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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70 호
단기 4340. 10. 06 (음력 8. 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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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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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자기계발서 '시크릿'이 5주째 선두를 굳게 지켰다.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이라는 부제 하에 호주의 전직 TV 제작자가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 전반에서 성공하는 법을 제시했다.
반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온 심리학 박사가 자폐 판정을 받은 손자에게 보내는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담은 '샘에게 보내는 편지'가 20위권에 첫 진입했다.
번성을 누리다 화산 폭발에 희생된 폼페이 '최후의 날'을 역사 팩션으로 구성한 '폼페이' 역시 새롭게 순위에 올랐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 무르익고 있지만 이번 주 역시 문학서보다는 재테크, 처세서 등 실용서의 강세가 이어졌다.
다음은 한국출판인회의가 지난달 28일부터 4일까지 교보문고, YES24 등 전국 온ㆍ오프라인 서점 11곳의 도서판매 부수를 근거로 집계한 10월 첫 주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시크릿(론다 번ㆍ살림 BIZ) 2.파피용(베르나르 베르베르ㆍ열린책들) 3.바리데기(황석영ㆍ창비) 4.이기는 습관(전옥표ㆍ쌤앤파커스) 5.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박현주ㆍ김영사) 6.코믹메이플스토리-오프라인RPG23(송도수ㆍ서울문화사) 7.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송승용ㆍ웅진윙스) 8.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ㆍ김영사) 9.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ㆍ아르테) 10.배려-마음을 움직이는 힘(한상복ㆍ위즈덤하우스) 11.무지개원리(차동엽ㆍ동이) 12.이코노믹 씽킹(로버트 프랭크ㆍ웅진지식하우스) 13.멘토(스펜서 존슨ㆍ비즈니스북스) 14.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정철진ㆍ한스미디어) 15.스페인에서 보물찾기(곰돌이COㆍ아이세움) 16.샘에게 보내는 편지(대니얼 고틀립ㆍ문학동네) 17.남한산성(김훈ㆍ학고재) 18.폼페이(로버트 해리스ㆍ랜덤하우스코리아) 19.대한민국2030 재테크 독하게 하라(김민수ㆍ미르북스) 20.공중 그네(오쿠다히데오ㆍ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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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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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물론 가끔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듣고도 그것을 분간할 줄 모른다면 똑같이 미치광이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 해리 S.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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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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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불의를 용서하지 말라
열두 번째는 정의를 지키는 일이다. 배우는 학생은 정의와 이익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정의란 것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이익을 따라가는 무리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좋은 일을 위하면서 이름을 얻으려는 것 또한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니, 군자는 그것을 흙 파먹고 사는 것보다 더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하물며 착하지 않은 일을 행하면서 이득을 보겠다는 자임에랴. 배우는 학생은 털끝 만한 욕심이라도 가슴 가운데 간직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은 부모를 위하여 노동에 힘쓰고 비록 품팔이와 쌀을 짊어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마음은 항상 깨끗하여 자기만의 이익 때문에 땀을 흘리지는 않았는데, 오늘날의 선비는 온종일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도 오히려 욕심을 면하지 못하니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혹시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꾸려 가자면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야 하되 오직 이득만을 구하는 생각은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고받고 하는 일에는 그것이 사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살피고, 물질의 얻음이 있을 때에는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구차스럽게 살아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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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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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7. 서학 논쟁
3. 우주관의 변화
17세기 이전에 조선에서의 세계 인식은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천원지방설'에 기초하여 조선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앙에 있고 그 외의 나라들이 중국의 주변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도입된 한역 세계 지도와 세계 지리서("직방회기", "곤여도설" 등)를 접한 조선인들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수광은 북경 사행원 이광정이 도입한 유럽 지도("구라파국여지도")를 보고 서양이라는 존재가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인식하였다. 이익은 '천원지방설'을 극복하고 '지구'설을 받아들였다. 이익은 한역 서양 천문서를 보고 감탄하며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그가 수용한 서양의 천문학설은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천문학설이었다. 그것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각기 다른 높이에 있는 여러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지구 중심의 천동설이었다. 이는 과학과 종교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서양 중세의 우주관이었으나, 이익은 이를 통하여 동양의 우주관을 근본부터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하였다. 그리고 지구설은 홍대용에 이르러 '지전설'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중화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더 넓고 다양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며 세계 각지가 모두 세계의 중심일 수 있다는 혁신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곧 화와 이의 구분, 내와 외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화 중심적인 춘추대의의 명분론을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평등하고 개방적인 세계관으로의 사상적 전화를 이룰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후담처럼 전통적인 우주관에 기초를 두고 서학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화이론적 지리관을 펼치기도 하였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에 있고 유럽의 모든 다른 나라들은 바다 끝의 외딴 지역이므로, 그 토지의 대소에서는 다소 서로 비슷하다 할지라도 중국과 같은 대열에 놓고 혼동하여 일컫는다는 것은 실로 질서를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화이론은 서양 세력이 물밀 듯이 밀려 오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척사위정 유생들에까지도 이어졌을 만큼, 쉽게 벗어나지 못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화이론적 우주관은 서양 세력에 대해서 조선인들의 자주적 의식을 지켜 줄 이론적 기반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보다도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두 눈에 접한 충격으로 인해 조선인들은 화이론적 세계관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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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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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본뜻 : 햇수를 세는 고유의 계산법에는 천간과 지지로 헤아리는 방법이 있다.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의 십간과,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의 십이지의 조합으로 해를 나누는데 그 조합이 총 60개이다. 십간과 십이지의 맨 처음 조합인 갑자년이 다시 돌아오려면 만 60년이 지나야 하는 것처럼, 자신이 태어난 해의 간지와 같은 해가 돌아오려면 만 60년이 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 60년이란 천지의 한 사이클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환갑이란 말이 생겨난 것인데 천지가 한 바퀴 돌 만큼 세상을 산 것이니 천수를 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뀐 뜻 : 만 60세를 이르는 말 또는 만 60세를 축하하는 일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주갑, 환력, 회갑, 화갑 등이 있다.
"보기글" -올해가 아버님 환갑인데 어떻게 해 드려야 기뻐하실까? -요새는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의료 시설이 좋아져서 환갑에 노인데 대접 받기는 이르지 않아?
언어 분류
우리말을 세계 여러 언어들과 견줄 때, 흔히 알타이 말겨레에 딸린다기도 하고, 교착어에 든다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현재 지구상에서 쓰이는 수천 언어들은 똑같은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에 비해 더 비슷하거나 가까운 게 있어, 서로 가까운 것끼리 묶어 볼 수 있다. 말을 분류하는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언어의 구조적 특징에 바탕을 두는 기준인데, 이를 유형론적 분류라 한다. 다음은 언어의 기원과 역사에 바탕을 두는 것인데, 이를 계통론적 나누기라고 한다. 언어의 유형론적 분류란 언어가 지니는 말소리, 낱말, 문장에 따라 같은 특징을 가진 언어들끼리 묶어서 나누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문장을 구성할 때 우리말처럼 목적어가 서술어 앞에 놓이는 언어들이 있는가 하면, 영어처럼 목적어가 서술어 뒤에 놓이는 언어들이 있다. 이처럼 부려쓰는 말 차례에 따라서도 세계 여러 언어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계통론적 분류란 그 언어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같은 뿌리에서 갈려 나온 언어에는 어떤 언어들이 있는지를 밝혀 나누는 방식이다. 이렇게 나누어 기원이 같은 언어들끼리 묶은 것을 말겨레(어족)라고 하는데, 흔히 알타이어족, 우랄어족, 인도유럽어족들이 그 보기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알타이어족에 드는 언어일까? 그렇다고 알고 있는 이가 적잖은데, 아직은 단정 짓기 어려운 수준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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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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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지은이:사마천, 옮긴이:김진연, 펴낸이:이영선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그 해 가을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침공하였다. 그 즈음 이웃 진나라는 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음모에 의해서 목공의 처남이 되는 태자 신생이 자살했고,(앞에서 보듯이 헌공의 딸이 목공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 또한 공자 중이와 이오 두 사람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그 후 먼저 탈출해 있던 공자 이오의 사자가 진나라로 목공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이오가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목공은 그 청을 받아들여 백리해에게 군사를 주어 이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오는 감사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성공하는 날에는, 하서의 여덟 성을 바치겠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이오는 성공하였고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영지를 떼어 주겠다던 약속은 완전히 무시했고, 국내에서는 오히려 여희 일파를 쓰러뜨린 공로자인 이극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한편 이극을 죽였다고 하는 소식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아직 진나라에 머물던 사자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에 내일이면 나도 어찌될지 모른다고 겁을 먹은 사자는 목공에게 다음과 같은 방책을 올렸다.
"이오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쁩니다. 인망이 있는 것은 오히려 중이 공자쪽입니다. 군주께 약속을 어긴 것도, 이극을 살해한 것도 두 이오의 심복인 여생과 극예가 획책한 짓입니다. 청컨대 감언이설로써 두 사람을 곧 불러다가 여기에 붙잡아 두고 그 동안에 중이 공자를 군주로 세운다면 만사는 잘 될 것입니다."
목공은 끄덕이면서 귀국하는 사자에게 사람을 딸려 보내 여생과 극예 두 사람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조심성이 대단했다. 무엇인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자 왕 이오에게 귀엣말을 하고는 오히려 그 사자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사자의 아들인 비표가 진나라로 피신하여 목공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오는 무법자이며 백성들에게 인망이 없습니다. 무찌르셔야 합니다."
그러자 목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군주라면 어떻게 충신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인심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목공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앞날에 대비해서 비표를 신하로 등용하였다. 목공 12년, 진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서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고 진나라에 양식을 도와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자 비표가 목공에게 말했다.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서 쳐부숴야 할 때라고 봅니다. "
이에 목공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기근과 풍작이란 번갈아 돌아오는 일이니 지금 여유가 있는 우리가 곡식을 보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백리해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이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고약한 놈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결국 목공은 백리해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좇아 식량을 주기로 했다. 그 날부터 진나라 도읍인 옹으로부터 진나라 도읍 강에 이르기까지 곡식을 운반하느라고 강에는 배들이, 그리고 육지에는 수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목공 14년에 이르자 이번에는 거꾸로 진나라에 기근이 심해서 이오에게 식량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오가 신하들과 논의하고 있었는데 어떤 신하가 이렇게 말하고 나섰다.
"지금이야말로 목공을 쳐부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승리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이오는 이 의견을 따라 이듬해인 목공 15년에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 갔다. 목공은 이에 맞서 비표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목공 자신도 출전했다.
명마를 잡아 먹은 용사들
9월 임술날에, 한원 땅에서 목공은 이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오 또한 단숨에 승부를 가리겠노라 마음먹고 몸소 나섰다. 그러나 싸움터를 달리며 순찰하고 있던 중 그만 진흙땅에 말의 발이 빠져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목공은 부하들을 이끌고 육박해 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오를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오의 군대에 포위당함으로써 목공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때 목공을 구원하기 위해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든 용사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목공은 위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여 이오를 생포했다. 그 전투가 있기 수년 전에 목공의 명마가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산 기슭에 살던 건달 패거리 3백여 명이 그 말을 잡아 먹고 있었다. 명마를 수색하고 있던 관리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공은,
"군자는 짐승을 죽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헤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고 하지 않나?" 하고는 도리어 그들에게 술을 잔뜩 주었다.
이 3백여 명의 사나이들이 궁지에 빠진 목공을 구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목공이 이오를 친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목공을 돕기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목공이 궁지에 빠진 것을 보자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자기들이 목공의 명마를 잡아 먹었을 때의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었다.
우는 아내와 천자
결국 목공은 전쟁에서 이겨 이오를 생포하고 자랑스럽게 개선한 후 이렇게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온 백성은 몸을 깨끗이 하라. 과인은 이오를 제물로 바쳐 상제께 제사를 올릴 것이다."
주나라 천자가 그 소식을 듣자,
"진나라의 근본을 따진다면 우리 주나라와 한 핏줄이다. 그러니 죽이지 말라." 하고 목숨을 살려 주라고 청했다. 또한 목공의 부인은 바로 이오의 누나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상복에다 산발하고 목공에게 호소했다.
"제가 동생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 동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번만 용서해 주소서." 목공은 곰곰이 생각했다.
'모처럼 이오를 사로잡아 기뻐하고 있었는데 천자께선 구명을 청하시고, 아내는 애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목공은 할 수 없이 이오를 방면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숙소와 식사도 군주로서 대우하도록 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이오를 자기 나라로 귀국시켜 다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래서 이오는 하서 땅을 목공에게 바치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이에 목공은 자기 집안의 처녀 하나를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세력은 크게 강성해져 동쪽으로는 용문강까지 뻗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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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이야기 - 로이스톤 M. 로버츠
제17장. 실험실의 우연에서 나온 새로운 화학공업.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이란 두 사람의 화학자 샤를 프리델과 제임스 M. 크라프츠에 의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이 반응의 발견은 두 사람이 1877년 파리의 프리델 연구실에서 실험 중에 예상 밖의 결과를 얻은 데서 비롯되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그들의 우연한 발견에 실용적인 중요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탄화수소와 케톤류의 합성법을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특허를 취득했다. 그들의 판단은 그야말로 적중했다. 그것은 유기화학 반응 중에서 실용상 이 반응보다 중요한 반응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라고 해도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이옥탄가 가솔린, 합성고무, 프라스틱, 합성 세제 등의 제조는 모두 '프리델-크라프츠 화학'의 응용인 것이다. 크라프츠는 1839년 보스톤에서 태어났다. 19세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한후 채광학을 1년간 공부했으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야금학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 화학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로버트 빌헬름 분젠과 파리대학의 샤를 아돌프 부르츠의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부르츠의 여구실에서 사를 프리델을 만난 크라프츠는 1861년부터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크라프츠는 1865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서 광산 검사관으로 근무한 후, 마침 그 무렵 설립된 코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3년 후에는 메사추세스공과대학(M.I.T)으로 옮겨 교육과 연구에 많은 개혁을 했다. 1874년에 건강이 나빠져 파리로 돌아갔으며, 부르츠의 연구실에서 프리델과 공동연구를 재개했다. 크라프츠는 M.I.T로 곧 돌아갈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기후가 바뀐것과 또하나는 아마도 프리델과 함께 발견에 대한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건강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17년간 파리에 머물렀다. 1877년부터 1888년까지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염화알루미늄과 유기 화합물의 반응에 관련하여 50가지가 넘는 논문과 특허를 냈다. 1884년에 부르츠가 사망하자 프리델은 소르본느대학에서 유기화학교수와 연구주임 자리를 인수 받았다. 프리델은 프랑스 화학회의 창시자이며 그 회장직을 4기 동안 맡아왔다. 1891년에 크라프츠는 M.I.T.로 돌아아서 교수로 복귀하여 1897년에는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육과 연구의 수준을 높임으로 해서 M.I.T.를 유럽의 대학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시도했다. 3년후에는 실험실에서의 연구에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학장직을 사임하였으며, 1917년에 78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 두 사람은 모두 학계나 대학의 관리 운영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과 공업의 역사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역시 그들이 발견한 반응에 의해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연구의 계기가 된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로 하자. 그들은 염화알루미늄을 알루미늄과 요오드로 처리해서 요오드화 알루미늄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리고 이 예상외의 결과는 알루미늄 대신에 염화 알루미늄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유기염화 화합물과 어떤 종류의 금속(예컨대 아연)과의 반응으로 유사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거기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으며, 반응물이나 촉매로서 금속염화물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는 금속염화물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비로소 증명했다. 그들은 프랑스 화학회에 자기들이 발견한 것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유기염화물에서 염소 한 개를 제거하고 탄화수소에서 수소 한 개를 제거한 나머지를 조합해서 생기는 탄화수소를 고수율로 생성시키는 방법을 확립했다. 이 방법에 의해서 에틸벤젠이나 아밀벤젠 또는 벤조페논 등을 얻을 수 있다."프리델과 크라프츠는 예상외의 결과가 여러 종류의 탄화수소류나 케톤류(벤조페논은 케톤의 일종으로 그들의 새로운 반응으로 얻을 수 있는 제2의 중요한 화합물군이다)의 합성법이 된는 가능성이 숨겨져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실험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프리델과 크라프츠의 방대한 연구논문과 특허는 유기화학의 새로운 연구분야와 실험법을 확립하여 더구나 현대 화학공업에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기초 과정을 구축했던 것이다.
'프리델-크라프츠 화학'을 복잡하고 전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들의 생명에 여러 중요한 형태로 관계되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상공에서의 전투에서 비행사에 의하여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인류 분쟁의 역사에 있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성과가 이토록 소수인에 의해서 달성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 공중전에서의 승리는 단지 영국 공군의 비행사의 수완과 용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항공기 연료의 우수성에도 있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전투기는 영국군이나 미국군의 전투기보다 우수했으나 연료는 그렇지 못했다. 영국군이나 미국군의 비행기가 사용한 항공기 연료 덕택에 그들은 성능면에서 결정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연료가 프리델-크라프츠 화학의 직접 산물이었으며 톨루엔이라든가 기타 알킬화 방향족 탄화수소를 함유하고 있었다. 그와 마친가지로 제 2차세계대전에서 천연구무의 공급원이 단절된 연합군에게 합성고무는 지상전의 사활문제였다. 자동차, 항공기용의 타이어는 필수품이었다. 정부와 생산업자, 과학자 및 기술자의 협력에 의하여 합성고무는 매우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그것은 스틸렌(styrene)으로 만들어졌으며 GRS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것은 스틸렌형 정부고무(Govenment Rubber, Styrene type)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또한 이것은 스틸렌과 부타디엔(C4H6)의 공중합물인데 공중합물이란 2종류의 단량체(모노머)의 혼합물을 중합시켜서 만든 고분자 화합물(폴리머)로서 이 경우 스틸렌과 부타디엔은 단량체이다. 아크릴로니트릴(C3H3N), 부타디엔, 스틸렌으로 만들어진 중합체(ABS)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것은 스틸렌-아크릴로니트릴 공중합물의 강도와 스틸렌-부타디엔 공중합물의 유연성을 어느 정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행가방이나 자동차 부품에 사용되어 왔다. 스틸렌만으로도 중합이 일어나며, 단순히 폴리스틸렌이라고도 하는 이 폴리머의 용도는 매우 넓다. 성형을 하게 되면 라디오, 전지, 완구등의 케이스나 기타 온갖 종류의 용기로 사용할 수 있다. 폴리스틸렌폼(스티로폼)은 단열성이 우수하고 가벼워서 건물의 단열제로 사용되기도 하고, 성형해서 아이스박스나 뜨겁거나 찬 음료의 일회용 컵으로도 사용된다. 최근에 발전한 스티로폼의 용도로는 옥외 광고용 조각이 있다. 1982년에 제조된 폴리스틸렌 제품은 180만톤 이상이나 되었다. 합성세제는 현재 우리의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다. 식기 세척이나 의류 세탁용이 이것이며 비누와 달라서 경수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샴푸의 주성분도 바로 이것이다. 생분해성 합성세제의 대표적인 예는 도데실벤젠설폰산염이며, 곁 가지가 되는 12개의 탄소는 프리델-크라프츠의 알킬화반응으로 인해 벤젠 분자에 소속된다. 아스피린(제 29장 참조)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페놀은 이소프로필벤젠[쿠멘(cumene)이라고도 한다]으로 제조하는데 이 이소프로필벤젠은 벤젠과 프로필렌과의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으로 만든다. 매년 4,000만 파운드(18,000톤)이상의 아스피린이 미국에서 제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인당 300정에 해당된다. 프리델과 크라프츠가 1877년에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었던 것이 그들의 통찰력에 의해서 설명되고 발견된 지도 약 1세기가 지났다. 앞에 열거한 것들은 그동안의 실용적인 용도 중에서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G.A. 올라와 R.E.A. 디어는 그들의 저서 '프리델-크라프츠와 관련 반응들'(1963)에서 "많은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우연의 선물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발견한 것을 놓치지 않고 발전시키려면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 예민한 관찰력과 창조력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라고 술회했다.
(해설)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 교수가 되고 나서 수년 동안 나는 그 해 여름을 오크릿지 국립연구소에서 지내면서 방사성 탄소(14C)를 유기화학의 연구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공부했다. 방사성 탄소는 원자력 에너지 계획의 부산물이다. 이것의 원자를 유기 분자 속에 도입하여 특수한 기기로 검출하면 그 방사성 때문에 그것의 존재와 심지어 그 위치도 알 수 있다. 오스틴대학으로 돌아온 후 이 새로운 기술을 연구에 활용해 보았다. 내가 선택한 주제는 독일의 화학자들이 1892년에 보고한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에서의 14C 추적 실험이었다. 프리델-크라프츠 반응에 관한 당시의 설명에 의하면, 독일인 화학자들의 결과에는 의문이 있었으며 실험적 증거는 신빙성이 부족했다. 새로운 실험 기술을 사용하면 그들의 결과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기술로는 적외선 분석과 가스 색층 분석, 이상 두 가지가 고려되었다. 둘 다 신뢰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14C 방사 화학 분석보다 간단했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14C 방사 화학법에 흥미를 더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사용해서 예전의 연구를 다시 한번 조사해 보기로 했다. 대학원생인 스탠리 브란덴버거가 실험을 도와주었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 분석이나 가스 색층 분석을 사용하였다면 이전의 연구 결과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14C 트레이서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분자 재배치를 발견했다. 우리가 사용한 14C 표지분자는 보통의 방향족 탄화수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발견에 학문적 의미가 있다 치더라도 실용적 가치는 없었다. 그러나 이 14C 표지분자에 의한 발견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보통의 방향족분자에서도 유사한 분자 재배치를 찾아냈다. 그 결과물 중에는 실용상 중요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화학 문헌 중에서 잘못된 보고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바로 잡기도 하고 그 외에도 의문이 되어있는 결과를 설명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연히 발견한 이 '알킬벤젠 재배치'의 연구는 우리들의 장기간에 걸친 연구 주제가 되었으며, 게다가 과학에 있어서 세렌티피티의 온갖 예에 관한 나의 무한한 흥미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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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남이 보내 오는 물건을 꼼꼼히 기록한 김안국
김안국(1478-1543)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국경, 호는 모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1등,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9년(1503)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중종 2년(1507)에중시에 급제하였다.
중종 26년(1531)에 일본 사신 붕중이 왔는데, 김안국이 선위사로서 영접을 주관하였다.
"노생이 중국에 두 번 조회하러 갔고, 유구에 두 번 사신으로 갔으며 귀국에 세 번 와서 외국 사람을 많이 만났으나 공과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붕중은 탄복해 마지않았으며, 귀국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우 정국과 함께 유림의 종장으로서 김안국은 이천에 물러나 살고, 김정국은 고양에 물러나 살고 있었다. 하루는 김정국이 이천 형의 집에 가니, 마을 사람들이 풋콩을 삶아 오기도 하고 혹은 오이를 따 가지고 와서 김안국에게 바쳤는데, 김안국은 그것을 모두 또박또박 책에 기록하였다. 김정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은 이런 물건들을 무엇에 쓰려고 받으며, 어찌하여 그것을 책에 기록합니까" "사람들이 성의로 보내 오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물리치겠으며, 책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곧 잊어버리게 된다. 어찌 남의 은혜로운 뜻을 버리겠는가"
시골에 살 적에 김정국은 간소하고 담박하여 나물과 잡곡밥도 이어 가지 못하였으나, 김안국은 전원을 장만하여 양곡을 쌓아 두고, 나누어주었다가 또 거두어들이며, 고을의 모임에는 꼭 참여하였다. 김안국이 전라감사가 되었을 적에 마침 전주에 있는 경기전을 중창하는 날을 당하여 경기전 대문 밖 조금 가까운 곳에 별도로 별당 두세 칸을 건축하였다.
인조 1년(1623) 계해반정 뒤에 정승 원두표가 정사공신으로 방백이 되어 경기전에 이르러 태조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이때 경기전 참봉이 기생을 불러 이 별당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 원두표는 그 별당을 철거해 버렸다. 그 뒤 나이 젊은 경기전 참봉들이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할 적에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생을 묵게 할 곳이 없어서 혹 재실에 몰래 끌어들여 같이 자기도 하였다. 김안국과 원두표 두 사람의 일처리에 대하여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분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문경이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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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 바디스
영화 '쿼 바디스'는 우리 나라에서도 개봉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 후 한동안 길가에서 친구를 만나면 "어딜 가는 길이냐?"하는 대신 "쿼 바디스"하고 묻는 것이 유행되었다. 본래는 '그리스도'와 사도 '베드로'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인데 19세기의 폴란드 작가 '셍키비츠'가 이 제목의 소설을 쓴데서 유명해졌다.
'그리스도'의 사후 기독교의 세력이 점차 로마제국의 하층민 사이에 번져나가자 황제 '네로'는 가혹하고도 잔인하게 이를 탄압했으며 그 결과 견디다 못한 기독교인들은 잇따라 로마를 떠났다. 그들 가운데는 12사도의 하나인 '베드로'도 끼어 있었다. 밤중에 로마를 빠져 나온 '베드로'는 '아피앙'가도에서 일출을 맞았다. 그때 '베드로'는 눈부신 햇빛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끓으며 말했다.
"쿼 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의 귀에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역력히 들렸다. "네가 나의 백성을 버린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
잠시 후 일어선 '베드로'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베드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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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3 - 후안 마누엘
네번째 이야기 양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 방법
어느 왕이 옛날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이야기꾼을 한 명 데리고 있었다. 그 이야기꾼은 왕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때마다 왕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어느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왕이 이야기꾼을 불러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상시처럼 이야기를 다섯 가지만 할 게 아니라 더 해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이야기꾼은 다른 짤막한 이야기 세 편을 더 해주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그 이야기들은 너무 짧구나. 그러지 말고 좀 긴 이야기 하나만 더 해주고나서 자러가거라." 왕의 명령에 이야기꾼이 긴 이야기 하나를 시작했다.
"어느 시골 사람한테 찬 리브라가 생겼습니다. 그 남자는 장에 가서 이천 마리의 양을 샀지요. 그런데 그가 양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여울목은 물론이고 다리 위로도 강을 건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 사람이 어떻게 강을 건널까 고민하고 있는데 사람 한 명과 양 한 마리에다가 가까스로 끼워넣으면 양 한 마리 정도는 더 탈 수 있는 배 한 척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양을 두 마리씩 태워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양 두 마리, 양 네 마리, 양 여섯 마리..."
그런데 이야기꾼은 이런 식으로 양들을 세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왕은 급히 그를 깨워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야기꾼은 이런 재치 있는 대답으로 왕을 만족시켰다.
"오, 고귀하신 전하. 이 강이 워낙 넓은 데다가 배는 작고 양들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전하, 불쌍한 시골 사람이 그 많은 양들을 데리고 강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나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겠습니다."
*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재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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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 박현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기마종족과 혼혈 한족
기자가 역사에 등장할 당시 동아시아 사회는 어떠했을까? 한나라 때 유향이 편찬한 "설원"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가 죽은 뒤 많은 지식인들이 해설을 붙인 결과, 그 책은 일종의 백과전서적인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 책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몇 구절 실려 있다. 간략하게 그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은나라 임금 탕이 하나라 임금 걸을 정벌하려 할 때, 이윤은 '정벌부터 하지마시고 조공의 양을 줄여 반응을 살펴본 다음에 정벌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윤의 말대로) 그렇게 하자 걸이 화가 나서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므로, 이윤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잘못하면 우리가 화를 입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탕은 걸에게 잘못을 아뢰고 다시 (종정과 같이)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은나라가 다시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자, 걸은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 했는데,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이윤은 하나라를 정벌하고자 주장했으며, 탕이 이윤의 주장을 따라 걸을 정벌하자, 걸은 남쪽으로 도망갔다.
이런 내용은 "상서"나 "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이 기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구이라고 부르는 세력의 군사력이 동아시아 정세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구이가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들이 세운 연맹국가가 고조선임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은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노릴 무렵에 고조선은 이미 동아시아의 전체 판도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강성함은 은나라가 대륙의 패권자가 된 다음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은나라는 고조선과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은나라의 중심세력 그 자체도 기마종족의 한 계열이었다. 즉 이 시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중심적인 문명주도 세력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마종족이었다. 요컨대 은나라도 여전히 기마종족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정치세력일 따름이었으며, 중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명을 세우지는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기록은 하족이나 은족 및 구이(고조선)가 모두 기마종족의 한 갈래이고, 그 가운데 은족과 하족이 세력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이때 강력한 무력을 가진 구이가 은족과 손잡자 패배한 하족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남하했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중국이 중국다운 독자적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남쪽으로 도망갔던 하족의 후예들이 은 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뒤의 일이다. 즉 백이와 숙제 및 기자 등 은족의 망명인들이 황하의 중상류로부터 황하의 하류 및 요동과 요서 일대로 밀려난 뒤에야 비로소 '한족'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다. '종족 내부투쟁'에서 밀려난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나섰던 하족은 일찍부터 남부(물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살고 있던 토착 남방종족들과 완전한 혼거단계에 들어갔다. 바로 이 혼거,융합 과정을 통해 독특한 정치적,문화적 역량을 축적한 새로운 종족, 곧 혼혈 한족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한 갈래인 서부의 주족이 다시 황하 중상류를 빼앗았으며, 다른 한족들을 통합하였다. 따라서 주나라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혼혈 한족이 자신의 계보를 하나라에서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을 '여러 하족'이라고 불렀으며, 주나라 왕족은 자신의 성이 황제와 마찬가지로 희씨라고 주장했다. 그들을 문화적으로 훈련시킨 것은 하나라의 망명세력과 그 문화였으며, 그들의 그런 주장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혈연과 문명에서 절반만 하나라의 후예일 뿐이었다. 그들은 수백여 년에 걸쳐 이미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어낸 새로운 종족, 곧 혼혈 한족(융합한족이라 불러도 좋다)으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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