정중부는 젊은 장교들의 행태에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중부는 이의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집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의방 형제는 손에 술을 들고 정중부를 찾아가 부자의 인연을 맺자고 제의, 정중부는 이를 수락하였다. 이의방은 정중부가 혹시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하여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이의방은 혼자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다른 무신들이 반발하며 나섰고, '조위총의 반란' 진압 작전에서 크게 패한 이의방은 결국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의 형인 이준의마저 이의방의 행동을 못마땅히 여겨 죽일려고 했을 정도로 그는 매우 포악하고 독단적인 인물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 때에도 시국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일대 개혁을 바라는 일반 군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정중부 정권은 하급 무관들과 심한 대립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일부 의견을 수렴하여 정치에 반영하긴 했지만 원천적인 갈등 요소는 없앨 수 없었다. 또한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 정국은 다시 유혈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갔다. 세력을 잡은 정중부 역시 정권 유지에 급급해 정적을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았다. 1171년, 김보당 등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난을 일으켰다. 정중부는 이를 평정하고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 유인준을 따라 경주까지 왔던 의종을 잡기 위해 이의민을 급파하였다. 이에 이의민은 손으로 의종의 등뼈를 추려 죽이고 연못 속에 던져버렸다. 김보당이 신문을 당하면서 모든 문신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 진술하자, 정중부는 그동안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던 문신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준의, 진준 등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이토록 정중부도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권에 맛을 들인 정중부는 조위총의 반란이 있던 1174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남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주위에는 아부하는 자들만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니 정중부 정권은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중부는 결국 1179년(명종 9년) 아들과 사위 등과 함께 경대승에게 살해당하였다.
정중부의 반란은 무신들의 신분적 차별은 물론이고 당대 지배계급의 동요와 사회 모순의 심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 모순이 심화된 상태에서 이에 대한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반란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통치 능력이 없는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는 구심점을 잃고 혼미를 거듭하였던 것이며 정통성이 없는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의 등장으로 고려의 역사는 암울한 터널을 거쳐 나가야만 했다. 사실 정중부의 반란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로써 무신들간의 정권 다툼이 반복되면서 백년 동안의 무신정권 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층부의 동요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였으니 '고려 민란의 시대'는 무신정권의 모순 자체 속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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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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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아름다운 순간들.1
1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깊이 음미하지도 못한 채 그냥 그냥 지나쳐 버릴 때가 많은 것 같다. 사람마다 자기가 체험하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적어 두는 수첩이라도 있으면 어떨까.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듣게 되는 이웃의 어떤 표정, 말씨, 마음씨, 자연의 한 장면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삶의 한순간을 밝혀줄 수 있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음은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발견하고, 맛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아름다움의 힘을 더욱 깊이 알아듣게 되겠지.
2 밤새 심한 태풍이 불던 다음 날. 정원의 수많은 백합들이 거의 가 못쓰게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아침에 창을 열었을 때, 얼굴 하나 안 상하고 웃어주던 그 하얀 꽃들의 얼굴, 얼굴, 그 고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정말 신기하지요?' 우리는 몇번이나 수녀원 안뜰에 나가 태풍에도 잘 견디어낸 꽃들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3 점심식사 후에 잠시 다녀온 오늘의 바다 빛깔은 특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함께 산책을 나간 분으로부터 '엄마, 파도는 모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밀려오는 거지?' 했다는 어는 어린아이의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어린아이야말로 천재적인 시인이라는 생각이 더욱 새롭다.
4 오늘 산책길에서 마주친 한 마리 고운 새의 이름을 찾아야했다. 인기척에도 놀라 금방 도망갈지 모르니 좀더 우리 수녀원 산길에서 놀다 갈 수있도록 다근 길로 돌아가자며 내 팔을 잡아끌던 도료 수녀의 그 마음씨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늘고 여린 그의 음성이 내 안에 고운 새의 발자국처럼 찍혀있다.
5 며칠 전에 경은이가 가져온 분홍갑사 주머니 안의 나팔꽃씨를 머리맡에 두로 자니 내 침대가 꽃밭이 되는 것만 같다. 종이 봉투나 비닐봉지에 넣지 않고 일부러 헝겊주머니를 만들어 꽃씨를 넣어보낸 사람의 그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6 비오는 날의 여행길에서 돌아온 어느 저녁, 나는 잔뜩 흙 묻은 신발을 미처 닦을 틈도 없이 아침을 맞이했는데. 누군가 깨끗이 닦아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속으로 짐작되는 이가 있어 대뜸 '이 신발 수녀님이 닦았지요?' 했더니 아무 대답도 없이 씨익 웃기만 하던 그 젊은 후배 수녀의 은은한 아름다움이 한촉의 난의 향기로 내게 머문다.
7 임종이 가까울 만큼 위독한 상태에서도 가벼운 병을 옆 침대에 입원해 있는 나를 더욱 걱정하며 지켜봐주시던 그 사랑 많은 노 수녀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수녀님의 묘지에 오를 때마다 그 분처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무척 부끄럽다. '풀은 무덤위에 아름답게 자라난 머리카락인 듯도 하다.'는 휘트먼의 <풀잎>의 한 구절을 뇌어보는 수녀원 묘지 위에서의 쓸쓸한 아름다움
8 수녀들이 각자의 일터에서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하면 서로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신생아실에서 일하면요, 아기들의 울음소리에서 생명을 느껴요. 그런데 부모가 사이 좋고 정상적인 관계인 아기들은 울음소리가 너무 크고 우렁찬 데 비해서 미혼모의 아기들은 울음소리부터가 너무 작고 힘이 없어 불쌍해요'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수녀도 있고, '염소를 키워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이번에 또 새끼를 낳았는데 구경하려 오세요' 하는 이도 있고, '오늘 먹은 호박은 제가 농사지은 것입니다. 올해는 호박이 몇백 개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 하는 이도 있고 '몹시 편찮으신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하는 양로원의 수녀, '가출한 우리반 학생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하는 교사 수녀 등등 소임의 종류만큼 이야기도 다양하다.
수녀들 각자가 표현하는 기쁨, 슬픔, 근심은 어느새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니 우리의 '기도의 일'또한 끝이 없다.
9 손님이 자주 드나드는 객실에 다 쓰고 난 잉크병을 씻어 그 안에 하얀 자갈을 깔고 살짝 꽂아 놓은 들꽃 한송이를 보고 또 보며 기뻐하는 나를 보고, 객실 담당자로서의 흐뭇한 보람을 환한 웃음으로 표현하는 듯한 어느 예비수녀의 그 모습이 작은 들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답다.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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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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