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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10 호
단기 4340. 12. 21 (음력 11. 1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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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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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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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고신뢰감 넘치는 어린아이의 눈빛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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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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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무엇보다 생명을 사랑하라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은 욕심이 물들지 않은 양심이지만, 어른이 되면 벌써 욕구에 눈을 뜬다. 어른 된 마음이란 의리가 다 갖추어진 이성과 판단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도덕심이란 곧 의리를 깨달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두 가지의 마음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바깥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그에 따른 인생이 없을 수 없게 되고 생명을 사랑하면 도덕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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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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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1장 - 생각한다는 것
1. 마음속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
우리들의 눈에 자주 띠는 풍경이지만-예컨대 10월 하순의 저녁 무렵, 석양이 정원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대문에 서서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당신은 멍하니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고 하자.-이때 누군가가 살짝 곁에 다가와서 "뭘 생각하고 있지?"하고 말을 건다. 이럴 때 당신은 곧장 적당한 대답을 찾아낼 수가 있을까? 또 밤이 되어, 책을 읽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즐거운 독서를 할 때와는 달리 얼굴을 온통 찌푸리고 책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럴 때 "지금 뭘 생각하고 있지?" "그건 무슨 책이지?" 하고 갑자기 상대방으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면, 조금 전 어느 날 저녁 무렵 때처럼 "응, 뭐 별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지" 하고 대답해 버리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막연하게 아참, 이런 일은 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자신도 은연중 얼마나 차리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잘 정돈된 방과 같은 것이 아니고, 자신도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고, 어두컴컴하고 마치 모기가 사는 창고와 같은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더구나 마음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려고 문을 열어 보면, 갑자기 고동색의 한 작은 모기 새끼가 얼른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사실 유쾌한 일은 못된다. "뭘 생각하고 있지?" 하고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들이 흔히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때로는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대 우리들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짖거나,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으려고 두세 번 시도해 보고는 실망해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강아지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진지하게 연습하면, 적어도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 시도하려면, 아주 멍하니 얼이 빠져 있을 때, 즉 우리들의 의식이 완전히 경계를 풀고 있을 경우에는 오히려 적당하지 않으며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데는 좀더 좋은 기회가 있다. 예를 들면, 신문을 읽고 있는데 그 신문에 실린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하는 다채로운 기사 거리에 약간 싫증나기는 했어도 아직은 그렇게 피곤한 상태가 아닌 때, 차를 타고 있는데 차의 진동이 쾌적해서 마음을 놓을 상태가 되었을 때,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듯한 기분인 데도 아직은 마음의 활동이 다소 느슨하기는 하지만 계속되고 있을 때, 또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그 강연이 주위를 기울여 들을 만한 값어치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는 경우 등등 즉 우리들의 마음이 잠깐 동안 휴식하는 상태에 있을 경우가 자기의 마음을 활동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잇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의식을 갑자기 긴장시켜서, 3초나 4초 정도, 마음의 흐름의 일부를 멈추고 '자,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하고 자기 자신을 검사하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하는 데 성공을 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계속 시도해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떤 의식의 실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손쉬운 방법이며, 또 이 방법을 해보면 해볼수록 쉽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마음의 헝클어짐
"뭘 생각하고 있느냐구요? 그거야 당신이 쓴 책에 관해서지요. 내가 그 책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이 책을 쓴 당신 자신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내용에 무척 호감이 갑니다" "당신이 매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뭘 생각하고 계시느냐고 묻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만일 약간의 흥미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면, 그건 별로 도움이 안되지요. 그런데 당신은 이 테마가 마음에 드십니까?" "네, 좋아합니다" "이 테마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흥미를 끈다. 즉 당신 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자극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물론 책을 읽는 동안에 떠오르는 생각은 당신 자신의 것이지. 결코 내가 말하는 바를 반드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쓴 문장에서 당신이 느끼는 여러 가지 생각, 그것이 바로 당신이 이 책을 즐겨 읽는 주요한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신 자신의 생각이지, 나의 생각이 아니며 그러한 생각은 결국 이 책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사실이 책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걸맞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책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걸맞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상 나는 당신이 쓴 책을 충실하게 읽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외우려고는 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외우려고 하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리게 될 것이니까요. 하여튼 나의 즐거움이 나혼자만의 것이라면, 당신이 말했듯이, 책에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참, 그렇군요"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메인 주(미국 동북부의 주 이름)에 있는 농장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옛날 당신의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창고가 하나 있었어요. 여름이 돼서 내가 거기에 찾아갔을 때, 그 창고에는 겨울 사과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었는데, 나는 그 향기가 몹시도 좋았어요. 소년 시절의 나는 몇 시간이건 거기서 깊은 생각에 잡기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에라스무스(1466-536, 네덜란드의 신학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항상 흐뭇한 행복감에 젖게 되는 그 초상화를 보면서 저 낡은 창고의 일을 상기하곤 한다. 사실 나도 2, 3분 전에, 에라스무스의 일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뚜렷한 생각이었다. 그 까닭은 언젠가 그 그림 앞에서 "여기 자기 코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이는 누굽니까?" 하고 나에게 물은 바보 녀석을 생각해 내고는 갑자기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바보 녀석은 싫다. 이 일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군요. 당신은 이 책에는 쓰여 있지 않은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건 그렇습니다. 이 책이 근거가 되어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거지요 내가 내일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한참 열심히 하고 있는 중에 당신 책에 관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고, 문장 하나하나까지도 생각해 낼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내일 내가 서명(사인)을 할 일 중에는, 나의 5년 분 정도의 수입에 해당되는 큰 돈이 걸려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이 책만큼 내가 열심히 읽은 것은 일찍이 없었어요.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더라도 소용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이 책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또 다른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데, 예를 들면, 월터 스콧(1771-1832,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이라는 소설가는 새로 쓸 소설의 줄거리를 찾아내게 되면,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을 읽어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유는, 독서를 통해서 두뇌의 작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이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지성이 당신의 의식의 어떤 부분-5분의 1내지 3분의 1 정도-을 이 책을 위해서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당신에게 있어서는 지성이란 외부의 일을 맡아서 해주는 일종의 우수한 사무원과 같은 것이다. 당신 자신은 자기 일을 하고, 자기에게 있어서 어떤 이론보다도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를 들면, 주위에 퍼져 있는 사과의 향기를 맡으면서 몇 시간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일이 있는 창고이고, 당신이 좋아하는 에라스무스의 초상화이며, 그 그림의 훌륭한 점을 알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혐오감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과 또 당신의 의식의 표현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독서하는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짓이라고 당신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자아의 입장에서 보면, 도리어 책 쪽이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정성껏 펜을 잡고 있는 사이에 나의 자아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이야기해 보자. 나는 두 시간쯤 전에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가랑비를 맞으며 길을 헤매고 잇는 가엾은 어미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가 마음에 걸리어 아무래도 이 글이 잘 써지지 않더군요. 당신이 에라스무스를 깔본 바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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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
본뜻 : 조강은 지게미와 쌀겨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이 먹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강지처란 쌀겨나 지게미와 같은 거친 식사로 끼니를 이어가며 어려운 시절을 같이 살아온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바뀐 뜻 :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견뎌 온 아내를 이르는 말로서, 오늘날에는 본처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쓴다.
"보기글" -입신출세 했다고 해서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된다 -조강지처 불하당이란 말이 있듯이 조강지처를 홀대하면 반드시 그 업보를 받게 되는 법이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 처를 잊지 말거라
조족지혈
본뜻 : 글자 그대로 '새발의 피'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하찮은 일이나 아주 적은 분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보영중학 축구팀 정도야 조족지혈이지, 뭐 -'새발의 피'라 그러면 될 걸 굳이 '조족지혈'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문자를 쓰면 좀 더 유식해 보이기라도 한다더냐?
중화사상
본뜻 :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이 중국의 오악 가운데 중악인 화산에서 일어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후에 한족이 중국을 다스릴 때 중화라는 뜻을 새롭게 사용했다. '중'은 중앙, 중심을, '화'는 문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한족을 둘러싸고 있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문화를 주도해 나가는 문명국이라는 뜻으로 썼다.
바뀐 뜻 : 중국 사람이 스스로 '중화'라 불러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사상으로 한족의 사상적 저류가 되어 왔다. 조선 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받아들인 중화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중국이 우리보다 앞선 문명국이니 중국의 문물을 따라야 한다는 의식이었다.
"보기글" -전한 시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을 빌어 와 우리 나라 수도인 서울을 굳이 '서울 장안'이라 일컬은 것에서도 중화사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글이 발명된 이후에도 양반 계층에서 계속 한문을 쓴 것은 중화사상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사람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사람이 참으로 무엇인가 싶다. 어버이를 죽이는 자식이 있더니 자식을 죽이는 어버이까지 나타났다. 돈 몇 푼에 꽃이파리같이 고운 어린이를 서슴없이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이틀에 셋씩이나 생기는 세상이다. 이땅에 사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국어사전은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 한다. 사람이 짐승이라는 소리다.
‘사람’은 ‘살다’와 ‘알다’가 어우러진 낱말이다. 요즘 맞춤법으로 하자면 ‘살다’의 줄기 ‘살’에다 ‘알다’의 줄기 ‘알’을 이름꼴(앎)로 바꾸어서 붙인 셈이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살+앎’이겠으나, 속으로는 ‘삶+앎’으로 보아야 옳다. 삶을 아는 것이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어떤 삶이 보람차고 어떤 삶이 헛된지를 알고, 무엇이 값진 삶이며 무엇이 싸구려 삶인지를 아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 겨레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삶을 아는’ 존재라 여기며 ‘사람’이라 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한글을 처음 만든 때 이미 ‘사람(람의 `ㅏ'는 한글고어 아래아)’으로 나타나니 그전부터 써 왔음이 틀림없다. 참으로 놀라운 슬기로 마땅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가! 이만한 이름을 붙인 겨레가 세상에 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가 낱말의 속뜻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제대로 가르치며 사람답게 살기로 힘썼더라면, 오늘같이 막가는 세상을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미꾸라지
추어탕이 생각나는 철이다. 미꾸라지와 함께 무청·호박잎·고추를 넣고 끓인 뒤 제핏가루(산초-)를 살짝 쳐 먹으면 구수하고 향긋한 맛이 나는 국이 바로 추어탕이다. 추어탕의 주인공인 ‘미꾸라지’를 남쪽에서는 ‘미꾸리·미꾸라지·웅구락지·용주래기’로 일컫는 등 쓰는 말이 다양하다.
‘미꾸리’는 16세기부터 19세까지 문헌에 나오는 낱말이다. 역사적으로 용언 ‘믯글’(미끌-)에 뒷가지 ‘-이’가 연결되어 ‘믯글이>밋구리’로 쓰면서, 남쪽의 여러 고장에서 ‘미꾸리·미꼬리·밀꾸리’로 소리내 쓴다. 20세기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꾸라지’는 ‘믯글’에 뒷가지 ‘-아지’가 합친 것으로, 방언에서는 주로 ‘미꾸라지’와 ‘미꼬라지’로 발음하는데, 다른 발음으로는 ‘미꾸락지·미꾸람지·미꾸래기·미꾸래미·미꾸래이·미꾸랭이’ 등 아주 다양하다.
전남에서 사용하는 ‘옹구락지·웅구락지’는 ‘우글우글, 우글거리다’에서 볼 수 있는 시늉말 ‘우글’을 뜻하는 ‘옹굴’에 뒷가지 ‘-악지’가 결합하여 새로운 꼴이 생긴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용고기·용곡지·용주래기’를 쓰는데, 이는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만든 이름이다. 함경도에서는 ‘새처네·소천어·종개미·찍찍개’ 등을, 평안도에서는 ‘말배꼽·맹가니·장구래기·증금다리·징구마리’ 등으로 쓴다.
‘미꾸라지’라는 말을 보면, 역사적으로 오래된 형태가 고장말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고, 그 고장의 정서에 맞게 새롭게 만든 말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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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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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13. 복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다(원앙, 조착)
2) 개혁가는 온전하게 죽기 어렵다(조착)
조착은 일찍부터 법가의 학설을 배운 수재였다. 당시 천하에는 "서경"에 통달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진나라 시절의 박사였던 복생이라는 사람이 "서경"에 통달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90세를 넘긴 노인이었으므로 조정에 불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적당한 인물을 복생에게 파견하여 자기도 배울 수 있도록 그 인물을 천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천거된 사람이 바로 조착이었다. 조착은 복생에게 "서경"을 배우고 와서 정치를 논할 때마다 " 서경"을 인용하여 조목조목 정리해 말했다. 문제는 그를 매우 아껴 높은 자리에 등용했으며, 특히 태자의 신뢰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태자는 늘 그를 '지혜 주머니'로 부르며 곁에 있게 했다. 조착의 주장은 제후의 영지를 삭감할 것, 법령을 엄격히 적용시킬 것, 농민의 권익을 보호할 것 등이었다. 하지만 그의 견해에 찬성한 사람은 태자뿐이고, 원앙을 비롯한 고급 권리들은 모두 조착을 싫어했다.
개혁과 수구세력
이윽고 문제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바로 경제였다. 경제는 즉시 조착을 중용하여 그의 말에 언제나 따랐다. 이제 모든 실권은 조착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런 가운데 법령들이 잇달아 바뀌었다. 이때 승상 신도가도 조착을 매우 못마땅해 했으나 손을 쓸 수 없었다. 당시 조착의 근무처는 유방의 아버지를 모시는 묘의 경내에 있었는데, 문이 동쪽으로만 나 있어서 출입이 매우 불편했다. 이에 조착은 남쪽으로도 출입할 수 있도록 묘의 바깥 담에 구멍을 뚫어 출입문을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승상은, '옳지, 이번 기회에 내 조착이라는 놈을 없애 버려야지.'하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조착은 즉시 경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면서 설득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승상은 다음 날 어전 회의에서 조착이 방자하게 묘의 구멍을 뚫은 죄를 들어 조착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조착에게 설득된 경제는 그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그것은 묘의 담이 아니라 경내의 바깥쪽 담에 불과한 것이니 문제가 되지 않소."
승상은 도리어 사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풋나기 놈을 내가 미리 죽이고 뒤에 폐하께 보고할 것을 그랬나. 황제의 허락을 받고 죽이려다가 내가 당했구나. 이 분함을 어떻게 풀어야 한다는 말인가!' 승상은 끝내 그것이 병으로 도져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후 조착의 위세는 더욱 강해만 갔다. 그는 죄과가 있는 고관들의 땅을 삭감했고, 심한 죄가 있을 경우에는 몰수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법령을 개정해 자그만치 30항목의 법령이 바뀌었다. 그러자 고관들 사이에 조착을 원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두 적수
특히 원앙은 조착과 견원지간의 적수였다. 조착이 나타나면 원앙이 자리를 떴고, 원앙이 나타나면 조착이 자리를 뜰 정도였다. 서로 말 한번 주고 받지도 않았다. 어느 날 조착은 원앙이 예전에 오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어 취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원앙은 형 집행은 보류되고 다만 파면으로 그쳤다. 그 후 오나라 반란을 일으키자 조착은 이를 갈며 분개했다. '역시 원앙이라는 자가 관련되게 분명해. 반란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니 이렇게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가. 다시 취조를 해 반드시 놈을 처벌하고 말리라.' 그러나 부하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이미 반란군이 몰려오고 있는데, 이제 원앙을 취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조착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 사실을 원앙에게 알려 준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란 원앙은 즉시 두영을 찾아갔다. 두영 역시 조착에 의해 토지를 몰수당하고 복수만을 노려오던 터였다. 원앙은 두영에게, "이 사건을 직접 황제께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대감께서 만나게 주선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두영은 황제와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드디어 원앙은 황제를 마나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이 난을 피흘리지 않고 평정시킬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귀가 번쩍 뜨이는 듯이 물었다. "아니, 어떤 방법이 있소?" "지금 반란의 기치는 황제 주변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간신으로 저들이 지목하고 있는 조착을 제거하면 난은 자연히 평정될 것입니다."
개혁가의 최후
그런데 이미 며칠 전에 조착의 아버지가 조착이 염려되어 서울로 찾아왔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뭐냐? 고관들의 땅을 빼앗고 법을 고치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네 욕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조착은 정색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님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아니, 나라라고? 나라가 태평하면 우리 조씨는 망해도 좋다는 것이냐? 이제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리고는 이튿날 아버지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
한편 원앙의 말을 들은 경제는 고민에 빠졌다. '조착은 나라의 보배요, 나의 둘도 없는 충신인데.... 아니지, 난을 평정하려면, 그래서 나라를 지키려면 어쩔 도리가 없지." 드디어 경제는 결심했다. 며칠 후 조착은 경제의 부름을 받고 의관을 갖춰 수레에 올라탔다. 그러나 수레는 궁궐로 가지 않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목이 베어졌다. 하지만 조착을 처형시킨 후에도 반란은 평정되지 않았다. 원래 간신 제거란 명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제는 반란군 진압의 책임을 맡고 있는 등공을 불렀다. "과연 반란군들이 조착의 처형 사실을 알고 전투를 중지하던가?" 그러자 등공이 대답했다. "반란을 주도한 오왕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영지를 삭감당하자 분개하여 조착 제거의 명분을 내세웠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신은 이제 천하의 선비들이 입을 다물고 폐하께 직언을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뜻인가?" "원래 조착은 제후들이 비대해지고 강성해져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세력을 통제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영지 삭감은 그 과정에서 나온 좋은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이 시행되자 그 자신이 화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충신들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황공하오나 조착은 죽이지 말았어야 좋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경제는 한참을 아무 소리도 없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귀공이 잘 얘기했소. 나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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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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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2부 활성산소가 주범인 수많은 질병
피부노화의 주범은 자외선
피부는 표면에 위치하므로 무슨 변화가 와도 쉽게 맨눈으로 금방 쉽게 알 수가 있다. 노화현상이 온 것도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조직이다. 무슨 변화가 오면 굳이 병원에까지 안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악화되지 않도록 닦고 바르고 영양분을 주면서 조심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대접을 받는 곳이다.
만일 폐나 간도 피부처럼 곁에 나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담배나 술에 절어서 거무튀튀하게 변하는 것을 금방 볼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의사가 굳이 말을 안해도 금연, 금주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내부 장기는 몸 속에 있으므로 겉에서 볼 수가 없다. 노화현상이 와도 피부처럼 금방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피부에 쏟는 정성의 절반만 들여도 속병이 많이 없어질 것이다. 최소한 1년에 한번씩은 정기검진을 해서 자기 속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피부는 겉에 있어서 이렇게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 내부 장기와는 달리 또 다른 것에 의해 시달림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노화가 빨리 된다. 예를 들면 탄력성이 없어지고 얇아지며 멍이 잘든다. 피부 밑의 모세혈관이 넓어져서 겉에서 눈으로도 빨간 실핏줄이 보이기도 한다. 머리가 빠지고 하얗게 되고 건조해지고 주름이 생기는 것도 노화의 증거이다. 물론 이렇게 되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피부를 제일 빨리 노화시키는 것은 자외선이다.
피부 중에서도 제일 자외선을 많이 받는 곳이 어딘가? 얼굴과 목부위, 손처럼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곳이다. 그럼, 이제 옷을 벗고 거울을 한번 보라. 어디가 제일 주름이 많고 노화되어 보이는가? 바로 자외선에 제일 많이 시달린 얼굴, 목, 손일 것이다. 간혹 건강 잡지의 표지모델로 꾸준히 운동을 하고 단련을 해 온 노인의 사진이 실리기도 한다. 단단한 근육과 탄력있어 보이는 몸을 자랑하며 미소를 짓는 사진말이다. 몸매만 떼어놓고 보면 20--30대 같다. 하지만 얼굴을 보면 나이를 속일 수가 없다. 자외선을 쪼인 햇수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매일같이 땀흘리는 농부나 어부들을 보라. 얼굴이 하도 자외선에 시달려서 실제 나이보다 10~20살은 더 늙어 보이는 사람이 많다. 자외선은 이렇게 피부 노화현상을 빠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조그만 반점을 만들기도 하고, 두꺼운 각질을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피부암이 생기게 한다.
자외선(실내선탠 포함)을 쪼이면 피부에 프리라디칼이 만들어진다
자외선은 파장의 길이에 따라 3가지로 나눈다. 가장 긴 파장을 가진 것이 A형으로 320~420나노미터(1나노미터(nm)는 10억 분의 1미터)정도 된다. 그 다음이 B형으로 290~320나노미터, 가장 짧은 것이 C형으로 290나노미터 이하이다. C형은 지구 상층권의 오존층에서 흡수가 되어 걸러진다. 하지만 A형과 B형은 지표면까지 도달하여 인체에 영향을 준다. 이 중에서도 파장이 긴 A형 자외선은 피부층으로 침투하여 피부를 검게 만든다. 또 탄력섬유에 손상을 주어 피부노화의 요인이 된다. 그리고 피부조직에서 프리라디칼 생성을 촉진시킨다. 반면에 B형 자외선은 직접적으로 피부조직의 DNA성분을 변형시켜서 피부를 벌겋게 만들고 염증이나 수포를 만드는 자외선이다. 실제 임상연구에서도 자외선을 쪼인 피부조직에서 히드록시라디칼에 의한 손상 흔적이나 지질의 산화 변질을 관찰할 수 있다. 프리라디칼이 만들어지는 것 외에도 자외선을 쪼이면 반응산소종들이 만들어진다.
이런 자외선의 피부 손상은 실내 선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실내선탠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건강상식인 것이다. 오히려 인공자외선은 자연적인 태양광선보다도 자외선 방출량이 더 많아 유해성이 더 크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인공선탠의 적정 시간, 노출량, 위험 사항 등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어서 더 문제이다. 피부를 오래도록 건강하고 탄력있게 유지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구리빛 피부를 자랑하고 다니지도 말고 부러워 하지도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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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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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배가 침몰되는데도 태연했던 유희춘
유희춘(1513-1577)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인중, 호는 미암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처음 글을 배울 적에 눈에 한번 거치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였다. 신재 최산두의 가르침을 받았다. 모재 김안국의 문하에 종유하였는데, 모재가 그를 공경하여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중종 33년(153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춘방과 홍문관의 관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 때에는 정언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죄가 추가되어 처음에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지는 길이었다. 뱃길이 험하여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일어 함께 가던 세 척의 배가 모두 침몰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슬피 울먹였지만 유희춘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종성에서 19년 동안 있었는데 어려운 생활 속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만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속몽구'를 지어 배우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숙하였다. 혼자서 머나먼 길을 걸어 종성으로 남편을 따라올 때에 마천령을 지나게 되자 시를 읊었다.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끝이 없는 동해가 거울처럼 평평하구려 머나먼 길 아녀자가 무슨 일로 왔던고 삼종의 의리는 중하고 나 한 몸은 가벼워서이네
이 시를 보면 성정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가 처음 왕위에 올라 유희춘을 불러다 대사성에 임명하였으며,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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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
큰 인물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랜 세월과 꾸준한 노력 끝에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삼국 정립시대 위 나라에 최염이라는 이름 높은 무장이 있었다. 그는 풍채며 음성이 대인풍으로 수염이 넉자요, 무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데 최염의 종제에 임이라는 자가 있어 외양도 초라하고 명성도 나지 않아 문중에서도 홀대를 받는 터였으나 최염만은 그의 사람됨을 인정하고 있었다. "큰 종이나 큰 솥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재능은 만만히 이루어지지 않소이다. 임도 그렇듯 '대기만성' 유일테니 두고 보시오. 기필코 대단한 인물이 될테니..." 그의 말대로 임은 훗날 삼공이 되어 천자를 보좌하는 소임을 맡을만큼 큰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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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1. 보리수를 닮은 사람들
동자승
푸른 달, 풍진 세상 온갖 고통 아래서도 수행납자에게는 정이 많으면 못 쓰는 법이다. 15, 6 년 전이다. 나는 부처님 도량 안에 서 있었다. 외로운 늑대처럼 초생달을 삼키려고 그것도 누더기로. 그렇게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송장처럼 서서 보고 있는데 열 한두 살쯤 되었을까 까까머리 동자승이 장삼을 수하고 종각 앞에 서더니 합장반배하는 거였다. 떠엉. 동자승은 합장을 하던 종을 한 추 쳤다. 그때 나는 동자승이 종두(中)를 하는 모양이 충격적이어서 멍하니 그 종 치는 모습과 낙엽 떨어지는 걸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왜냐하면 마치 떨어지는 낙엽이 종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육도행(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는 여섯 가지 방편으로 첫째 자비로써 널리 사랑하는 행위, 둘째 불교도덕에 계합하는 행위, 셋째 여러 가지로 참는 것, 넷째 수양에 힘쓰고 게으르지 않는 것, 다섯째 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는 것, 여섯째 삿된 지혜와 나쁜 소견을 버리고 참지혜를 얻는 것)의 번뇌망상 깊디깊어 밑도 끝도 없고, 생사의 고뇌 넓고 넓었는데 그 우비고뇌가 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적멸(寂滅)과 같은 시간 속에서 두 손 모아 합장했다. 그런데 동자승이 종을 한 추 치더니 중국무협영화에 나오는 배우 모양 쿵후의 몸짓들을 짓는 거였다. 종 한 망치 치고 폼 한 번 잡고 종 한 번 치고 다른 동작을 하는데 그만 나는 합장한 채 입가에 미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나의 종 치는 모습을 보는 이가 있었다. 비구니였다. "들켰구나." 나는 부끄러워 합장을 한 채 고개를 수그렸다. 비구니스님은 석주 큰스님을 시봉하던 이였다. 나는 잠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짓다 하늘의 조각달을 힐끔 보고는 객실로 돌아와 가사장삼(스님이 입는 법의)을 수하고 법당을 향해 가다가 그만 문설주에 걸려 넘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섰는데 동자승이 치는 종소리는 여전히 삼천대천세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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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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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7. 일본 군국주의의 한반도 강점 (뒤틀린 대동아공영권의 잔혹한 여파) 1/2
일본 침략의 7 단계
미국의 흑선이 닫혀 있던 일본의 항구를 강제 개항시킨 사건은 근대 일본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개항과 함께 문화적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보수와 개혁의 대립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근대 1868 년에 단행된 메이지유신이 바로 그 계기였다. 즉 메이지유신은 근대 일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시기부터 유럽에서 이루어진 산업혁명의 성과물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성과물을 자신의 경제적 바탕으로 삼아 차츰 동아시아의 정치,군사적 강자로 떠올랐다. 그들은 메이지유신으로 말미암아 영주들이 몰락하고 실직한 무사층이 사회의 불평세력으로 떠돌자, 이들을 재조직해서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그 힘을 바탕으로 침략적인 외교노선을 세웠다. 그들은 먼저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근조선에 대한 침략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내부정비가 덜 이루어졌으므로 내부정비를 강화하는 한편,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방법을 본떠 근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침략의 제1단계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정치판에서 밀려나면서 근조선의 내부정세가 복잡해지자, 일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1876 년 근조선을 강제로 개항하게 한 뒤,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근대적 외교를 모르고 있던 근조선과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써 온갖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는 한편, 청나라와의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고치게 함으로써 근조선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 이후 일본을 통해 알려진 서양 문화는 근조선을 격동의 시대로 몰고 갔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자는 흐름이 역사의 표면으로 솟아올랐고, 일본의 진출에 저항하는 세력도 힘을 모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구식 군대의 정당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1882 년 군인폭동이 일어났고, 마침내 일본의 진출과 서양 문화의 수입 분위기는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을 밀어내고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으려던 청나라가 이 사건의 정리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정세는 한층 복잡해졌다. 일본 침략의 2단계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개혁을 갈망하던 김옥균, 박영효 일파는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 탈환을 노리는 일본과 손잡고 그들의 원조를 받아 1884 년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완전독립의 달성, 공평한 인재등용,상공업의 발전 등을 목표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선포했다. 그러나 청나라로부터 즉각적인 반격을 받고 개혁정부는 며칠을 넘기지 못한 채 무너졌고,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 탈환이라는 일본의 계획도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중심으로 주도권 탈환의 기초를 다져갔다.
침략 3 단계는 일본이 청나라를 밀어내고 다시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탈환하는 1984 년부터이다. 사회개혁과 반침략의 구호를 내걸고 전통사상(동학) 중심의 자주적 개혁을 목표로 삼아 1894 년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청나라와 일본은 모두 근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근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근조선 영토에서 한판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들이 주도하는 일본식 개혁을 유도했다.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정부를 구성하고 그들에게 일본식 개혁을 이끌어나가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1894 년의 타율적 개혁(이른바 갑오경장)이다. 그러나 근조선 지배에 대한 일본의 주도권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남진정책에 따라 근조선을 손에 넣으려던 차르 러시아의 도전이 바로 그 고비였다. 독일 및 프랑스의 협조를 얻은 러시아는 청나라를 이기고 요동지역을 점령하려던 일본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한편, 정권욕에 불타는 민비 일파와 손잡고 친러정부를 구성했다. 이에 일본은 민비를 암살하는 등 친러세력을 위협하면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근조선 정부와 민중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며, 근조선 지배를 위한 러시아의 기반만 강화시켜주게 되었다.
근조선에 대한 일본 침략의 4 단계도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근조선에 대한 지배를 굳히려는 러시아와 결국 전쟁을 벌여(1904)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미국 및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근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게 되었다. 나아가 러시아마저 일본의 근조선 지배를 인정함으로써, 근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일본은 이제 지배권을 굳히기 위한 내부작업을 추진했다. 그들은 근조선 정부를 협박해서 1905 년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뒤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1907 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정미7조약을 맺었고, 의병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근조선의 모든 영역에 헌병경찰을 주둔시켰다. 이제 그들에겐 근조선을 일본 영토로 공식화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하여 급기야 1910 년에 타율적이 합방이 이루어졌다.
일본 침략의 5단계는 토지조사사업 및 임야조사사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근조선 정부로부터 한반도를 손에 넣은 일본은 먼저 한반도의 경제적 바탕인 토지와 임야에 대한 소유권을 재정리함으로써, 이제 민중들로부터도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확인받으려고 했다. 아울러 조사과정에서 약은 술수를 부려 많은 토지와 임야를 국유화하거나 친일파의 소유물로 만들어줌으로서, 한반도 지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반도 민중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토지와 임야를 둘러싼 분규와 소요는 폭압적인 헌병정치에도 불구하고 그칠 줄 몰랐으며, 일본에 대한 한반도 민중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나 서양의 다른 열강에 비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그치지 않았으며, 마침내 한반도의 전체 민중들이 저항의 깃발을 들기에 이르렀다. 1919 년 3월부터 시작된 비폭력 저항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운동의 결과 한반도의 독립을 이루려는 지휘부가 이곳저곳에서 탄생했으며, 이들의 분열과 통합 과정에서 저항운동은 발전해나갔다.
일본 침략의 6 단계는 이런 저항운동을 약화시키는 한편 한반도에 대한 장기적 지배를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이 추진한 전략은 한반도의 완전한 일본화였다. 그들은 근조선의 귀족들을 자신들의 협조자로 만들어 통치의 앞면에 세우기도 하고, 한반도의 지식인과 부유층을 내세워 저항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한편,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부분적인 자율을 인정하기도 했다. 신문을 발행하게 했으며, 조건적으로 집회를 허용하고, '회사령'을 철폐해서 조선인이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도 어느 정도 용인했다. 그러나 이 단계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훨씬 더 철저해졌다. 그들은 전시체제를 내세워 모든 물자를 수탈했으며, 쌀의 생산을 독려하여 군량미로 빼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인력 및 '정신대'까지 징발했다. 또한 조선식 성과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강요했으며, 일본의 글과 말을 쓰라고 억압하면서 겨레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짓눌렸다. 이 밖에도 '황민화'(일본화)를 위해 일본이 추진한 정책은 헤아릴 수 없으며, 사실상 교육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조선 민중을 일본식으로 개조하려 했다. 따라서 일본은 많은 저항을 받았지만, 이 저항의 과정에서 한반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차츰 새로운 생활방식에 물들어갔다. 일본말이나 일본화된 말이 일상화되었고, 일본식 문장과 문법이 생활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일본은 패배했고,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침략야욕은 이 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지 않았다.
1945 년 뒤에도, 특히 1960 년대 이후부터 일본의 침략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 침략의 7 단계인 이 시기의 침략은 주로 문화적,경제적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아직도 정당한 국제적 거래자가 아니며, 여전히 침략세력이다. 근래에 들어 언론매체에 자주 오르내린 독도(돌섬), 문제만 하더라도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침략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잘 드러내주는 문제인 것이다. 즉 독도문제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침략을 그만둘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선택을 대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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