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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4 호
단기 4340. 11. 3 (음력 9. 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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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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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AALF-전주 개최기념 예쁜편지 쓰기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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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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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굴이 진주를 만든다./ 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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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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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생각하면 얻는다
대개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이 있을 때나 일이 없을 때나, 뜻함이 있을 때나 뜻함이 없을 때 나를 막론하고 마땅히 존경심으로써 기둥을 삼아 그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려가 생기지 않은 때에는 몸과 마음이 비워지고 심성이 순수하게 되며, 그 사려가 이미 생겨난 때에는 바른 도리가 환히 드러나고 물욕이 물러나 하늘의 이치에 복종하므로 복잡한 근심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노력을 쌓고 쌓으면 성공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학문의 길인 것이다. 이것을 힘쓰지 않고 그때그때 저절로 생각이 나오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한가로울 때 깊은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맹자는 '마음의 일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먼저 큰 뜻을 세워 놓으면 작은 뜻이 빼앗지 못한다'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무릇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는 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곧 사사로운 욕심이 있다'하는 것은 그 말의 뜻이 정학하지 못하다. 밝게 보고자 하는 것과 밝게 듣고자 하는 것을 일시에 합하면 하나를 생각하는 것이지 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힘씀이 오래면 자연히 각각 그 이치에 맞는다는 말도 매우 맞다. 이른바 '한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는 비록 다른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한 것은 마음을 두 갈래로 쓰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하는 공부로서 옳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보기와 듣기를 함께 하거나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여기서 만일 듣는 데에만 오로지 마음을 두고 보는 것을 전연 돌보지 않는다거나, 손짓에만 집중하고 발짓은 되는대로 아무렇게 내버려둔다면, 어찌 일에 있어서 한 가지는 잘하고 한 가지는 못하는 것이 되겠는가? 돌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곳에서 마음이 그 일을 당하여 마땅히 응하고 응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불분명하여 통하지 못하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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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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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2 장 과학 철학
과학은 가치 중립적인가
고학은 가치 중립적인 것인가? 과학은 그것의 효용성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과학적 지식이나 법칙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데, 그것을 사용하는 정치가나 기업가가 나쁜 목적에 사용하면 나쁜 결과가 나오고 반대로 좋게 사용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과학이 객관적이 아니라면 가치 중립적일 수도 없겠지만, 조금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현대 과학이 가치 중립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보자. 어떤 과학자가 과학 중에서 가장 순수한 연구, 응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연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자 물리학--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 물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 된 물음에 대해서 탐구하는,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효용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분야--을 연구한다고 할 때, 그가 이 연구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유는 이 과학자가 물질은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라는 것을 탐구하는 데서 재미를 얻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두 번째 이유는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세 번째 이유는 연구에 대한 보상, 말하자면 궁극적인 물질 입자를 발견했을 때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벨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놓고 볼 때 그의 입자 물리학 연구 활동은 다른 것보다 재미있다는 가치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많은 연구비를 줄 만한 분야라는 후원자의 가치 판단, 보상이 별로 없으면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치 판단이 배제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 활동을 하는 주체가 이미 어떤 과학 연구를 할 것인가를 선택할 때 가치 판단을 하고 시작한다면 과학 활동은 가치 중립적이 될 수 없다. 과학 연구 자체에는 시작 단계에서부터 이미 그것이 효용성이 있기 때문에 시작한다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입자 물리학이라는 순수 연구 분야도 가치 중립적이 될 수 없다면, 응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화학이나 고체 물리학 같은 다른 분야들은 더더욱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 이 분야의 연구들은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연구 결과가 어떤 실제적 응용 가치가 있을 것인가--예를 들어 화학의 경우 의약품이나 신소재에 대한 응용, 고체 물리학의 경우에는 반도체에의 응용--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지고, 결과가 나오면 그것의 응용 가능성에 대해서 또 한 차례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놓고 볼 때 우리는 과학은 순수 과학이든 응용과 관계가 있는 과학이든 모두 가치 중립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 연구의 결과로 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면 과학자가 그러한 과학 연구를 선택해서 수행한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제 과학이 객관적이지도,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 연구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이 책임은 개인적인 좁은 차원과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인 커다란 차원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좁은 차원에서 볼 때 책임은 개인적인 결단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서 어떤 화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실험을 해야만 연구를 할 수 있는데, 이 연구에서 유독한 화학 약품이 많이 배출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이 유독 물질은 공기를 통해서 실험실 밖으로 빠져나가든 하수구를 통해서 하천으로 흘러가든 모두 환경을 크게 오염시킬 수 있다. 이러한 오염을 막기 위해서 화학자가 취할 수 있는 길은 첫째, 배출되는 유독 물질을 남김없이 모았다가 정화 처리를 하여 해가 없는 물질로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연구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즉, 같은 연구를 한다고 해도 유독 물질이 만들어지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화학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유독 물질을 가장 적게 배출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유독 물질이 나오지 않는 전혀 다른 방식을 개발하여 이 방식에 따라 연구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합성 세제가 하천을 오염시킨다면 합성 세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비누와 같은 천연 세제를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드는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행동은 자기 연구가 낳은 결과를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에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만일 연구를 했는데 유해한 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그 연구를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 연구는 즉각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커다란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염화플루오르화탄소(CFC)는 화학 연구에 의해 합성된 물질로 환경에 대해 즉각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매우 안정되었기 때문에 생물체를 공격하지도 않고 다른 물질과 반응해서 유독한 물질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요즈음 전지구적인 환경 문제로 부각된 오존층 파괴는 바로 이 염화플루오르화탄소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처음 보기에는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시간이 흐른 뒤 오존층 파괴라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 연구의 결과 중에는 처음에 무해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중에 오히려 더욱 큰 피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핵 폐기물도 이러한 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초기에 과학자들은 핵 폐기물이 독성이 있기는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핵 폐기물이 생태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면 원자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태도를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상당히 흐른 다음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래 전에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연구이기 때문에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책임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문제는 실험실 수준에서 개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과학 활동의 바람직한 방향과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하고 비판하는 과학자 집단일 것이다. 이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수행되는 과학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결과에 대한 예측, 앞으로 과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의 설정 등이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러한 과학자 집단은 양심적인 개별 과학자의 활동을 크게 고무할 수 있다. 대체로 과학자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들이 과학계의 연구 방향이나 결과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면 그 소속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거나 심지어는 추방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 중에는 과학계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 이야기하기는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만일 이들의 행동을 지원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이들은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과학자 집단은 그 규모가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현대 과학 활동이 국경을 초월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므로, 그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활동도 세계적인 규모의 집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도, 가치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과학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과학자의 책임은 대단히 막중한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이 연구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고, 과학 연구 결과가 사회에 나와서 잘못 사용될 경우에는 이를 비판하고 억제하는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H.브라운, '과학의 지혜', 이화여대 출판부, 1994. 바이젠바움, '컴퓨터 사회, 과연 낙원인가', 명경출판사, 1995. 이필렬, '자연 과학 개론' 제4부 '현대 사회와 과학, 통신대 출판부, 1995. 김명자, '현대 사회와 과학', 동아출판사, 1993. 박성대, '민족 과학의 뿌리를 찾아서', 동아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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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증요법
본뜻 :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곁으로 나타난 증상에 대해서만 행하는 임시방편적인 치료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고열인 나면 냉찜질에 해열제만 처방하는 등의 치료법이다.
바뀐 뜻 : 어떤 일에 대해서 근본적인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상태에 따라서 그때 그때 임시 방편 식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대증요법이라 한다. 흔히 '대중요법'으로 잘못 쓰고있는 경우가 많다.
"보기글" -대학 정원을 늘리는 식의 입시 제도 개편은 단순한 대증요법 밖에는 안되지 근본적인 교육의 방법론이 달라져야 한다구 -수질오염이 심각한 낙동강에 엄청난 양의 소독약을 풀어 넣은들 그건 일시적인 대증요법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수질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구
금과 줄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국어 시험에 “다음 밑금 그은 문장에서 맞춤법이 틀린 낱말을 찾아 고치시오.” 하는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60년대를 지나면서 ‘밑금’은 시나브로 ‘밑줄’로 바뀌어 요즘은 모조리 ‘밑줄’뿐이다. “다음 밑줄 친 문장에서 맞춤법이 틀린 낱말을 찾아 고치시오.” 이렇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국어 교육이 잘못 쓰는 말을 바로잡기는커녕 앞장서 틀린 말을 퍼뜨린 것이다.
종이나 마당 같이 반반한 바닥에 긋는 것은 ‘금’이다. ‘긋다’와 ‘금’, ‘그리다’와 ‘그림’과 ‘글’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줄’은 시험지 같은 종이에 칠 수가 없다. 빨랫줄이든 전깃줄이든 연줄이든 ‘줄’은 공중에 치는 것이고, 반반한 바닥에는 떨어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 다만, 바닥에 죽 늘어서 있는 것도 ‘줄’이다. 그러나 이런 ‘줄’은 치지 않고 짓는다. 군인은 줄을 ‘지어’ 걸어가고, 글월은 줄을 ‘지어’ 써내려 간다.
‘줄’은 생김과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다.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도록 굵게 드린 ‘바’는 흔히 ‘밧줄’이라고 겹쳐 쓰지만, 씨름꾼이 샅에 매는 ‘샅바’는 그냥 ‘바’다. 실이나 삼이나 종이로 가늘게 꼬는 ‘노’도 ‘노끈’이라고 겹쳐 말하고 조심스러운 물건을 묶는 데 쓴다. ‘올’도 ‘줄’이기는 하나 너무 가늘어서 ‘줄’을 만드는 감에나 쓰인다. 물건을 매거나 묶거나 꿰는 데 두루 쓰이는 ‘끈’이 있고, 평평하게 너비가 있어서 허리띠, 머리띠, 애기 업는 띠로 쓰이는 ‘띠’도 있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쉽게 찾기
다른 고장의 말을 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국어사전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 까닭에 방언사전이나 자료집 등을 일일이 살펴야 찾을 수 있다. 이런 어려움을 덜고자 문화부와 국립국어원 쪽에서 ‘한국 방언 검색 프로그램’을 개발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남한 방언 검색 프로그램, 북한 방언 검색 프로그램, 해외 방언 검색 프로그램’으로 짜였다. 이제까지 나온 갖가지 사전과 자료집에 나오는 고장말들을 모아 뜻과 종류와 지역을 표시한 정도다. 이 프로그램은 콤팩트디스크에 담아 보급이 됐는데, 나아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점검하고 있는 줄 안다.
또한 ‘문학 작품에 나타난 방언 검색 프로그램’을 꾸리고 있는데, 다양한 지역을 대상으로 약 2000가지의 어휘를 수집하여 해설하고 있다. 〈겨레말큰사전〉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벌이는 지역 방언 조사와 작품 속 언어 조사에서도 숱한 고장말을 수집하고 있다. 국어원에서 벌이는 ‘남북 지역어 조사 사업’이 완성되면 좀더 다양한 고장말들이 보태질 것이다.
한편으로, 앞으로 꾸릴 방언 검색 프로그램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방언형과 음성, 지도 작성은 물론, 정확한 뜻풀이와 보기말을 대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여러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할 터이고 비용도 숱하게 들 터이다. 정보화 시대에 배달겨레가 사는 영역의 고장말들을 두루 이해하여 말글살이의 질을 높이도록 하자면 정책 당국, 학자, 국민이 뜻을 한데 아울러야 할 터이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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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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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2) 도대체 여자의 욕심이란 그 끝이 어디일까?(여후)
단 한번의 사랑으로 태후가 된 여인
유방의 총애를 받던 여인들은 여후의 복수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방의 사랑을 덜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남아 끝내 황제의 어머니가 된 여인이 있었다. 바로 박희라는 여인이었다. 박희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놓고 겨룰 때, 아버지가 항우 진영에 있었다. 그 후 전쟁에서 패하자 그 가족들은 포로가 되어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박희는 노예로 되어 베 짜는 여인이 되었다. 그 뒤 우연히 베 짜는 방에 들른 유방은 박희의 미모에 반해 박희를 후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박희의 미모도 사실은 별 뛰어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유방의 머리에서 까맣게 잊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박희는 관부인과 조자아라는 두 명의 후궁과 매우 친했다. 그래서 세 친구는 언제나, "우린 나중에 누가 먼저 귀인이 되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 꼭...."하고 약속했었다.
그 후 관부인과 조자아는 유방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다. 어느 날 유방과 같이 나들이하던 두 후궁은 잠시 쉬고 있을 때, 박희와의 약속을 말하며 서로 웃었다. 그러자 유방이 꾸중을 하며 왜 웃냐고 물었다. 두 후궁이 그 이유를 말하니 유방은 갑자기 박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즉시 박희를 불러내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박희가 조용히 속삭였다.
"지난 밤 제 배에 푸른 용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답니다." "그래, 그건 길조구나. 그 꿈을 이뤄 주마."
이렇게 해서 박희는 단 한번의 정을 받고 아들을 잉태했다. 그러나 그 뒤 박희는 유방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유방이 죽고 나자 유방의 사랑을 받던 후궁들은 모조리 여후에게 앙갚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박희는 유방과 거의 관계도 없던 '불쌍한 여인'으로 취급되어 살아 남았던 것이다. 더구나 여후가 죽은 후, 여씨의 전횡에 넌더리가 나 있던 중신들이 박희를 불러 들였고 그래서 그 아들을 황제로 세웠던 것이다. 참으로 불행이 행운으로 바뀐 경우라 할 것이다.
외아들을 잃고도 눈물이 없는 까닭은?
한편 효혜제가 세상을 뜨자 국상이 발표되어 모든 신하가 관 앞에서 곡을 했다. 그러나 여후는 겉으로 곡하는 소리만 낼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때 장량의 아들인 벽강은 아직 나이 열 다섯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우 똑똑했다. 그는 바로 승상이던 진평을 찾아갔다.
"태후께서 지금 외아들을 잃고도 조금도 슬픔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그럴까?..." "효혜제에게 성장한 아들이 없기 때문에 태후가 중신들에게 위협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상 어른께서 이 기회에 태후의 조카분들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여씨 가문에게 요직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태후의 두려움도 풀릴 것이며, 중신들도 화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평이 즉시 그 말대로 하니, 과연 여후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목놓아 울며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그 후 여후는 노골적으로 정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 여후는 효혜제의 상이 끝나자 태자를 왕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 태자 역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인 여후가 완전히 황제의 권한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나이 어린 황제는 소제라 불리웠는데, 사실 그는 효혜제의 정실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었다. 정실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여후가 자기 집안의 미인 한 명을 후궁으로 들여서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생모를 죽이고 정실 부인이 낳은 태자로 꾸몄다. 그 뒤 소제가 4, 5세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이 사실을 그에게 얘기했다. 화가 난 소제는 주먹을 꼬옥 쥐고,
"다음에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 말 테다."하며 분개하였다. 이 말이 그대로 여후의 귀에 들어갔다. 그를 그대로 두어서는 앞날이 불안하다고 여긴 여후는 소제를 전에 척희를 잡아 가뒀던 영항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소제가 병이 깊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얼마 후 소제는 원인 모르게 죽었다.
천하의 주인은 유씨인가, 여씨인가?
이어 여후는 다음 황제로 유홍을 내세웠는데, 그 역시 아직 나이가 어려 소제라 불렀다. 그리고는 여전히 여후가 황제의 권한을 휘둘렀다. 어느 날 여후가 자기 친정 식구를 제후로 삼을 생각으로 우승상 왕릉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왕릉은,
"선제께서 '유씨가 아닌 사람이 제후로 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으라' 하셨습니다.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야 합니다."라고 반대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여후는 이번엔 좌승상 진평과 대신인 주발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여후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비난하였다.
"어찌 선제와의 약속을 어긴다는 말입니까. 그리고서 무슨 낯으로 선제를 뵙겠소?" 그러자 그들은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용기있게 태후에게 맞서는 면에서는 우리가 당신보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 유씨 권력을 지키는 데에는 당신이 우리만 못할 것이외다." 그 후 여씨 일족은 계속해서 제후로 임명되었고,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 역시 제후로 임명되었다. 여수는 이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제후 자리에 오른 여성이 되었다.
유씨 남편들을 감시하는 여씨 아내들
여후는 황실인 유씨와 자기 친정인 여씨 간에 권력 다툼이 격화되자, 한 가지 꾀를 냈다. 즉 여씨의 딸들을 유씨의 제후들에게 시집을 보내 아예 가정에서부터 유씨를 꽉 잡아 버리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조나라 왕으로 봉해져 있던 유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유씨 문중에서 시집온 본처에게 정이 가지 않아 다른 첩에게 사랑을 쏟았다. 그러자 질투심 많았던 여씨 성의 본처는 이 사실을 여후에게 고하고, 또 있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편에게 뒤집어 씌었다. '여씨 성에게 제후 자리를 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여후가 죽는 날이면 내 반드시 여씨 일족을 멸하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여후는 분기탱천했다. 곧바로 유우를 잡아들이고는 그를 연금시킨 채 일체의 음식을 못 먹게 만들었다.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되었다. 유우는 굶주림 속에서 원한에 사무친 시를 읊었다.
여씨가 권세를 잡으니 유씨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제후라는 건 이름 뿐, 아내까지 강요당했다. 아내가 질투 끝에 나를 팔아넘기니 계집의 밀고가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황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 이 나라 충신들은 어디로 갔는가! 차라리 자결할 것을, 어찌 미리 깨닫지 못했던고, 이렇게 굶어 죽는데도 인정을 베푸는 자조차 없구나. 하지만 여씨의 무도함을 하늘의 힘을 빌어 기필코 보복하리라.
유우는 이렇게 시를 읊고 드디어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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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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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29 장. 약품(우연히 발견된 예상 밖의 효과).
부정맥 치료제(이것으로 충분한 수면을)
상품명 노보카인과 자일로카인(xylocaine)〔일반명은 프로카인(procaine)과 리도카인(lidocaine)〕은 국소마취제로서 (예를 들면 치과 마취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1940년대에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심장부정맥 증상이 있는 개에게 전신을 마취시킬 때 노보카인을 주사했더니 그 심장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것이 마취과 의사에게 알려져 바로 그 효과를 사람에게 시험해 볼 기회가 생겼다. 미국 육군의 어느 흉부 센터에서는 급성심장혈관부전인 환자 몇 명에게 이를 시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선구적인 테스트는 찰스 버스테인 대령에 의하여 실시되어 1946년에 보고되었다.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최초의 테스트는 기능부전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경우에만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이 있는 환자에 대한 노보카인(novocaine) 주사는 결과적으로 마비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떄문에 항상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한 부정맥 증상이 진행 중인 마취상태의 환자에게 국부 마취제를 주사할 경우에 나쁜 영향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심장 순환 개선이 관찰되었다. 1950년에는 J.L. 사우스워즈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자일로카인이 뛰어난 항부정맥 효과가 있다는 임상적 증거를 제출했다. 그 이후 심장수술에 관련되는 국부마취약의 정맥주사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목적을 위해 개발된 약이지만 전혀 다른 목적에 유용하다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 명백한 예이다.
미녹시딜(머리카락도 깜짝 놀라다).
1980년 펜실바니아 주 브라인 모어의 자퍼코스터 박사는 38세된 남성의 고혈압을 미녹시딜(minoxidil)이라는 약으로 치료하고 있었는데 두피에 새로운 털이 돋아났다는 것을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지에 편지로 보고했다. 이 환자는 20세 때부터 거의 대머리 상태였다. 자퍼코스터이 편지나 그 후 나오기 시작한 다른 보고는 먼저 피부과 의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리고 곧 이어 이 뉴스가 번지기 시작하자 일반 남성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대머리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며 그 치료법은 고대 이집트시대부터 탐구되어 왔던 것이다. 피부과 의사 중에는 시카고의 일리노이 대학병원의 버지니아 피들러 와이스라는 여의사가 있었다. 그녀는 만일 이 약을 국소적으로 사용하면 혈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타 반갑지 않은 부작용 없이 머리털을 성장 촉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미녹시딜의 정제를 분쇄해서 로션으로 만들어 3명의 환자 두피에 1일 2회씩 발라보았다. 그러자 수 주일 후에 3명의 환자 중 2명의 머리에서 머리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피들러 와이스 박사가 미녹시딜의 제조원인 어브존 사에 전화를 하자 거기에서도 이미 이 약의 로션을 사용하여 예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피들러 와이즈는 그 후 어브존 사와 공동으로 대규모의 연구를 시작했다. 1984년에 보고된 논문에 의하면 48명의 환자 중 25명에게 새 털이 돋아났으나 미용상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은 그 중 11명이었다. 그 외에 1987년까지 다수의 연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 미녹시딜액은 탈보가 심한 모든 환자에게 전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약의 가장 유효한 사용법은 환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을 유지하게 하며, 대머리가 되는 초기단계에서 회복하는 것을 돕게 될 것이다. 이 약은 무한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으며, 한편 장기간을 사용할 경우 피부의 안전성은 확인되어 있지 않다. 1987년 말까지 그 일반적인 사용을 FDA(미국 식품 의약품국)로부터 인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설령 인가가 된다 하더라도 의사의 처방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혈압의 치료약인 미녹시딜이 머리털의 발모를 촉진하는 것은 임상 시험에 의해서 증명된 셈이다. 'Clinical Pharmacy'(임상 약학)의 1987년 5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어느 환자가 이 요법에 양성 반응을 보일 것이가를 미리 알 수 있는 적당한 지침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아마도 가장 적당한 용매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 효율을 향상시킬 수가 있겠으나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탈모치료에 있어서 미녹시딜의 위치를 화고히 하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정보가 필요할 것이다"
인터페론(암과 관절염).
1955년, 아이잭스와 린덴만은 인터페론(interferon)이 바이러스 감염에 대응하는 세포가 만들어 내는 단백질 및 당 단백질이며, 이것으로 넓은 범위의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새로운 타입의 항암제일 가능성 때문에 매스콤과 대중 그리고 의학계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물질의 적당량을 얻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인터페론의 임상 응요의 진보는 매우 더디었다. 몇 년 전에 처음으로 인간의 인터페론 유전자가 클로닝되어 사정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1984년에 실시된 임상적인 암 치료의 실험도중에 우연한 관찰을 통해 인터페론 주사가 류머티즘성 관절의 통증과 부기를 완하시킨다는 놀라운 이 사실이 발견되었다. 예비적인 연구 결과 일반적인 치료로는 도움받지 못했던 환자 중 3분의 2에게 이 호르몬이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만일 이 결과가 보다 넓고 일반적인 것으로 확인된다면, 유전자공학에 의해 대량 생산된 인가 호르몬은 예상밖의 큰 시장이 될 것이다. 암 치료약이 관절염을 치료한다는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생물공학 회사인 바이오젠 사의 독일 자회사 바이오페론 사에서 연구 중에 생긴 일이었다. 제스 루드닉 박사에 의하면 암과 류머티즘성 관절염 두 가지를 앓고 있는 환자 몇 사람이 관절염의 동통에 어느 정도 개선을 보였다고 한다. 회사의 간부는 처음에 회의적이었으나, 독일 국내에서 38명의 환자에게 테스트했더니 1주일에 5회의 주사로 1주일에 2주일 동안에 28명은 관절염의 통증이 완화되었으며, 또 몇 사람은 통증이 없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터페론이 플라세보인지를 비교하는 검사가 더욱 필요하며, 이 호르몬이 단지 증상을 완화시키기만 하는 것인가 또는 원인인 관절염이라는 병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가를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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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예견과 지혜로 엄청난 화를 면한 이자
이자(1480-1533)의 본관은 한산이고,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14년에 음성으로 물러나 살면서 호를 음애라 하였다. 그 뒤 충주의 토계로 이사하여 집 이름을 몽암이라 하고, 호를 몽옹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54세에 죽었다. 그곳에 서원이 있다. 이자가 중종 13년(1518)에 조선 개국 이래로 말썽이 되었던 이씨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는 임무를 띤 종계변무주청사로 한충, 남곤과 함께 연경에 갔다. 그곳에서 남곤이 병에 걸리자, 한충은 간호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저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선비들의 씨를 없애고 말 것이다"
이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이 간사한 인물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만리나 되는 타국에 함께 와서 죽어 가는 꼴을 어떻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이자는 끝까지 남곤을 돌보아 죽지 않도록 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 때에 이자가 잡혀갔다가 석방이 된 것은 남곤이 지난날 간호 받은 일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가 김안로와는 인척 관계가 있고, 또 주계군 이심원에게 같이 글을 배운 사이이지만 두 사람이 평생토록 행한일들은 선행과 악행이 서로 반대가 되었으니, 김안로는 언제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기묘사화 뒤에 이자가 용궁으로 쫓겨나 있었는데 중종 27년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함창에 있는 자기 선산에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궁을 지나면서 이자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자를 꺼려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시험삼아 동정을 탐지해 보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이자는 그의 마음 속을 먼저 환히 들여다보고 김안로가 그곳으로 올 때쯤 되어 홰나무꽃을 달인 물에 얼굴을 씻고 이불을 두르고 앉아 김안로를 맞았다. 김안로가 이자의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음애공은 이제 끝장이 났다. 염려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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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언영색
교묘한 말과 표정으로 겉치레할 뿐 좋은 내용은 없음을 말한다. 공자는 말하기를 말솜씨가 교묘하고 모가 없는 표정을 짓는 이 중에는 성실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무뚝뚝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은 완성된 것을 갖춘 셈이나, 진배없다고 하였다. 하나 그런 사람이라도 완성된 덕을 갖추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형식과 실질이 조화를 이루어야지만 비로소 순자라고 공자는 말했다. 여러 방면의 학문을 배우고 그것을 형식으로써 정히 통제하라고 가르쳤다. 결코 무뚝뚝하고 우직한 태도를 권장한 것은 아니다. 공자는 무엇보다도 말과 표정으로 사람을 속이는 교활을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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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여덟번째 이야기 몸집 작은 남자와 사자
몸집이 자그마한 남자가 힘들게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나무도 심고 논밭고 일구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막 근처에 사는 사자 한 마리가 그가 열심히 가꾸어놓은 곡식과 나무들을 망가뜨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사자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남자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사자를 잡으려고 했다. 사자는 그 남자가 자기를 잡으려고 많은 덫과 함정들을 파놓아서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음 편하게 사는 게 낫다는 생각에 새끼 사자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새끼 사자도 어느덧 성장하여 몸집도 제법 크고 기운도 세졌다. 어느날 새끼 사자가 아빠 사자에게 물었다.
"아빠, 여기가 우리 고향이에요? 아니면 고향이 따로 있나요?" "우리는 이 고장 출신이 아니란다. 우리는 다른 지방에 살았었는데, 그곳에 사는 몸집이 조그마한 남자의 덫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온 거야." 아들이 아빠 사자에게 물었다. "그 몸집 작은 남자가 대체 누구길래 아빠를 공포에 떨게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우리처럼 몸집도 크지 않고 기운도 세지 않단다. 하지만 굉장히 영리하고 속임수도 잘 써." "그렇다면 내가 가서 우리가 당한 모욕을 되갚아주고 오겠어요." 아빠 사자는 아들을 만류했다. "그 조그만 남자는 별의별 재주가 많단다. 넌 절대로 그곳에 가면 안 된다. 거기 갔다가는 그 사람의 꾀에 빠져 죽음을 당하고 말 거야." "걱정마세요. 나도 영리하고 용기가 있어요. 아빠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당하지는 않아요. 기필코 복수를 하고 말겠어요." 아빠 사자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아들을 말렸다. "아들아, 가면 안 된다. 네가 내 말을 안 듣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다가는 곧 후회하게 될 거다."
하지만 새끼 사자는 아빠의 당부나 충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남자를 찾아 길을 떠났다. 새끼 사자는 길을 가다가 등가죽이 벗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진 말이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누가 당신을 이렇게 흉측하게 만들어놓았어요?" "몸집이 조그만 남자인데, 그 사람은 나를 끈으로 너무 세게 묶어요. 그리고는 내게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라고 채찍을 휘두르는 통에 이렇게 온몸이 멍투성이랍니다." 그 말을 들은 새끼 사자가 혼자 으르렁대며 중얼거렸다. '아! 그 몸집 작은 남자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혔단 말인가! 내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동물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단 말인가! 그놈에게 복수하겠다고 내 수염을 걸고 맹세하겠어.'
사자는 땅에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는 걸 보고는 황소에게 물었다.
"이 발자국은 누구 거예요?" "그건 몸집이 작은 남자의 발자국이랍니다."
그러자 사자가 손바닥을 펴 그 남자의 발자국 크기를 재보고는 말했다.
"발도 정말 조그맣네. 그런데도 그렇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하다니. 황소 아저씨, 몸집 작은 남자가 누군지 가르쳐주겠어요."
황소가 발로 멀찌감치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사자는 그 남자가 높은 산 위에서 곡괭이를 들고 밭을 일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봐. 네가 우리 부자와 다른 동물들에게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않고 있느냐! 이제 네 잘못을 뉘우칠 때가 왔다. 내가 너를 혼내줄 테다."
그러자 몸집 작은 남자가 몽둥이와 도끼, 칼로 무장을 하고는 사자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여기로 올라오면 이 몽둥이로 너를 때려눕히고, 이 도끼로 네 살덩어리를 토막치고, 이 칼로 네 껍질을 벗기겠다고 신을 두고 맹세한다."
사자는 몸집 작은 남자의 기세등등한 행동을 보자 그만 주눅이 들었다.
"그곳으로 올라가 너를 따끔하게 벌을 주려고 했지만 네가 그리 완강히 거부하니, 그럼 나와 함께 내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누가 더 힘이 세고 왕이 될 수 있는지 판가름을 해달라고 하자." 몸집 작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가 함께 길을 가면서 너는 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나도 네 몸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갈 때까지는 사이좋게 가자구."
이렇게 조건을 내세우고는 남자와 새끼 사자는 함께 길을 떠났다. 하지만 몸집 작은 남자는 큰 길을 내버려두고 덫과 함정들을 잔뜩 파놓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사자가 그 남자에게 말했다.
"나도 너를 따라서 이 길로 갈 테다." "네 마음대로 해."
그런데 남자 뒤를 바짝 쫓아가던 사자가 갑자기 덫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자가 큰 목소리로 몸집 작은 남자를 불러 도와달라며 사정을 했다. 남자가 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도 몰라. 발이 묶여서 꼼짝할 수가 없어. 나 좀 풀어줘." "네 아빠의 판결이 있을 때까지는 길을 가면서 서로의 몸에 손도 대지 않기로 맹세한 걸 벌써 잊어버렸니? 난 너를 도와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발이 묶인 채로 엉금엉금 기어서 길을 가던 사자는 또 다른 덫에 걸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손까지 꽁꽁 묶이게 되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사자가 도와달라며 큰 소리로 몸집 작은 남자를 불렀다. 하지만 몸집 작은 남자는 사자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몽둥이를 집어들고 사자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사자가 말했다.
"오, 몸집 작은 남자여. 나를 불쌍히 여기고 제발 나를 용서해줘. 내 머리나 등, 배는 때리지 말고 아버지의 충고를 제대로 듣지 않은 이 귀를 때려줘. 그리고 좋은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내 가슴을 때려줘. 아버지는 네가 영리하고 속임수도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거든. 아버지 말씀이 옳았어."
* 자기보다 나은 사람의 충고와 조언을 한쪽 귀로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충고가 세상을 사는 지혜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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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10. 묘청의 실패와 김부식의 승리 (보수와 사대주의의 수렁에 빠진 고려 재건국의 실패)
묘청의 정체
묘청은 1135 년에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반란(아직 사건을 규정짓기 이전이므로 잠시 동안 이런 표현을 쓰기로 한다)을 일으켜 대위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그래서 반란자들이 늘 그렇듯 묘청이란 인물도 그 행적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다. 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묘청이라는 그의 법명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나 속명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그에게 정심이라는 또 다른 법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 따름이다.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그의 행적은 뒤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헤아릴 수 없는 인물들 가운데서 굳이 그의 행적을 들추어보는 까닭은 그의 행적과 그 역사적 위치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묘청의 반란은 겨레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때로 지역과 지역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혹은 문신과 무신의 세력투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층민의 옹호를 받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민중항쟁의 지도자로 평가한 견해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거기에다 종교갈등의 문제까지 추가하면 묘청의 반란은 참으로 복잡한 평가를 받는 셈이다. 승려였다는 기록과 반란을 지도했다는 사실을 연결시킬 때, 묘청은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가권력에 맞서 반란을 지도한 역사상 단 한 명의 유일한 불교 승려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묘청은 스스로 도선의 후계자임을 내세웠다고 한다. 그는 강정화라는 도선의 후계자로부터 '태일옥장보법'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강정화는 불교 승려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인물이고, 태일옥장보법도 불교와 무관한 것으로 사물과 사람의 기운을 일치시킨 어떤 사물을 멀리 옮겨다 놓으면 그 사물과 함께 사람의 위치도 저절로 옮겨지는 선교의 전통적 술법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묘청의 승려였을지라도 불교사상에 얽매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가 서경에 지은 임원궁 팔성당에 모신 여덟 명의 성인을 살펴보면 그의 사상적 색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영산인 백두산(만주족은 청경산이라 불렀음) 신을 문수사리보살이라 이름 붙여 모셨고, 석가를 육통존자라 이름 붙여 그 다음으로 모셨는데, 이런 점에서도 그가 평범한 불교 승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묘청은 불교 승려라기보다 도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전통선교의 사상가였다. 물론 도선이라는 인물도 불교 승려였지만 불교적 사상의 테두리를 극복했던 것처럼, 묘청도 승려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그런 사상적 경향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도선의 경우 그의 출신 사문과 법맥이 그럭저럭 확인되고 있는데 견주어, 묘청의 경우 그러한 사항이 오늘날의 불교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오늘날 무속인이 임의로 승려를 자처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전통사상가요 선교의 수련인이었던 묘청이란 인물도 친불교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승려라는 신분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묘청이 도선의 경우처럼 불교와 선교 및 유교의 통합을 내세웠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 더욱 크다. 그렇다고 도선과 묘청 사이에 사상적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출신 사문과 법맥을 가진 도선이 사상통합의 중심축을 아무래도 불교에 두었다면, 출신 사문과 법맥조차 확인되지 않는 묘청은 그 축을 선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선과 달리 묘청은 자신의 교리와 정치의 일치를 한층 강력하게 내세웠으며, 내세지향적이기보다는 현세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협조자와 반대자
묘청은 처음부터 반란을 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현실적 여건과 최대한 타협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포부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의 계획은 먼저 고려의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즉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단군 왕검의 안식처라고 알려진 서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정치,사회적 상징성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자신의 세력기반을 튼튼히하며, 이를 기반으로 고려를 고구려나 대진 같은 나라로 재건국하려고 했던 것이다. 묘청이 처음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기록상 서기 1128 년 인종 6 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지지자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예컨대 정지상, 백수한, 김안,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과 반란의 지휘자였던 조광이나 유참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일 뿐, 묘청의 협조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임원궁을 짓고 팔성당을 지키며 반란에 참여했던 숱한 사람들 가운데도 많은 협조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정지상은 고려의 12시인으로 평가되며, 다섯 살 때 이미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정직한 인물이었으며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유교적인 관점에서 파악했던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장사상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역학이나 불교에도 사상적인 깊이가 있었다. "고려사"에 실린 그의 행적이나 "동문선" 및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린 그의 문학작품에도 이런 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백수한이나 다른 사람들도 정지상과 비슷한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묘청이 가장 먼저 내건 명분은 바로 서경 천도였다. 그들의 주장은 개경의 기운이 이미 약해진 반면 서경에 다시 왕업의 기운이 서렸으니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경지역 가운데서도 파발마를 설치했던 임원역 근처에 크게 번창할 기운, 이른바 '대화세'가 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고, 나아가 그곳을 수도로 삼아 혁신적인 정치를 편다면 금나라를 비롯한 36개국이 모두 그 그늘에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금나라로부터 끊임없는 압박을 받고 있던 고려왕 인종은 묘청 등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임금은 먼저 묘청이 건의한 대로 1132 년 2월 서경으로 행차했으며, 다음 달 서경에서 기병과 보병의 열병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인종은 같은 해 동짓달 서경에서 묘청이 주관한 행사에 자신의 옷을 보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과 아울러 묘청의 말을 좇아 '혁구정신(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의 기틀을 세움)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묘청 일파에 대한 반대도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핵심인물은 "삼국사기"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김부식이었으며, 그를 추종하는 임원개나 이중도 묘청의 추방이나 처형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들은 주로 옛 신라계의 실력자로서 정치적 보수성을 강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중국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족 중심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할 무렵 중국 대륙은 분열되어 한족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족을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으로 설정할 만큼 사대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1131 년 묘청 일파가 임원궁 공사를 시작하자 인종을 설득하여 노장사상의 연구를 금지시킴으로써, 묘청 일파의 기세를 주변에서부터 꺾어나가기 시작했다. 또 묘청 일파가 서경 천도를 내세우자 묘청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서경의 궁궐을 수리하게 되자 개경의 궁궐도 수리함으로써 서경중심론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런 팽팽한 대립관계에서 인종은 먼저 묘청 일파의 주장을 존중했다. 1133 년 섣달에 이중이 상소를 올려 묘청의 추방을 주장하자, 인종은 오히려 다음해 정원에 묘청을 삼중대통 지누각원사로 삼아 더욱 존중하는 한편 다음 달엔 서경으로 행차했다가 3월에는 대화궁으로 거처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대파들은 더욱 강력하게 묘청을 규탄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지도자였던 김부식이 직접 나서서 서경 천도를 규탄했다. 김부식의 상소 이후 보수파의 세력이 결집되자 묘청 일파도 상소를 올려 '칭제건원'(황제가 되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을 주장함으로써 마침내 그 대립상태가 막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이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한 승리자는 김부식을 비롯한 반대파일 수밖에 없었다. 개경 관료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추종자였으며, 그들은 기득권을 지킨다는 이해관계에 따라 강력하게 결집되어 있었던 탓이다. 김부식 일파는 자연적인 작은 재앙까지도 묘청 일파의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하늘의 상징이라고 주장했으며, 묘청 일파의 주장과 그들의 신앙적 행사가 민심을 현혹시키는 수단이라고 비방하면서 끈질기게 인종을 설득,협박했다. 그 결과 정치적 분위기는 점차 묘청 일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묘청 일파는 실력을 행사해서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거나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일 가운데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들은 실력행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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