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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17 호
단기 4340. 7. 9 (음력 5.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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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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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苦海를 떠돌다’…윤후명 신작 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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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후명씨(61)가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끝 없는 자아찾기 여행’으로 요약되는 그의 작품 세계의 특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번 소설집은 모두 여행을 떠나는 1인칭 화자의 시각으로 쓰여진 단편 10개가 실렸다. 여행의 목적과 장소는 각기 다르지만 주인공은 한결같이 낯선 곳에서 자신의 현실과 과거를 돌아보고,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무시한 파편화된 기억에 붙들리거나 어지러운 기시감을 체험한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묻고 온전한 자아를 추스르고 싶어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오생근씨는 “시대적 변화 속에 황폐해진 내면적 공허를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표제작 ‘새의 말을 듣다’는 동료 문인들과 독도에 간 화자가 우연히 알타이어를 공부한다는 한 남자와 인사를 나누게 되면서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는 바이칼 호수 북쪽 알타이산맥에 대한 상상이 과거 전쟁통의 피란길, 강화도 보문사 뱃길 등의 기억과 얽혀드는 이야기다. “사랑하지 않으면 멸종한다”는 남자의 말이 화자의 가슴을 때리면서 알타이 샤먼에게 자신을 깡그리 맡겨 온전한 삶을 찾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끓어오른다.
‘서울, 촛불 랩소디’는 화자가 새로 복원된 청계천을 주제로 한 글을 청탁 받아 그곳을 찾아간 일, 과거 청계천변을 함께 거닐었던 여자친구와의 추억, 문학행사로 유럽에 갔을때 그녀가 교수로 일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행 열차에 올라 하룻동안 재회했던 일 등이 쉴 새 없이 교차한다. 여기에 요즘의 청계광장과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백남준의 작품 ‘촛불’과 그의 부음이 겹쳐진다.
이밖에 ‘나비의 소녀’는 양평 인근 용문산에서 나비떼와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본 뒤 몽골 소녀 나빌레의 환영을 떠올리는 내용이고, ‘의자에 관한 사랑 철학’은 부처님 오신날 연등행렬에 함께 참가한 친구가 정신없이 살다가 수리남의 정글에서 사고로 잃어버린 아내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서 의자에 앉아있던 아내를 그리다 결국 빈 의자를 그리게 됐다는 화가를 떠올리는 이야기다.
끊임 없는 연상과 중첩으로 엮어진 윤씨의 소설들은 ‘삶은 축제가 아니라 고해(苦海)일지 모른다’는 그의 인생관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미학적 언어와 이미지로 빚어내는 고전문학의 면모를 보여준다.
〈한윤정기자 yshan@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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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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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할 때 해결책을 늘어놓기란 참 쉬운 법. / 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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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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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세상을 구하려면
내가 앞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청족(깨끗한 절의를 높이 받들어 온 가문)은 비록 독서를 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존중받을 수가 있으나 폐족(큰 죄를 지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집안)으로서 세련된 교양이 없으면 더욱 가증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사람들이 천히 여기고 세상에서 얕잡아 보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너희들은 지금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며 얕잡아 보고 있으니 비참한 일이다. 너희들이 끝내 배우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포기해 버린다면 내 저술과 간추려 놓은 자료들을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못한다면 내 책들은 더 이상 남겨질 수 없을 것이며,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공소장과 옥안(재판의 진행 기록)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떤 취급을 받겠느냐? 아무쪼록 너희들은 이런 점들까지 생각해서 다시 분발하여 공부하여라. 내가 이어온 실낱같은 우리 집안의 공부하는 전통을 너희들이 더욱 키우고 번성시켜 보아라. 그러면 세상에서 다시 빛 보게 될 것은 물론 아무리 대대로 벼슬 높은 집안이라도 우리 집안의 자존심과는 감히 견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괴롭다고 이런 일을 버린 채 노력하지 않느냐.
요즈음 한두 젊은이들이 중국의 경조부박(언행이 경솔하여 신중하지 못함)한 가난의 괴로움을 극한적으로 표현한 말들을 모방하다가 절구나 짧은 싯귀를 만들어 당대의 문장인 것처럼 자부하며 거만하게 남의 글이나 욕하고 가치 있는 글들을 깎아 내리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불쌍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는 반드시 경학(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바탕을 다진 후 옛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을 따지고 그것이 잘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 볼 일이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에 마음을 두고 옛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제대로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라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된 뒤 더러 안개 낀 아침, 달뜨는 저녁, 짙은 녹음, 가랑비 내리는 날을 보고 문득 마음에 자극이 와서 한가롭게 상념이 떠올라 절로 운율이 나오고 시가 되어질 때, 천지 자연의 음향이 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경지일 것이다.
이 근래 괴이한 논의가 있는 바 많은 지식인들이 우리 문학을 멀리 배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눈도 주지 않으려 하니 이거야말로 큰 병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사대부 자식들이 우리의 옛일들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논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그 학문이 비록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시시한 엉터리가 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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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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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2. 개화 사상과 서구 사상의 유입
개화사상
4. 애국 계몽 운동으로의 전환
개화 운동은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운동을 전후로 하여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전환하였다 18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여러 신문사, 학회, 교육 기관 등이 그 새로운 형태를 띠는 운동의 매개체가 되었다. 이 시기 개화 운동의 후계자들은 이것들을 통하여 근대 민권 사상에 근거하는 사회 정치론과 근대적 과학 기술 문명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민족 영웅들의 사적을 찬양하였다. 이 운동은 근대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중요함과 제국주의 침탈에 의한 망국의 절박함을 반영하는 지식인 주도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애국 계몽 운동이라 불린다. 대다수 애국 계몽기의 지식인들은 근대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실력배양을 통한 자강의 도리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자강이라는 말은 시간을 요구하는 점진적 개념이다. 즉 이는 교육과 실업의 진흥 등을 통해 달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강 운동의 현실적 표현은 경제와 교육 문제의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교육에서는 지육과 덕육을 강조하고 경제면에서는 식산흥업을 주장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의 대표적인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기는 젊어서부터 유형원, 정약용 등의 실학에 심취하였던 유학자였다. 그는 동학 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을 직접 면담한 바 있고,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 평생 동안 실천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는 당시의 군주 전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입헌 군주제를 제기하고 민주와 평등이 천하의 대세임을 천명하였으며, 이에 기반하여 종래의 문벌 제도와 신분 제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불합리한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시정을 촉구하고, 학교의 건립과 의무 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종래 주자학의 리기심성론을 완전히 파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리기심성론과 성선설 등은 비록 봉건적 독단을 많이 제거하고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유지된 것이기는 했지만, 근대적 계몽 사상의 철학적 기초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지연은 한말의 개화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국제 사회를 국력의 강약에 따라 우열과 흥망이 결정되는 사회로 규정하였으며, 문명화가 제국주의 서양 문명의 확대 과정에서 달성된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였다. 따라서 국가간 경쟁에서의 승패는 국력의 차이에서 결정된다고 파악하였고, 자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국력을 키워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교변'에서 유교를 '도로써 백성을 얻는 것'이라 하고, 당시 국세가 쇠약해진 원인을 진정한 유학자를 쓰지 않은 데 있다고 보아, 그것이 유교의 죄가 아니라 속된 유학자나 가짜 유학자가 행세하고 붕당이 만연했던 폐단 때문이었다고 하여 유교를 죄책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개화는 참된 유학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개화를 수용할 줄 모르는 척사위정론자들의 태도와 성급한 개화를 요구했던 개화파를 일정하게 비판하고, 개화가 유학의 삼강오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개화란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조화와 개발을 뜻한다고 보았으며, 이로써 고금과 동서의 절충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유학을 양명학으로 개혁하자는 박은식의 '유교구신론'과, 유학을 개량하여 문명의 풍조를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자는 신채호의 주장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학을 폐지하는 대신 개혁하자는 것으로서 사상면에서 전통의 발전적 계승을 도모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역시 새로운 유학이 근대 사회를 이룩하는 전반적인 이념으로서 역할을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새로운 유학, 즉 양명학의 기반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사상적 분위기 및 서양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의 모델에 대응하여 제기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근대의 전형적인 계몽 운동에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 투영된 운동이었다. 그것은 문화 운동에 치중하는 등의 한계를 갖기도 하였지만,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국내 최후의 운동 형태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미 개화 운동에서도 그러했지만, 애국 계몽 운동 역시 외세의 충격과 압력을 상대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운동 목표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이론적 기초와 물리적 기반을 충분히 확보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 사회를 이룩하려는 노력은 주로 서양의 근대를 모방하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그만큼 우리 나름의 좀더 바람직한 근대의 모습을 확보하는 것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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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
본뜻 : 이 말의 기원은 영국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비롯된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정부의 보고서 표지에는 흰 표지를 붙이고, 의회의 보고서에는 푸른 표지를 붙였다. 여기에서 비롯되어 정부가 시정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는 보고서를 백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라마다 그 빛깔이 다른데, 프랑스는 황서, 이탈리아는 녹서, 우리 나라, 미국, 독일 등은 백서라고 부른다.
바뀐 뜻 : 정부에서 발표하는 각종 공식 보고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이번에 정부에서 발표한 인권 백서 봤어? 그 정도면 엠네스티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인가? -환경처에서 발행한 세계 환경 운동 백서를 받아 봤더니, 우리 나라 환경 운동은 거의 걸음마 단계더구만
백성
본뜻 : 백성은 본래 백관이라는 벼슬 이름이었다. 옛날에는 덕이 높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 성씨를 하사했기에 백성이라 불렀던 것인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관직이 없는 보통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이 밖에 백성은 백 가지 성씨를 가리키는 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백 가지나 되는 성씨란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한 나라 안에 있는 국민 모두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바뀐 뜻 : 국민, 인민을 가리키는 예스러운 말이다.
"보기글" -오늘날에 백성이란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 아냐?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거늘, 백성들의 마음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가 과연 그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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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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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미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 아메리카 인디언
`라스트 모히칸`, 블랙 호크, 제로니모
신생 독립국 미국의 중심지는 아메리카 동부지역이었다. 미국은 서쪽을 향해 개발을 지속하면서 오늘날의 형태에 다다르게 된 것인데, 이 정력적인 성장 과정에서 인디언의 존재는 큰 골칫거리였다. 야만인 같은 인디언에 대한 대책은 오직 한 가지였다. 인디언을 아메리카 대륙 서쪽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이 손쉽고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백인들은 서부를 향해 나아가면서 토지와 부를 얻었으며, 반면에 인디언들은 서쪽으로 내몰리면서 삶의 근거들을 하나씩 잃어 가게 된다. 미국이 1787년 발표한 서북 지역 포고령은 미국 역사에서 독립 선언문과 헌법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오하이오 강 북부 지역을 백인들의 정착지로 선언하였고 그래서 후에 오하이오, 인디애나, 위스콘신 등의 주가 생겨나게 되었다. 포고의 내용에는 인디언에 대한 관용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 담겨 있었다. 해당 지역에 살던 인디언의 토지와 재산은 인디언의 동의 없이 빼앗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인디언과의 평화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합리적인 법안을 지속적으로 제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글자 그대로 말뿐이었다. 인디언과 백인 이주민들의 갈등은 막을 길이 없었고 그 갈등에 개입한 미국 군대는 당연히 백인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830년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에게 치명적인 또 다른 법안을 제정한다.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취임 전부터 공언했던 의지를 법안을 통해 표현한다. 영원히 인디언의 적으로 남게 될 잭슨 대통령이 주도한 인디언 이주 법안은 미시시피 강 동쪽의 인디언을 강 건너 서쪽으로 내모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당시 아메리카의 대사막이라고 불리던 강 서부 지역은 백인이 영원히 거들떠보지 않을 땅이라고 생각했다. 이주 법안은 원칙적으로 강제적인 이주를 금지했다. 계약과 거래를 통해 인디언의 땅을 구입하려 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주 대상이었던 체로키, 크릭, 치카소 부족 등은 거래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많은 경우 미국인들은 각 부족의 일원을 사주하여 계약서를 꾸몄고 그것을 근거로 퇴거를 명령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정항하는 인디언들에게는 당연히 무력이 동원되었다.
차근차근 대륙을 잠식하던 백인들은 아메리카 서쪽 끝에서 날아온 기적 같은 소문을 듣게 된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인데,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구름처럼 서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백인들로서는 가슴 설레는 이 사건이 인디언들에게는 최후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경위는 이렇다. 백인들을 실은 수천 수만 대의 마차가 서부를 향해 달렸는데 그 경로에는 당연히 인디언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놓이면서는 무시무시한 철마가 인디언 영토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륙 횡단 철도로 노동자와 물자와 군대를 실어나르면서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으며 인디언들을 무력화하는 데에도 성공한 것이다.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된 시점인 1869년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한 순간이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음에 살펴볼 내용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즉 인디언 정복사가 종결될 즈음이다. 미국 독립 이후 많은 인디언 전쟁이 발발했지만 인디언의 완패가 거듭되었을 뿐이다. 19세기 후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인디언들의 낭패감과 물리적 피해는 말할 수도 없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비극적 역사 상황은 영웅을 낳기도 한다.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인디언 최후의 전쟁을 이끌었고, 그래서 아직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전사들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이 있다. 인디언 전사를 거론할 경우 우리는 흔히 영화 <라스트 모히칸>(마이클 만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 1992년)을 떠올린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제목 그대로 모히칸족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믿기 쉽다. 영화 속에서 운카스가 숨지고 혈통이 백인인 호크아이만 살아남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모히칸족이 전멸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2,000명 정도가 살아 있으며 이 숫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수백 개의 인디언 부족을 떠올리다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또한 영화의 관객들은 모히칸족이 상당히 전투적인 부족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히칸족의 전투성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다른 인디언 부족들처럼 영국과 미국의 무력 행사에 적지 않게 고통받았겠지만 모히칸은 미국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부족이었다. 그들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 동조한 소수 부족 중 하나였고 3분의 1 가량의 성인 부족원을 전쟁에서 잃은 대가로 버몬트 주의 땅을 얻었다. 그래서 모히칸은 영국이나 미국의 백인과 맞서 싸운 위대한 인디언 전사로 여겨지기에는 함량 미달인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사 중 하나는 블랙 호크이다. 그가 속한 소크 부족은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 일리노이와 위스콘신 주에서 살았다. 그런데 일부 부족원들이 영토를 미국에 양도하는데 합의하면서 시련이 시작된다. 블랙 호크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크 부족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 낯선 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부족원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강을 되건넜다. 인디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백인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소크 부족의 추장이 된 블랙 호크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부족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1832년 블랙 호크가 보낸 전령이 백인 정착민에게 살해되면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것이 블랙 호크 전쟁이다. 블랙 호크는 소크 부족과 폭스 부족에서 뽑힌 약 1,000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미시시피 강을 건너와 영토의 회복을 선언한다. 백인과의 불합리한 양도 계약의 효력도 당연히 기각되었다. 하지만 블랙 호크가 지휘한 소크와 폭스 부족은 그해 8월에 허망하게 패배하고 만다. 미국인들은 블랙 호크 전쟁에서 승리를 얻음으로써 크게 고무되었다. 이 전쟁은 미국 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마지막 인디언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동부 지역은 17세기 초반 제임스타운을 세우면서부터 미국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이므로, 이 승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 다른 인디언 전사는 아파치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아파치는 잔인한 인디언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제로니모>(윌터 힐 감독, 1995년)에서 인디언 사냥꾼 알 시버(로버트 듀발)는 아파치와 싸울 때는 반드시 마지막 총알을 아껴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잔인한 아파치들은 생포된 적을 발가벗기고 송진을 발라 불에 태워 죽이니 생포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이다. 다분히 과장된 설명이라고 해도 백인들이 얼마나 아파치를 두려워했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아파치는 북아메리카 서남부 지역에 살던 부족이다. 이들은 미군을 만나기에 앞서 이미 스페인 군대와 200년 이상을 싸워 왔다. 19세기 중반 미국이 뉴멕시코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아파치의 상대자는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는데, 애초에는 아파치 부족과 미국이 우호 협정을 체결한다. 1861년 미군은 아파치의 추장 코치스를 체포했고 탈출한 코치스가 평화 협정을 파기한 미국에 복수전을 벌이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파치의 복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단기간에 애리조나 주에서 백인 정착민과 상인과 군인이 모두 퇴거당할 정도였다. 코치스가 이끌던 아파치 전사들은 10년간 항쟁을 계속했지만 결국 패배한다. 아파치의 마지막 전사는 제로니모였다. 아파치의 한 지파인 치리카후아족 출신인 그의 인디언식 이름은 교야슬레이, 즉 하품하는 사람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스페인 군대에 잃은 제로니모는 타고난 전사였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제로니모가 이끌었던 아파치 항쟁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 정부는 여러 차례의 군작전을 시행한다. 1883년 크룩 장군이 이끌던 군대는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 산에 은거해 있던 아파치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다. 제로니모는 이때 산카를로스의 인디언 구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기로 약속하고 투항한다. 인디언 구역에서는 안전이 보장되었지만 유목 부족이던 아파치로서는 한정된 땅이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드넓은 대지를 내달리던 아파치가 농사를 짓는 일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부족원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옮겨가기를 갈망했다. 결국 제로니모는 부족원들을 이끌고 인디언 구역을 탈출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각종 매체는 아파치의 탈출을 대서특필했다. 아파치 부족의 철저한 응징을 기억하던 상인들과 정착민들의 아우성도 빗발치면서, 미국 정부는 제로니모를 체포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결정한다. 마일스 장군이 이끄는 5,000명 이상의 미군이 아파치 토벌을 위해 작전에 투입되는데 최후의 결전에서 미군이 대면한 제로니모 일행은 겨우 34명에 불과했다. 제로니모는 패배했고 부족원과 함께 감옥에서 사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제로니모의 패배는 또 하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한다. 이제 미국은 북아메리카의 서남부 지역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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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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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4.남자의 마음을 도마 위에 놓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남자여야 한다
그는 당신의 내적인 면과 겉모습 중 어느 쪽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가 가장 중시하고 있는 것은 여성의 용모일까? 그는 당신을 모두에게 과시하려고 당신에게 대담한 의상을 입히고 싶어하지는 않는가? 당신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미묘한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그 문제는 다음에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침대 위에서 그의 사랑 행위에 조금이라도 주문을 하려 하면, 자기는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하를 내지는 않을까? 사랑해 하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여성은 말한다. 제 남편은 사랑해 하는 말을 평생 세 번밖에 하지 않았어요. 나와 자기 어머니와 딸에게 각각 한 번씩이요.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 사용하면 이미 재고품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는 스스로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예를 들면, 무언가 상대방으로부터 거절당한 후 문득 자신을 향해 나는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대단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침착하게 자문할 수 있을까? 그는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경향은 없는가? 언제나 상처받은 자리를 치료해 주어야만 하는 사람인가? 배웅할 때는 아이에게 하듯이 등을 토닥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그에 대해서 여러 감정을 갖고 때로는 정열적이 되어 단조롭지 않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을 가? 마음이 서로 통하는 두 사람이 될 수 있을 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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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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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남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강순
강순(1390-1468)의 본관은 신천이고, 자는 태초이다. 상상부원군 강윤성의 증손으로, 음직(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공로로 하는 벼슬)으로써 벼슬했다.
세조 13년(1467)에 길주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호조 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상중에 있는 허준을 기용하여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이유소를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였다. 토벌군은 홍원에서 싸우고, 또 만령에서 싸워 반란군을 대파하고, 이시애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건주의 이만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우리 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왔다. 세조는 어유소를 좌장군으로 삼고, 남이를 우장군으로 삼고, 강순을 정서주장으로 삼아 정병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건주의 동북쪽을 공략하여 그들을 소탕하였다. 큰 나무를 베어 하얗게 깎은 뒤에 "모년 모월 모일에 정서주장 강순과 좌대장 어유소 등은 건주위 올미부를 토벌하고, 이에 돌아간다"고 쓰고 돌아왔다. 그는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신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14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입어 반란죄를 입게 되고, 국문을 받게 되었다. 강순이 영의정으로서 국문에 참석하여 남이가 정강이뼈가 부러지도록 국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변명을 해주지 않자, 남이는 "강순이 나에게 모반을 시켰소" 하고 강순을 끌고 들어갔다. 강순은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천한 몸이 다행히 성군을 만나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신의 나이 지금 칠순이 넘었거늘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모의를 했겠습니까?" 예종 임금이 강순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자 남이는 또다시 모함하였다. "성상께서 거짓말에 속아 죄를 면해 주신다면 무슨 방법으로 죄인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을 듣고, 다시 의심이 난 임금은 국문을 시작하였다. 강순은 늙은 몸에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 허위 자복을 하고 말았다. 이를 본 남이가 강순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불복한 것은 장래를 기대한 때문이었는데, 이제 다리뼈가 부서져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소. 나 같은 젊은 사람도 억울하게 죽게 되었거늘 살만큼 산 노인이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억울하오" 드디어 남이와 함께 사형을 당하게 된 강순이 남이를 불렀다. "남이야, 너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모함했느냐?" 남이가 대답하였다.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내나 대감이나 같지 않소. 당신은 수상으로서 나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한마디 변론도 하지 않았으니, 당신도 억울하게 죽어야 마땅하오" 강순은 어처구니가 없어 좌우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젊은이를 친하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려. 반역이 어떤 죄인데 장난을 치다니..."
강순의 아내와 자제들도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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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영화를 누렸던 만큼 그의 지혜도 탁월한 것이어서 구약성서의 열왕기 상에 보면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 사람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더 크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는 동식물학에 밝았다고 문필적 재능도 뛰어나서 시가 1천5백 수, 잠언 3천을 지었다고 전한다. '솔로몬'의 지혜를 말해 주는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 집에 창녀 두 명이 살았는데 어쩌다 거의 동시에 임신을 한 끝에 사흘 간격을 두고 똑같이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아이를 낳은 창녀는 몹시 잠버릇이 나쁜 여자였는데 어느 날 밤 아이를 짓눌러 질식시키고 말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여자는 옆에 자던 또 하나의 창녀 아이와 죽은 아이를 바꾸어 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둘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살아 있는 아이가 제 아이라고 우겨댔던 것이다. 마침내 해결을 못보고 '솔로몬' 왕에게 제소를 했다. '솔로몬'왕 앞에 나와서도 두 여인은 여전히 다툰다. 한참동안 바라보던 있던 왕은 신하를 시켜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 칼로 살아 있는 아이를 두 동강 내어서 저들 두 여인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특히 그 아이의 생모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임금님, 제발 그 아이를 베지 말고 그냥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그러나 또 하나의 여인은 "아닙니다. 둘로 갈라서 나누어 주십시오"하고 태연히 말한다. 그 말을 듣자 '솔로몬'왕은 "그 아이는 베지 말아달라고 한 여인에게 주어라"고 했다. 백성들은 이 재판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다들 칭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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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거장의 노력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상을 조각하고 있는 아틀리에에 친구가 놀러 와서 완성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그 친구가 다시 놀러 왔다가 깜짝 놀랐다.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석상은 두 달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는 물었다.
"이게 뭔가? 자네는 두 달 동안이나 게으름 피우고 있었나?" "게으름을 피우기는커녕 지난 두 달 동안 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네."
미켈란젤로는 피로에 지친 얼굴로 말했다.
"저기를 다듬고 이쪽을 다시 닦고, 여기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저 근육을 팽팽하게 만들곤 했다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직 입가 언저리를 조금 더 부드럽게 하고 이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야 하는 일이 남았다네."
친구는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하지만 자네, 너무 오래 끌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사소한 일에 집착하느라 일을 밀고 나가지 못한대서야 어떻게 대작을 만들겠나?"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제대로 만들고 싶다구. 그리고 제대로 된 작품은 세심한 주의와 불굴의 노력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네."
이 작은 일화는 세계 미술사에 불후의 명작을 남긴 거장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시사하고 있는 의미가 크다. 일 그 자체에는 경중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맡은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따라서 자신의 지위가 높은가 낮은가를 재려고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맡으면 화풀이를 하듯이 그 일을 적당하게 처리해 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이 일화가 시사하는 바를 진지하게 읽어 내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렇게 할 때 맡은 일의 경중을 떠나 오로지 진지하게 완성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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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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