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34 호
단기 4340. 8. 1 (음력 6.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난임(불임) 극복사례 생활수기 공모
|
|
글터 → 명언 / 격언
|
버릴 수 있는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애당초 지니지않았던 조국이다. / 김소운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몸에 맞는 직업을
제가 갑자기 의원이 되었다니 무슨 의도며 무슨 이익을 도모하고자 그리 되었느냐? 제가 의술을 빙자하여 벼슬아치들과 사귀면서 아버지의 석방을 도모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말하는 바 덕을 베푸는 것처럼 거짓 행세하고 다니는 사람을 너는 알지 못하느냐? 돈안드는 입술을 지껄여 기쁘게 해주고는 돌아가 비웃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넌지시 권세 있음을 보이며 너로 하여금 몸을 구부리고 땅에 엎드리게 할 때 너는 절로 그 술수에 빠져들게 되니 너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무릇 사람들 중에 높은 벼슬이다 깨끗한 직책에 있는 사람, 덕이 높고 학문이 깊은 사람도 의술에 대하여 터득하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 천하게 의원 노릇을 하지는 않는다. 병자가 있는 집안에서도 바로 찾아가 묻지 못하였다. 서너 차례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위급하여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겨우 한가지 처방을 내려 귀히 여기게 하는정도라야 옳다. 너는 요즘 크게 소리내어 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방에 가득 모이게 하고 별의별 사람들을 내력도 모르면서 사귀거나 재워 주고 먹여 준다니, 그게대체 무슨 변고냐? 이후로도 내가 네 하는 일을 모두 들을 것이니 당장 그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살아서는 연락도 않을 것이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현대의 사상/해방 이후-현재
2. 남한의 서양 철학
마르크스주의 복원과 확산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하나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때는 분단 이후 경험해 보지 못한 온갖 진보적 국면들이 다양하게 돌출하였기 때문이다. 민족 문제가 저항적 인식의 지평에 진지하게 떠오르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사회 과학적 논거 위에 여러 수준에서 제기된 시대가 바로 1980년대였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1980년대는 마르크스주의가 40여 년의 단절을 뛰어넘어 한국의 지성계에 복원했다는 점에 그 본질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분단 이후 남한의 현실에서 철저히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면 세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공공연히 거론되고 전반적으로 퇴조해 가던 1980년대에 이러한 세계적 조류에 역행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이 땅의 젊은 지성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가 복원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념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민중 사상적 경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민중이라는 말은 학문상의 필요에서 나왔다기보다, 1970년대 이래의 사회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그러니만큼 민중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민중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논자에 따라 한결같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사회 변동은 사회 전반의 양극화 현상을 낳았고, 이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의 각 분야에서 소외된 계급과 계층을 배경으로 그간 민중이라는 말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고 이를 이론화하려는 숱한 노력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포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굳이 '민중 사상적 경향'으로 규정한 것도 이처럼 민중의 의미를 둘러싼 개념적 혼란과 심지어 이질적이기조차 한 다양한 경향을 포괄하는 민중 논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 사상이란 다분히 추상적이며 사상 내용의 정형성도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민중적 고통과 억압에 대한 연대감과 애정을 학문 이론이나 사상의 출발점으로 삼아 전개한 다양한 이론적 노력들을 민중 사상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민중적 관점에서 전개된 이론적 모색은 신학, 사회학, 문학, 국사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 이론적 자원은 무엇보다도 분단 시대의 역사적 현실이었지만, 아울러 종속 이론, 서구 마르크스주의, 헤겔 변증법 등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종속 이론은 1970년대 말에 도입되어 특히 1980년대 전반기에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수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이후 근대화, 산업화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배경으로 도입된 종속 이론은 한 마디로 근대화론에 대한 대항 이론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종속 이론은 과거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종속을 겪은 제3세계, 특히 중남미의 역사적 경험을 기초로 대두한 이론인 만큼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근대화론과는 이념이나 분석틀에서 정반대의 경향을 보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종속 이론의 도입은 중심부 위주의 발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을 동반한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념적으로 친사회주의 발전 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수용을 부채질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경향은 헤겔 변증법이었다. 1980년대 초의 사회적 격동을 겪으면서 이른바 '헤겔 르네상스'라 불러도 좋을 현상이 젊은 철학도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변증법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 철학사에 뿌리 깊었던 독일 관념론 전통을 배경을 한 것이긴 했지만, 과거 헤겔 연구에서 지배적이었던 체계적, 존재론적 접근보다는 시대와의 긴장 속에서 철학을 이해하는 헤겔 철학의 방법적, 역동적 측면에 더욱 주안점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헤겔 변증법에 대한 관심은 헤겔 철학 자체나 독일 관념론 전통을 지향하고 있었다기보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예비적 전단계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점은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헤겔 변증법에 대한 관심이 유물 변증법에 대한 관심으로 급격히 선회한 데서도 확인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 특히 루카치(G. Lukacs)철학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역사 현실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변증법의 핵심으로 본 그의 입장은 변증법의 현실 변혁적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헤겔 변증법에서 유물 변증법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는 데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과학성(총체성)을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주장 또한 노동자 계급의 주도적 역할을 부인하는 네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차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중반을 계기로 다양한 민중 사상적 경향은 마치 불순물이 하나하나 제거되어 가듯이 마르크스주의로 수렴되어 갔다. 마르크스주의 복원의 이념적 배경이 되었던 여러 사상 경향은 사실 1980년을 전후한 사회 운동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1970년대에는 민중 운동이 민주화 운동 속에 포함되어, 독자적으로 실천되지 못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분야의 민중 운동은 급격한 신장세를 보이면서 독자적 이념과 주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각 분야의 민중 운동이 조직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필요성과, 이런 통일성을 보장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분석 및 전망의 필요성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민중 사상적 경향과 이 시기의 숱한 논쟁은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이론적 대응이었으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귀결의 원인에 대한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의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 지적해 둘 점은 당대 정치 권력의 억압성이다. 1970년대 이후 정치 권력은 대학, 언론, 노조 등 시민 사회의 여러 집단들에 의한 자율적 운동을 금지하고 국가 통제 아래 편입시켜 버렸다. 온건한 사회 운동을 포함한 사회 운동 일반을 전면적으로 봉쇄한 정치 권력에 대한 저항은, 따라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제도 개혁 운동의 형태를 띨 수가 없었다. 강압적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급진적 정치 이념이 호소력을 가지는 상황이 구조화되고, 이는 1980년을 전후한 사회적 격동을 겪으면서 현실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바로 평화적, 합법적 사회 운동이 설 자리는 좁아지고 혁명의 호소가 설득력을 지니는 풍토 아래서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막연하게 사용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로 지칭되는 사상적 조류는 실제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일컬어지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네오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동구권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제3세계의 마르크스주의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 이후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 여러 사상적 조류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 확산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 사상만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 아래 논의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종속 이론과 서구 마르크스주의도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일부를 담당하며,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성과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1980년대는 포괄적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입장들이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사회 운동의 지배적 흐름으로 정착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두 흐름이 지배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사회 운동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 두 흐름은 사회 운동 진영 내부에서 발생한 숱한 노선 갈등의 세계관적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서로 충돌하고 있던 두 흐름은, 마르크스주의가 장기적으로 단절되었던 역사를 감안하더라도, 그것들이 지적으로 폐쇄성을 보였다는 점, 민중 운동의 현실적 전개를 과도하게 앞지르거나 심지어 불필요한 논쟁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수많은 이론적 쟁점을 만들어 내면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수준을 높인 점도 함께 지적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지하다시피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의 물결이 한국 민중 운동의 이념에 심대한 동요를 가져 왔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화된 연구가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상적 동요가 일어난 셈이었다. 불과 5년 남짓하는 기간에 마르크스주의의 복원과 동요가 교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 무관하게, 격동의 1980년대를 겪으면서 복원된 마르크스주의가 1990년대 한국 서양 철학 연구의 한 관심 영역으로서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리라는 점은 틀림없다 하겠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야합
본뜻 : 정도를 걷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합치는 것을 가리키는 야합이란 말은 그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부모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쓰고 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나이가 50살이나 차이 나는 안미재라는 처녀와 혼인식도 올리지 않고 훌쩍 동거로 들어갔고 곧 이어 공자를 낳았는데, 이 사실을 사마천은 야합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바뀐 뜻 : 정상적이지 않은 남녀간의 결합을 가리키던 이 말이, 오늘날에 와서는 눈앞의 이익이나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리거나 결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3당 합당을 구국의 결단이라 해야 할 것인가, 야합이라 해야 할 것인가 -이합집산과 야합이란 말이 정치인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쓰이는 세태의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양반
본뜻 : 동반과 서반을 한데 아울러 양반이라 한다. 문반들은 주로 도성의 동쪽에 살고 무반들은 주로 도성의 서쪽에 살았기에 그들을 동반과 서반이라 했다. 사대부들이 관직을 얻으면 문반이나 무반,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가리켜 양반이라 했던 것이다.
바뀐 뜻 : 조상의 혈통을 살펴보아 사대부 출신을 양반이라 일컫는다. 오늘날에는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을 일컫는 말로 널리 쓰고 있으며, 나이 든 남자를 일컫는 일반 호칭으로도 쓴다.
"보기글" -그 사람 참 양반이야, 나 같으면 불 같이 화를 낼 일에도 허허 웃고 마니 말이야 -그 양반 참 딱도 하시네 아니, 그렇게 말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
|
|
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음지에서 일하며 권력을 지향한다 - 마피아
시칠리아의 마피아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범죄 단체가 있게 마련이지만 모두 마피아라는 명칭을 얻지는 못한다. 마피아가 워낙에 뚜렷한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부는 물론이고 정치 권력까지 획득하여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즉 권력을 지닌 기업형 범죄 조직이 마피아이다. 게다가 마피아는 특유의 철의 규율로 결속된 집단이다. 마피아는 그 기원에서부터 5가지 기본 원칙의 오메르타(omerta)라는 서약을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한다. 죽음 앞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침묵의 서약, 조직과 보스에 대한 절대 복종의 규범, 우호적 마피아 분파에 대한 지원의 의무, 패밀리를 향한 공격에는 철저히 복수한다는 원칙, 당국과의 접촉을 불허한다는 원칙 등이 오메르타를 구성한다. 마피아는 하나의 패밀리, 즉 가족이나 다름없다. 엄격한 위계질서로 틀지어져 있으며 패밀리 보스에 대한 복종과 집단의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것이다. 마피아가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에 앞서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던 이유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다. 마피아의 발생지인 시칠리아 섬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에 합병되기까지 무수한 외침을 경험했다.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에 인접해 있는 시칠리아는 유럽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 터키제국, 스페인, 게르만 등 여러 강국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래서 외부 세계를 경원시 하는 배타적인 시칠리아의 분위기가 유래된 것이다. 배타적이며 내부 결속을 중시하는 시칠리아의 분위기는 마피아에게도 직접 이어진다. 더욱이 범죄 단체에 대한 외세 지배자의 탄압과 견제는 더욱 심각했고 무솔리니를 비롯한 자국의 정치 권력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마피아는 강적들과 항상 맞설 수밖에 없었다. 기원에서 현재까지 마피아는 외세와 내부의 세력에 맞서 조직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철의 규율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빈번한 외세의 침략은 마피아(Mafia)의 어원을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피아는 `피난처`를 의미하는 아랍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있고, 또 `지배 질서에 대한 호전성`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있다. 그리고 콜린 윌슨은 <잔혹>(하서)에서 마피아는 이탈리아어 `Morte Alla Francia Italis Anela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죽음을 외친다).`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단어라고 설명한다. 명칭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럿이지만 마피아의 성격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일치한다. 초기 마피아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시칠리아의 봉건제 기간 동안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마피아는 부재 지주에 고용된 소규모 군대였다. 지주들은 외세와 산적 그리고 농민들로부터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리들을 고용하고 토지 보호의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마피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말하자면 초기 마피아는 귀족들에게 고용된 동네 `어깨`였다. 마피아의 또 다른 성격은 좀더 긍정적이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을 지배하던 외세에 맞서 싸우던 소규모 비밀 조직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외세 지배 질서를 교란하던 독립 투사로 출발하여 현재의 기업형 범죄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성격이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외세가 지배하는 곳에서 토종 깡패들은 다분히 외세에 반하는 경향을 지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이라 불리는 인물은 엄밀히 말한다면 종로 지역을 지배하려던 불량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일본 군경에 맞서야만 했고, 그래서 그는 독립 투사의 이미지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피아가 뚜렷이 범죄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때는 19세기 초반, 즉 시칠리아에서 봉건 제도가 무너진 시기와 일치한다. 마피아는 자기 구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협박과 무자비한 폭력을 무기로 지역을 장악하고 그곳에 자신의 규범을 심었다. 무력한 일반인들은 보호의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고 마피아의 규범을 따름으로써 마피아의 지배를 인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 섬 곳곳에 생겨난 마피아들은 협상을 통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제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오늘날까지 1,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어 낼 조직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폭압적인 정치 권력도 민심을 잃으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라고 할 때, 불한당 마피아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사실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철의 규율과 무자비한 보복 덕분에 유례없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상식대로라면 그렇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설명도 있다. 마피아는 분명 악성 종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험 제도와 유사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이 그 설명의 요지이다. 마피아는 봉건제가 무너진 직후 급성장하였는데, 그 즈음의 사회 변화상을 주목하면 왜 마피아가 시칠리아에서 긍정적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봉건 제도의 몰락이 가져온 변화 중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소수가 재산과 물리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봉건 제도 아래에서는 귀족 등 극소수가 재산과 물리력을 독점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재산을 소유하고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사회적 안정성이 크게 훼손된다. 사람들은 주위의 군상들이 잠재적인 도적떼임을 잘 알고 있다. 틈만 보이면 내 재산을 사취하거나 강탈할 게 분명하다. 실은 나도 남의 재산을 취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기본적 신뢰가 사라진 것이고 사회는 대혼란의 상태에 빠져든 셈이다. 이전의 국가 권력을 대신하여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운 세력이 바로 마피아이다. 마피아는 정당성은 없었지만 거래 관계를 교통 정리할 정도의 물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마피아에 의뢰하면 재산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거래도 안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거래와 일상 생활에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보호를 요청하는 대신 그 대가를 마피아에게 지불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마피아는 보험 제도에 비유할 수 있다.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재물을 일부 포기하는 원리, 그것이 바로 마피아와 보험 제도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민초들에게 마피아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명백히 불한당 같은 깡패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없으면 불편한 존재가 마피아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피아가 사회적 권력까지 쥐게 된 배경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거론된 강고한 내부 규율도 중요한 변수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아가 통일될 무렵의 정치적 호조건도 거론될 수 있다. 가리발디가 주도한 1860년 이탈리아 통일은 곧 전국적 선거로 이어졌는데, 이 선거에서 마피아는 정치 권력의 지분을 공식적으로 얻게 된다. 시칠리아의 선거를 통제하고 바람을 일으킬 유일한 토착 세력이 마피아였기 때문에 중앙 정치가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피아가 시칠리아 사회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도 사회 권력을 장악하는 데 호조건이 된 것이 분명하다. 마피아는 시칠리아 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세력이었기에, 시칠리아인들로서는 통일이나 선거 그리고 명백히 사회적 요청을 충족시키는 제도 중 하나였기에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시련이 거듭되었지만 마피아는 몰락하지 않았다. 가장 가혹한 시련은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20년간 이탈리아를 지배하면서 시칠리아의 마피아를 일망타진하기로 결심한다. 세즈레 모리라는 지방관를 직접 파견하여 마피아 조직원들과 보스들을 척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한동안 일대 위기에 봉착했던 마피아는 파시스트로 위장 전향하면서 명맥을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탄압을 피해 북부 이탈리아로 이주한 덕에 마피아의 세력권이 오히려 확장되는 결과도 얻었다. 많은 마피아들은 2차 대전 후 이탈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에 협력을 약속하고 감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현재도 그 악명과 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하다. 시칠리아에만도 181개의 마피아 패밀리가 있는데 조직원은 약 5,0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은 물론이고 전체 이탈리아를 장악하여 비합법적인 활동과 합법적인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으로 진출했는데 죄근에는 특히 동구권 등에 그 세력을 뻗치고 있다. 세계의 언론들은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 마피아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이탈리아 마피아의 확고한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1992년 반마피아 법안을 통과시킨다. 교도소에 갇힌 마피아 두목과 조직 간의 연락을 단절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마피아 단원에게 법률적 혜택을 제공하는 등 마피아의 와해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강공에 마피아는 주춤거린다. 특히 콜레오네 마피아의 보스 토로 리나를 체포한 일 이 최대 성과 중 하나였다. 콜레오네는 영화 <대부> 주인공들의 고향으로 설정되어 있는 마을이다. 이탈리아 마피아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분파가 바로 콜레오네 분파이니 토로 리나를 잡아들인 이탈리아 정부는 의기양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피아는 곧바로 떨쳐 일어났고 그 보복의 칼날은 정부의 심장을 향했다. 토로 리나가 체포된 직후 조반니 팔코네 판사와 그의 아내가 살해되었다. 팔코네 판사는 바로 반마피아 정책의 상징이었다. 그는 무장한 차량을 타고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도심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 차량이 폭파된 것이다. 곧이어 갤러리, 교회 등이 폭파되고 오메르타의 원칙을 파기하고 조직을 배반한 옛 마피아 단원들이 암살되기 시작했다. 마피아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전체가 테러에 휩싸이고 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이처럼 공식적 권력과 정면 충돌을 불사할 만큼 이탈리아 마피아는 아직도 강력한 물리력과 권력을 지나고 있다.
|
|
|
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6. 일하는 여성에게
유능한 여자는 고집이 센 여자?
직장의 동료 남성에게서, 간접으로 "만만찮은 대단한 수완가야!"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크게 기뻐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유능하고 일을 잘하며, 게다가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말이다. 남성은 그 때문에 자신을 잃고 머뭇거리는 것이다. 이치에 맞는 것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나가는 여성과 당당히 논쟁할 만큼의 각오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허점을 찔렀을 경우 특히 동요하고 위협을 느낀다. 그렇다고 겁을 내면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권위가 그녀에 의해 흔들렸을 때, 그는 그녀를 '고집 센 여자'라고 부르게 된다. 정상으로 승진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일을 팽개치거나 나약한 말을 하거나 겸손을 가장하는 여성, 라이벌의 출세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여성, 갖가지 거짓말을 퍼뜨리는 여성, 동료를 만들어 라이벌을 고립시키는 여성, 이러한 여성은 모두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는 고집 센 여자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방식을 양심에 비추어보아야 한다. 자기의 고식적인 방법이 자기나 주위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손해를 주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하려는 것은 그런 여성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여성은, 자기의 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권한의 본질과 그 쓰임을 바르게 알고 있어서 이성적으로 실력이 있으며,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활약할 뿐만 아니라 뒤에서 받쳐주는 업무에도 능통한 여성이다. 사람들은 남성이 놀라운 업무 능력을 보이면 진심으로 칭찬해준다. 남성이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는 어려운 흥정을 성사시킬 때, 세상의 동향에 재빨리 적응할 때, 벅찬 교섭상대와 맞설 때, 브리핑을 명쾌히 할 때 등이다. 그러면 그와 마찬가지의 능력을 가진 여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이론을 구사하는 능력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에게만 주어진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남성특유의 능력에 감히 도전하는 여성은 남성 입장에서 보면 강인한 여자인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역량부족을 통감하게 하는 상대가 남성일 경우 그 결과에 승복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갖게 만드는 힘을 가진 존재가 여성일 때 그녀는 가장 품격이 떨어지는 여성, 즉 '고집 센 여자'로 통한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귀갑이라는 점괘가 정말로 들어맞은 김홍도
김홍도(1524-155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중원, 호는 남봉이다. 재주와 학식으로 일찍이 이름이 알려졌고 명종 원년(1546)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5등으로합격하였는데 당시에 23세였다. 그 뒤 명종 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직제학 김노가 주역 점을 잘 쳤는데 김홍도가 처음 태어났을 적에 점을 쳐보았더니 이름을 귀갑이라고 하라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어릴 적의 이름을 귀갑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김홍도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사람들은 그가 장원할 암시였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김노는 한창 병이 들어 앓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뒤 얼마 안 되어 정말 죽고 말았다. 그 뒤에 김홍도가 윤원형과 사이가 좋지 않아 홍문관 전한으로 갑산에 귀양가서 죽었는데 갑산으로 귀양간다는 점괘가정말 들어맞은 것이었다. 뒤에 벼슬이 회복되었으며 아들 기수가 존귀하게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홍도는 기상이 호방하고 사물을 얕잡아 보아 늘 입버릇처럼 뇌었다.
"집의가 불의를 집행하고 지평이 공평하지 않다"
대관들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아 마침내 화를 당하였다고들 하였다.
|
|
|
글터 → 이글저글
|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 (1788-1824) 이 한 말이라하여 널리 알려진 것. 타고난 미모에 절름발이인 이 청년귀족은 일찍이 분방한 생활에 탐닉했으며 친구들과 더불어 해골바가지에 술을 담아 통음 난무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스무살 때 새로운 바람을 쐬려고 스페인, 희랍, 중근동 일대에 여행을 떠났다. 퇴폐적인 서양문명에 싫증을 느낀 그에게 동방은 확실히 이국적인 몽상의 나라였다. '바이런'은 동방여행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인상을 바탕으로하여 쓴 것이 장시 '챠일드 해롤드의 여행'이었다. 그 시가 세상에 발표되자 그 분방하고 자유로운 시상은 독서계에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당시의 감상이라하여 그의 벗 '토마스 모어'가 전하는 말이다. 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된 '바이런'은 수많은 여인과 관계를 가졌으며 끝내 무궤도한 생활로 해서 영영 고국을 등지게 되었다. "영국아, 수 많는 결점이 내게 있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노래한 것은 그 무렵의 일. 불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바이런'의 생애는 그의 작품이 낭만적이었듯이 파란만장의 한갓 로망이었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마음을 비운 검법
어느 날 다쿠앙 선사가 야규 다지마노카미의 대문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무사들이 훈련 삼아 칼싸움하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을 했다.
"허허, 사범이라는 것들이 형편없군."
문지기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다지마노카미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다지마노카미가 화를 내며 명령했다.
"당장 그 건방진 놈을 끌고 오너라!"
다쿠앙은 도장으로 끌려 들어왔다. 다지마노카미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대는 출가한 몸이면서도 검술을 좀 아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유파를 익혔는가?" "으하하하....."
다쿠앙이 느닷없이 크게 웃더니 말했다.
"그대는 천하제일의 사범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제보니 검술은 참으로 서투르기가 짝이 없군. 무슨 유파를 익혔는가가 검술의 비결은 아니오. 검을 사용하는데 무슨 유파인가 하는 따위가 왜 필요하단 말이요."
다쿠앙의 당당한 태도에 다지마노카미는 좀 기가 죽었다.
"그렇다면 할 수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다지마노카미가 안절부절못하다가 목도를 들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대는 어떤 무기를 택하겠소?" "소승은 출가한 몸이라 아무 것도 들지 않겠소. 자아, 무슨 유파를 써서든 빨리 쳐보시오."
다쿠앙이 대답하고 도장 한복판에 우뚝 섰다. 다지마노카미는 놀랬다. 한치의 빈틈도 없는 자세였다. 섣불리 달려들었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다지마노카미는 목도를 내려놓고 다쿠앙에게 무릎을 끓으며 엎드려 간청했다.
"황송합니다. 정말 스님이야말로 지덕이 뛰어난 성승이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요되지 않는 심법의 수업을 하교하여 주십시오."
다지마노카미의 그릇에 마음이 움직인 다쿠앙은 그에게 심법의 비결을 전수해 주었다.
검술에는 갖가지 유파가 있고, 스승은 제자에게 우의의 비결과 독자성을 비밀리에 전수한다. 그러나 다쿠앙의 검술관은 달랐다. 유파의 족자성에 구애되어 그것을 비밀리에 전수하는 것은 고작 검술의 입구에서 헤매는 "형편없는" 상태이고, 정말로 "훌륭한" 검술은 그런 개별적인 유파를 초월한 데 있다는 것이다. '심법의 비결'이 개별적인 유파를 초월한 비법인데, 그것은 검술만의 독특한 비결이 아니라 인생의 온갖 측면에 적용되는 궁극적이고 '가장 훌륭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며, 마음의 자세를 무아의 드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무아'란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다. 승부에 신경 쓰지 않고 일체의 집착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좀처럼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가시밭길을 헤치듯이 지난한 정신 수행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잇는 경지이다. 따라서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피투성이의 인생 수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인생의 모든 측면에 적용된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그대로 피투성이의 인생 수업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비운다'고하는 심법의 비결을 향해 항상 정진해야 한다.
|
|
|
글터 → 수필
|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1 - 후안 마누엘
여섯번째 이야기 간을 닦아야 했던 남자
한번은 루까노르 백작과 그의 조언자 빠뜨로니오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나는 요즘 돈이 넉넉하지 못해 괴롭다오. 그래서 마음은 아프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을 팔아버리든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소. 지금 처해 있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소. 내 주변에는 그동안 내가 고생해서 모은 돈을 요구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오. 그 사람들한테는 그 돈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주오." 빠뜨로니오는 말했다. "루까노르 백작님, 당신과 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은 어떤 병자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 하군요."
한 남자가 심하게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를 본 의사들은 갈비벼를 들어내고 간을 꺼내 약물로 닦지 않으면 낫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남자가 수술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의사가 간을 꺼내 손에 들고 있을 때 마침 그곳에 있던 어떤 사람이 의사에게 그 간을 자기 고양이의 먹이로 주겠다며 달라고 했답니다.과연 그 남자는 자기 간을 그 사람에게 주었을까요? 백작님, 어려움을 겪어가며 모은 돈을 별로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면 그건 그 남자가 자기 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남에게 줘서는 안 될 것을 줘버린다면 당신에게 큰 해가 될 수도 있다.
|
|
|
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