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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90 호
단기 4340. 10. 28 (음력 9.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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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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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농어촌 여성문학 문예공모
사단법인 농어촌 여성문학회에서 농어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합니다. 기간은 2007년 10월1일부터 11월 30까지이며 자격 농어촌에 거주하는 여성에 한합니다.
모집부문 시, 수필,로 시는 3편. 수필은 1편입니다.
상금은 대상 1명에 50만원 금상 2명에 30만원씩 은상 3명에 20만원씩입니다 작품 수준에 따라 시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인 순수창작물로 발표되지 않은 작품이어야 합니다. 입상하신 분께는 농어촌 여성문학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드립니다.
보내실 곳 kyk10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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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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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여자의 최고급 화장품./ 로살린드 러셀(미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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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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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3. 퇴계 이황
외모가 흐트러지면 마음도 변한다
'외모가 흐트러지면 마음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찮게 여겨질 일이 아니다. 마땅히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만 하더라도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때 미리 쓸데없이 신경을 쓴다면 성공할 수 없다. 다만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깊고 너그럽게 인격을 길러, 말을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노력하여 점점 익숙하게 되면 자연히 자신도 실수 없을 것이고 남을 상대하는 데도 절도에 맞을 것이다. 비록 맞지 않는 말이 있더라도 남들 역시 심하게 그대를 원망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옛 선비들이 공부한 것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학문과 스승을 공경하고 힘써 잠시의 중단도 없었다. 또한 수많은 공부를 쌓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충분히 연구하고 실천한 다음에야 지식과 행동이 자연히 순서에 따라 얻어졌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학문에 있어 너무 급하게 이루려는 병폐가 있는 듯하다. 그런 까닭에 빠른 효과를 얻으려는 것을 피하지 못하여 항상 어긋나게 행하기 쉬운 염려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계속하면 쉽사리 편견에 빠져 도리어 진리를 해칠까 염려되는데, 이는 적은 폐단이 아니다.
또한 부모를 섬기는 일은 하늘이 준 양심과 지극한 도리가 아님이 없으니, 이치에 마땅한 것을 헤아려 지성으로 온순히 섬기고 조심하여 차츰차츰 행한다면, 어찌 위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집안 식구들이 섭섭하게 여기겠는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집안 식구들이 섭섭하게 여기는 것은 너무 급히 구하고 지나치게 빨리 하려는 때문이다. 역시 마땅한 것을 헤아려 보지 않고 점진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 자취가 너무 드러난 때문이 아니겠는가?
행하여 들어맞지 않거든 자신을 반성하여 자책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부모에게 드릴 음식을 몸소 장만하는 일이야말로 부모를 섬기는 일 중에 중요한 사항이다. 사는 게 풍족해지고 버릇없이 자란 자식이 많아 이것을 실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몸소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혹 부모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면, 형편에 따라 적당히 참작하여 차차 더해 가야 한다. 문제는 마음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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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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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 엮은이:김창호 / 펴낸이:백석기
2장 과학 철학
인간 뇌의 복제를 꿈꾸는 미래 컴퓨터
그렇다면 인간 지능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공 지능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참다운 지능이란 곧 한 가지 상황에서 얻은 지식을 다른 맥락에서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즉,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고, 그것을 예견치 못했던 상황에 접했을 때 융통성 있게 적용하며, 주어진 정보들을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관점이나 개념을 통하여 창조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등, 그런 능력에 관한 한 아직까지 인간의 뇌는 가장 뛰어난 정보 처리 장치임이 분명한 듯하다. 오늘날의 컴퓨터 프로그램은 오목이나 바둑을 상당한 수준으로 둘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서 드러나는 컴퓨터의 지능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오목이나 바둑도 물론 복잡한 게임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문제 상황은 무한할 수 있으나) 문제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또한 문제를 풀어 가는 규칙도 명료하게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대단히 빠른 처리 능력을 가진 컴퓨터라면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인간이 부딪치는 현실은 그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문제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해결의 규칙 또한 미리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개개 상황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애매하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처해야 할 컴퓨터는 결코 인간의 뇌를 따라올 수 없다. 그것은 기존 컴퓨터가 우리의 일상적인 시지각, 일상 언어 구사, 상식적 추론 등을 전혀 흉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우리 인간은 살짝 빠져 나온 꼬리만을 보고도 그것이 고양이라고 판단할 수 있고, 사진 속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금방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몇 번 공을 쳐 봄으로써 테니스 치는 법을 배우기도 하는데, 이러한 지각, 학습 능력은 컴퓨터가 결코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다. 1900년대 이래 기존 컴퓨터의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 뇌의 구조를 복제하려는 새로운 컴퓨터 설계 개념이 시도되고 있다. 흔히 '신경망 컴퓨터'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인데, 아직 그 성과가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한 연구로부터 나올 컴퓨터의 모습과 그 기능에 대해서는 예단하기 어렵다. 그때의 컴퓨터가 지금의 컴퓨터보다 훨씬 인간의 지능에 근접할지의 여부는 기다려 볼 일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창민이가 퍼스널 컴퓨터를 새로 구입하러 가면서 석규, 진실이와 나눈 대화를 읽고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창민 : 석규야, 내가 쓰던 286컴퓨터를 바꾸기로 했어. 함께 용산 전자 상가에 안 갈래? 진실이도 함께. 석규 : 창민이 너 돈 많구나. 그 컴퓨터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창민 : 그러게 말이야. 기종이 워낙 빨리 바뀌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훨씬 좋은 기능을 가진 기종이 많이 싸졌다는데 옛 기종을 사용하면 뭔가 뒤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사실 옛날 것으로도 내가 사용하기에는 충분할 텐데. 석규 :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기술에 대한 맹신 때문이 아니겠어? 조그마한 기술 발전을 마치 대단한 과학적 성과인 양 과장하고 사회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 양 떠벌리는 것도 결국 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니? 창민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컴퓨터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게 되면 결국 인간의 두뇌와 동일한 사고 능력을 지닌 컴퓨터를 개발할 수도 있지 않겠니?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즉 그러한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기술이 발견된다면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겠지. 석규 : 하하. 컴퓨터가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인공 지능의 가능성을 묻는 문제라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문제는 단순히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철학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어. 컴퓨터가 물질이라고 한다면, 기계적 운동을 하는 컴퓨터라는 물질이 정신의 과정을 산출할 수 있는가 하는, 정신-물질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가 있지. 그런데 나는 물질이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창민 : 석규, 너 또 골치 아픈 철학 이야기를 하는구나. 넌 꼭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것을 추상화해서 아주 복잡하게 만들더라. 석규 : 그렇지 않아. 철학이 추상적이라고 해서 골치 아프고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야. 창민 : 그래그래, 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설교조로 말이 길어지더라.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면 말야, 난 너의 생각과 달라. 물론 물질의 기계적 운동이 정신적 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지. 하지만 생각해 보자고. 과연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인간 육체의 물질적 운동 없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정신의 과정은 물질적 과정의 최고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석규 : 최근 철학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정신적 과정은 물질적 과정에 수반되거나 혹은 물질적 과정과 병행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거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자고. 컴퓨터가 하는 일이란 기호를 조작, 변환해 내는 계산기의 역할이라 할 수 있지. 일군의 기호를 다른 일군의 기호로 변형하는 기호 조작에 관련된 일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 논리학, 수학이 아니겠니? 그래서 좋은 컴퓨터라고 해 봐야 기호를 변환해서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과정을 보다 신속하게, 또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일 뿐이지. 창민 : 하지만 수학이나 논리학에서의 기호의 변환 과정을 추리라 할 수 있는데, 컴퓨터라는 기계가 논리학과 수학에서의 추리 과정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곧 지능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니? 수학이나 논리학이 인간 사유의 산물인 것처럼. 그렇다면 인간 지성이 하는 말도 결국 컴퓨터가 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능이란 것도 결국 물리적 기호 조작의 능력일 뿐인 것 아닐까? 석규 : 너는 인간의 지능에 대해 매우 협소하게 파악하고 있어. 인간의 지능은 단순히 기호들의 변형만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이나 관점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여 창조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주어진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창조적인 대화, 또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데이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등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이러한 일들을 컴퓨터가 수행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겠지. 진실 : 나는 요사이 너희같이 잘난 친구를 둔 덕택에 배우는 게 아주 많아. 난 잘 모르지만, 인간의 감각과 같이 글을 읽는다거나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컴퓨터가 개발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발전되면 인공 지능을 갖춘 컴퓨터를 만들게 되지 않겠어?
토론해 봅시다 1. 정보 혁명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2. 컴퓨터와 '계산'이라는 개념간의 관련을 설명해 보라. 3. 컴퓨터는 특별한 종류의 기계다.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4. 컴퓨터에 비교해 볼 때 인간 지능은 어떤 점에서 가장 특징적인가?
주요 개념 정보 혁명, 정보 처리, 컴퓨터, 인공 지능, 신경망 컴퓨터
참고 문헌 이인식, '사람과 컴퓨터', 까치 J.설, '심리 철학과 과학', 소나무 J.레이드, '마음과 컴퓨터', 민음사 P.처칠랜드, '물질과 의식',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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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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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강산
본뜻 :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강과 산을 말한다.
바뀐 뜻 :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 한 군데 버릴 곳 없이 아름다운 강과 산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 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보기글" -'삼천리 금수강산 너도나도 유람하세 구경 못한 사람일랑 후회 말고'하는 노래도 있지 않수? -공해와 무분별한 환경 파괴 때문에 금수강산이란 말도 옛말이 되어 버렸다
사전과 방언
남북의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이 함께 만들고 있는〈겨레말큰사전〉에 실릴 올림말로 약 30만 낱말을 잡고 있다. 고유어를 중심으로 편찬하는 까닭에 고장 정서가 스민 방언, 여러 문학 작품에서 부려쓰는 토박이 어휘들이 약 10만 낱말 정도 새로 실린다. 왜 방언과 작품의 어휘를 이처럼 많이 싣는 것일까? 그것은 ‘민족적 특징을 나타내는 고유어’를 중심으로 한다고 합의한 편찬 지침에 따르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역사, 다양한 지역의 전통과 민속, 고유한 정서와 문화를 방언과 문학작품 속의 언어들이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어의 경우에는 ‘내’(煙)와 ‘연기’를 사전에 올리고 있으나 북쪽의 문화어에서는 ‘내, 연기’와 더불어 방언인 ‘내굴’을 주된 어휘로 싣고 있다. 따라서〈조선말대사전〉에는 ‘내굴길, 내굴내, 내굴먼지, 내굴분무기, 내굴칸, 내굴쏘임, 내굴찜, 내굴안개’ 등의 복합어가 표제항으로 올랐다. 적극적으로 고장말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남쪽의 국어사전들에서는 ‘내, 연기’의 사투리인 ‘내음, 내금’을 ‘내’의 경상방언으로만 표기하고 어휘의 방언적 특징과 예문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그간 방언 어휘를 적극적으로 연구하지 않아서 그렇다.〈겨레말큰사전〉은 이를 보완하여 배달겨레의 특성을 지닌 토박이말인 고장말을 아름답고 품위 있는 우리말로 대접해 사전에 올리려 애쓰고 있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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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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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8.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진승, 오광)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오!
진승은 하남 사람으로 진섭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또 오광도 역시 하남 사람으로 진승의 친구였다. 진승은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크고 배짱도 두둑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주인 집 밭에서 일을 하다가 밭두렁에 나와 쉬면서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출세해서도 옛 친구는 잊지 않도록 해야지..." 이때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마라. 머슴사는 주제에 출세는 무슨 얼어 죽을 출세냐?" 그러자 진승은 개탄했다. "슬프도다. 참새가 어찌 대붕의 큰 뜻을 알겠느냐."
반란의 봉화
진나라 2세 황제 원년 7월, 대규모 강제 노역이 개시되었다. 진승이 살던 지방에서도 9백 명이 징발되어 북방의 국경 지대로 끌려갔는데, 진승과 오광은 소대장격의 인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야영을 하고 있을 때 큰비가 왔다. 그래서 길이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행군도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시간은 자꾸만 흘러 약속한 기한 내에 국경 지방으로 도착하기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인솔 책임자는 반드시 처형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진승이 오광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도망쳐봤자 얼마 못 가 잡혀 죽는다. 또 사람들을 끌고 국경으로 가도 죽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일반인데, 우리 한번 나라를 발칵 뒤집고 죽는 것이 어떤가?" 그러면서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지금 이 나라는 망조가 들었다. 지금의 2세 황제는 처음부터 황제 자리에 오를 자격도 없는 자였다. 원래 큰아들 부소가 당연히 차지해야 할 자리였거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부소가 아주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알지만, 아직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지. 또 유명한 항연 장군도 마찬가지일세. 그도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었는데, 초나라가 멸망당한 뒤 죽었다고도 하고, 또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소문이 분분한 형편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가 부소와 항연 행세를 하면서 여기 패거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버리는 거다. 그러면 천하의 백성들이 호응할 것이 아닌가?" 이 말에 오광도 적극 찬성했다. "좋다. 그럼 우리 한번 해 보는 거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점쟁이를 찾아갔다. 그때 점쟁이는 이들의 야심을 눈치채고, "당신들의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 다만 귀신의 뜻에 잘 따라야 한다." 고 말했다. 이 말에 크게 고무된 두 사람은 그러면서도 그 '귀신이 뜻'이 도대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하다가, "옳지, 귀신의 힘을 빌어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라는 것이겠지."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진승왕'이라고 붉게 쓴 헝겊 조각을 어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뱃속에 슬쩍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 물고기를 한 병사가 사가게 되었다. 그는 고기를 요리하다가 뱃속의 헝겊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이 헝겊을 보여주게 되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진승과 오광은 또 다른 꾀도 썼다. 야영하는 근처 숲속에 있는 사당에 오광이 들어가 밤에 도깨비불을 피우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초나라가 일어난다. 진승이 왕, 초나라가 일어난다. 진승이 왕."하고 소리를 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일행 중에 진승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게 되었다.
왕후장사의 씨가 따로 있는가!
오광은 평소에도 동료들의 일이라면 두 손을 걷어부치고 돕는 성격으로 병사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어느 날 이들 일행을 인솔하는 총책임자인 장교 두 사람이 술에 취했다. 그러자 오광은 갑자기 앞으로 나가 그 장교들에게, "나는 도망치겠다. 나는 도망치겠다."하고 몇 번이나 소리쳤다. 일부러 장교의 화를 돋구어 시비를 걸고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한 꾀였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장교 한 사람이 매우 화를 내면서 오광을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장교의 칼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오광이 잽싸게 그 칼을 주워 들고 단칼에 장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때 진승도 나머지 장교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진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비 때문에 길이 막혀 이미 기한 내에 도착하기는 글렀다. 가 봤자 모두 죽을 뿐이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개죽음을 당하다니 말이 되는가! 어차피 죽을 바에는 세상을 한번 깜짝 놀라게 해 주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모두 다 같은 인간일 뿐인 것이다. 우리라고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대찬성이오! 우리 한번 해 봅시다."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되자 진승과 오광은 스스로 부소와 항연이라 칭하고, 초나라의 관습에 따라 제단을 쌓고 올라가 모두 오른쪽 어깨를 벗음으로써 한 마음임을 맹세한 뒤 국호를 '대초'로 정했다. 그리고 진승은 장군이 되었으며, 오광은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우선 부근 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무기와 병력을 확보한 후, 차츰 그 세력을 넓혀 갔다. 그런데 그 세력은 급속도로 늘어나 순식간에 전차 6대, 수레 7백 대, 기병 천여 명, 병졸 수만 명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 진격해 옛날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성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 진나라의 폐해가 극에 달해 백성의 대부분이 이미 등을 돌린 탓이었다. 진승은 진성을 점령한 후 지방 유지들을 모아 놓고 자기의 뜻을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장군께서 몸소 일어나셔서 천하의 불의를 내몰고 폭정을 벌하셨으며 초나라를 다시 부흥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라고 떠받드는 것이었다. 사실 초나라 사람들이야말로 진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높았다. 천하 통일을 사실상 겨룬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였는데, 이 와중에서 초나라 회왕은 속임수에 걸려 진나라에 연금당한 채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역시 초나라다'라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였다. 아무튼 진승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곧 왕이 되었으며, 국호는 '장초'라 했다.
좌절된 진격
당시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은 제각기 군수와 현령 등 관리들을 죽이고 진승에게 속속 합류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의 군대는 무려 수십 만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초나라의 곳곳에는 수천 명씩 떼지어 다니는 무장 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일제히 진승에게 호응했기 때문이다. 진승은 그 당시 명망높은 인사였던 무신, 장이, 진여를 시켜 옛날 조나라의 영토를 공격케 하였으며, 옛 위나라 땅에는 그곳 출신인 주시를 파견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주력부대는 오광을 부왕으로 삼아 진나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오광은 형양 지방을 포위한 채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승상 이사의 아들인 이유가 삼천 군수로 있으면서 방어를 굳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진승은 선비 출신의 참모도 얻게 되었는데 바로 주문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항연 장군의 부하였으며, 또 춘신군을 섬긴 일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원래 진승의 군대에는 선비 출신이 거의 없었던 상태였으므로, 진승은 주문을 얻자 매우 기뻐했으며 그를 크게 신뢰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주문으로 하여금 진나라 공격을 담당하도록 명령하였다. 주문의 군대는 진나라로 진격하는 도중에 병력을 크게 증강하여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전차 1천 대, 병졸 수십 만으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주문은 단숨에 함곡관을 돌파하고 희 지방에 진을 쳐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 때 진나라에서는 장군 장항이 죄인들과 노예로 구성한 부대를 이끌고 나와 맞섰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주문은 적은 군사로 너무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감으로써 장한 군대의 반격에 말려 3개월을 버티다가 패했으며, 다시금 면지 지방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면지 지방에서도 10여 일간 싸우다가 결국 패배한 주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병사들은 흩어져 버렸다.
반란군의 분열
한편 조나라 공격을 명령받았던 무신 일행은 조나라 평정에 성공하자 진승과 상의도 없이 스스로 조나라 왕이라 칭하고 진여를 대장군에, 그리고 장이를 승상에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승은 크게 노하여 그들의 남아 있던 가족들을 잡아들여 처형하려 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말렸다.
"지금 큰 적인 진나라도 아직 무찌르지 못했는데, 그들의 가족을 죽이는 것은 적을 또 하나 만들뿐입니다. 차라리 기분좋게 승인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진승은 사신을 파견하여 무신의 즉위를 축하하고 그 가족들도 잘 대해 주었다. 그런 후 진승은 무신에게 즉시 진나라 공격에 나설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무신은 회의를 소집하여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부하들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일을 진승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만약 진나라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그 공격의 방향이 우리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차라리 북쪽의 연나라를 평정하여 세력을 확대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진승이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하여도 우리 나라를 쉽게 공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의견에 동조한 무신은 연나라 출신이었던 한광에게 많은 군사를 주어 연나라 평정의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한광이 연나라를 평정하자, 그곳의 유지들이 한광에게 간청하고 나섰다.
"초나라와 조나라에는 이미 왕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나라에도 왕이 계셔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장군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한광은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결국 그 뜻을 받아들여 연나라 왕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위나라 공략에 나섰던 주시는 위나라 평정에 간신히 성공했는데, 그곳에서도 주시를 왕으로 세우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주시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결국 옛날 위나라 왕손이던 구를 대신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은 제각기 독립하여 분열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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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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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26 장. 폴리에틸렌(새고 오염된 기구가 준 선물)
테플론(폴리테트라 플루오르 에틸렌)은 제2차세계대전 직전에 발명되어 원자폭탄 제조에 유용하게 사용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했다. 또한 1930년대에 발면된 고분자로, 연합군이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폴리에틸렌이었다. 폴리에틸렌은 레이다의 전선(케이블)의 절연체로 사용되었으며, 이 새로운 전자기기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절연체의 덕택이라고 할만하다. 프리텔-크라프츠 반응의 이야기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협력으로 실용화된 발명의 제1호는 고 옥탄가 항공기 연료의 제조였으며,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을 이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제 17장 참조). 테플론, 폴리에틸렌, 항공기 연료라는 멋진 세 가지의 화학적 발명과 개발은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헌을 하였다는 점에서 연합국 측의 화학자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리에틸렌(영국에서는 폴리텐이라고 한다)의 발명은 임페리얼 화학 공업사(I.C.I)의 영국 화학자들의 덕분이며, 우연적으로 생산되기는 했어도 그 후 군사용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었다. 이 세렌디피티적 발명에 대하여 I.C.I사의 화학자 J.C. 스웰로우는 '폴리텐의 역사'(1960년 간행)의 제1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시산이 흐름에 따라 어떤 이야기도 관념적으로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기에, 연구를 위한 계획이 처음부터 꾸준하고 논리적으로 발전하여 어떤 제품의 발명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는 순서나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폴리텐에 대한 이야기는 연구 중에 생겨난 예상 외의 결과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며 연구에 있어서도 우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이다 ... 폴리텐의 실제의 역사는 1932년 체셔 주 노스위치에 있는 I.C.I사의 알칼리 분과의 페린과 본인(스웰로우)이 화학반응에 미치는 초고압이 효과에 관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 1932년과 1933년에 걸쳐 약 50가지 정도의 반응이 시도되었으나 결과는 모두 기대에 어긋났다(즉, 흥미있는 또는 가치가 있는 생성물은 전혀 얻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에틸렌과 벤즈알데히드(benzaldehyde)의 반응도 1933년에 시험되어, 섭씨 170도에서 에틸렌의 압력 1400기압(초고압)으로 실시되었다. 실험이 끝날 무렵에 (반응)용기의 벽이 실험을 담당한 깁슨의 실험노우트에서 인용하면, '백색 왁스와 같은 고체'의 얇은 막으로 덮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고체가 에틸렌의 폴리머라는 것을 알았으나 에틸렌으로 실험을 반복하면 에틸렌은 격력하게 분해될 뿐이었다. 스웰로우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고압에서의 실험을 좀더 좋은 장치를 설계하고 만들어낼 때까지 중지했다. 1935년 12월, 개량한 장치를 사용하여 에틸렌의 실험이 재개되었다. 온도가 섭씨 180도에 도달했을 때 압력이 저하되어서 펌프로 에틸렌을 추가했다. 나중에 그 작은 용기를 열어 보니 흰색의 고체 가루가 전부 8그램 발견되었다. 기체의 에틸렌이 고체의 중합체가 되는 중합반응만으로 이 압력 저하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장치의 이음새 한 군데에서 누설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했다. 스웰로우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여기서 또 우연의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원인을 완전히 해명하기 의해 연구팀 전원이 수개월간 열심히 연구했으나 만일 이 누설이 아니었더라면 실험은 이토록 획기적이지 못하고 이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실험을 성공하게 된 것은 누설된 에틸렌 대신에 새로운 에틸렌을 용기에 추가한 데에 있었다. 그 에틸렌은 우연히 폴리머의 생성을 촉매하는데 마침 적당한 양의 산소를 함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웰로우는 또 이 폴리에틸렌이 폴리에스테르와 폴리아미드의 성질로서 뒤퐁 사의 카로더스가 발견한 '냉연신 현상(제25장 참조)'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고 보고했는데 이것은 그 에틸렌 폴리머가 거의 직선상태로 결합한 모양을 한 고분자량의 중합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I.C.I.사 사람들은 이 새로운 폴리머의 적당한 용도를 찾아내지 못했는데 만일에 또 한 번의 우연이 없었던들 단순히 실험실 안에서의 관심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수중에서의 전신, 전화케이블의 제조에 관계하고 있는 영국건설보수회사의 딘은 새로운 폴리머의 이야기를 듣고 수중케이블의 전연체로서 적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딘과 I.C.I사와의 우연한 정보교환으로 폴리에틸렌이 영국에서 레이다용으로 개발되었다는 것과 그로브즈 장군과 뒤퐁 사와의 우연한 정보교환으로 테플론이 미국에서 원자폭탄용으로 개발된 내용 중에는 신기하게도 우유사성이 있다. 테플론에 관해서는 제27장 참조). 딘은 그 물질을 아주 조금 밖에 얻지 못했으나 조사해 보고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I.C.I사의 사원도 폴리에틸렌의 기계적 성질이 전화케이블의 절연에 사용되고 있던 구타페르카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1939년 7월에 I.C.I사는 1해리의 해저케이블을 만들 만한 양의 폴리에틸렌을 만들었지만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완전한 테스트는 못 했으나 이 목적에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케이블 제조로 얻은 경험은 수년 후 조급한 개발이 필요해졌을 때에 대단히 유용했다. 잠수함 전화 케이블용으로서 예상되는 수요에 대비하여 작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이 공장은 1939년 12월 독일군이 폴란드로 침공한 마침 그날에 조업을 개시했다. 실제로 폴리에틸렌으로 절연된 해저케이블이 부설된 것은 전쟁 말기가 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유대를 맺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는 지상 및 기상탑재 레이다 장치용으로 순응력있는 고주파용 절연케이블의 수요가 금새 다급해졌다. 이 목적을 위한 폴리에틸렌은 영국에서는 I.C.I사가 또한 미국에서는 뒤퐁 사와 유니온 카바이드 사에 의해 각각 제조되었다. 레이다 장치에 있어서의 폴리에틸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레이다의 발명자 로버트 왓슨 와트 경의 1946년 8월의 발언(스웰로우의 '폴리텐'중에 인용된 것)이 그것을 극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폴리텐을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거의 이상적인 절연성과 구조상의 완전성 때문에) 그때까지 거의 불가능했던 기상탑재 레이다의 설계, 제조, 장치, 보수 등의 문제점이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 불가능했던 안테나와 피더의 다양한 디자인이 가능해지고 방송에서 보수 공사의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것은 폴리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폴리텐은 레이다에 의해 항공이나 바다 그리고 육지에서의 긴 연속적인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히틀러 총통이 그의 U보트의 일시적(실제로는 오래 계속된) 패배의 원인으로서 인정한 '유일한 기술장비'에 있어서도 폴리텐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레이다는 우리 함대가 '발견, 조준, 발사, 샤른호르스트호 격침'이라는 해군 사령관의 표현으로 나타났듯이 중요한 해전의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작은 군용함에 의한 계속적인 작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U보트에 대응하는 기상레이다의 소형 장치에 있어서도 폴리텐의 중요성은 그야말로 결정적이며, 또한 폴리텐을 사용하는 함재레이다와 동시에 이용되어 수주일 동안에 U보트를 100척이나 격침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폴리텐 성형을 한 이상 시스템은 우리 군의 폭격대의 위력을 수십 배로 증가시켰다.
폴리에틸렌은 테플론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후 필름과 성형품의 제조가 대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필름생산이 급속하게 발전한 미국에서는 많은 용도의 폴리에틸렌이 셀로판을 대신하게 되었다. 현재 폴리에틸렌 필름은 농작물과 냉동식품이나 부패되기 쉬운 식품과 섬유 제품 그리고 기타 모든 종류의 상품 포장에 사용되고 있다. 그 밖에 용도로 필름은 농업에서의 광범위한 이용(비닐하우스, 지면 피복, 도장용 피복) 그리고 없어서는 안될 쓰레기 봉지 등에 이용되고 있다. 전선의 절연체로서의 이용은 지금도 폴리에틸렌의 중요한 용도이다. 또 폴리에틸렌은 연간 생산량이 45만톤을 넘는 최초의 플라스틱이었다(1959년). I.C.I사의 화학자들에 의해서 발명된 것으로서, 산소를 촉매로 하여 고압에서 제조되며,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폴리에틸렌은 저밀도 가지형 폴리에틸렌이다. 여기서 '가지형'이란 탄소 두 개의 에틸렌 모너머 단위로 된 고분자 사슬의 특성을 표현한 말이다. 만일 에틸렌분자가 전부 서로 끝과 끝이 이어지면 폴리머분자는 그림 26-1에서와 같이 가지형이 아닌 직선형이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까지는 나뭇가지 모양의 폴리머를 생상하였다. 이것은 1950년대에 결국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어지게 된 고밀도 직선형 폴리에틸렌에 비하여 용융점과 밀도가 낮았다(가볍다). 사실, 폴리에틸렌의 우연한 합성은 1933년에 I.C.I사의 화학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3년 전 일리노이대학에서 마벨 교수의 지도를 받고 있던 대학원생 프리드리히가 실험을 하고 있을 떄 예기치 않았던 부생성물로서 이 폴리머가 생겼던 것이다. 이 실험은 알킬리튬 화합물이 존재하는 대기압에서 에틸렌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
미국화학회의 화학교육부가 1980년에 만든 비디오테이프 중에서 마벨 교수는 자기가 50년 이상 걸쳐서 공헌해 온 사연을 담은 '고분자 연구에의 입문'에서 1930년의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실험 결과를 바로 추적하지 않는 이유로 "폴리에틸렌이 그토록 쓸모있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또 하나의 잘못 판단한, 장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예를 상기한다. 몇 년 전 나는 가끔 존스 흡킨즈대학의 에머트 레이드 교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에틸렌과 벤젠으로부터 프리델-크르프츠반응(제17장 참조)을 이용하여 좋은 수율로 에틸벤젠을 합성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그가 그 과정을 특허출원을 하지 않은 이유는 '에틸벤젠을 아무런 쓸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1928년에 있어서 사실이었다. 그러나 에틸벤젠은 스티렌의 원료이며 1930년대에 들어서자 스티렌으로 폴리스티렌을 만들게 되었다. 폴리스티렌은 매우 용도가 광범위한 물질이며 1987년에는 미국 내에서 230만톤 이상의 폴리스티렌 제품이 판매되었다. 이 두 가지 일화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우연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고 해서 전부 중요한 발견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즉, 세렌디피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밀도의 가지형 폴리에틸렌은 압력용기의 누설과 그것을 관찰하고 조사한 덕분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고밀도의 직선형 폴리에틸렌은 더러워진 장치(또는 사용한 후 깨끗이 씻지 않았던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1953년 칼 지글러 박사는 독일의 뮬하임(Muelheim)에서 석탄 연구를 하는 맥스프랑크연구소 소장이었다. 그는 이전에 에틸렌을 I.C.I사의 화학자들이 사용한 방법보다도 저압에서 중합시킬 목적으로 마벨과 프리드리히가 하던 방법을 따르고 또한 발전시켰으며, 에틸렌을 알킬리튬과 또다른 유기금속 시약(금속원자가 유기의 원자단과 결합하고 있는 화합물)과 섞어서 시험하고 있었다. 이 실험에서 에틸렌폴리머가 생산되었으나 분자량이 작아서 소용이 없었다. 어떤 날의 실험에서는 전혀 폴리머가 생산되지 않았으며, 에틸렌의 2분자가 서로 붙은 이량체인 다이머(dimer)만 생겼다. 이 결과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지글러와 그의 공동연구자인 E. 홀치캄프는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다. 수주일 걸려서 간신히 알아낸 것은 그 반응에 사용한 용기 속에서 그 전의 실험에서 사용된 니켈화합물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발견에서 지글러와 그의 부하들은 니켈이나 다른 여러 가지 금속 또는 금속화합믈이 에틸렌의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로 했다. 그 결과 니켈과 마찬가지로 에틸렌의 중합을 저해하는 금속도 몇 가지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더욱 놀라운 발견으로는 어떤 종류의 금속염화물과 유기 알루미늄화합물을 조합하면 매우 유효한 종합촉매가 되어 그림 26-1에 그려져 있듯이 완전히 가지가 없는 거대한 고분자량과 고용융점 그리고 직선형 분자구조의 폴리에틸렌이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직선형 폴리에틸렌의 용융점이 높아짐으로써 실용성이 있는 한 예로는 자동접시닦기기계에 의해서도 변형되지 않는 컵이나 기타의 식기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87년 미국에서의 고밀도 폴리에틸렌의 생산량은 360만톤이나 되었다. 제조회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중합이 I.C.I사의 공정에 필요한 고온 고압이 아니고, 상압의 저온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최적의 촉매는 4염화 티타늄과 트리에틸알루미늄을 함유한 것이었다. 촉매는 소비되지 않고 재사용이 가능했으므로 티타늄의 값이 비싸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과정은 뮬하임 상압 폴리에틸렌 과정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급속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다.
밀라노의 몬테카티니 사의 고문이었던 이태리 화학자 줄리오 나타 교수는 지글러의 연구소와 몬테키티니 사 사이의 라이센스 계약 덕택에 새로운 과정에 관한 정보를 그때 그때 즉시 입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는 지글러의 촉매를 프로필렌(propylene)이나 기타 에틸렌과 유사한 탄화수소류에 응용하여 이 촉매가 이것들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어느 폴리프로필렌보다도 유용한 고밀도, 고용융점, 직선형의 폴리프로필렌을 만들 수가 있었다. 폴리프로필렌은 세계의 주요 플라스틱이 되어 1987년에 미국에서의 제조량은 320만톤에 가까웠다. 자동차 부품, 냉장고, 기타의 기구류 등 많은 성형품이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융단, 로우프, 케이블 등에 사용되는 섬유도 폴리프로필렌이다. 에틸렌과 프로필렌의 공중합체는 탄력성이 있고 어떤 용도에서는 고무 대신에 사용된다. 이 새로운 촉매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천연고무와 거의 같은 합성고무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촉매는 이소플렌이라는 모노머 단위가 서로 연결되어서 나선형의 고무 고분자로서 배열하게끔 제어할 수가 있다. 이 나선형이야말로 고무의 탄력성을 내는 분자구조인 것이다(합성고무에 관하여는 제11장 참조). 자동차 타이어의 합성은 지금까지 천연고무와 합성고무의 가격을 비교하여 결정되었고, 때로는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글러의 발견이 고분자공업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한 증거로 이 방식으로 제조된 모든 재료의 평가액이 연간 10억달러를 넘는다는 추산이 있다. 지글러와 나타는 1936년에 노벨화학상을 공동으로 받았다. 1973년 지글러의 사망직후 열린 추모식에서 그의 후계자인 막스 프랭크연구소의 G. 윌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글러의 기본적 지침은 참으로 새로운 것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며 그것은 실험에 의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예상 외의 발전에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새로운 현상이 주목적과 관계가 없을지라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도 지글러의 지침 중의 하나였습니다."
- 폴리염화비닐(Poly Vinyl Chloride): 폴리염화비닐(PVC)은 폴리에틸렌과 밀저한 관계가 있다. 모노머인 염화비닐(CH2=CHCI)은 에틸렌의 수소원자 하나가 염소원자로 바뀌어진 것만이 다르다. 이 폴리머는 대단히 용도가 광범위하며 공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플라스틱 재료이다. 1987년의 판매액은 6억 달러 이상이었다. 또한 매우 값싸고 다목적인 플라스틱으로, 파이프와 파이프 부속품(용도로는 이것이 가장 많다), 유연한 컴퓨터 디스크, 원예용 호스, 건축용 벽판, 전선용 케이블 전연체, 식품 포장 재료, 자동차의 시트 커버, 샤워 커튼, 기타 많은 가정용품 등에 사용된다. 1930년대 초에 플라스틱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업적인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또한 최초의 합성 고분자이기도 했다. 이 합성도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1938년에 프랑스의 화학자 빅토르레그놀는 봉해진 유리관에 염화비닐을 넣어서 햇빛을 쬐면 하얀 분말이 생성된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로부터 훨씬 후인 1872년에 E. 버우만은 염화비닐이 '용매나 산에 영향을 안 받는' 백색 고체가 된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의 중요성은 훨씬 후에까지 알지 못하였으며 공업적 개발은 염화비닐의 실용적인 촉매 중합법이 발견된 후의 일이었다. 폴리에틸렌 산화물과 폴리프로필렌 산화물: 1951년 여름 웨스트버지니아 주 남부 차알스턴에 있는 유니온 카바이드 사 소속인 두 명의 화학자 조지 파울러와 월트 데니슨은 에틸렌 산화물 (CH2CH2O)의 봄베(bombe)의 밸브를 열었다. 무색의 기체가 나와야 했었다. 그런데 나온 것은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였다. 그래서 그 즉시 이 상태가 불량한 봄배를 옆으로 밀어 내놓고 다른 봄베를 가져다가 계획했던 실험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호기심 많은 두 사람의 화학자는 상태가 불량했던 봄베의 내용물을 살펴보게 되었다(이것은 같은 상황에서 테플론을 발명한 로이 플랑켓트의 체험을 상기시킨다. 제27장 참조). 검은 액체를 밖으로 내놓았더니 단단한 흑색 고체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을 물에 잘 녹았다. 물에 녹아서 검어진 액체를 여과시켜 보았더니 흑색 분말과 무색의 투명한 용액으로 나뉘어졌다. 투명한 용액을 증발시켜 본 결과 굳은 백색의 고체가 남았다. 그 고체를 분석해 보니 철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백색 수용성 고체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즉, 이 백색 고체는 에틸렌 산화물의 폴리머이며 이것은 상태가 불량한 봄베 속의 산화철 촉매(녹)의 작용으로 생긴 것이었다. 이 작은 실험이 계기가 되어 10만에서 500만까지의 여러 분자량이 있는 에틸렌 산화물의 폴리머를 합성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몇 년 후 찰스 프라이스는 광학 활성 프로필렌 산화물을 중합시켜서 광학 폴리머를 만들었다.
사실은 독일의 화학자들이 그로부터 18년 전에 에틸렌 산화물을 중합시켰는데 아무도 이 발표된 논문을 몰랐던 것이었다. 재발견된 폴리에틸렌 산화물의 몇 가지 성질이 공업 화학자의 흥미를 끌었다. 그 하나는 폴리에틸렌 산화물은 설령 미량이라 할지라도 물의 점도를 크게 상승시키고 매끄러운 감촉의 용액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성질은 수성 페인트의 점도를 높이는 데 이용할 수 있으며 화장품, 로션 또는 식기용 액체 세제 등에도 사용되었다. 수용성 폴리머의 또 하나의 용도는 농업용이다. 튜브로 된 테이프를 만들어 거기에 종자(씨)를 일정한 간격으로 넣어서 이 '종자 테이프'를 얕은 골에 넣고 흙으로 약간 덮기만 하면 된다. 빗물이나 관개수에 젖게 되면 테이프가 녹아 종자의 싹이 발아하게 되고 일정한 간격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재배나 수확이 간단해졌다. 이 폴리머의 가장 매력적인 성질의 하나는 극히 작은 양을 물에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파이프나 호스 속을 흐르는 물의 마찰을 대폭으로 저하시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건축 현장에서 파이프를 통하여 콘크리트를 흘려 보내는 데에 이용되어 왔다. 소화 작업에도 이용되어 왔는데, 보다 가는 호스로 물을 보낼지라도 같은 힘의 펌프보다 더 먼 곳까지 물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발견에는 몇 가지 중요한 '만약'이 있다. 이를테면 만약에 불량한 봄베 속에서 중합이 조금만 더 진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들은 원인을 살펴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천만 다행하게도 중합은 마침 알맞게 진행되어 흥미로운 끈적끈적한 물질이 나왔기 때문에 파울러와 데니슨의 호기심과 상상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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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돌부처에 미혹된 자들을 깨우친 이인형
이인형(1436-1497)의 본관은 함안이고, 자는 공부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를 거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일찍이 금산군수로 있을 적의 일이다. 성종 13년(1482) 무렵에 개령현 송방리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오래되어 눈, 코, 귀, 입이 모두 마모된 돌부처 하나를 얻어, 이를 밭가에방치해 두었다. 우연히 천식증을 앓는 사람이 그 돌부처에 절을 하고 나서 병을 고쳐 영험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빛이 비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자 여자가 분잡하게 이르고 쌀, 베, 종이, 돈, 향, 초, 꽃, 과일을 가지고 오는 자가 밤낮 끊이지 않았다. 어떤 중이 와서 향화를 주관하자, 시주자가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사찰을 짓고자 하였다. 사족의 부녀들도 친히 와서 기도하고 개령현감, 금산훈도가 모두 그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빌기도 하고 혹 자식을 점지해 주기를 빌기도 하였다. 이때 이인형이 그 소문을 듣고 유생 및 사령군사를 보내어 그 중과 시주자를 잡아 쫓아 버렸다. 이를 문간공 김종직이 시로 축하하였다.
쑥대밭에 버려진 지 몇 해나 되었던가 미련한 돌덩이가 무슨 신이 있으랴 처음에는 나무 거사가 먹이 구하는 것 같더니 점차로 돈 부수는 지방 사인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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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륵
닭의 갈비뼈는 먹으려고 하면 고기가 적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는 데서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할 사물을 말한다.
후한의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위의 조조를 맞아 역사적인 한중 쟁탈전을 벌였을 때다. 전쟁이 수개월에 이르러 조조는 군비 군량이 어지럽혀지고 도망병이 속출, 나아갈 수도 지켜낼 수도 없어졌다. 그래서 조조는 '계륵' 즉 닭의 갈비뼈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뜻을 아는 부하가 없었다. 그런데 조조의 군병 가운데 양수라는 재사가 있어 일찍이 어느 비문의 은어를 풀어내는데 조조보다도 빨랐던 자다. 그는 조조의 '계륵'이라는 명령에 접하자 곧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하며 동료들에게 일러 주었다.
"한중 땅이란 마치 닭의 갈비뼈와 같아서 먹자니 먹을건 없고 버리자니 또한 아깝다는 뜻이므로, 나랏님께선 돌아가기로 작정하신 거라네"
아니나 다를까, 조조는 군병을 이끌고 한중에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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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스물네번째 이야기 개의 가죽을 둘러쓴 염소
아주 많은 양을 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크고 무서운 사냥개가 있어 늑대로부터 양들을 보호했다. 그 개가 얼마나 사납고 무서웠던지 늑대들이 감히 양 가까이 오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개도 나이가 들자 마침내 늙어 죽고 말았다. 개가 죽자 걱정이 된 목동들이 이야기했다.
"어떡한담. 들판을 지켜주던 개가 죽고 없으니 이젠 늑대들이 마음놓고 와서 양들을 잡아갈 텐데 어떡하지." 목동들의 걱정을 들은 건방진 염소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한 번 들어보세요. 내 뿔과 털을 깍고 나에게 죽은 개의 가죽을 벗겨서 씌워주세요. 그러면 늑대들이 내가 그 개인 줄 알고 놀라서 가까이 오지 못할 거예요."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한 목동들은 염소에게 개의 가죽을 씌워 개로 변장시켰다. 늑대들은 양들을 잡으러 내려왔다가 평상시처럼 그 무서운 개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도망쳤다. 그러던 어느날 배고픔에 견디다 못한 늑대 한 마리가 내려와서 양을 낚아채 도망쳤다. 개의 가죽을 둘러쓴 염소가 그걸 보고는 늑대 뒤를 급히 쫓아갔다. 염소는 자기가 진짜 개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늑대가 자기를 보고 놀라서 도망치는 것도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늑대의 뒤를 쫓았다. 늑대도 그 무서운 개가 쫓아오자 놀란 나머지 오줌을 싸면서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하지만 그 악명 높은 개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을 보자 겁에 질려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 몸을 다시 한 번 더럽혔다. 지칠 대로 지친 늑대가 붙잡히기 직전 염소의 개 가죽이 나뭇가지에 걸려 벗겨지면서 개가 아니라 염소라는 게 들통이 나버렸다. 그제서야 속임수라는 것을 깨달은 늑대가 염소를 붙잡고는 물었다.
"너는 누구냐?" 염소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대답했다. "염소예요." "그런데 왜 나를 그렇게 놀래켰어?" "장난삼아 재미있어서 그랬어요."
이 말을 들은 늑대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염소를 끌고 자기가 놀라 오줌을 싼 곳으로 가서 말했다.
"네가 보기에는 이게 재미있는 장난이지? 늑대가 염소를 보고 놀라서 두 번씩이나 오줌을 싼 게 재미있단 말이냐! 너는 죄값을 치러야 해!"
그렇게 해서 개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던 염소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 자기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잔꾀를 부리다가는 더 큰 화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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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7. 대진(발해)의 멸망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한정된 결정적 사건 #2)
불교의 번영과 연맹왕국의 황혼
대진에서 불교의 전성기는 9세기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대진 수도였던 중경 현덕부나 중기의 수도였던 동경 용원부의 유적에서는 불교적인 색채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데 비해, 후기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유적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경 용천부는 중기에도 한때 수도였던 적이 있으나, 후기의 수도로 사용된 기간이 더 긴 만큼 지금 발굴된 유적은 대부분 대진 후기의 것으로 평가된다. 요컨대 대진에서 불교가 번성한 것은 대인수가 수도를 동경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긴 이후였던 셈이다.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옮긴 뒤, 대인수가 주력한 정치적 사업은 연맹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북부여족 중심의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상적으로도 그가 선호한 것은 기마종족의 하늘사상이 아니라 권력의 중앙집중화에 걸맞은 다른 사상이었다. 불교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 대진의 후기 권력이 내세운 사상적 대안이었다. 불교와 더불어 유교사상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수도를 옮기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진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규모와 짜임새에서도 그런 사실이 드러난다. 대조영은 둘째 아들 대문예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거기에 머물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익히도록 하였으며, 유학생도 자주 보내 중국 문화를 공부하도록 했다. 물론 초기의 이런 작업은 중국 문화를 활용하기 위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문화를 배워온 그들이 대진의 중심세력이 되자 정치제도까지 중국식, 특히 당나라식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본받아 3성 6부 제도를 실시했으며, 당나라의 지방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무모하게 중앙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진 말기의 중심적인 이념은 역시 불교였다. 대인수는 백제의 법왕이나 무왕이 미륵불교를 내세웠던 것처럼, 당나라에 유행하던 화엄종을 받아들여 중앙권력을 절대화하려고 했다. 그 결과 상경 용천부에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규모가 매우 큰 가람이 여러 개 세워졌다. 화려한 탑과 석등도 세워지고 승려들은 국가의 외교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즉 말기의 대진은 마침내 오늘날 북방식 불교양식이라고 불리는 장엄하고 화려하며 기운찬 불교문화의 창조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독재왕권을 강화하다가 호족들의 거센 반발을 받아 비참한 패배자가 된 반면 조화와 연맹과 화합이라는 신라 전성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왕건이 고려를 세운 것처럼, 불교로서 기마종족의 전통을 대신하려 한 대인수의 후계자들은 마침내 패배자가 되었다. 요컨대 대진의 경우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의 대체기가 곧 문화의 전성기였으며, 문화의 전성기가 곧 나라(종족연맹)의 황혼기였던 것이다.
큰 역사 작은 역사
대진이 기마종족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한 뒤, 겨레 역사에는 두 가지갈랫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기마종족의 거대한 연맹을 재구축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단일종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역사를 만드는 길이었다. 고려왕조는 이 가운데 두번째 길을 선택했으며, 첫번째 길을 명분으로 남겨두었다. 고려는 한반도 내부에 살고 있는 부여족과 숙신족 및 예맥족 등을 조선족 또는 한족이라는 단일종족으로 통합하는 한편, 북진정책을 명분으로내건 것이다. 요컨대 고려왕조는 대진 멸망 이후 단일종족 중심으로 축소지향의 역사를 펼친 셈이다. 다른 한편 거란족이 주도하는 요나라는 첫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여전히 돌궐이나 여진족 및 말갈족 등과 연합하려 했으며, 그 내부에서 연맹을 이끌기 위한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 겨레의 역사는 무대를 바꾸게 되었다. 대진이 있을 때까지 우리 역사는 늘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고려 이후부터 우리 역사는 단일민족 중심의 한반도 역사로 줄어들었으며,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는 우리 겨레의 주변지 역사로 바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족은 그 주변지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발상을 바꾼다면, 그 뒤에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가 남의 역사일 수는 없다. 단일민족 중심의 겨레 역사가 우리의 '작은 역사'라면, 동아시아 기마종족 전체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의 '큰 역사'가 되는 탓이다. 대진 멸망 이후 고려는 우리 역사의 작은 무대였으며, 그런 고려의 입장에서 우리의 큰 역사는 남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관점은 끝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역사만이 우리 역사로 굳어져버렸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한반도가 오늘날처럼 작아진 까닭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또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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