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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82 호
단기 4340. 10. 20 (음력 9. 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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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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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외수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명박 후보가 지난 6월 6일 국립현충원에 방명록에 남긴 글의 맞춤법 교정본을 올렸다. |
ⓒ 이외수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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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외수씨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향해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분이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신다"며 비판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이외수씨는 지난 10일 자신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외수가 화난 이유'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올려 이 후보를 비판했다. 이씨가 화난 이유는 국어도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는 이 후보의 발언 때문이다.
이 후보는 지난 5일 부산을 방문해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나 국사 등 일부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면 어학연수를 안 가도 영어에서 불편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작가 이외수씨는 "무슨 망언인가, 이 분이 과연 대한민국의 언어와 역사를 얼마나 알고 계시기에 저런 망언을 저슴지 않는 것일까"라며 "그러실 바에는 차라리 미국으로 이민이나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이 후보를 맹비난했다.
이어 이씨는 "모든 문인들이 영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라며 "나는 정치와 무관한 견지에서 이 글을 올리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특히 이씨는 이 후보가 지난 6월 6일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남긴 글에 '빨간펜 교정'을 한 사진을 올려 이 후보의 한국어 실력을 꼬집었다. 이 후보는 당시 방명록에 "당신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읍니다. 번영된 조국,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모든것을 받치겠읍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읍니다'는 '~습니다'가 맞다. 그리고 띄어쓰기도 두 곳에서 틀렸다.
이 후보 발언과 관련 이경숙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어떻게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이렇게 하면 한글날은 영어날이 되는 것인지, 김치는 젓가락이 아닌 포크로 먹는 것인지, 한국 대통령도 원어민 대통령 수입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꼬집은 바 있다.
이외수씨는 <벽오금학도> <꿈꾸는 식물> <들개>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다. 아래는 이씨가 지난 10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전문이다.
이외수가 화난 이유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분이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무슨 망언인가 이 분이 과연 대한민국의 언어와 역사를 얼마나 알고 계시기에 저런 망언을 서슴지 않는 것일까
모든 문인들이 영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그러실 바에는 차라리 미국으로 이민이나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명박씨가 서명한 날짜는 6월 6일 현충일이다 그리고 이명박씨가 지칭한 당신들은 순국선열들이다
그 분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신 문화유산을 소멸 또는 약화시키겠다는 발언에 어떤 타당성이 있는가
나는 정치와 무관한 견지에서 이 글을 올리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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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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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시간도 충분치 않은데, 증오할 시간이 어디있으랴! /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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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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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힘이란 뜻을 담는 그릇
마음에 갖추어진 본성이 일어나 정이 되는 것이니, 성이 본시 착한 것이면 정 또한 마땅히 착하여야 할 것인데 정에 혹 착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뜻은 본래 순수한데 그것을 움직이는 힘에 맑고 탁한 것이 있는 것이다. 힘이라는 것은 뜻을 담는 그릇이다. 뜻이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힘이 쓰이지 못하므로 순수하나 뜻이 생겨날 때에는 선악이 비로소 나뉘이니, 선이란 맑은 기운이 일어난 것이요, 악이란 탁한 기운이 일어난 것으로 그 근본은 다만 천지 조화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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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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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10. 현대한국철학 논쟁
2. 특수성과 보편성 - 한국 철학의 실체에 대한 시각의 대립
이 문제는 한국 철학의 실체가 있는가, 혹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결론은 그런 관심 자체가 문제이며, 문제 제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한국 철학의 실체-본질을 따지는 것을 본질주의 혹은 실체론의 오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한국 철학의 정립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 철학 부재론과 고유론
한국 철학의 정체를 따지는 일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당시 지식인들의 초미의 관심은 새로운 근대 국가의 건립과 그 국가를 떠받치는 이념에 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새로운 국가에 필요한 새로운 인간을 기르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인간, 사회, 자연을 통합적으로 올바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는 문제였다.
부재론/식민사관: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제시한 식민사관이 그 바탕이다. 이들은 한민족의 특징을 타율성, 정체성/고착성, 종속성/사대성, 파당성으로 규정하고, 파당을 지어 싸울 뿐 발전할 수 없는 인간이요 국가요 민족이라고 하였다. 오직 외부의 힘으로만 발전하는 타율성과, 외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속성과 고착성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주체적인 철학은 없으며 다만 외부에서 들어온 철학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불교나 주자학은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실학도 고증학들 들여 온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은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억지이며 날조였다.
고유론/민족주의: 이 이론은 부재론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하였다. 이 속에는 외래 사상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는 주장과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 있다. 후자는 불교, 유교, 도교 등 중국에서 들어온 것을 뺀 단군 신화나 화랑도 혹은 무속 신앙만을 우리 사상으로 본다. 이는 스스로 초라해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불교, 도교, 유교도 우리 삶에 녹아들어 창조적 발전을 했기 때문에 우리 사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근대 이후 들어온 서구 사상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서구 보편주의: 이러한 고유론과 마주 서 있는 것이 보편주의이다. 이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시각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본 한국은 미신과 인습에 사로잡힌 나라였으며, 전통 사상과 철학은 근대 이성 혹은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서구 근대의 보편성에 대한 신화적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전통 문화에 급진적 계몽주의의 폭력이었던 셈이다.
실체론의 문제: 이 같은 쟁점은 근원적으로 본질주의 혹은 실체론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 한국 철학의 실체나 본질이 있어야 하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찾아야 하는가? 이는 열등감의 발로이거나 자기 과시욕의 산물로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우리의 이성이나 삶과 상관없이 철학의 실체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의 이성으로 우리의 삶을 사유할 때 우리 철학이 나온다. 그런데 고유한 철학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고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야 하는가? 이는 결국 필요없는 논쟁일 뿐이다.
한국 철학의 특수성과 보편성
앞에서 본 전통 문화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어떠한 철학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위에서 말한 시각차는 다시 특수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통해 좀더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편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학문은 보편 타당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철학도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철학은 하나이며 보편적인 연구 방법과 대상이 있다는 것, 설사 고유한 방법과 대상이 있다 해도 그 연구 결과로 나온 철학 자체는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특수성론자들에 의하면 한국 철학은 고유한 연구 방법과 대상이 있으며 그 연구 결과인 철학도 고유한 것, 특수한 것일 수밖에 없다. 후자가 우리 현실의 특수성과 역사 전통을 중시하는 반면, 전자는 학문이란 어떤 지역의 현실이나 역사에 매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후자는 현실적으로 있는 사실에 근거하는 반면, 전자는 학문의 보편성이라는 이상과 당위를 강조한다. 후자가 고유론을 이었다면, 전자는 보편론을 잇고 있다.
연구 방법론: 어떤 사람들은 동양 철학 연구 방법은 서양 철학과 다르다고 한다. 예컨대 윤리학의 경우 서양 철학이 선이나 정의 등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가진다면, 동양 철학은 그것을 얻는 방법인 수양론에 관심을 둔다. 동양 철학은 이론/지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지혜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 철학은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길을 택하지만 동양 철학은 직관/체득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중요한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다. 특수한 연구 방법이라도 그것이 동양 철학에만 적용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고학과 고증학이 동양 철학 연구에 유용하듯이, 해석학, 현상학, 언어, 분석, 역사적 유물론이 유용하다면 받아들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이 연구에 효과가 있고, 그 결과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느냐이다.
연구 대상에 따른 이론의 타당성 문제: 이 문제에서는 주장이 날카롭게 대립한다. 특수성론자들은 한국 철학의 연구 대상은 한국의 전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편론자들은 '한국'이라는 형용사를 부정한다. 그리고 굳이 붙인다면 '한국에서 하는 철학(활동)'으로 푼다. 철학이란 보편적인 것이며 서양 철학도 지금 우리의 사유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완성태로서의 전통은 아니지만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우리 전통이든 서양 전통이든 왜 그런 연구를 하는지를 따지는 문제에서는 관점이 더욱 치열하게 대립한다. 특수성론자들은 우리의 연구가 한국이라는 조건에 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 근거한 철학을 해야 하며, 그 결과 특수한 학문으로서 '한국'철학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주의자들은 학문이 한 계급 한 나라 한 인간에 구속된다면, 그것은 파당적인 이론이지 학문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론 체계로서의 학문이 사회적 존재에 구속되기 때문에, 오히려 보편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특수성론자들이 역사 현실이나 전통을 중시하는 반면 보편론자들은 개방적인 태도로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다. 특수성론자들은 서양 이론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도 없으며 맞지도 않는다고 보지만, 보편론자는 서양 이론이라도 보편적인 것은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본다. 보편론자들에게는 특수성론자들의 태도가 한국이라는 것에 학문을 한정시키는 폐쇄적인 모습이며, 나아가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수주의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쟁은 공허하다. 그 까닭은 두 주장이 서로 출발점과 도착점이 되기 때문이다. 특수한 이론도 그 도착점은 보편적이어야 하며, 보편적인 이론도 그 출발점은 특수한 곳이다. 중요한 것은 특수성이냐 보편성이냐 하는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따지는 일이다. 지금 우리의 이성은 무엇인가, 그것의 구체적 표현인 우리의 언어는 무엇인가, 혹은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는 무엇인가 등을 따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국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철학은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우리 철학의 수준은 우리 철학자 사회의 수준일 뿐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일반인의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한국어로 철학을 하는 한 더욱 그렇다. 과학을 예로 들자면 과학은 보편적이지만, 한국의 과학 수준과 미국의 과학 수준이 같을 수 없다. 미국의 발전된 과학이 바로 우리 것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언어 문제로 있지만, 지적 소유권의 문제가 더 크다.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문과 미국 학문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탐구의 결과가 바로 우리 학자 사회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또한 이론이나 학문이나 보편성을 지향해야 하지만, 그 보편성이 어떻게 얻어지는지는 생각해 보자. 그 보편성은 일차적으로 우리 학자 사회에서 얻어지며, 이차적으로 국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학자 사회는 일종의 시장이다. 그 속에서 치열한 토론과 경쟁을 통해 이론이 검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론이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아니다. 그 학자 사회에서 보편성을 얻는 공정 경쟁을 막는 권위주의적 풍토를 제거하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 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 우리 철학일 것이다. 그 철학이 얼마나 보편적이냐 하는 것은 우리 철학자 사회가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빼고, 특수성이냐 보편성이냐를 따지는 것은 공허할 뿐이며, 그것은 문제 제기부터 잘못된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이명현, "이성과 언어" (문학과지성사, 1982) 김태길 외, "국민윤리" (한국방송통신대학, 1985) 심재룡 외,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집문당, 1986) 편집부 엮음, "조선 철학사 연구" (도서출판 광주, 1988) 정성철, "조선 철학사" II (이성과현실, 1988) 후외려 주편, "중국철학사", 양재혁 옮김 (일월서각, 198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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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말서
본뜻 : '사건의 전말을 얘기해 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전말이란 일이 진행되어 온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말과 비슷한 말로 시말이 있는데, 시말이란 글자 그대로 어떤 일의 시작과 끝을 가리키는 일본식 한자어다.
바뀐 뜻 : 보통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일의 경위를 서면으로 적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말서로 바꾸어 쓸 수 있으나 이 역시도 썩 마땅한 말은 아니다.
"보기글" -이번 일 때문에 시말서를 써야 한다는데 어떻게 안 쓰고 넘어가는 방법은 없을까(전말서를 써야 한다는데) -걸핏 하면 시말서를 쓰라니 이거 어디 불안해서 회사 다니겠어?(전말서를 쓰라니)
사투리와 토박이말
‘사투리’는 대중말(‘대중’은 ‘눈대중이 매섭다’ 하는 대중, 곧 ‘가늠’을 뜻하는 토박이말)에 맞선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사투리와 대중말이 싸잡혀 있다. 대중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국민이 막힘없이 주고받도록 규정에 맞추어 마련해놓은 말이고, 그 규정에서 벗어나는 우리말은 모두 사투리다. 그것에는 어느 고장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고, 어떤 사람이나 모둠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다. ‘토박이말’은 들온말(외래어)에 맞선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토박이말과 들온말이 싸잡혀 있다. 우리말에는 중국과 몽골, 일본과 서양에서 들온말이 있거니와 이것들을 뺀 나머지는 토박이말이고 이것이 우리말의 알짜요 노른자위다. ‘토박이말’에는 대중말과 사투리가 있고, ‘사투리’에는 토박이말과 들온말이 있다.
‘사투리’와 ‘토박이말’은 배웠다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낱말이다. 그들은 굳이 ‘방언/지역어’와 ‘고유어/순수국어’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꾸어다 쓴다. 따져보면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살갑고 올바른 낱말이지만 ‘방언/지역어’나 ‘고유어/순수국어’는 어긋나고 엉성궂은 낱말이다.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우리 겨레의 삶에서 나고 자라 살갑게 우리 품에 안겨들지만 ‘방언/지역어’나 ‘고유어/순수국어’는 다른 겨레의 삶에서 나고 자라 엉성궂게 우리 품을 밀어낸다.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낱말이고, ‘방언/지역어’나 ‘고유어/순수국어’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낱말이다.
김수업/우리말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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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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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6. 고목나무가 꽃을 피우다(춘신군)
춘신군은 초나라 사람으로서 이름은 헐이요, 성은 황 씨이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초나라의 경양왕을 모시고 있었다. 경양왕은 황헐이 변론을 잘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 무렵에 진나라는 이미 백기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와 검중 지방 등을 탈취하였고, 언, 영 지방을 함락시켰으며, 동으로는 경릉까지 제압하여 초나라의 경양왕은 동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황헐(춘신군)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없애버릴까 두려워 하였다. 이에 그는 편지를 진나라 소왕에게 보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면
"지금 천하에서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신다는 소문이 들리니 이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울 때에는 힘없는 개가 그 해를 입게 되오니 초나라와 친교를 맺는 거이 가장 나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은 극단의 상태에 이르면 다시 처음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겨울이 다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다하면 겨울이 옵니다. 위로 쌓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위태롭게 되니 바둑알을 쌓아놓는 경우가 바로 그 일례입니다. 지금 대왕의 영토는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서 동서의 변경에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긴 이래로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대왕께서는 성교를 한나라에 보내셨는데, 성교는 그 땅을 가지고 진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 군대를 사용하거나, 위세를 과시하지 아니하고도 백 리의 땅을 얻은 것이니 왕께서는 유능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또 군사를 일으켜서 위나라를 공격하니 드디어 위나라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대왕께서는 또 제나라와 진나라의 허리 부분을 끊고, 초나라와 조나라의 등뼈 부분을 자르니 천하의 나라가 모였으나 감히 이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왕의 위세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 대왕께서 만약에 공적을 보유하시고, 위세를 지키신 채로 남을 공격하여 탈취하려는 욕심을 버리시고, 그 대신 인의 의 땅을 비옥하게 갈아 놓으셔서 후환이 없도록 하신다면 3왕에 다시 대왕을 첨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왕께서는 위대하신 것이며, 오패에 다시 대왕의 이름을 첨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왕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만약에 자기를 따르는 백성의 많음을 믿고, 병력의 당대함에 의지하여, 위나라에 승리한 위세를 타서 힘으로 천하의 군주를 신하로 삼으려 하신다면 그 후환이 생기리라고 신은 걱정이 됩니다. "시경"은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시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도 끝맺음을 잘하는 사람은 드물도다.
그리고 "역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우가 물을 건너려 할 때는 그 꼬리를 물 속에 담가 본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일이란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맺기는 어려움을 뜻하고 있습니다. 옛날 지백은 조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이익되는 것만을 알았고, 유차에서 자신이 당할 화는 몰랐으며, 오나라는 제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편리함만 알았고, 월나라에게 패배하리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공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눈앞에 있는 이익에 빠져서 그 뒤에 있을 환난을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초나라를 무너뜨릴 것만을 생각하시느라 초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 한, 위를 강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큰 세력을 가진 자는 먼 곳은 안정시키고 간섭하지 않는다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초나라는 우방이요, 이웃나라는 적국입니다. 또한 이런 말도 "시경"에는 있습니다.
펄펄 뛰는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 사로잡히고, 다른 사람이 먹은 마음을 나는 헤아려 안다네.
지금 대왕께서는 한, 위가 대왕을 잘 대우한다고 믿고 계시니 이는 바로 오나라가 월나라를 믿은 것과 똑같습니다. 신이 듣건대, '적은 틈을 주어서는 안되고, 때는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한, 위에 대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베푼 덕은 없고,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원망만 있습니다. 한나라와 위나라의 부자와 형제들이 진나라 때문에 연이어서 죽음을 당한 것이 이미 10대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조국은 피폐하게 되고, 사직은 기울었고, 종묘는 허물어졌습니다. 그들은 배를 칼에 찔려 창자가 끊어졌고, 목은 잘리고 턱은 꺾어졌으며, 머리와 몸은 분리된 채 풀밭과 진펄에 해골이 나뒹굴고, 두개골은 거꾸로 처박혀 국경선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와 노약자가 목과 손목을 묶인 채 포로가 되어서 길에 연이어 있습니다. 귀신들은 외로이 상처받고, 그들을 제사하는 유족도 없습니다. 백성들은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가족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진 채 남의 종이 된 사람이 천하에 가득 차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한, 위가 망하지 않는 것은 진나라의 우환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그들의 힘을 빌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니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대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네 나라에서는 반드시 군대를 일으켜서 대왕에게 대응할 것입니다. 진, 초의 군대가 전쟁을 쉬지 않고 하는 동안 위나라는 군대를 출격시켜 공격할 것이니 그러면 옛 송나라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남쪽을 향하여 초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그러면 사방은 반드시 정복당할 것입니다. 이들 땅은 모두 사방에 통할 수 있는 평원이며, 기름진 땅인데 그들로 하여금 단독으로 공격하여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중원지방에 한, 위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고,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 위의 강대함이 진나라와 대적할 만한 것입니다. 한편 제나라는 남으로는 사수로 경계선을 삼고, 동으로는 바다를 등지고 있으며, 북으로는 황하를 끼고 있으므로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천하의 나라 중에 제, 위보다 강한 나라는 없게 될 것입니다. 제, 위가 땅을 얻고 이익을 챙겨서 진나라의 하급관리를 거짓으로 받든다면 1년 뒤에는 비록 자기들이 황제가 되지는 못한다 할 지라도 대왕께서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풍부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생각컨대, 대왕과 같이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백성을 가지고 있으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처지에 전쟁을 하는 것은 대왕의 실책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대왕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보건대, 초나라와 선린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진나라와 초나라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한나라에 대처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진나라에 복종을 하게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 이때에 험준한 산동의 지리로써 옷깃을 삼고, 굽이치는 황하의 이로움으로써 띠를 삼는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대왕의 관문을 지키는 제후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위나라도 또한 진나라를 위하여 제후를 감시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왕께서 일단 초나라와 선린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진나라의 영향력 안에 들에 되는 두 대국 군주들이 제나라와 국경선을 같이하고 견제를 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제나라의 오른편에 있는 땅은 팔짱을 낀 채 그대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영토가 동해와 서해를 가로질러 형성이 된다면 제, 초는 연, 조와 연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연, 조를 위협하고, 바로 제, 초를 뒤흔들어 놓는다면 이 네 나라는 가혹히 공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복종할 것입니다.
황헐의 글을 다 검토한 소왕은 "참으로 좋은 글이로고." 하며 칭찬하고 백기의 공격을 멈추게 한 다음 한나라와 위나라에 사과하였다. 그리고 사신으로 하여금 초나라에 예물을 바치고, 동맹국이 될 것을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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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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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 21장. X선, 방사선 그리고 핵분열.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
아리 베그렐이 천연방사능을 발견한 것은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직후이며 그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베크렐은 음극선에 의해서 음극관의 유리에 인광이 나며, 동시에 투과력이 강한 새로운 방사선이 생긴다는 뢴트겐의 논문을 읽었다. 베크렐은 가시광선에 의해 인광을 발하는어떤 물질이 X선과 비슷한 투과력이 강한 방사선을 방출 할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그것은 잘못된 가설이었으나 가치있는 발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베크렐은 인광물질로서 우라늄의 화합물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사진의 건판을 검은 종이로 싸서 그 위에 우라늄 화합물의 결정을 놓고 그곳에 집중적을 일광을 쬐였다. 사진판을 현상해 보니 우라늄 화합물 결정의 상이 찍혀 있었다. 주의깊은 실험가인 베크렐은 미리 검은색 종이가 일광으로부터 사진 건판을 보호한다는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에 건판을 감광시킨 것은 일광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가 있었다. 이 실험에서 베크렐은 자신의 추론이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때 어떤 자연 현상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 결과 단순히 화학이나 물리학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있어서의 새시대(원자시대 또는 핵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후 파리에서는 몇 일 동안 해가 나지 않았다. 베크렐은 우라늄 화합물의 결정을 활성화한 인광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광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날 때까지 실험을 중지하고 이 결정을 서랍 속에 안전하게 싼 사진 건판 위에 놓아 두었다. 수일 후 베크렐은 우라늄의 결정과 함께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사진 건판을 현상했다. 우라늄 결정에 남아있었던 소량의 인광 때문에 결정의 상이 조금 나타날 것을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름의 상은 우라늄 결정과 함께 필름을 일광에 쬐였을 때와 같이 짙게 찍혀 있었다. 그래서 베크렐은 일광이 우라늄 결정을 인광성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일광의 효력은 밑에 둔 사진 건판을 감광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이 감광은 설령 어두운 곳일지라도 우라늄 결정 그 자체에 의해서 생긴다라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베크렐은 검은색 종이를 투과하여 사진 필름을 감광시키는 방사선이 나오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우라늄을 함유한 견본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사선은 분명 보통의 광선이 아니었다. 순수한 우라늄 화합물이건 불순한 우라늄 광물이건 우라늄을 함유한 것은 모두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방사선은 통과하는 공기를 전리시키기 때문에 검전기를 사용해서 방사선의 양을 계측할 수 있었다. 검전기의 작용은 같은 종류의 전하는 반발한다는 사실에 기초를 둔 것이다. 반발력은 기계적인 복원력을 물리치고 작용하는 탄력성 있는 도체가 휘는 정도로 관찰할 수 있다. 베크렐은 단 하나만을 제외한 나마지 모든 실험 재료에 방사선의 양과 화합물이나 광석 중의 우라늄 함유율이 정비례하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 제외된 하나는 피치블렌드라고 하는 광석으로 이것에서는 순수한 우라늄보다도 몇 배 강력한 방사선 양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베크렐은 이 광석에 우라늄 이외에 그보다 훨씬 높은 방사선을 가진 무엇인가가 함유되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단계에서 방사능에 얽힌 사연으로 퀴리부부가 등장한다(방사선이라는 말도 마리 퀴리가 명명한 것이다). 베크렐 교수는 마리 퀴리에게 박사 학위의 연구 과제로서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 중에서 미지의 방사선 불순물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 볼 것을 제안했다. 마리는 남편인 물리학자 피에르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1.4m3의 피치블렌드 광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한꺼번에 18㎏나 되는 광석을 주철 항아리 속에서 용해시키고는 철 막대로 젓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용감한 방법으로 마리와 피에르는 우라늄보다도 방사능이 강한 두 가지 새로운 원소를 피치블렌드에서 분리할 수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와 이름을 연관지어 폴로늄이라고 명명하고, 또 하나는 방사선이라는 점에서 라듐이라고 이름 붙였다. 폴로늄은 우라늄의 60배, 라듐은 400배나 방사능이 강했다. 라듐이 광석 중에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천만분지 1 정도였다. 퀴리부부는 베크렐이 자연 방사능을 발견한 지 겨우 2년 후인 1898년에 라듐과 폴로늄 발견을 발표했다. 마리와 피에르 퀴리는 베크렐과 함께 1903년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상의 절반을 베크렐에게 '천연방사능의 발견' 에 대하여 수여되고 나머지 절반은 퀴리부부에게 '앙리 베크렐 교수가 발견한 방사능에 관한 공동연구' 에 대하여 수여된 것이었다.
- 앙투안느 앙리 베크렐은 고명한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부친과 조부도 저명한 과학자였으며 둘 다 파리의 자연역사박물관의 물리학 교수였다. 1852년에 태어난 앙리는 일반 초등 교육을 마친 후, 공과대학으로 진학하여 거기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프랑스 정부의 도로 교량국의 기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부친과 조부가 교편을 잡았던 박물관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89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과 조부의 뒤를 이어 박물관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1895년에는 공과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후 1년도 안되어 그를 대단히 유명하게 한 이 발견을 했던 것이다. 1908년에 사망할 때까지 방사능에 관한 새롭고 중요한 연구를 계속했었다. 1911년 마리 퀴리는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피에르도 1906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않았으면 이 상을 함께 수상했을 것이다. 마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마리의 표창장에는 "파리의 마리 퀴리 교수에게 라듐과 폴로늄 양 원소의 발견과 라듐이 추출 및 이 놀라운 원소의 성질과 화학의 연구를 통한 화학 진보의 공헌에 대하여"라고 적혀 있다. 마리 퀴리는 1934년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 원인을 분명히 그녀가 방사선을 많이 받을 결과였을 것이며, 그 위험성은 그의 죽음 훨씬 후에까지도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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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변방으로 유배 가는 회재에게 옷을 벗어준 장언량
장언량(1491-1560)의 본관은 풍덕이다. 중종 9년(15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청백한 관리로서 벼슬은 정2품의 한성판윤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이다. 중종 때에 명 나라가 건주위를 치려 할 적에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니, 이기를 도원수로, 장언량을 부원수로 삼고, 이조의 낭관인 임형수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임형수가 도원수인 이기를 찾아가 보고 어버이가 늙은 것을 이유로 종사관의 직을 사양하니, 이기는 "부원수 장언량에게 말하라"고 답하였다. 임형수가 곧 장언량에게 가서 뵈니, 장언량은 융복(군북)으로 청사에 나와서 교의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임형수가 급히 융복을 갖추어 입고 다른 종사관과 함께 서서 예를 행하고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얼마 뒤 명나라에 파병하는 일이 중지되어 가지 않게 되었다. 뒤에 임형수가 장언량을 찾아가니, 중문에 나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며 자리에 인도하고 술을 베풀어 기쁨을 다하고 파하였다. 회재 이언적이 북방 변경인 강계로 유배되어 갈 적에 날씨는 춥고 옷을 얇았다. 장언량이 그를 길에서 만나 여우갖옷을 벗어 주었다. 을사사화 때에 이기가 사람을 시켜 장언량에게 말하였다.
"만일 내 말을 따르면 마땅히 큰 훈작을 얻게 될 것이오" "선인(아버지)의 정국훈(중종반정 때의 공훈)이 있으니 이것으로 이미 족하다"
장언량은 끝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 정이 중종반정 때의 원훈으로 하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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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과 동 키호테
이 두 작품 즉 세계 최고의 비극과 풍자소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 주인공을 위식적으로 비교한 것은 근대 러시아 작가 '뚜르게네프'가 처음이었다. 그는 '햄릿과 동 키호테'라는 강연에서 두 주인공의 성격을 비교한 다음 "햄릿을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돈 키호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햄릿'은 '세익스피어'작인 희곡의 주인공. 아버지를 죽인 자가 숙부임을 밝혀내고 원수를 갚지만 자기도 뒤따라 죽는다. '동 키호테'는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1547-1616)가 지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황당무계한 기사소설에 정신이 팔려 종자 '산쵸 판사'와 함께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수꽝스런 모험과 실패를 되풀이한다. 그로 인해서 '햄릿'하면 과잉의식에 사로잡혀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 즉 근대 지식인의 원형이라고도 할 내향적 성격의 사람을 말하고 반대로 '동 키호테'는 과대 망상적이지만 자기가 정의라고 믿으면 물 불 안가리고 덤비는 행동적 성격의 사람을 뜻한다. 주의해서 보노라면 우리들 주변에도 현대판 '햄릿'과 '동 키호테'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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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열여섯번째 이야기 당나귀의 발을 핥은 늑대
당나귀가 산 중턱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여우가 와서 물었다.
"너는 누구니?" 당나귀가 대답했다. "나는 짐승이야." 그러자 여우가 다시 말했다. "내가 물어보는 건 그게 아니야. 네 조상이 누구냐는 거지." "말이 내 할아버지뻘이 돼." "그것도 내가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네 이름이 뭔지나 말해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난 내 이름도 몰라. 그래서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왼쪽 발바닥에 이름을 새겨놓았대. 이름이 뭔지 알고 싶으면 내 발바닥에 새겨져 있는 걸 읽어봐."
여우는 당나귀의 속셈을 눈치채고는 그냥 산 속으로 들어가다가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늑대를 발견했다. 때마침 늑대는 배가 고파서 탈진한 상태로 나무그늘 밑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여우는 늑대를 골탕먹일 속셈으로 늑대에게 다가가 마구 야단치기 시작했다.
"아이구, 멍청하기는. 배가 고프다면서 왜 가만히 앉아 있는 거니? 얼른 일어나서 들판 있는 곳으로 가봐. 통통하게 살찐 동물이 있으니까 빨리 가서 잡아먹도록 해."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늑대가 초원으로 뛰어가서 여우와 똑같이 당나귀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니?" "나는 짐승이야." "내가 물어보는 건 그게 아니야. 네 조상이 누구냐는 거지." "말이 내 할어버지뻘 돼." "그것도 내가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네 이름이 뭔지나 말해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난 내 이름도 몰라. 그래서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왼쪽 발바닥에 이름을 새겨놓았대. 이름이 뭔지 알고 싶으면 내 발바닥에 새겨져 있는 걸 읽어봐."
당나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늑대는 당나귀의 속임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당나귀의 발바닥을 들여다보던 늑대는 뭐라고 씌어 있는지 자세히 보려고 흙투성이인 당나귀 발을 혀로 깨끗이 핥기 시작했다. 늑대가 당나귀 발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을 때 갑자기 당나귀가 늑대의 이마 한가운데를 냅다 걷어찼다. 순간 눈알이 빠지면서 늑대는 기절해 넘어져버렸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여우가 박장 대소하면서 말했다.
"아이구, 바보 같은 녀석.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 글을 읽겠다고 하는 꼴이란. 이제 쥐뿔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척하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걸 알겠지?"
앙숙인 늑대를 골탕먹이고 신이 난 여우가 다시 길을 가다가 독수리가 달팽이를 낚아채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달팽이가 껍질 안으로 들어가 꼼짝을 하지않는 바람에 독수리는 달팽이를 먹을 수가 없었다. 여우는 달팽이 껍질을 깨지 못해 끙끙거리고 있는 까마귀에게 다가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맛있는 걸 잡아오셨네. 하지만 머리를 써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그러자 독수리가 여우에게 달팽이를 나눠줄 테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여우는 이렇게 충고했다.
"아주 높이 날아가서 바위에다 달팽이를 힘껏 떨어뜨리면 달팽이 껍질이 깨질 거예요. 그러고 나서 사이좋게 나눠먹으면 되잖아요?"
독수리는 좋은 생각이라면 하늘 높이 날아가 달팽이를 바위 위에 힘껏 떨어뜨렸다. 그러자 바위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우는 껍질이 깨진 달팽이를 가지고 재빨리 숲속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 눈앞의 이익에 혹하여 남의 말을 쉽게 믿다가는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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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4. 외래사상에 흔들렸던 세 나라 (전통사상을 버리고 수입사상에 의존한 삼국의 집권층)
외래사상과 사회의 운명
고구려는 백제와 달리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백제와 운명을 같이했다. 고구려 역시 광개토왕이 영토를 넓힌 뒤 점차 왕권 강화에 눈을 돌렸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교 및 전통사상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과정에서 고구려를 구성하던 여러 종족들과 왕족 사이에 틈바구니가 생겼으며, 이것이 국력을 약화시켰다. 사상적 혼돈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 무덤은 주로 전통사상에 따라 고안되었는 데 비해 그 이후의 무덤에서는 사상적 혼돈이 자주 발견된다. 예컨대 같은 시기에 만든 무덤들에서조차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가 곧잘 나타난다. 사신도와 신단수를 고집한 무덤과 더불어 불교식 연꽃무늬와 보살상이 벽화와 천장을 장식한 무덤이 같은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문화적 혼돈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상과 사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들어오자 어떤 세력은 전통사상을 버리고 불교를 신봉했으며, 다른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기만 했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기도 했지만, 도교도 결국 또 다른 갈등의 불씨만 지폈을 따름이다. 광개토왕 이후의 고구려 역사는 그런 갈등의 역사였으며, 이러한 갈등은 결국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문화적 통합력이 작은 사회가 고조선의 부활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유럽 문화의 주류는 그리스 문화와 게르만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중세는 이런 세 가지 문화적 요소가 갈등과 통합을 겪은 시대였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이들 세 요소가 나름대로 융합되면서 '유럽시대'를 열었던 계기였다. 그런데 만약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배척을 받았더라면 유럽의 운명이 과연 오늘날과 같았을까? 그리스 문화의 합리성과 게르만 문화의 진취성과 기독교 문명의 근본주의가 융합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며, 백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이들 문명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동유럽은 서유럽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외래문화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쉽게 숭배하는 것은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줄이게 된다. 외래문화를 무조건 배척한 사회도 유지되기 어려우며, 그것을 쉽게 숭배하고 자신의 전통문화를 저버린 사회도 유지되기 어렵다. 역사는 언제나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시켜낸 사회뿐이었다. 고구려가 외래사상을 둘러싸고 지나치게 대립,갈등했다면, 백제는 지나치게 외래사상에 의존하려고 했다. 그런데 삼국 가운데 가장 힘없던 신라의 경우는 달랐다. 신라는 외래사상(특히 불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받아들인 뒤에는 그것을 자신의 문화적 역량으로 녹여내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고, 나아가 이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최치원의 문장 하나가 신라의 그러한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신의 도가 있는데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 그 도의 연원은 선가의 사적에 잘 밝혀져 있으며, 사실상 세 가지 사상(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원리는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기록을 남긴 최치원이 비록 남조신라 때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신라가 외래사상을 대했던 기본적인 자세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 사실들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풍류란 다른 모든 훌륭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원리였으며, 그 어떠한 것보다 높은 차원의 사상적 원리로 간주되었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서도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불교와 심각하게 대립했지만, 마침내 그것을 전통문화 속으로 포섭해 버렸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불교와의 근본적인 대립이나 불교에 의한 자기 문화의 근본적 변질이라는 측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원광법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마침내 불교가 신라의 전통적인 사상 속으로 포섭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또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도 불교사상을 깊이 있고 독특하게 이해한 지성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신라가 가지고 있던 전통사상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으나 이렇듯 정신적으로 이미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벌판을 휩쓸었던 고구려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모든 해안지역과 일본 열도에까지 담로를 설치했던 백제의 멸망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허약함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백두대간 끝머리에서 남한 땅의 절반도 안 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눈치만 살피던 신라의 성장 역시 그들의 강력한 문화적 주체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외래사상에 대한 자세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삼국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강성했던 두 나라의 그릇된 선택이 결국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낳았고, 나아가 영토적으로 작은 한반도가 만들어지는 최대의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하면서, 숱한 외래사상을 만나 허덕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처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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