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가해자와 피해자의 풀리지 않는 송사 - 아랍인과 유태인
선택된 민족의 장구한 수난
민족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족과 국가가 완전히 운명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민족의 외피로 여겨질 수 있다. 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여러 국가를 세울 수도 있고, 동시대에도 같은 민족이 여러 국가의 국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민족이 국가라는 그릇을 여럿 만들고, 그 그릇들 중 몇 개는 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에서 유태인은 여간 독특하지 않다. 역사를 통해 유태인이 건설한 나라는 이스라엘뿐이며, 고대 이스라엘이 몰락하자 수천 년 동안 유태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20세기 중반 이스라엘이 (재)건국되었을 때에야 유태 민족은 국가를 얻은 것이다. 유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부침을 함께 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곧 유태인의 역사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기원전 11세기경 현재의 팔레스타인, 즉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졌다. 기원전 13세기 모세가 등장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능해졌다. 그는 약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유태인들을 이끌고 출애급을 감행한다. 모세가 유태인들을 이끌고 간 곳은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가나안 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모세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또한 신과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유태교에 따르면 우주 만물의 창조자는 유태인과 계약을 맺는데, 신은 유태인에게 위대한 나라를 제공할 것이며 유태인의 영원한 믿음이 그 반대 급부로 설정되었다. 유태인 특유의 사상인 선민 사상, 즉 자신들은 절대자가 선택한 민족이라는 믿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가나안 땅에 뿌리를 내린 이스라엘은 곧 번성하고, 특히 사울, 다윗, 솔로몬 왕이 지배할 시기에 그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스라엘의 부와 영광의 상징인 거대한 성전을 건립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아라비아를 잇는 무역로를 열어 무역과 산업 발전을 이루는 등 황금기를 일군 군주가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 그러나 그의 사망(기원전 931년) 이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국가로 양분된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할되는 것이다. 그리고 급격히 쇠하기 시작하여 결국 북부는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이후에도 유태인들은 가나안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마카바이오스 전쟁에서와 같이 외세에 맞서 항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남유다가 몰락함으로써 `유태인의 분산`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유태인은 2,000년 이상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전세계에 흩어져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유태인의 대표적인 수난 장면을 중세와 현대에서 각각 한 가지씩 꼽을 수 있는데, 중세 때의 악역은 유럽의 국가들이며 현대의 악한은 당연히 독일 나치이다. 중세 교회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행에 가담한 집단이라는 명분으로 유태인을 탄압했다. 20세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원형을 중세 교회의 유태인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15년 카톨릭 공의회는 반유태주의를 천명하는데, 이 결정은 유태인 차별에 머물지 않고 유태인의 격리와 고립을 제도화한 것이다. 앞서 이슬람 세력이 유태인에게 노란 표식을 옷깃에 달도록 의무화했던 것처럼,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유럽에서도 유태인은 각 국가가 지정하는 표식을 달아야 했다. 그리고 많은 유럽 국가들은 게토라는 구역에 유태인의 거주를 제한하였고, 유태인의 경제 활동도 기독교적 윤리에 위배되는 직종, 예를 들어 고리 대금업 등에 한정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서유럽의 적개심은 14세기에 더욱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그시기에 유럽 인구의 30% 이상이 흑사병으로 숨지는 끔찍한 상황이 닥쳤는데, 유럽 국가들은 이 재난을 유태인의 음모 탓으로 돌린다. 즉 유태인들이 기독교도들의 우물에 독극물을 타서 일어난 재앙이라고 믿고 집단적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유럽 시민들은 가족이 흑사병으로 숨질 때마다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키웠고, 그런 분노는 유태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와 학살을 불러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편견이 개인들만을 결박한 것은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악감정은 법제화되어 14세기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유태인의 강제 추방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이 정착한 곳은 폴란드와 러시아 등지였다. 17세기 중반 폴란드에는 약 50만 명의 유태인이 살았다. 그런데 18세기 말엽에 들어서면 사정이 역전된다. 이번엔 동유럽 국가들이 유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시기 서유럽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개념을 시민의 무력으로 표현하고 현실화한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부근 유럽 국가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유태인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낳은 주요한 정치적 원인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유태인들은 이제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의 이주를 허락받을 수 있었고, 또한 유태인이 좀더 자유로운 기회의 땅을 찾아 아메리카 대륙 등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진출한 것도 이 시기이다. 유태인이 제도적 박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태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악감정들은 은밀히 잠재되어 있다가 20세기 초반 한 정치 집단의 만행을 통해 가장 잔혹한 형태로 표면화된다.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나치의 대학살의 칼날은 집시, 동성애자, 사회주의자, 슬라브 민족 등 여러 집단을 향했지만 유태인도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어원상 `완전히 불태우다`라는 의미로, 본래는 제물을 불태우는 종교적 의식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집단 살상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는 나치에 의한 조직적인 살상 행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주동자는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1,0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는데 그 중 600만 명이 유태인이었다. 1933년 집권과 동시에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사회적 지위나 종교 등 모든 후천적 조건과는 관계없이 혈통이 유일한 기준이었는데, 일단 유태인임이 확인되면 모든 사회적 기회가 박탈되었다. 유태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의사직과 변호사직도 잃었으며 대학에서도 퇴학당했다. 1939년에 이르면, 유태인은 독일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다. 재산권 상실은 물론이고 게르만족과의 접촉도 금지되며 도서관이나 공원 등 공공 장소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게토에 수용되어야 했다. 게토에서는 유태인들이 물품을 생산하여 밖으로 내면 나치가 식료품을 반입하는 형식이었지만 기근에 의한 죽음이 빈발했다. 1941년에는 유태인이 전화나 공공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되고, 6세 이상의 아이들은 모두 노란별 모양의 배지를 달아야 했으며, 12세 이상의 아이들은 군수품 생산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히틀러는 대중 선동과 대중 심리 조작에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특유의 선동 능력으로 독일인들의 가슴 속에 있던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소망을 일시에 몰아 낸다. 대신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지도자에 대한 맹종을 설득해 냈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광신적으로 단결한 독일의 목표는 게르만 민족의 세계 패권 장악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권 장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목표라기보다 당의였다. 히틀러의 선동, 그 기저에는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깔려 있었다. 유전학과 우생학을 근거로 볼 때 게르만 민족이 생래적으로 우월한 존재이니 게르만의 세계 제패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국경을 넘어 인접 국가들을 정복하고, 내부적으로는 결속과 응집을 저해할 열등한 집단들을 근본적으로 격리하는 일이 필요했다.
나치의 탄압 대상에 정치적 반대 세력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겠지만, 왜 하필 유태인이었을까. 여기에는 앞에서 보았던 유태인에 대한 유럽인의 뿌리 깊은 편견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나치가 채택한 프랑스 학자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 1816~1882)의 인종 이론이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고비노는 백인, 특히 독일 국민이 인류 문명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유태인은 생래적으로 열등하고 비열하기 때문에 유럽 문화를 훼손할 위험을 지닌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편견에 불과하지만, 유태인 학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유태인에 대한 일반의 악감정이 깊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유태인 학살의 또 다른 원인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태인뿐 아니라 여러 소수 집단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가공의 적을 창조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기하는 고전적 정치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위험한 무리의 존재 사실은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게 마련이고, 적에 대한 응징 과정은 출정 직전의 축제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나치는 유태인 등을 배척하고 학살하면서 자국 내의 전체주의적 단결력을 높였던 것이다. 이렇게 유태인의 학살 배후에는 유럽인들의 편견과 나치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격리하고 차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에 이주, 격리시키려던 이전의 계획은 백지화되고, `최종 조치`를 위해 살인 캠프를 준비한다. 유태인을 분류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최종적으로 학살하는 장소가 된 이 수용소는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지, 특히 폴란드에 여럿 세워졌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각 수용소 근처의 게토에서 유태인들이 대거 옮겨진다. 여성, 노인, 어린이 등 노동력이 없는 유태인들은 곧 살해되었고, 노동력이 있는 유태인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된다. 나치는 샤워 시설이 갖추어진 가스실에 유태인들을 몰아넣고 가스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아주 손쉽게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희생자들을 즉시 집단 화장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나치의 눈에는 인간이 철저하게 노동력으로 계산, 치환되고, 육신도 일정 공간을 점유하는 골치 아픈 물건에 불과했기에 아무 죄책감 없이 소각해 버릴 수 있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범죄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에 거주하던 830만 명 중에서 60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런 수치에서 유태인에 대한 학살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이성적 폭력이 유태인에게 가해졌고, 유태인들은 현대 문명의 야만적 광기에 의해 무력하게 희생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즈음 유태인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엄청난 수의 동족이 희생된 2차 대전이 종결된 직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2,000년만에 부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나라를 세운 땅이 공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곳은 아랍인들의 고향이었다. 유태인들은 남의 터전을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비극적인 희생자의 모습에서 침략자로 일순간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유태인들의 건국은 아랍인들의 희생만을 낳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아랍은 미국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고, 그 결과 미국 영화에서 아랍인은 악한으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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