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시대별로 본 한국 철학
5. 현대의 사상/해방 이후-현재
4. 북한의 주체 철학
완성기의 주체 사상
주체 사상의 기본 체계는 1982년에 김정일이 발표한 '주체 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제시되었다. 김정일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과학"에 집중적으로 실린 바 있지만 철학적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른 글들은 아니었다. 1983년 이후 비로소 이른바 김정일의 철학 사상에 대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1983년에 주체 사상의 철학적 원리와 사회, 역사 원리를 설명하는 단행본이 출판되다가, 1984년 "주체의 사상, 리론, 방법의 심화 발전" 전5권이 나오면서 주체 사상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5년에는 드디어 '위대한 주체 사상 총서' 전10권이 발간되어 주체 사상의 체계가 완성된다. 주체 사상의 기본 체계는 총10권 가운데 제1권 "주체 사상의 철학적 원리", 제2권 "주체 사상의 사회력사적 원리", 제3권 "주체 사상의 지도적 원칙"에 나타나 있다. 세 권의 책에 나타난 주체 사상의 기본 체계는 '김일성주의'의 한 구성 부분으로 간주된다. '김일성주의'는 더 이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한 독창적 개념임을 내세우기 위해서 사용된 말이다. 김일성주의는 철학적 원리, 사회 역사적 원리, 지도적 원칙을 내용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주체 사상을 정수로 하되, 주체 사상보다 포괄적인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김일성주의의 3대 구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3대 구성인 철학, 정치경제학,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셈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독일의 고전 철학과 영국의 고전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에 대체되는 과학적 학설로서 철학, 정치경제학,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3대 구성을 내놓았으나, 다시 사상 이론적 원천의 변화와 새로운 역사적 과제와 관련하여 주체 사상, 혁명 이론, 영도 방법이라는 3대 구성을 갖춘 김일성주의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의의 한 구성 부분이 된 혁명 이론으로는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론,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 이론, 인간 개조 이론 등이 있으며 영도 방법으로는 영도 체계와 영도 예술이 있다.
주체 사상의 전문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1986년부터이다. 1986년 이후로는 "철학연구"가 복간되어 완성된 주체 사상의 체계를 각 전문 분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간다. 복간된 "철학연구"는 1960년대와 같은 다양한 기획은 사라지고 6쪽 정도의 짧은 논문들만 수록하고 있다. 논문들에는 각주가 완전히 사라지고 본문 중의 인용 문헌도 김정일과 김일성의 것뿐으로,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만다. "철학연구"의 복간과 함께 북한 철학은 다시 강단 철학적 성격을 회복하게 되었다. 철학의 기본 원리가 바뀌었으니 종래의 개념 체계를 전반적으로 재조정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강단 철학적 성격은 메타 철학적 논설이 늘어난다든가, 서양 철학사를 중시한다든가, 논의가 세분화, 전문화된다든가 하는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0년대의 "철학연구"가 실천 문제의 이론적 정당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1986년 복간된 이후로는 주체 철학이 사용하는 개념을 독자적으로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며, 따라서 개념적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새롭게 정립한 패러다임을 세밀화하는 '정상 과학'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주체 사상의 전문화에서 이론적 관심이 집중된 것은 심리 철학적 문제였다. 주체 철학의 인간에 대한 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대체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인간론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세계관임이 강조되어 왔다. 그에 따라 구체적인 인간 심리를 다루는 인간론 연구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활기를 띠게 된다. 심리 철학적 논의의 핵심은 '사상 의식'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문제이다. 사상 의식은 지식과 대비되면서 설명되는데 이 문제는 당파성과 과학성, 혹은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문제를 주체 사상식으로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주체 사상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지적 이해보다 인간을 실제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문제를 중시해 왔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여러 심리적 개념들, 예컨대 요구와 지향, 감정과 심리, 각오와 의지 등이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상 의식'이 논의의 핵심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체 사상에 따르면 의식은 사상 의식과 지식의 두 측면이 있는데 양자의 차이는 사상 의식이 감정과 의욕 의지를 포함하는데 있다.
심리 철학적 문제 외에도 1986년 이후 북한 철학자들은 주체사관과 유물사관을 대비시킴으로써 주체 사상의 사회 역사적 원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들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한 서양 철학에 대한 연구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서양 철학 연구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1950년대 이래 남한에서 연구되는 현대 철학을 비판해 온 그 연장선상에 있지만, 특히 1980년대 들어서는 주체 사상을 서양 철학사의 가장 발달된 위치에 놓음으로써 주체 사상의 우월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와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철학의 역사적 전개는 서양이나 남한의 경우와는 달리 단 하나의 사상에 의해 완벽하게 지배되고 있다. 북한의 철학은 주체 사상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철학적 관심 자체가 이데올로기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즉 북한 철학계의 주요 관심사는 과학의 근거로서 철학을 탐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유일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철학은 그 유일 사상을 정당화하는 것 말고는 설 자리가 없다고 하겠다. 북한 철학계는 실천적 지도 사상으로 성립된 주체 사상에 철학적 외피를 입히는 작업을 1970년대 이래 최대의 과제로 삼아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 철학계는 하나의 일관된 경향을 보여 왔는데 그것은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론적 인식에 대한 감정이나 도덕 등의 상대적 자립성과 반작용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이론적 인식을 강조하는 서구 계몽주의의 전통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또한 인간 실천의 성격을 중심으로 철학의 근본 원리, 인간론, 사회, 역사적 원리를 수립하는 주체 사상의 세계관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 체계 구성과 표현 방식에서도 실천적 효과를 의도하고 있다. 철학의 근본 문제를 인간 해방이라는 실천적 목표를 성취하는 것에 두고 그로부터 도출해 내는 목적론적이고 연역적인 체계 구성도 그렇지만,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과 대중의 일상 언어를 통한 철학적 용어 선택 역시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철학계의 실천적 지향이 유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구조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한, 북한 철학계의 철학적 문제 의식이 온전한 의미를 획득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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