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1. 주자학 기호 학파
기호 학파가 지역을 단위로 구분해서 붙여진 명칭이라면, 율곡 학파는 학맥을 중심으로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대체로 기호 학파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은 서인 계열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율곡 학파로, 영남 학파는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고 있어서 퇴계 학파로 병칭되기도 한다. 이처럼 기호 학파는 이이를 종사로 하는 학문 집단으로서, 주희,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노선을 진리의 계보, 즉 도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 노선에 이황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이들은 이황의 리기론 등 학문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의 도학자로서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계보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통론뿐만 아니라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케 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들은 마침내 정치적으로도 승리를 얻게 되었다. 기호 학파는 자신들 내부에서도 이이의 사단칠정론이나 인심도심설 등 학문적인 주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회의를 하는 등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견지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정신을 통해 주자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더 심화시켜 나갔다. 이들은 크게는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인 노선 차이, 작게는 각 개인의 학문적인 견해 차이를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로 하여금 공통적인 의식을 공유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정신을 견지하면서도 주자학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신심에 가까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원의 침입을 받은 고려 사람들이 부처의 가호를 얻고자 "대장경"을 만들었듯이, 정권을 쥔 노론은 청의 침입 후 주자학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주희의 저술에 대한 해석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희의 저술들에서 보이는 부정합적인 요소들을 가려 내여 정론을 세우는 작업을 무엇보다 중요한 학술 활동으로 여겼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주자대전차의"였는데, 이는 이황의 "주자서절요"와 "주서절요기의", 정경세의 "주문작해"를 수용한 것이었다. 이 책은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계 기호 학파의 작업 성과를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이 이 작업을 중시했던 것은, 이황이나 정경세의 저작에 오류가 적지 않은데다, 윤휴 일파의 '이단사설'도 주희의 "주자대전"을 바로 읽는다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 사후에도 이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김창협과 그의 제자인 어유봉에 의한 "주자대전차의문목", 김매순의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 이의철의 "주자대전차의후어" 등을 거쳐, 이항로, 이준 부장의 "주자대전차의집보"로 집대성되었다. 한편 주희의 저술들 속에 보이는 부정합적인 요소들은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에 의해 교정되었다. 그 밖에도 정조가 편찬한 "주서백선", 강호부의 "주서분류", 박세채의 "주자대전습유" 등이 있다. 이러한 저작들의 노론 학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들이 주자학에 얼마나 경도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주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져다 성심껏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종교적 열망을 갖지 않고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조선이 주자학 왕국이 되었던 것은 주희에 대한 단순한 존경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자학 절대화 경향은 기호 학파 내부에서 일어난,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논쟁, 즉 인물성동이 논쟁에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주희의 "중용장구"와 "맹자장구"의 주석에서 보이는 사람과 사물의 본성에 관한 상반된 견해가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람 이외의 존재가 사람과 같은 본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이간 등의 인물성 동론자의 주장이나, 온전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한원진 등의 인물성 이론자의 주장 모두 사람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놓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홍대용이나 최한기와 같은 일부 실학자들이 이 논쟁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자연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표명한 경우도 있긴 하였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오히려 주희의 주석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른가에 관심을 두었다. 즉 주희의 권위에 의해 자기 설을 정당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당시 기호 학파에게는 주자학이 바로 옳고 그름을 확증하는 기준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 정조 이후 서울과 경기 지방에 사는 노론계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청조의 고증학이 받아들여져 고증학과 주자학 사이의 논쟁, 즉 한송 논쟁이 있었다. 문헌 고증을 통해 현실 사회에 접근하려 했던 것이 고증학을 받아들인 측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고증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전적으로 자신들을 고증학자라고 표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증학이 주자학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절충론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고증학은 경전 해석에만 매달림으로써 새로운 세계간을 제시할 수 없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고증학자로 일컬어지는 김정희 역시 현실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절충적인 고증학마저도 조선에서 제대로 연구되기는 어려웠다. 기호 학파의 주자학은 전체와 개인의 관계를 완결된 체계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그 완결성이 무너지지 않는 한 영속되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추상적이고 공허한 이론 체계라 하더라도, 각각의 개인이 도덕적인 자기 완성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한다면 이들의 주자학은 여전히 의미있는 체계로 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주자학적 이념을 파기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날 때까지 이와 같이 절대화되고 교조화된 주자학을 지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호 학파는 이처럼 극단적인 절의를 강조하는 명분론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명분론만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 현실론자라고도 할 수 있다. 기호 학파는 사상적으로는 주자학을 신봉했지만, 문학적으로는 주자학적인 '문이재도'와 같은 엄격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학이 철학에 종속되지 않고 문학 자체의 독자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과감히 인정하였다. 이는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정서를 배설할 통로를 마련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특히 서울에 거주하던 경화거족들은 문인들의 자유로운 시문 창작을 후원하였을 뿐 아니라, 정선과 같은 예술인을 후원하기도 하는 등 문단과 예술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지식인들은 이들 기호 노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유로운 시문 창작을 통해 체제의 모순을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북학파이다. 그러나 북학파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 한정된 소외된 지식인들에 불과하여 현실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에는 어려웠다.
송시열에 이르러 가장 번성하였던 기호 학파는 그 이후 내부적인 분열을 거치면서 학문적으로 여러 갈래의 학파로 나뉘어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앞서 말한 인물성동이 논쟁을 벌였던 낙론과 호론이다. 낙론은 동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호론은 이론의 입장을 취하였는데, 이 중 낙론 계열은 서울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의 노론들과는 여러 모로 차별성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조정의 상황과 국제 정세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던 만큼,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묵수적으로 지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변화와 개혁에 활용하려는 일군의 지식인들도 그 속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개화파였다.
|